27. 불협화음 ( 3 )
행사가 끝났다.
륜과 통령의 계획은 성공리에 끝났고, 군중은 분노,기대, 그리고 희망을 품은 채로 집으로 흩어졌다. 그 희망의 주인공은 아이 우르드. 레이븐사이드의 새 가주였다.
그러나 아이 본인은 달랐다. 통령의 연설 속에서, 포고문 속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말 속에서 수 없이 울려퍼지는 '아이 우르드'가 자신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는 혼자만은 어떤 기대도 품지 못했고, 고독을 느껴서, 전혀 다른 곳을 향했다. 총관의 목이 내걸린 자리였다.
목을 치웠어도 장대는 여전히 높다랗게 솟아 있었다. 저문 해를 따라서 그림자는 길게 늘어섰다. 장대에 등을 대고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아이는, 문득 블로어를 불러내었다.
"세계의 죽음..."
아이는 검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이번 계획을 실행하면서 자신이 용인한 타인의 죽음을 되돌아보기 위해서였다. 검날에 신경을 집중하자, 블로어는 아이가 되새기려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건 륜이 보아왔던 세계의 멸망이었다.
센디엘의 수명은 다해가고 있었다.
천 년간 뒤집히지 않은 모래시계처럼, 제국은 천 년간 전혀 진보하지 못했다. 이따금씩 진보한 것처럼 보인다 할 지라도 그것은 그저 단편적인 도구의 발전이었을 뿐, 인간은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사랑과 미덕의 총량은 줄어만 갔고, 절망과 악덕 그리고 죽음만이 천천히 고여갔다.
원인은 아지프와 외신이었다. 신들은 인간이 신앙함으로써, 즉 그 신이 대표하는 개념을 긍정함으로써 존재했다. 자신의 개념이 세계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신들은 하나둘씩 절망해서 외신이 되어갔고, 무가치한 세계를 부수기 위해 공세에 나섰다. 천년이 지난 끝에 그들의 공세는 감당할 수 없이 커져갔다.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제국을 건설한 7위계의 율사는 아지프를 제국에 편입시켰다. 그들로 하여금 외신을 막게 할 생각이었고, 자연스럽게 나머지 학파들은 대 아지프 동맹을 이루어 아지프를 견제함으로써 균형을 이룰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실패했다.
아지프와 외신은 적대적으로 공생하기 시작했다. 거세지는 외신의 위협은 더 많은 희생을 정당화시켰고, 아지프는 거리낌없이 마술사 아닌 자들을 희생시켰다. 아지프를 견제해야 할 여섯 학파는 민간인의 희생을 외면했다. 그들의 갈 곳 잃은 메아리는 센디엘의 곳곳에 퍼졌고, 그 절규를 들은 신들은 하나둘씩 외신으로 변해갔다. 악순환이었다.
그 악순환이 거듭된 끝에, 아지프의 7위계가 탄생하게 될 때. 그 때가 멸망의 시발점이었다. 그들의 발호로 인해 제국은 내부로부터 붕괴했고, 외신은 바깥으로부터 밀려들어와서, 세계는 한 줌의 인간밖에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변한다.
지금 아이가 목표로 삼은 성도 8궁, 천갈궁 파에톤의 주인인 귀르겐의 죽음은 그중에서도 특히 참혹했다.
그는 태곳적부터 살아남은 데몬스폰, 은랑왕을 죽이고 저주를 받았다. 보름달을 볼 때마다 광증에 시달리는 저주였다. 자신의 광증으로 다른 이가 상처입지 않기를 바랬던 그는 스스로를 랭 반도 남쪽의 외딴 섬에 유폐했다. 그림자 섬이라는 이름의 섬이었다. 그 섬에는 바다로 외신이 몰려오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결계가 있었다. 귀르겐은 그 섬을 지키다 명이 다해 죽기를 소망했다.
그 섬은 궁벽했다. 그를 흠모해서 수발하러 모인 성기사들 외에는 어떤 생산 시설도, 사람도 없는 곳이었다. 자연히, 재앙이 도래해서 외부와의 연락이 끊겼을 때, 참혹한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귀르겐의 광증을 피하기 위해서 아탕칼리는 매 달 보름이 되기 전마다 그림자 섬에 배를 파견했다. 재앙이 닥치자 그 배가 끊겼다. 당황한 성기사들이 선착장 부두에서 뗏목을 만들어 띄우려 했지만 허사였다. 보름달이 떠오르자 귀르겐은 광증으로 이성을 잃었고, 성기사들을 덮쳤다. 성기사들은 저항하려 했지만, 자신의 그림자 분신을 만들어내는 힘을 가진 천갈궁 앞에선 무력했다. 어렵잖게 승리한 귀르겐은 산 채로 그들의 목을 씹어 삼켰다. 그리고 다음 날 자신이 한 짓을 깨닫고, 완전히 미친다. 미쳐서 그 섬에 접근하는 모든 것을 베어넘기다가, 고래 형태의 외신의 입으로 달려들어 함께 최후를 맞았다.
항상 그랬다. 재앙의 시나리오에서 귀르겐을 기다리는 것은 항상 그런 결말이었다. 그와 함께 파에톤은 바다 깊은 곳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영영 아무도 찾지 못했다. 그 결과 성도 8궁을 모두 모아 최후의 반격을 시도해보려던 사람들은 절망하고 말았다.
"그럼 제가 가져야 할 성도 8궁은, 그 천갈궁이겠군요."
아이는 조용히 말했다. 륜은 눈짓으로 동의했다. 단테가 남겨준 봉인이 풀리기 전에 아이는 성도 8궁이 되어야만 했다. 천갈궁은 여러모로 그에 적합해 보였다. 귀르겐을 위해서도, 아이를 위해서도.
귀르겐은 이미 늙었고 또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성도 8궁 중에서는 최하위에 속하는 자였다. 이미 충분히 강해진 아이는 그에게서 천갈궁을 건네받을 자신이 있었고, 그 역시 기쁘게 자신이 짊어진 짐을 건네줄 것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 선거 직전에 기나센을 비워야 하는데, 그랬다간 통령 당선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게지."
그래서 륜과 통령은 전혀 상관 없어보이는 두 가지를 결합시켰다. 아까 있었던 행사의 마지막에서 통령은 소리쳤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이름 모를 배후자가 남아 있으며, 이와 같은 테러를 또 반복할 거라는 사실이오!"
아이칼마로이의 투창. 그건 보통 귀중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걸 사용한 테러가 있었다는 사실은, 자연스레 커다란 배후를 상상하도록 만들었다. 굳이 륜이 정적 제거 따위를 위해서 이런 귀중한 물건을 사용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시오!"
통령은 아이를 내세웠다. 아이는 엉거주춤 사람들 앞으로 나섰다. 이어서 통령은 아이가 얼마나 훌륭하게 그 암습에서 자신을 지켜내었는지를 설명했고, 또 지켜낼 것인지를 설명했다. 북서 자치령에서의 미담을 공개한 것은 이 때였다. 천을 헤아리는 인골귀와 굉혈포에 맞서서 아무런 희생자도 낳지 않고 마을을 지켜냈던 미담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감탄의 탄식이 터져나왔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통령은 외쳤다.
"이 레이븐사이드의 젊은 가주는, 마술을 베어내는 성유물을 가지고 있소!"
그 말에 따라 아이는 레바테인을 치켜들었다. 성유물과는 거리가 먼 형상이었지만, 이미 고양된 사람들은 사소한 의문을 갖지 않았다.
"이 젊은 가주는 이제 그 마수로부터 기나센을 구해내기 위해서, 천갈궁 귀르겐 경에게 찾아가 파에톤을 두고 결투를 요구할 작정이오!"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사람들은 최면에라도 걸린 듯 팔을 흔들고 모자를 던져댔다. 천갈궁이 품은 힘은 자신과 같은 분신을 만들어내는 힘이었다. 아이의 분신이 그 레바테인을 들고 밤마다 기나센을 순찰할 것이라는 말이 뒤따랐다. 어느 집에 아이칼마로이의 투창이 떨어지든, 이 성검으로 베어내어 줄 것이라는 것이었다.
"후우우."
아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거짓말이었다. 통령은 그 뒤에도 거짓말을 덧붙였다. 자신의 직권으로 이 건에 대한 조사를 맡길 테니, 그 배후를 찾거든 즉결처분해도 좋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또다른 모략을 품고 있었다.
귀르겐을 찾아가서 천갈궁을 건네받고 성도 8궁이 되면, 기나센의 반응은 열광적일 것이다. 검을 연마하는 자들로 가득한 용병국가답게, 성도 8궁을 배출하는 것은 기나센의 숙원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 열광적인 반응으로 여론이 달아올랐을 때를 틈타서, 대산맥파의 후보를 테러의 배후로 지목하고 죽인다. 그것이 통령이 세운 계획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완벽한 당선을 장담할 수 있네.'
결국 또 정치적인 죽음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이는 블로어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통령과 륜이 만들어낸 거짓말은 훌륭하게 먹혀들어갔다. 연단 아래에서 사람들은 더없이 행복하게 소리질렀고, 통령은 당당하게 선포했다. 뿔나팔 소리는 높았고 취주악은 감미로웠다. 하지만 그 중심에 있던 아이만은 그 모든 것이 불협화음으로 들렸다.
그 모든 소리로부터 벗어난 지금에서야 그 불협화음의 원인을 알았다.
그건 가슴 깊은 곳에서 자그맣게 울리는 소리였다.
어린 시절의 자신의 목소리, 그것이 마음에서부터 호소하고 있었다. 북서 자치령에서 너는 아무도 죽지 않게 하겠다고 외치지 않았었냐고.
마음 속에서 자그맣게 울리던 그 소리는 총관이 매달린 자리로 다가갈수록 더 커져서, 이제는 귓전에서 북을 울려대는 듯 들렸다.
"안 돼."
아이는 블로어로 자신의 긴 머리를 잘라내었다. 땋은 머리가 잘려나가서 바닥에 널브러졌다. 마음 속에서 울리던 소리가 고요해졌다. 림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괴롭게 숨을 토하며 검을 내려놓았다. 이어서, 아이는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말했다.
"더 이상 어리광을 부릴 수 없는걸."
만약 모두에게 세상의 멸망을 확신시킬 수 있다면, 그래서 어떤 피도 어떤 죽음도 흘리지 않고 하나로 단결해서 그 멸망에 맞서도록 할 수 있다면. 그랬다면 이런 모든 정치적인 죽음은 필요 없을 것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어린 아이는 그런 이상을 호소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이는 알았다. 그것은 동화에나 나올 이야기였고,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내기판에 내걸린 건."
세계의 죽음이었다. 검손잡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블로어가 보여준 미래의 환영이 다시 머리로 밀려들어왔다.
해안과 포구마다 시체가 쓰레기처럼 쌓인 광경을 보았다. 마을은 불타서 서까래 하나 남기지 못했고, 논밭의 이렁마다 잘린 팔다리가 박힌 채 희게 썩어갔다. 굶주린 산간 벽지의 마을에선 사람들이 서로 아이를 바꾸어 삶아 먹었다. 살 썩는 내음과 녹슨 검의 쇠비린내가 바람마다 실려 헐벗은 숲을 할퀴어댔다. 기나센도 예외가 아니었다. 륜은 그 침대에 누워서, 기나센의 저 푸른 산맥이 떠밀려온 송장과 백골로 가득 차는 광경을 몇 번이나 보아야만 했다.
륜이 보았던 광경을 함께 보았기에 아이는 비로소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가문전을 거치면서 자신의 말을 들은 륜이, 최소한으로 희생자를 줄인 결과가 이거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희생자를 줄이라고 요구했다간, 이 환영은 현실이 되어 밀어닥칠 것이었다.
"더 이상, 이런 죽음 하나하나로,"
이렇게 마음을 써서는 안 된다. 이렇게 마음을 쓰다간, 언젠가 큰 빈틈이 생기고 말 것이었다. 자신이 정당하거나, 이들을 죽일 권리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는 이를 악물었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가슴을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를 자른 것은 그 어린 마음을 잘라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짧은 머리로 집에 돌아오자 륜은 놀란 얼굴로 맞아주었다. 식사를 거르고 침대에 누웠다. 밤새 잠이 오지 않았다. 창가로 들이치는 달빛을 맞으며 몸을 뒤척일 때, 륜이 문을 열고 찾아왔다.
"혹시, 잠이 오지 않나요?"
머리맡에 다가온 륜은 아이의 머리를 무릎에 눕혔다. 아이는 가만히 창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헝크러진 앞머리를 쓰다듬으며, 륜은 작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언니가 들려주던 자장가에요."
몇 번이나 반복되었을까.
한참이나 자장가를 들은 후에야, 아이는 마음 속의 불협화음을 몰아내고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자장가는 감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