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59화 (159/279)

29. 겁쟁이 ( 4 )

천갈궁의 일격은 흉맹했다.

"큭!"

팔뚝이 저려오는 충격을 간신히 버텨내고, 아이는 유혼을 길게 휘둘렀다. 검날과 검날이 마찰하며 긴 쇳소리와 불똥을 튀겼다. 귀르겐은 틈을 주지 않았다. 두꺼운 주먹으로 아랫배를 후려쳤다. 팔꿈치 끝으로 간신히 막았지만, 아이의 몸통은 공처럼 튕겨 저 멀리로 쳐박히고 말았다. 푸슉! 흰 모래와 돌조각이 크게 튀어올랐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찢어질 듯한 아픔을 딛고 아이는 검을 황급히 곧추세웠다. 먼 거리에서 송곳처럼 칼을 세우고 귀르겐이 덮쳐왔다. 깡! 간신히 막아냈다. 검을 교차하고, 아이는 귀르겐과 얼굴을 마주했다. 강인한 주름이 이마와 턱끝에서 꿈틀댔고, 가지런한 잇새로 연신 푸른 숨을 토하고 있었다. 눈은 광기에 젖은 듯 초점이 불안정하고, 흰자위는 검게 물들었다. 이를 악물고 후려쳤다. 자세를 낮춘 아이는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림, 미제리코드!"

아이의 오른손에 십자의 단검이 솟아났다. 지척이었다. 아이는 갑옷의 틈새에 미제리코드의 송곳같은 검날을 박아넣었다. 끼이익, 쇠를 비틀어 부수는 소리와 함께 살점을 저미는 감각이 손끝에 똑똑히 느껴졌다.

"하아아압!"

기합을 내지르며 미제리코드를 올려벴다. 이대로 살점을 난도질해서 온 몸에 독을 퍼뜨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귀르겐의 어깨에 휘감겨 있던 여왕의 그림자가 가로막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여왕은 입을 크게 벌리고 굉음을 내질렀다. 무형의 파동이 어두운 섬의 공기를 뚫고 아이의 고막을 후려쳤다. 먹먹했다. 그 괴성은 영혼을 진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사방이 어지럽고 시야가 흐려졌을 때, 아이는 흐릿하게 자신을 덮쳐오는 발을 보았다. 쾅! 다시 한 번 폭음이 터지고, 아이는 가슴을 걷어차였다. 미제리코드의 손잡이를 놓치고 뒤로 멀리 날아가 나무를 쳐부수고 쓰러졌다.

"윽, 으으윽..."

이마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아직도 어지러운 듯 이마를 붙잡으며 아이는 간신히 일어섰다. 그러나 그렇게 여유부릴 틈이 없었다. 림의 다급한 외침이 아이의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어서 피해라, 어린 순례자야!'

눈 앞이 밝아왔다. 거기에 보이는 것은, 짐승처럼 괴이쩍은 자세를 취한 채 힘을 모으고 있는 귀르겐이었다. 천갈궁은 검 끝부터 끝까지 검푸른 빛으로 가득해서, 눈이 아플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참랑격?"

아이는 그 일격의 정체를 눈치채고 입을 벌렸다. 아이가 예상했던 형태도, 에바가 예상했던 형태도 아니었다. 그렇게 외치자마자 귀르겐의 참랑격이 아이가 서 있는 자리 전체를 노리고 휩쓸어왔다. 검격이 쏟아져나갈 때 여왕의 그림자는 다시 입을 벌리고 괴성을 내질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쾅!

참랑격의 위력은 흉악했다. 얻어맞는다면 생존을 장담할 수 없었다. 모래톱은 포탄이라도 얻어맞은 듯 박살나서 흰 모래의 비를 뿌렸고, 바위도 나무도 잘게 부숴져 허공을 비산했다. 아이의 뒤에 있던 뼈의 기둥은 그 일격을 얻어맞고 밑둥이 부서져서 기우뚱했다. 우지끈! 큰 소리가 울렸다. 기둥은 연기와 폭음 속에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귀르겐 쪽이었다.

쓰러뜨렸나, 귀르겐은 자신의 일격이 대지에 남긴 상흔을 확인하고 검을 물렸다. 연기가 걷힌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귀르겐은 달려드는 발소리를 들고 다급히 천갈궁을 치켜세웠다.

"쳐먹어라!"

무너지는 뼈의 기둥 위를 달려서 아이가 덮쳐오고 있었다. 일격이 도달하기 직전, 아이는 뼈의 기둥 위로 뛰쳐올라가서 매달려 그 공격을 피했다. 그 직후 기둥을 박차고 달려들고 있던 것이다. 검을 막 치켜드는 귀르겐이 눈앞에 보였다. 늦었어! 확신하며 도약했다. 몸 전체를 활처럼 굽히고, 섬이 떠나가라 큰 소리를 내질렀다.

"림, 레바테인!"

그 텅 빈 손에 구불구불한 적색의 대검이 치솟고, 도약한 아이는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내 손에 힘을 밀어넣었다. 레바테인은 하늘이라도 무너뜨릴 듯 거대한 호를 그리며 귀르겐을 덮쳐갔다. 여왕은 다시금 입을 벌리고 괴성을 내질렀고, 귀르겐은 천갈궁을 방패처럼 세워 일격을 대비했다. 쾅! 충돌. 아이는 귀르겐의 몸을 걷어차고 뒤로 물러나 착지했다.

"베어냈다!"

떨어지는 도중 둥글게 궤적을 바꾸어 오른편을 노렸던 것이 주효했다. 레바테인은 여왕의 그림자를 베어내고, 귀르겐의 견갑을 박살낸 뒤 어깨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빙글 돌아서 다시 검을 치켜들고 귀르겐의 상태를 살폈다. 연이은 격전으로 자신도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방금 일격을 맞고도 귀르겐 역시 무사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오, 오... 또, 또..."

귀르겐은 얼굴을 부여잡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여왕의 그림자가 베인 충격인 것인가? 몸부림치는 그의 눈에서 검고 끈덕진 연기가 일렁거렸다. 중요한 것은 다음이었다. 그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여왕은 길고 깊은 비명을 내질렀다. 지금까지의 모든 비명을 합친 것보다도 큰 비명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 비명은 섬을 가득 메우고도 멀리 퍼져나가서, 배를 타고 돌아가던 에바에게까지 들렸다. 상어 괴물의 내장에서 기형검을 뽑아내며 에바는 걱정스럽게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네이슨과 선원들도 이 기괴한 비명을 들으며 얼굴을 경직했고, 다함께 수평을 바라보았다. 깎아지른 수평 위에선 어둠이 일렁이고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귀를 막아라!'

림의 외침, 그러나 늦었다. 옛날 그 생육의 천사의 심장처럼, 저 비명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고 보고 싶지 않은 기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기억은 절망이었다. 아이의 고막으로 스며든 비명은 이도를 타고 뇌 속으로 흘러들어가, 깊게 응어리진 아이의 슬픔과 고독에 입을 맞추었다.

ㅡ결국 인간에게 소통은 불가능하며, 모두는 각자의 세계 안에 갇혀 있는 것일세.

누군가의 읊조림 뒤로 해일처럼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귀르겐의 절망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영웅이 되고 싶었다. 자신의 선의와 영웅심을 믿고 세상과 싸워나간다면,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했다. 연인을 희생시킨 세상에게 칼을 들고 덤비지도 못했다. 그저 이 섬에서, 무기력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정말로 낯설지 않았다. 북서 자치령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다나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스쳐지나갔다. 자신도, 진실로, 진실로 무고한 이를 베어내고 싶지 않았다. 영웅이 되고 싶은 소망은, 그 때에만큼은, 어쩌면 지금도 진실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결국 끝까지 자신의 검을 순결하게 다스리지 못했다. 진물이 가득한 눈으로 엎드려서 칼을 받던 헤이든의 가주가 떠올랐다. 총관의 모습도 떠올랐다. 식솔을 위해 죄를 뒤집어쓰고 내걸렸던 그의 시체가 떠올랐다. 장대에 걸린 그 몸뚱이를 내려서, 그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자신은 울고 있었다.

그 날, 집에 틀어박혀서 블로어를 매만졌다. 베어내지 말아야 할 것을 베어낸 검은 전에 없이 무거웠고, 몸은 깊은 물에 빠진 듯 무기력했다. 과거의 자신은 그 총관과 함께 죽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잠에서 벗어나는 이불의 무게는 세상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웠고, 그저 멍하니, 방 안에서 머무르고 싶었다...

"그래서요!"

아이는 고함을 내질렀다. 고함에 놀란 걸까, 일렁이던 눈 앞의 환영이 걷혀가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고, 레바테인을 불러내어 그러쥐었다.

"그래서 계속 징징대고 있을 겁니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불분명했다. 아이는 귀르겐에게 달려들었다. 천갈궁을 들어 막는다. 그 눈은 여전히 광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선하게 살 수 없었으니까, 죄를 지었으니까! 이런 작은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책임을 내다버리는 게, 그게 당신의 선택입니까!"

울림은 컸다. 귀르겐은 검을 휘두르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 눈은 초점을 되찾고 아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이는 이를 악물고 소리질렀다.

"나는 그런 겁쟁이와 싸우러 여기까지 온 게 아닙니다!"

"너는...너는?"

"나는 당신이 본 미래를 막아낼 사람입니다!"

귀르겐은 입을 벌렸다.

"그러기 위해서, 영웅인 당신에게, 검을 물려받으러 온, 사람입니다!"

과거를 들여다보았던 것은 아이뿐이 아니었다. 어둠으로 가득한 귀르겐의 눈에도, 아이의 과거가 흐리게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귀르겐은 그것을 보았다. 모든 환영을 본 끝에 침묵했고, 침묵 끝에 웃었다. 메마른 웃음이 두 사람 사이에서 번져갔다. 그는 문득 고개를 숙였다.

기괴하게 변형된 자신의 모습이 눈에 비쳤다. 갈비뼈는 앞뒤로 황폐하게 튀어나왔고, 살점은 갑옷을 휘감고 불끈거렸다. 그는 툭 말했다.

"이 꼴을 보고도 나를 영웅이라 부르는가?"

"예!"

아이는 검을 마주잡고 악을 쓰듯이 외쳤다.

"어쩌면 당신 말대로 영웅 같은 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실패하더라도, 영웅이 되려고 노력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웅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을 겁니다!"

"바보같군."

천갈궁을 양 손으로 붙잡고, 아까 취했던 자세를 취한다. 참랑격의 자세였다. 아까 보았던 자세지만 아이는 그 검세에서 다른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그 검날 위에는 분노가 없었다. 아까의 참랑격이 아이를 죽이고자 하는 절망을 담은 것이었다면, 지금은 그저, 후배를 시험하고자 하는 무인의 의지만이 담겨 있었다.

지금 그는 천갈궁의 주인으로서, 아이 앞에 서 있었다.

"한 수면 충분하겠지."

검 위로 노도처럼 푸른 기운이 몰아쳤다. 아까의 것과 다르게, 검은 빛이 섞이지 않은 정순한 푸른색이었다. 아이는 그와 자세를 똑같이 취했다. 레바테인 위로 붉은 기운이 차올랐다. 두 사람의 자세는 거울처럼 똑같았다.

쾅!

창졸간에 승부는 났다. 서로의 검날에 기운이 충만했을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력을 담아 일격을 후려쳤다. 귀르겐의 공격은 참랑격이었고, 아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전에 그게 어떤 공격이었을지, 에바와 길게 토론했던 덕에 베껴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불완전했지만 아이는 굳이 참랑격을 택했다. 예의였다. 동화의 주인이 되고자 했던 자에 대한 예의로, 아이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큭!"

아이는 핏물을 토했다. 귀르겐의 참랑격은 자신의 허리를 길게 베고 지나가서, 뜨끈한 피가 바지를 가득 적시며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내장이 끊겨서 피가 역류한 듯 검고 찐득한 핏물을 한움큼 토했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다. 비척이며 몸을 일으켰다. 등 뒤에는 검을 붙잡은 채 쓰러진 귀르겐의 모습이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승리한 것은 아이였다.

"축하한다. 너, 라면. 이 검을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

아직 절명하지 않은 것인가. 가슴을 잃고도 그는 중얼거렸다. 여왕의 그림자가 그를 무릎에 눕히고 흐느끼고 있었다. 귀르겐이 이를 악물고 천갈궁을 건네자, 그림자는 눈 녹듯이 사라졌다. 아이는 얼른 여왕 대신 자신의 무릎으로 귀르겐의 목을 기댔다.

"이 대책 없는 세계를, 잘 버텨낼 수 있겠나."

저주를 말하듯 귀르겐은 말했다. 그의 흐릿한 시야에 아이의 얼굴이 비쳤다. 그리고 그는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겁쟁이라면 너는 울보인 모양이군. 뭐가 그렇게 슬픈가."

귀르겐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아이는 또 구슬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지막 힘으로 손을 내뻗어서, 귀르겐은 그 눈물을 훔쳤다. 애정이 아니었다. 그저 순수하게, 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영웅을 연기하며 살아가거라."

자신이 인정한 자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귀르겐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아이는 그 섬에서 한동안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훌쩍이며 하늘을 들여다보았을 때, 뼈로 만들어진 천장은 부서지고 있었다. 죽은 귀르겐의 시체는 고요했다. 주섬주섬 품에서 써클렛을 꺼냈다. 귀르겐의 이마는 평원처럼 넓었다. 아이는 써클렛을 그 이마에 씌워주었다.

어느새 아침이었다. 부서진 천장 사이로 햇살이 조각나 스며들어왔다. 야속하도록 맑은 하늘이었다. 알에서 깨어나는 새는, 처음으로 저런 빛을 보게 되는 걸까. 멍하니 생각했다. 아이는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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