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52화 (152/279)

28. 귀르겐 ( 1 )

기나센을 벗어나는 마차는 단정했다.

기름을 먹인 바퀴살에서 무지갯빛이 부서졌고, 은칠한 마차지붕은 하늘빛을 그대로 담아내었다. 아이는 동백기름을 적신 천으로 검날을 매만지며,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기나센의 준봉을 바라보았다. 산맥에서 멀어질수록 구름과 산봉우리가 가까워져서, 첩첩이 휘도는 산맥은 먼 하늘 끝으로 녹아드는 듯싶었다.

"저기, 저기, 이거 읽어줘."

경치를 감상하던 아이의 귀에 성가신 목소리가 울렸다. 에바였다. 옷자락을 잡아끌며, 커다란 책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아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또 뭔데?"

"이거 어떻게 읽는 거야?"

"흉룡."

"무슨 뜻인데?"

"흉악한 용."

"아하!"

그리고 다시 열심히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 삽화를 바라보는 에바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천진해보여서 아이는 살짝 웃음을 지었다. 지금 아이와 에바는 귀르겐의 천갈궁을 얻으러 떠나는 길이었다.

아이가 에바와 함께 움직이기로 한 이유는 간단했다. 변수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조디악의 계획이 번번히 실패하는 이유. 그건 그들의 예상보다도, 훨씬, 훨씬 더 많은 존재들이 그들의 예지를 어그러뜨렸기 때문일세."

성도 8궁, 아나테마, 그리고 7위계의 마술사. 이들은 조디악의 예지를 뒤흔들어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보다도 훨씬 더 많은 아나테마가 움직였기에 그들의 예지는 형편없이 부서졌다. 큰 내상을 입은 조디악은 지금쯤 힘을 추스르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약점은, 안타깝게도 저도 공유하는 약점이에요."

륜은 말했다. 그녀가 수많은 미래의 사건들을 알고 있는 이유는, '미래를 예지한 조디악의 모략'을 엿보았기 때문이었다. 즉 륜과 아이 일행은 조디악의 불확실한 예지를 훔쳐보는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 미래가 어떻게 변했을지, 어떻게 변하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변수는 되도록 줄이는게 좋겠죠."

에바 역시 반쯤 아나테마나 다름없는 베들렘이었다. 에바가 아이와 따로 떨어져 움직이다간,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것이 륜의 설명이었다. 그러니 일단 아이와 목적을 일치시켜서 동행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에바는 아이의 종자라는 명목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에바가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저 책은 어제 여행짐을 꾸리다가 산 것이었다. 함께 행장을 꾸리러 시장에 나왔을 때, 아이는 에바가 언제나 그랬듯이 또 먹을 것만 잔뜩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바는 고개를 젓더니 색다른 요구를 했다.

"책을 사자. 나, 책 좀 읽고 싶어."

글자는 자기 이름 쓸 줄만 알면 된다던 에바가 꺼낸 말이었다. 놀라웠다. 왜냐고 묻자 에바는 결연한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나 공부 할거야. 똑똑해지고 싶어."

아마도 드미트리와의 헤어짐이 에바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하지만 서점에 들어갔을 때, 결국 에바는 에바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못 읽겠어?"

"응? 아니!"

그러나 그 말과 다르게 역사책을 들여다보는 에바의 시선은 어지럽게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아마도 한 줄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이가 물어보자 억지로 고개를 젓고 책을 이어 읽는데, 세 장을 넘기는 동안 다섯 번이나 하품을 했다. 아이는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그냥 육포나 사러 가지?"

"날 어떻게 보는 거야!"

에바는 오기로 계속 책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한참이나 하품을 거듭한 끝에 겨우 읽을 수 있는 책을 찾아냈다. 그건 삽화가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는 신화 도감이었다. 펼치자마자 나오는 화려한 삽화와 목이 긴 공룡을 보고 에바는 눈을 반짝였다.

"저기, 이 글자는 어떻게 읽는 거야?"

못 읽는 단어가 나오면 물어보며 읽을 정도였다. 그 책은 고대, 중세, 현대의 괴물들을 망라한 도감이었는데, 각 시대마다 한 권씩 총 세 권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에바가 펼쳐든 첫 권에는 페이지마다 공룡 그림이 가득했다. 에바는 처음으로 졸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꼬리가 있었다면 살랑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이었다.

결국 에바는 그 책 세 권을 사서 마차에 올라탔다. 독서를 시작하려는 최초의 목적과는, 뭔가 꽤나 동떨어지게 되었지만, 그래도 문자를 가까이하게 되었으니 좋은 일이겠지. 아이는 에바를 들여다보며 피식 웃었다.

"저기, 이거는 어떻게 읽어?"

에바는 또 아이에게 페이지를 들이댔다. 아이는 천천히, 또박또박 그 글자를 읽어주었다.

"은랑왕 쿠르토."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에바가 들이댄 책에는, 두 발로 서서 만월을 보고 울부짖는 늑대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에바는 엉덩이를 아이에게 붙이고, 책을 같이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 부분은 어려운 단어가 많아서 잘 못 읽겠어. 다 읽어줘."

아이는 함께 도감을 맞들고, 천천히 그 페이지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은랑왕 쿠르토. 그건 지금 찾아가는 성도 8궁, 귀르겐이 무찌른 괴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도감에는 은랑왕의 이야기보다 귀르겐의 이야기가 더 세밀하게 적혀 있었다.

은랑왕, 그는 늑대인간의 몸에 깃든 데몬스폰이었다. 귀르겐이 그를 무찌르게 된 데에는 꽤나 긴 사정이 있었다.

은랑왕은 아주 먼 옛날, 작은 왕국의 왕족에게 저주를 내렸다. 물을 건너지도, 밟지도, 들여다보지도 못하는 저주였다. 그 저주가 흐르는 피는 예상 외의 마술적 효능을 지녀서, 외신들이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게 막는 결계의 재료로 쓸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왕족은 대대로 자신의 딸들을 결계의 재료로 바쳐왔다. 그 결계가 위치한 곳이 그림자 섬이었다.

귀르겐은 그 제물이 되기 위해 자청한 여왕을 호위해서, 그녀를 그림자 섬까지 데려가는 일을 맡았다. 호위라는 말이 우습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임무는 사실상 처형 집행인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예상 외의 음모와 재난이 겹쳐서 그 호위는 길어졌다. 여왕은 죽음 앞에서도 초연했고, 귀르겐의 등에 업혀서 개울을 건너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항상 차분했고 또 따뜻했다. 그 목소리는, 늘 자신의 소임 때문에 괴로워하는 귀르겐의 짐을 덜어주려 애썼다. 곧 예상 외의 사태가 벌어졌다. 귀르겐이 그녀를 흠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에바는 귀를 쫑긋하며 책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숨을 고르던 아이는, 밑에 적힌 내용을 더 읽어갔다.

귀르겐은 결심했다. 여왕의 일족을 대대로 사로잡고 있는 은랑왕의 저주를 풀어주기로. 그래서 그는 검 한자루만을 들고 은랑왕에게 맞섰다. 그때의 그는 아직 성도 8궁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정한 자신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 악마와 맞선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심지어 아탕칼리의 추적도 받아야 했다. 은랑왕을 죽였다간, 외신을 막을 결계를 더 이상 만들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우와..."

에바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뚫어져라 삽화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이는 목을 가다듬고 남은 부분을 더 읽어나갔다.

며칠이나 숨어서 은랑왕을 살피던 그는 곧 은랑왕을 죽일 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은랑왕 쿠르토는 옆구리에 심장을 매달고 있었다. 그 심장은 돋아난 뼈로 보호받았고, 심장의 겉가죽은 용의 가죽처럼 질기고 단단했다. 그 심장을 한번에 양단할 궁극의 참격, 귀르겐은 식음을 전폐하고 그 참격을 연마했다. 자신의 주인을 저주에서 구하기 위해서였다.

세상 전체를 등지고, 오직 자신의 주인을 위해서 싸운 귀르겐. 그는 결국 그 참격을 완성시켰다. 그 참격의 이름은 참랑격이라고 했다. 그 결과 그는 천갈궁의 인정을 받았고, 성도 8궁이 되었다.

"멋진 이야기다..."

에바는 아이에게서 도감을 뺴앗아서 꼭 끌어안았다. 여느 소녀라면 낭만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겠지만, 에바는 달랐다. 에바의 마음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것은 그 무용담인 모양이었다. 가방을 뒤적여서 나무칼을 두 개 꺼내더니, 하나를 아이에게 던졌다.

"그 참랑격이라는 베기가 어떤 걸까? 해봐!"

아마도 그 궁극의 일격이라는 걸 재현해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말을 꺼내는 에바의 눈은 진지해서, 아이도 장난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눈을 감고 귀르겐의 상상을 했다. 왜 그렇게 참격에 집착했을까, 그건 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습을 통한 한번의 일격이 끝나면, 죽을 것이 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건가?"

아이는 찌르기에서 나아가는 횡베기를 택했다. 하지만 에바는 고개를 저었다. 늘 사용하던 그 기형검을 꺼내더니, 똑같은 횡베기를 해 보라고 요구했다. 휘두른다. 그러자 에바의 기형검은 너무나 쉽게 횡베기를 막아냈다. 아이는 깨닫고 탄식을 흘렸다.

"아."

"그치?"

그 기형검은 짐승의 손톱을 닮았다. 그래서 아이는 자신의 실수를 알 수 있었다. 은랑왕은 짐승의 손톱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손가락에 다섯 개의 검을 달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렇다면, 이런 찌르기는 순식간에 막아서 부러뜨릴 것이다.

"이런 거 아니었을까?"

에바는 네 발로 엎드리듯 상체를 숙이더니, 번개처럼 목도를 앞으로 휘둘렀다. 휙, 파공음이 아이의 앞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털 한 올이 잘려서 바람에 흩날렸다. 인간의 것이라기보단 동물의 것 같은 검술이었다.

"그래, 그 쪽이 더 그럴듯할지도."

아이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던 무인으로써의 혼이 들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마차가 여섯 번이나 고개를 건너고 해가 저물 때까지도, 아이는 에바와 함께 그 '참랑격'이라는 걸 재현하려고 이런저런 논의를 했다. 즐거웠다. 덕분에, 오랜만에, 아이는 륜과 만난 이후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던 그 슬픔을 잠시나마 떨쳐낼 수 있었다.

"으하아아암!"

해가 저물고 마차가 멈추자, 에바는 기지개를 켜고 모포를 깔았다. 통령이 준 마차는 훌륭해서 칸막이만 치면 그대로 숙소가 될 수 있었다. 아이는 놋쇠 화로를 꺼내 불을 지폈다. 불꽃이 타닥이며, 순식간에 마차 안을 훈훈하게 달구었다. 부지깽이로 그 불을 헤집고 있을 때, 에바가 빼꼼 모포에서 얼굴을 꺼내고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그 다음 얘기는? 너는 알고 있지?"

도감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이었지만, 아이는 그 뒷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지금 아이와 에바가 귀르겐을 만나러 가기에 앞서 구하려 하는 것, 그것이 그 여왕의 써클릿이기 때문이었다. 그 써클릿은 비극의 증거였다.

"응."

들려줘도 될까. 들려줘야겠지. 아이는 타닥이는 불똥을 바라보며 조용히 그 후의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그러나 귀르겐은 실패했다.

은랑왕은 죽으면서, 귀르겐의 목을 깊게 깨물었다. 그 송곳니를 타고 귀르겐의 혈관에 데몬스폰의 피가 파고들었고, 귀르겐은 결국 반쯤 은랑왕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일개 검사였던 귀르겐이 성도 8궁이 될 정도로 강해졌던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이제 귀르겐이 은랑왕이 되었으므로, 여왕을 묶은 저주는 끝나지 않았다. 그 저주를 끝내기 위해서는 귀르겐이 죽어야 할 판이었다. 여왕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다친 귀르겐이 신전에서 정양하는 틈을 타서, 자청해서 그림자 섬으로 나아갔고, 그 곳에서 죽어서 결계를 그렸다.

귀르겐이 그림자 섬에 수십 년째 틀어박힌 주된 이유는 그것이었다.

외신이 쳐들어와서 그 결계를 부수면, 또 다른 여왕이 죽어서 결계를 덧그려야 할 것이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비극이 더 이상 없기를 바랬다.

그래서 아무도 그림자 섬의 결계를 해치지 못하도록, 그 섬을 지키는 것이었다.

늙은 몸으로도.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의 지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 여왕의 써클릿을 구해야 해."

그게 귀르겐의 광증을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두 사람이 도피할 때, 여왕은 어머니의 유품이었던 써클릿을 팔아서 여비를 마련했다. 그건 귀르겐이 항상 품고 있던 마음의 짐이었다.

조디악이 보았던 예지에서, 완전히 미쳐버린 귀르겐을 달래려던 사람들은 모두 그 써클릿을 확보하려 애썼다. 아이도 그 써클릿을 구해서 귀르겐에게 건네주기로 마음먹었다. 그에게 천갈궁을 건네받았게 되면 답례로 선물할 생각이었다.

그 물건이 있다면 귀르겐은 천갈궁 없이도 꿋꿋이 그림자 섬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거기에 아탕칼리에게 귀띔해서 그림자 섬의 방비를 보강한다면, 예지된 비극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마차는 랭 반도로 향하기 전에 우선 그 써클릿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저기, 잠이 안 와?"

아이는 한참이나 놋쇠 화로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에바가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부시럭거리며 책을 꺼내더니 아이에게 내밀었다.

"그럼 또 읽어줘!"

"빨리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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