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53화 (153/279)

28. 귀르겐 ( 2 )

아이와 에바는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랭 반도 인근의 구석진 마을이었다. 여왕의 써클릿은 15년 후, 이 마을의 허름한 전당포에서 발견될 예정이었다. 주인은 15루덴에 산 써클릿을 5천 루덴에 팔았다. 큰 손해였다. 5만 루덴을 불렀어도 군말 없이 사갔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출발하기 전, 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되새기며 아이는 마을의 큰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문제에 부딪혔다.

"어쩌지? 말을 맡아줄 곳이 한 곳밖에 없다는데."

마부석에 앉은 에바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서 마굿간이 있는 집이 드물었던 탓이었다. 그 유일한 마굿간에는 선객이 있었다. 갈기 하얀 백마가 진홍색 마의를 뽐내며 떡하니 마굿간을 차지하고 있어서 말을 댈 곳이 없었던 것이다. 심각한 표정을 지은 아이 앞에서 백마는 여봐란듯 여물을 씹어댔다. 그 때, 누군가가 여관에서 걸어나왔다.

"아, 멀리서 온 분들이십니까?"

성기사였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그러고보니 저 말이 입고 있는 마의도 아탕칼리의 디자인에 가까웠다. 아이가 두르고 있는 계인을 본 그는 선선히 자신의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혹시나 밤에 말끼리 흘레붙지 않도록, 주인은 창고에서 커다란 칸막이를 꺼내와서 말들을 갈라놓았다.

그동안 아이 일행은 여관 안으로 들어가서 그 성기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에 건조 음식이 아닌, 생 음식을 먹게 된 에바는 신나서 빵을 스프에 적셨다. 곧 여관의 안주인이 허브를 얹고 소금을 뿌린 두툼한 양다리를 내왔다. 함께 내온 작은 그릇에는 요거트가 꾸덕하게 담겨서 신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드시죠."

성기사는 접시를 이 쪽으로 내밀었다. 선뜻 마굿간을 내어준 것부터 시작해서, 호의의 연속이었다. 얼마 안 있어 그 호의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계인을 보아하니 우리의 종파와 연이 있으신 분으로 생각되는데, 혹시 협력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랭 교구에서 파견된 성기사였다. 기사라고는 하지만, 교단을 위해 일할 뿐 칼을 휘두르는 건 특기가 아니라는 말도 뒤따랐다. 그의 임무는 감시였다.

"온 센디엘에 악명을 떨치고 있는 수전노 집단, 조디악에 대해서는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요."

그 이름이 나오자 아이는 에바를 돌아보았다. 얼마 전까지 그 악명높은 수전노 집단의 일원이었던 에바는, 먹던 양다리가 목에 걸렸는지 목을 붙잡고 켁켁대고 있었다. 성기사는 말을 이어갔다.

"그들이 이 마을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합니다."

얼마 전부터, 이 마을에 대량의 인원을 풀어서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성기사는 도대체 이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알아내고, 가능하다면 저지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에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거, 설마..."

이 자그마한 마을에서 찾을 물건이라곤, 그 써클릿밖에 없었다. 아이는 손을 들어서 에바의 입을 막았다.

"당신이 염려하는 일에 대해서는, 저희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모호한 대답이지만 영리한 대답이었다. 성기사는 만족한 듯 자그맣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잠시 후, 짐도 풀지 않고 에바와 아이는 여관을 나섰다.

몇 블럭 움직이지도 않아서 아이는 에바는 이상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가 따라붙고 있어."

에바가 조용히 말했다. 통령이 준 고급 마차는 이 작은 마을에서 크게 눈에 띄었다. 성기사의 말에 따르면 이 마을 곳곳에는 이미 조디악의 끄나풀이 숨어 있다고 했다. 그들이 마차를 발견하지 못할 턱이 없었다.

"모르는 척 해."

그리고 그건 이미 예상하던 일이었다. 아이는 태연하게 기지개를 키며 속삭였다. 조디악이 써클릿을 찾는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베들렘을 잃어버린 그들은, 다시 자신의 손으로 운명을 거머쥐기 위해 새로운 칼이 필요했다. 아나테마를 뚝딱 만들어낼 수는 없으니, 그들은 성도 8궁을 영입하려 들 것이었다.

귀르겐은 조디악이 영입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성좌였다. 그녀의 연인이었던 여왕은 제국과 아탕칼리의 희생자였다. 그 자신도 데몬스폰의 피가 섞여서, 대륙에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외딴 섬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가 써클릿을 건네주며 영입을 시도할 생각이었을리라.

"그리고 그 놈들도 바보는 아니야."

지금까지 조디악이 형편없이 당해주었던 이유는 그들이 예지를 절대적으로 신봉했기 때문이었다. 별 것 아닌 작은 상단이었던 조디악이, 최고의 콘체른으로 올라설 수 있게 해 주었던 힘이 예지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실패의 원인은 어쩌면 세계라고도 할 수 있었다. 수백년간이나 잠잠하다가, 갑자기 화산처럼 세계의 운명에서 벗어난 괴물들을 토해내기 시작한 세계.

"그건 무슨 뜻이야?"

"이제 우리를 예지의 예외로 두고 견제할 거라는, 뭐 그런 말이지."

미행자를 흘깃 쳐다보며 아이는 말했다. 그들의 미행은 지나치게 신속했다. 사전에 자세한 귀띔을 듣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속도였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게 틀림없어. 아이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어서 오십쇼!"

아이와 에바가 미행을 달고 향한 곳은 전당포였다. 15년 후 여왕의 써클릿이 발견되는 전당포. 야비한 인상의 주인은 방금 전까지 엎드려서 잠을 청하고 있었는지, 뺨에 붉은 자국이 선명한 채로 손님을 맞았다.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선물로 쓸 장신구를 찾습니다. 전부 보여주십시오."

"전부요?"

눈썹을 꿈틀대며 귀찮아하는 주인에게 5루덴을 던져주었다. 화색이 된 그는, 잠시 후 낑낑거리며 안쪽에서 커다란 상자를 들고왔다. 그가 모든 장신구를 늘어놓는 데에는 무려 30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귀를 쫑긋거리며 그것을 바라보던 에바는, 남자용의 머리끈을 발견하고 손가락질했다.

"아! 이거 좋겠다! 너 갑자기 머리 잘라서 머리 끝이 되게 더럽던데!"

이 전당포에 들른 목적을 잊어버린 듯 천진했다. 아이가 눈총을 주든 말든, 에바는 결국 그 머리띠를 사비로 구입해서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동안 아이는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이걸 주십시오."

"그거? 아, 그건 딸려들어온 모양인데. 안 파는 거요. 딱 봐도 더럽게 싸구려처럼 보이지 않소."

때가 시꺼멓게 탄 써클릿을 내밀자 주인은 손사래를 쳤다. 이런 물건을 팔 수 없다는 말이었지만, 아이가 50루덴을 내밀자 군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에바는 눈을 크게 뜨고 그 써클릿을 바라보았다.

"그거야?"

의외였다. 여왕의 써클릿이라면 분명히 어떤 마법적인 힘이라도 담고 있던가, 값진 보석이라도 줄줄이 달려 있을 줄 알았는데, 아이가 꺼낸 써클릿은 어떻게 보아도 그냥 싸구려 모조품이었다.

포장한 써클릿을 애지중지 품고 가게를 나서고, 에바가 억지로 아이의 뒷머리를 묶어주고, 한참 걸어서 다시 여관에 도착할 때까지도, 에바는 그것이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돌아온 여관 방은 텅 비어 있었지만 어딘가 낯설었다. 누군가가 손을 대고 돌려놓은 듯했다. 이부자리의 주름을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모양으로 구겨놓았던 아이는 곧 이상을 발견했다. 주름의 모양이 변해 있던 것이다. 역시, 손을 댔군. 문 손잡이를 붙잡은 채로 아이는 중얼거렸다.

아이는 침대에 그 써클릿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쾅 문을 닫았다.

"가자. 목적은 이뤘으니 내일 빨리 랭 반도로 떠나야지."

"응. 알았어."

들리라는 듯 크게 말하는 아이의 말에 에바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먹이와 땔감을 사러 가자며 아이는 에바를 여관 밖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이가 전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바는 아이의 뒤를 뒤따르면서도, 조심조심 말했다.

"저기, 그런데 말이야. 그 써클릿, 그렇게 막 보관해도 되는 거야? 도둑이라도 들면 어떻게 해?"

"괜찮아."

"그 성기사 아저씨 믿고? 그치만 그 아저씨 칼은 잘 못 쓴댔는데..."

"그건 그냥 망가진 싸구려 모조품이니까. 아마 지금쯤 미행하던 놈이 그거 훔치려고 온갖 애를 쓰고 있을걸."

"응?"

에바가 눈을 크게 떴다. 애초에 저 전당포에는 아직 여왕의 써클릿이 입하되지 않았다. 입하되는 건 십 년이 지나서였다. 그런데도 아이가 굳이 그걸 50루덴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구매한 이유는, 눈속임이었다. 조디악은 지금 아이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또 자신들의 예지가 틀렸거니 생각하고, 그 써클릿을 진짜라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 그럼 진짜 써클릿은?"

"다른 곳에 있어. 이미 위치도 알고 있어. 은색의 숲, 그 샴발라라는 괴물들이 서식하는 곳이야."

"정말? 그렇게 가까이에 있었어?"

"애초에 그게 여기서 발견되었다는 건, 이 근처에 그 물건이 숨겨져 있었다는 거니까."

그 가짜를 눈속임용으로 던져놓고, 아이는 지금 진짜를 구하러 가는 중이었다. 구한 다음에는 틈도 주지 않고 바로 랭 반도로 떠날 셈이었다.

"오늘 안에 일을 끝마치고, 내일 떠나야 한다는 건 진짜야. 속도를 내자."

그 말과 함께 아이는 풀쩍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온갖 장애물로 가득한 지면 대신, 나무와 나무를 건너뛰어 목적지로 가겠다는 뜻이었다. 에바라면 그 속도를 따라올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에바는 씨익 웃으며 표범처럼 나무 위로 올라탔다.

하늘을 가득 메울 듯 커다랗게 떠오른 달 혼자서 숲을 내려다보는 밤이었다. 그 비죽비죽 솟은 숲그림자 위를 두 사람이 달려나간다. 목적지는 여왕의 써클렛이 숨겨진 장소, 은색의 숲이었다.

*

한 편, 그때 조디악의 끄나풀들은 내분을 저지르고 있었다.

"이, 이 개자식! 그깟 돈 몇 푼 떄문에 오 년이나 한솥밥 먹은 이 형님을 팔아먹어?"

"여기 걸린 현상금이 일만 루덴인데 어쩔 수 없지 않소. 오히려 비싼 값에 팔려나간게 다행인줄 아시오."

이곳은 랭 반도 인근, 아탕칼리의 세력이 유독 강한 곳이었다. 그래서 조디악은 무뢰배와 불량배를 여럿 고용해 일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내분이 일어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돈으로 모인 이들이 큰 돈을 눈 앞에 두고도 신의를 지킬 리가 없었다. 아이를 미행하면 써클릿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귀띔을 받은 불량배가, 하루종일 미행한 끝에 얼굴이 벌게져서 아이의 방에서 써클릿을 훔쳐나오자, 바로 다섯 개의 칼이 날아들어서 그 불량배를 토막쳤다.

그 이후 그들은 써클릿의 소유권을 두고 칼부림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배신에 배신이 거듭되었고,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 다섯 명이 죽었다. 마지막으로 써클릿을 품은 짝귀는 팔이 잘리면서도 써클릿을 놓치지 않고 헉헉대며 달아났다. 입에는 미소까지 걸고 있었다.

자신들이 무가치한 쓰레기를 두고 다투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열흘 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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