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목적 ( 2 )
이틀 후, 광장에서 펼쳐진 귀르겐의 장례식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운집했다.
기괴하게 변형된 귀르겐의 시체를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유골은 불타서 자그마한 청동 단지에 담겼다. 여러 명의 여인들이 붉은 비단으로 단지를 감싸주었고, 수만 명이 그 단지가 안장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은 흐느끼거나, 기도하거나, 또는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맡은 소임을 다하여, 목숨을 바쳐 우리의 남쪽 바다를 지켜냈소!"
그는 모비우스와 맞서 싸우다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다. 과연 영웅다운 죽음이라고 사람들은 멋대로 칭송했다. 연단 위에 선 아우렐리우스는 흘끗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발표해달라고 부탁한 것이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공을 돌리다니...'
귀르겐은 광증에 빠져 오히려 아이를 죽이려 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오히려 자신의 공을 돌려서 죽음을 명예롭게 지켜주다니, 보통 배포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이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추도를 하고 있었다. 은색 속눈썹이 우수에 젖어서 길게 늘어졌고, 그 위에서 한낮의 햇빛이 무지개처럼 부서졌다.
"그의 순국으로 천갈궁의 자리는 공석이 되고 말았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아우렐리우스의 목소리는 엄숙했다. 그의 손짓을 따라 아이가 연단 위로 걸어올라왔다. 연단 위에는 진홍색 천으로 감싼 천갈궁이 놓여 있었다.
"이 청년은 천갈궁과 함께 마지막까지 맞서 싸운 동지요! 싸움의 마지막에 천갈궁은 그를 자신의 후인으로 인정했소! 앞으로는..."
아이는 성큼 걸어가 천갈궁의 손잡이에 손을 가까이했다. 수만 개의 시선이 그 흰 손으로 집중되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와 초조한 눈 깜빡임이 광장 가득 차올랐다. 성도 8궁, 베루스의 유골로 만든 무기들은, 자격을 갖지 못한 자가 손을 대면 주인을 불태워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나테마의 제단에 자격 없는 자가 올라설 때 일어나는 불꽃, 나하트를 태워죽인 그 불꽃과 같은 것이었다.
정말로 저, 갓 어린아이티를 벗은 청년이 천갈궁을 휘두를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이유는 그것이었다. 누군가는 신음을 흘렸고 누군가는 질투에 찬 눈빛을 보냈다. 그 무수한 시선을 뚫고 아이는 팔을 내뻗어서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천을 끌러낼 때까지도, 불길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탄성이 쏟아졌다. 드러난 천갈궁은 전갈의 꼬리를 잘라 만든 듯 그 끝이 예리했다. 아이는 검을 짧게 휘둘렀다. 천갈궁은 아이의 손끝을 따라 유려한 선을 그렸고, 그 때까지도 불꽃은 솟아오르지 않았다. 이윽고, 그 검끝에서 새까만 무언가가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그림자였다.
"저건!"
네이슨이 탄성을 내질렀다. 귀르겐과 싸우며 그의 경험을 엿본 아이는, 지난 이틀간 림과 함꼐 환상 속에서 수백 번이나 귀르겐과 검을 맞대며 수련했다. 그 덕분에 벌써 천갈궁의 능력, 그림자를 부리는 능력을 완숙하게 익힌 상태였다. 검 끝에서 풀려나온 그림자는 뭉글거리더니, 생전의 귀르겐의 모습을 취했다. 그 강인한 턱을 응시하면서, 아이는 천갈궁을 들어 의례를 취했다.
"오오..."
네이슨은 그 의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알려준 의례였다. 진정으로 존중할 만한 무인을 만났을 때에 아탕칼리의 성기사들이 행하는 의식이었다. 의례를 받은 귀르겐의 그림자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형체 없는 연기가 되어 천갈궁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의 폭풍이 몰아쳤다. 손뼉을 두드리는 소리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빵조각을 노리고 모였던 철새들이 화들짝 놀라 날아올랐다. 아우렐리우스는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선포했다.
"기나센에서 이 먼 곳까지 방문해온 나의 친우, 아이 우르드가, 이 시간부로 천갈궁의 영광스러운 주인이 되었음을 선포하오!"
성인의 말은 그의 신분을 보증해주었다. 천갈궁은 원래 반쯤 아탕칼리의 소유물이나 다름없는 것이었고, 그의 인증을 받는다는 것은 아이가 이제 정말로 성도 8궁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새롭게 탄생한 영웅에게 박수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소음 속에서, 아이는 무릎을 꿇은 채로 성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우렐리우스는 그 이마에 월계수와 허브를 섞은 기름을 부어주며, 조용히 그 눈썹을 바라보았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황금빛의 기름이 길고 긴 눈썹의 숲을 벗어나지 못하고, 방울져서 매달려 있었다. 먼발치의 군중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광경이었다. 어째서일까, 아우렐리우스는 그 기름이 눈물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
랭 교구 한 가운데에는 섬이 있다.
그 섬 위에는 대성당이 있었다. 다음 날, 아우렐리우스의 부름을 받아 그 성당에 찾아온 아이는 잠시 발을 멈추고 성당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연홍색 벽돌로 지은 성당 위에 흰 새들이 둘러앉아 볕을 쬐고 있었다. 아이는 저 새들이 어떤 새들인지 알았다. 봄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새들이었고, 그래서 겨울마다 무리지어 봄인 곳으로, 이 땅의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새들이었다. 먼 비행을 대비해 새들의 가슴은 통통하게 부풀어올라 있었고, 털마다 기름이 흘러서 햇빛이 어지럽게 부서졌다.
'왜 그러느냐, 어린 순례자야?'
림이 말을 걸어올 때까지 아이는 그 새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겨울이 오면 겨울을 피해 달아나는 그 새들의 자유로움이 부러웠던 걸까, 고개를 저어 생각을 몰아낸 아이는 곧 대성당 속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왔군."
성당 안에서는 아우렐리우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색유리를 통과한 엷은 빛이 바닥을 천연색으로 물들이고 있어서, 함부로 발을 들이밀기 어려웠다. 아우렐리우스는 머뭇대는 아이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무언가를 매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가까이 와서 보게."
그의 뒷모습을 보며 아이는 침을 삼켰다. 아우렐리우스는, 굉장히 오랫동안, 자신에게 호의를 보여왔다. 마레가 살아남은 것도, 아셀라이가 파견되었던 것도 그의 안배임을 아이는 알았다. 얼마 전에는 귀중한 약을 자신을 위해 베풀어주기까지 했다. 그래서 오늘의 이 면담을 아이는 거부할 수 없었다. 아이는 천천히 차가운 돌바닥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름답지 않나?"
아우렐리우스가 바라보고 있던 것은, 가슴이 뻥 뚫린 성상이었다. 먼 옛날, 십자군에서 돌아온 아우렐리우스가 검을 꽂아넣었던 그 성상. 가슴을 꿰뚫렸는데도, 성상은 말 없이 미소를 짓고 팔을 벌려 무언가를 끌어안으려 하고 있었다.
"이 가슴에 왜 구멍이 뚫려 있는지, 자네는 아마 모르겠지."
그 성상을 매만지며 아우렐리우스는 조용히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세상에서 마레와 자신, 그리고 이제 아이만이 알게 될 비밀이었다.
"그건 백 년 전의 일이었다네..."
아우렐리우스는 남의 일을 털어놓듯이 자신의 회오를 털어놓았다. 마지막으로 이 성상에 박혀 있던 검에 대해서 얘기해줄 때,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레가, 아니, 그 사람이 그걸 뽑았다는 이야기인가요?"
원한과 증오에서 벗어나서 진실로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 검을 뽑아낼 수 있으리라고. 아탕칼리는 성인의 꿈에서 말했다고 했다. 아우렐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원래부터 그 아이를 주목하고 있었다네."
그는 오랜만에 만난 진짜 학자였다. 무언가를 긍휼히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마음을 펼쳐낼 행동력과 재주를 갖추었다. 아마 그대로 마술을 배웠더라면, 6위계에 오르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이 쉬웠으리라.
"그리고 어쩌면 말일세, 7위계에 다다랐을지도 모르지."
아우렐리우스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지금 마레에게도 들려주지 않은 진실을 들려주고 있었다. 아이는 아우렐리우스가 어떤 저의를 품고 있는지 몰라 입을 벌렸다.
"그렇다면..."
"그래서 일부러 수도원에서 멀리 떨어지도록 만들었지."
그 말과 함께 아우렐리우스는 한 발을 내딛었다. 대성당의 색유리를 통과한 빛이 아우렐리우스의 뺨을 밝게 물들였다. 그의 뺨에선 난해한 문양과 광배가 빛나고 있었다.
"왜 그랬습니까?"
마레는 이미 반쯤 마술사의 길을 접은 상태였다. 그는 아마 평생 4위계에 머무를 것이고, 학자로서 살아갈 것이었다. 아우렐리우스는 무겁게 말했다.
"그래야만 했지. 그래야만 그 아이가 그 검을 뽑아낼 수 있었을 테니 말일세."
7위계의 마술사가 되었더라면 오히려 저 검을 뽑지 못했을 것이라고. 아우렐리우스는 말했다. 그 자신도 6위계의 마술사이면서 그는 오히려 마술사를 부정하고 있던 것이었다. 아이의 경악을 뒤로 하고 그는 성당 안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마술, 마술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를 깊이 고민해본 적이 있나. 아마도 없겠지. 백정이 칼을 쓰는 것처럼, 목수가 망치를 쓰는 것처럼 마술사들은 마술을 쓰고 있으니 말일세. 하지만 그것은 말이지, 아주 그릇된 것이야."
"당신이 생각하는 마술은 뭡니까?"
"도구화된 신앙. 그뿐일세."
그는 멈춰섰다. 그는 깊은 눈으로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신앙은, 그것이 신에 대한 신앙이든, 가족에 대한 신앙이든, 무엇에 대한 신앙인가와 관계없이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일세. 그런데 그것을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학대하고,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기에 이 세계는 목적을 잃어버렸다네. 외신들, 저 절망한 신들의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공세는 그 무목적성에 대한 앙갚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네."
아이는 입을 다문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제국은 그 도구화된 신앙이라는 반석 위에 잘못 세워진 교회일세. 말해보게. 내가 그 반석 위에 한 장의 돌을 더 얹어야 했겠는가?"
아우렐리우스는 이어 선언했다.
"마레 델피에로, 그 아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마술사가 되거나, 또는 가장 위대한 학자가 될 수 있었다네. 나는 마술사는 저 검을 뽑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게 내 결정의 이유일세."
아이는 귀르겐의 섬에 가기 전 보았던 마레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심문관으로 오지를 헤맬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그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대안을 만들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아이가 상념에 젖어 있을 때, 아우렐리우스는 더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그리고 또 이유가 있다면, 그래, 7위계의 마술사를 또 만들 수는 없지 않겠나."
그 말은 아이를 떠보는 듯했다. 그리고 상념에 젖어 있던 아이는 그 떠보기에 당했다. 태연하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의 말은, 7위계의 마술사가 더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아이의 눈에서 자신이 바라던 반응을 찾아낸 아우렐리우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세계를 멸망시킬 인자를, 하나 더 늘릴 수는 없으니 말일세."
십자군에서 돌아온 아우렐리우스가, 이 성당의 성상에 검을 꽂아넣으며 보았던 계시. 마레에게 들려준 계시의 내용은 그게 다 아니었다. 그 때, 아우렐리우스는 세계의 멸망에 대한 계시도 들었던 것이었다.
"그, 그 말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는 손에 쥐고 있던 천갈궁을 떨어뜨렸다. 돌바닥에 부딪히며 천갈궁은 우렁찬 소리를 냈다. 사실상의 긍정이었다. 자신이 원하던 반응을 찾아낸 아우렐리우스는, 크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다시 소개하지. 이 늙은이는 아탕칼리의 성인이자, 자네가 친애하는 마레 델피에로의 대부이자,"
마지막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 잘못 세워진 제국을 치우고, 올바른 집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 어포슬의 수장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