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겁쟁이 ( 2 )
부두 인근의 교회에 도착했을 때.
아이를 그림자 섬으로 안내할 성기사들의 단장은 자신을 네이슨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멀리서 찾아온 이 낯선 방문자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년째 그림자 섬을 오가는 궂은 일을 도맡을 정도로, 귀르겐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천갈궁 파에톤을 건네받으러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코웃음을 쳤다. 상대가 고작 갓 어린아이티를 뗀 열일곱이라는 것도 그 판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체 어떤 생각으로 상부가 이런 애송이를 보내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대련으로 혼쭐을 내주겠다는 것이 그의 심산이었다.
그러나 막상 대련을 시작했을 때, 네이슨은 두 수 만에 자신이 오만했음을 깨달았다. 세 수째부터는 아름답게 기권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다섯 수 째에는, 자신이 두 수를 버틴 것도 상대가 배려했기 떄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섯 수가 되었을 때, 그는 두 손을 들었다.
"졌소."
네이슨은 검 손잡이를 거꾸로 쥔 채 가슴에 가져갔다. 기묘한 자세였다. 아이가 검을 물린 채 눈을 휘둥그레 뜨자,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자신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무인을 만났을 때, 존경을 표하고 축복을 기원하기 위한 의례요. 내가 이걸 이 땅에서 한 건 귀르겐 경에게 대련을 청한 이후 3년만이군."
네이슨은 진심으로 감탄스럽다는 듯 말했다.
"과찬입니다."
아이는 짧게 대답하고 검을 집어들었다. 바깥에서 전령이 뛰쳐들어온 것은 그 때였다.
"그림자 섬에서 오기로 한 배편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고?"
네이슨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전령은 비에 젖은 채로 자세한 자초지종을 알렸다. 어제가 보름달이 뜨는 밤이었으므로 아무리 늦어도 지금까지는 배가 도착해야만 한다. 그런데 아직도 배가 오지 않았다. 그렇게 돌아오는 인원과 교대하는 성기사들 사이에 저 손님들을 끼워 넣어서 보낼 생각이었는데, 어렵게 되었다. 그런 내용이었다.
"그런..."
불현듯 예지되었던 귀르겐의 미래가 떠올랐다. 외로운 섬에 홀로 갇혀있기 때문에, 그는 대부분의 미래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이미 그 예언이 실현된 것은 아닌가,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불길함을 느낀 건 네이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허둥대며 배편을 꾸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 없소!"
바깥에선 번개가 울렸다. 네이슨이 황급히 검을 허리에 채우고 우의를 입을 때, 아이는 에바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우리도 합류하겠습니다."
"우선 정찰을 할 예정이오. 귀한 손님들은 빠지는 것이..."
"위험한 일에는 앞장서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웠습니다."
아이의 눈에 담긴 진지함을 본 네이슨은 더 말리지 않았다. 방수포와 고리갑옷을 섞어 만든 우의를 건네줄 뿐이었다.
*
바다는 거칠었다.
"역류입니다! 역류에 접어들었습니다!"
"젠장, 틀어! 어떻게든 섬 인근까진 도착해야 해!"
비바람 속에서 파도는 미친 듯 출렁였고, 그 파도 위에 실린 배 역시 돛도 피지 못하고 흔들렸다. 계통 없이 불어대는 바람과 비보라 속에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고, 먹구름에 가려서 사방은 깜깜했다. 팽팽하게 밧줄을 잡아당기던 선원 하나가 줄을 놓치고 뒤로 넘어졌다. 그 순간, 달려들어 줄을 맞잡는 손이 있었다. 아이였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다시금 줄이 팽팽해졌다. 에바도 뛰어다니며 항행을 돕고 있었다. 아이는 먼 바다를 들여다보는 네이슨에게 악을 써서 물었다. 귓전에서 웅웅대며 몰아치는 바람 떄문에 악을 써야만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거의 다 도착했소! 저 거북 머리 바위를 넘어서면 금방이오!"
그 때였다. 망원경을 연신 닦아가며 그림자와 검푸른 물만 보이는 시야를 연신 확인하던 네이슨은 문득 이상한 것을 보았다. 가깝게 다가온 바위와 멀리 보이는 흰 섬 사이로, 무언가가 미친 듯 질주하고 있었다. 파도인가? 네이슨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다가오고 있다.
"괴물?"
이 날씨에? 다급히 망원경을 내린 네이슨은 입을 벌렸다. 잠시 눈을 뗀 사이에, 그것은 배의 선두까지 다가와 있었다. 맨 눈으로 보고서야 네이슨은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귀르겐 경?"
아니, 천갈궁으로 불러낸 귀르겐의 그림자였다! 그림자와 석유를 섞어 만든 듯 끈적하고 어두운 형상의 기사가 배로 덮쳐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림자의 형상이 정상이 아니었다. 그것의 가슴팍에는 갈비뼈가 안으로 쪼그라들어서 갑옷처럼 전면을 가렸고, 등에는 갈비뼈가 벌어지면서 솟아올라서 날개를 연상시켰다.
"뭐, 뭐야!"
당황한 네이슨은 진은검을 뽑아들고 신기를 끌어올렸다. 신기가 검에 전부 맺히기도 전, 귀르겐의 그림자는 거세게 네이슨을 덮쳤다. 간신히 막아냈지만, 진은검은 산산조각나서 검편을 흩뿌렸다.
"이게 무슨 짓이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잘록의 실험을 당하고 이성을 잃은 귀르겐이, 그림자를 파견해서 접근하는 모든 생물을 죽이고 있던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네이슨은 부러진 검을 붙잡고 울부짖었다. 그림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천갈궁을 당겨 잡고, 이번엔 네이슨의 상반신을 토막칠 기세로 달려들 뿐이었다.
"물러서세요!"
충격으로 멍하니 서 있는 네이슨을 밀쳐내고 아이가 달려들었다. 손에는 코람 데오가 들려 있었다. 손잡이에 좌우로 길게 뻗은 날개 장식으로 그림자의 검을 막아낸 아이는 곧바로 짓쳐들었다. 쩡, 그림자는 막아냈다. 갈비뼈를 쳐부술 기세로 가슴을 덮쳤다. 기름덩이를 베어낸 듯한, 또 고체를 베어낸 듯한. 기묘한 감각이 손끝에 전해졌다. 깡! 그림자는 다시 천갈궁을 크게 휘둘러 머리를 노리고 덮쳐왔다. 코람 데오를 양 손으로 붙잡은 아이는 뒷발을 빼고 막아냈다. 검과 검이 맞물려 십자를 그린다.
"가, 가세를..."
"피하세요, 당신들이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에요! 에바!"
교착 상태에서, 당황해서 우물쭈물대는 성기사들에게 소리쳤다. 아이는 이를 꽉 깨물었다. 눈 앞의 적은 강했다. 성도 8궁일 뿐만 아니라, 인공적인 외신을 만들어내는 아잘록의 실험을 겪으며 신기가 폭주했기 때문이었다. 에바를 제외한 누구도 도움이 되지 않을 듯했다. 그림자가 이 정도인데, 본체가 나선다면? 아이는 오랜만에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뒤에서 덮쳐!"
말할 필요도 없이, 에바는 이미 기형검을 뺴들고 덮쳐오고 있었다. 등의 갈비뼈를 노리고 검이 번뜩인다. 그런데, 경험의 산물일까. 귀르겐의 그림자는 교착 상태에서 놀랍도록 부드럽게 빠져나가며 기형검을 후려쳤다.
"큭!"
쩡! 에바의 기형검이 삐걱댔고, 에바는 신음을 흘리며 뒤로 공중제비를 돌아서 착지했다. 목표를 바꾸어 그림자는 에바에게 달려들었다. 아래에서 짓쳐들어오는 검. 그러나 붉게 달아오른 장검이 그 앞을 막았다. 코람 데오였다. 세 번의 경합을 거쳐서, 영체를 베어내는 힘을 충전한 그 검이 그림자를 막아세웠다.
"흐압!"
그림자는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놓치지 않았다. 붉게 달아오른 코람데오의 빛이 꺼지기 전에, 거무튀튀한 얼굴을 노리고 크게 검을 휘둘렀다. 스하악! 천둥이 치는 바다 위에서 절삭음이 소름끼치도록 길게 퍼졌다.
"성공이다!"
네이슨이 소리질렀다. 아이의 코람 데오는 그림자의 얼굴을 비스듬히 베어넘겼다. 코람 데오가 지나간 자리로, 시꺼먼 연기가 진액처럼 흘러나왔다.
"윽!"
그런데 신음을 흘린 것은 아이였다. 저 검은 연기가 흘러나온 이후로, 갑자기 어깨가 쑤셔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였다. 단테가 선주를 막아세우기 위해 쐐기를 박아넣은 자리. 자세히 보니, 검은 연기는 비바람 속을 뱀처럼 뚫고 기어와서 어깨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뭐지? 왜 이런 일이?'
동시에, 자신의 어깨에 갇혀 있을 선주가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저 그림자를 이루는 것이, 선주를 이루는 것과 같은 힘의 근원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몸 속의 선주가 힘을 흡수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아이가 어깨를 붙잡고 당황하고 있을 때, 귀르겐의 그림자는 입을 열었다.
"...경고한다. 나의 섬에 다가오지 마라."
영체를 베는 힘을 가진 코람 데오, 그것에 베여서 몸을 좀먹은 외신의 기운이 빠져나간 덕분에 대화를 할 수 있는 이성을 일시적으로 되찾은 모양이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귀르겐 경!"
대답한 것은 아이가 아니라 네이슨이었다. 그의 얼굴은 당혹으로 떨고 있었다.
"섬에 머물던 전우들은 전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당신의 목적을 밝히시오!"
"죽었다. 애도할 일은 아니다. 모두 그렇게 될 테니까."
그림자의 어조는 차갑도록 담담했다. 모두 그렇게 된다, 그 말에 불길함을 느낀 아이는 소리쳤다.
"그 말의 의미를 밝히세요!"
그 순간, 어깨가 강하게 시려오며 환상이 눈 앞에 퍼져나갔다. 귀르겐의 그림자에서 뻗어나와서 몸 속에 스민 외신의 기운이 이 환상을 보여주는 모양이었다.
어딘가 낯익은 반백의 마술사에게 멱살을 잡힌 채 몸부림치는 귀르겐의 모습이 눈 앞에 비쳤다. 그 때, 귀르겐은 아잘록과 잠시 동안 정신이 연결되어 있었다. 아잘록은 귀르겐의 절망을 더 깊게 이끌어내기 위해서, 자신이 계획이 이루어졌을 때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대륙이 아비규환이 되고, 어떤 생명도 살아남지 못하며, 이 섬은 거대한 고래 외신에게 파먹히는 장면이었다. 그것을 본 귀르겐은 탁 풀린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몸을 떨었다.
"그런... 당신이, 어떻게?"
즉, 귀르겐은 륜 그리고 아이와 마찬가지로, 다가올 세계의 운명을 알게 된 사람이었다. 어깨를 부여잡은 채 말을 더듬는 아이에게, 그림자는 나지막히 말했다.
"어차피 이 섬 밖의 세계는 내게 무의미하다. 나는 이 섬만은, 그녀의 무덤만은 지키기로 맹세했다. 사라져라."
그리고 그 종말을 확인한 그는, 종말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종말을 막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자그마한 섬만을 지키는 것을 택했다. 다시 한 번 환영이 시야를 검게 물들였다. 아잘록에게서 풀려난 직후, 기괴하게 변형된 몸을 일으킨 귀르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외신을 막는 결계로, 여왕의 피로 그려진 결계로 다가가더니 엄지를 깨물었다. 그리고 결계를 고쳐 그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신은 지금 바다 전체에서 외신을 막기 위한 결계를, 그 섬만을 막기 위한 결계로 바꾸고 있다는 겁니까!"
아마 내일이면 그 결계가 완성될 것이었다. 소리지르자 환영이 걷혀갔다. 그림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내 섬에 다가오지 마라. 다가오는 자는 죽는다."
아직 이성이 남아 있을 때 떠나고 싶었던 것인가, 그림자는 얼굴 가득 연기를 흘리며 뱃전을 박차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
"그래서, 당신 혼자 그 섬에 돌입하겠다는 말이오?"
귀르겐의 그림자가 떠나고 난 뒤, 아이는 모두를 모아놓고 말했다. 환영으로 귀르겐의 정보를 얻은 지금 아이는 알 수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하루, 아니, 16시간이 지나면 저 섬은 이제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장소가 됩니다."
세계의 멸망을 직면하고, 절망한 귀르겐은 광기에 가까운 두려움으로 결계를 고쳐썼다. 랭 반도의 남부 해역 전체를 막아주던 결계를 오직 그 작은 바위섬 하나를 막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외신이 바다로 쳐들어오는 길이 열리게 되며, 천갈궁은 영영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막아야 합니다."
이것은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끼칠 재앙이 될 수도 있었다. 그 주체가 성도 8궁인 귀르겐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네이슨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나도 가겠소."
"냉정하게 말해서, 도움이 안 됩니다."
"역시 그렇군."
아이의 말을 들은 네이슨은 자조 섞인 너털웃음을 흘렸다. 에바는 옆에서 염려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나는? 나는 같이 가도 돼?"
"너는 이 사람들의 후퇴를 도와줘."
이미 결계는 흔들리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은 험난할 것이다. 괴물의 습격이 있을 수도, 외신의 습격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배가 전복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만약의 경우에는 이 사람들이 본단에 연락해서, 지원군을 불러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작은 배 하나만 내어주십시오. 당신들은 교구로 돌아가 상황의 위급성을 알려주십시오. 그게 최선입니다."
네이슨은 승낙했다. 이미 아이의 실력을 확인한 참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그것이 최선이었다. 우의를 뒤집어쓰고 작은 물주머니와 함께 조각배에 올라타는 아이를 보며, 그는 마지막으로 악수를 청했다.
"무운을. 반드시 살아 돌아오시오."
"윽!"
네이슨의 손을 맞잡았을 때, 아이는 작은 신음을 흘렸다. 어깨가 다시 시려오며,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는 귀르겐의 환영이 눈 앞에 어른거렸기 때문이었다.
"정말 괜찮겠소?"
염려섞인 눈길을 보내는 네이슨과 에바를 뒤로 하고, 아이는 훌쩍 조각배 위로 뛰어내렸다. 에바는 뱃전을 부여잡고, 작은 배 위에서 흔들리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