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65화 (165/279)

5권 후일담 #2. 빈

북서 자치령의 용맥.

아직도 아이와 악룡 우스무가 싸웠던 흔적이 어지럽게 남아 있는 그 땅 한 가운데에는 거대한 도박장이 자리잡아 요사스럽게 번쩍이는 중이었다. 드미트리는 바짝 마른 입술을 매만지며 점점 가까워지는 도박장을 바라보았다. 눈을 찡그렸다. 그 입구에 세워진 소니아 아바키렌의 흉상이 전에 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여기서 내려주시지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하자 레버넌트는 두말없이 드미트리를 내어주었다. 기나센에서 패배한 그녀가 왜 여기에 있는가, 단 한 가지의 목적을 위해서였다. 자신의 목숨을 써서 마지막 반전을 꾀하는 것이 그녀의 목적이었다. 짤랑, 드미트리가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서자 지배인과 하인들이 앞다투어 머리를 조아렸다. 구레나룻이 풍성한 지배인은 두 손을 비비며 드미트리에게 말했다.

"아이고, 오, 오셨습니까. 그럼 저기 들어앉은 부랑아 좀 어떻게 처리해주십시오."

"그 사람이 온 게 사흘 전이 맞습니까?"

"예에에, 사흘 전부터 여기 들어앉아서, 그냥 온갖 강짜를 죄다 부리고 돈은 한 푼도 안 내는데 도저히 쫓아낼 수가 없습니다요."

예상대로군. 드미트리는 입술을 씹으며 그 불청객이 들어앉아 있는 귀빈실의 문을 열었다. 기름을 바른 경첩은 부드럽게 고개를 젖혀서 안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후드를 뒤집어쓴 남성이었다. 두 발을 꼬고 무례하게 책상 위에 올려놓은 구두는 반질반질해서 그의 사자 갈기 같은 적발이 그대로 비쳤다. 한 손에는 카드를 쥐고 한 손으론 접대부의 가슴을 주무르던 그 청년은, 드미트리를 보고도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어이, 네가 여기 대빵이냐?"

그의 말엔 남부 억양이 심하게 묻어 있었다. 드미트리는 그 무례한 언행에도 빙긋 웃으며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예. 이 지점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드미트리 즈다예비치라고 합니다. 귀빈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저 멀리에서부터 달려왔습니다."

그 사자갈기의 청년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느지막하게 다리를 책상에서 내려놓았다. 하인들이 달려들어 얼른 그의 발자국이 묻은 유리 책상을 닦아냈다. 쩍 벌리고 앉은 그는 치익, 담뱃불에 불을 붙였다.

"귀빈은 지랄. 나는 그냥 지나가는 떠돌이인데, 여기에 좆같은 놈이 있다는 말을 듣고 처리하러 왔다."

"실례지만, 무엇 말씀입니까?"

"데몬스폰. 여기 지하에서 데몬스폰을 기르고 있다며?"

후우욱, 연기를 내뿜은 그는 주섬주섬 루덴이 잔뜩 든 금화자루를 내려놓았다. 언뜻 보아도 1만 루덴은 넘을 거액이었지만, 조디악에게는 푼돈일 뿐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자갈기는 무례한 요구를 계속했다.

"결투다. 그 놈과 결투로 내기도박을 하고 싶은데. 배당은 대충 1억대 1이면 되겠지."

"1억대 1, 말씀입니까?"

그 말뜻을 파악하지 못한 주변 사람들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하지만 사자갈기는 피식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응. 내가 지면 1억배로 물어주지."

"이, 무슨... 총지배인님! 당장 이 미치광이를 추방해주십시오!"

드미트리의 호위로 붙어 있을 암살자들을 믿고 지배인은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여전히 가면 같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죄송하지만, 그래서는 내기 성립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엉?"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 사자갈기에게 드미트리는 조용히 선언했다

"사자궁 네메아의 주인, 빌헬름 경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말을 듣자 드디어 사자갈기의 표정에도 동요가 생기기 시작했다. 빌헬름 흐레스베인. 그는 성도 8궁 중 수위를 다투는 무구인 사자궁 네메아의 주인이자,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로 악마를 처단하러 방랑하는 악마사냥꾼이었다. 그의 말대로, 이 도박장의 가장 깊은 지하에는 옅게나마 데몬스폰의 피를 이은 괴물이 사슬에 묶여 있었다. 조디악은 의도적으로 그 사실을 퍼뜨려왔다. 악마와 관련된 것이라면 물불 안가리고 덤벼드는 이 방랑자를 낚기 위해서였다.

"날 아나? 어떻게?"

정체를 들킨 빌헬름 흐레스베인은 후드를 내리고 표정을 바꾸었다. 지배인은 그제서야 이 자가 방금 전까지 방탕함을 연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흠칫 떨었다. 그의 어조는 어느새 북부 억양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자는 신분을 들켜서는 안 되는 몸이었다. 악마사냥꾼, 이 세상의 모든 악마를 멸절하겠노라고 맹세한 자, 빌헬름 흐레스베인. 그는 강철 같은 증오심으로 어떤 사연을 품은 악마든 죽여왔다. 아탕칼리의 기사로 서임받은 귀르겐도 그 적개심의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한 조각 나룻배에 몸을 맡기고 귀르겐이 만월에 미쳐 날뛸 때를 틈타 덮친 적이 있으며, 그 때문에 아탕칼리에게 수배받은 몸이었다.

"대답 여하에 따라 이 방에 있는 모든 버러지들의 생사가 결정된다. 말해라."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스윽 등으로 손을 가져갔다. 홀연히 그의 등에서 짐승의 머리를 닮은 거대한 양손도끼가 치솟아올랐다. 그 양손도끼의 이름은 사자궁 네메아. 저건 악마를 죽이는데 있어서만큼은 어떤 무기도 따라올 수 없는 치명적인 효력을 가진 도끼였다. 모든 데몬스폰은 재생력을 갖는데, 저 도끼는 그 재생력을 오히려 독으로 바꾸어 썩어들어가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 도끼에 몸을 베인 악마는 상처가 불타올라 고통 속에서 죽어가기 마련이었다.

"히, 히이이익!"

지배인, 그리고 방금 전까지 빌헬름이 가슴을 주무르던 접대부는 놀라서 방 끝으로 도망쳤다. 덜걱,덜걱, 절박하게 문고리를 잡아챈다. 하지만 사자궁이 눈짓하자 문은 저절로 닫혀서 아무리 흔들어도 열리지 않았다. 얼굴을 들키면 안 되는 몸인 그는, 그의 정체를 알게 된 이 방의 모두를 죽일 생각인 듯싶었다.

"살, 살려주십시오, 저, 저는, 그냥, 그냥..."

그러나 드미트리는 달랐다. 벌벌 떨며 오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것까지도 그의 계획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야 당연히 알지요. 당신을 이 곳에 모신 게 저니까 말입니다."

"무슨 뜻이지?"

"이래 봬도 저는 파계 율사입니다. 이들의 입이 열릴까 두려우시다면, 제가 하나하나 서약을 받아서 절대로 빌헬름 경의 신상이 누출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본론을 말해라. 내가 미끼에 꼬인 붕어 신세다, 이 소린가?"

사납게 말하는 빌헬름에게 드미트리는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꼭 처리해주셨으면 하는 악마의 빌어먹을 새끼, 아니, 악마의 자식이 있습니다. 그 의뢰를 드리고자 당신을 모시려 이런 방법을 택한 것이지요."

심유한 눈빛으로 드미트리의 저의를 파악하려던 사자궁은 나지막하게 물었다.

"이런 복잡한 방법을 써서, 꼭 나를 불러내야 할 정도로 빌어먹을 새끼인가?"

"예. 당신에게 꼭 의뢰를 드리고자 이렇게 사례도 미리 준비해두었습니다."

빌헬름 흐레스베인, 그는 다른 성도 8궁들과 다르게 소속된 세력도 없고, 독특한 신념을 가진 자였다. 그래서 조디악은 성도 8궁을 포섭하려는 계획을 세울 때 항상 우선적으로 그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이 도박장의 지하에 데몬스폰이 있다는 소문, 그것은 조디악이 사자궁과 접선하기 위해 깔아둔 수백 가지 안배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물을 치듯이 뿌려놓은 미끼에 드디어 사자궁이 걸려든 것이었다. 그 노고에 걸맞게 조디악은 이미 그가 거절할 수 없는 사례를 준비해두었다. 드미트리가 꺼낸 물건을 본 사자궁의 눈이 동요로 떨었다.

"이건?"

"삼백년 전, 십자군 유적에서 발굴된 물건입니다. 피에 정순한 기운을 불어넣어 정수를 맑게 해주는 능력이 있지요. 아마 여동생 분의 지병의 진전을 늦추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내 놔!"

다음 순간, 빌헬름은 이미 드미트리의 팔목을 잡아 꺾고 있었다. 그 팔찌는 빌헬름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왔던 것이었다. 먼발치에서 보더라도 모를 리가 없었다. 신음을 흘리는 드미트리에게서 팔찌를 앗아간 빌헬름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이건 모조품이잖나. 죽고 싶나?"

"이렇게 나설 것을 예측했으니 모조품부터 보여드린 것이지요."

드미트리는 재빨리 내기를 걸고 자신이 그 팔찌를 갖고 있음을 선언했다. 진실을 말하도록 강제하는 그 능력은 이럴 때 아주 유용했다.

"우리의 보잘것없는 의뢰를 받아들여서, 한 마리의 버릇없는 악마를 쳐죽여 주십시오. 그게 완수되었을 때 이 물건으로 값을 지불하겠습니다."

드미트리의 하얀 팔목을 붙잡은 빌헬름은 잠시동안 그 제안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를 제외한 모든 성도 8궁은, 조디악이라는 부류를 굉장히 증오하고 미워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의 도덕률과 조금 다른 도덕률을 가진 사람이었다. 악마를 쳐 죽인다, 원하던 물건을 받는다. 이들이 제시하는 의뢰의 내용은 자신에게 더없이 부합해 보였다.

"덧붙일 조건은? 그렇게 내 편의에 좋은 계약을 해 준단 말인가, 천하의 수전노 개새끼들이?"

숨기고 있는 조건이 있으면 꺼내라는 말. 동시에 반쯤 계약을 승낙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드미트리는 미소를 지으며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졌다.

"영민하시군요. 한 가지만 맹세해주시길 바랍니다."

그 손에는 앞뒤가 같은 동전이 들려 있었다. 그가 구속력을 가진 계약을 할 때 사용하는 동전이었다. 그 맹세를 어기게 되면, 심장이 터져 죽는 것은 사자궁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빌헬름에게 드미트리는 말했다.

"그 악마가 어떤 대상인지 들어도, 절대로 의뢰를 포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조디악, 그들은 입수한 아이의 피와 모발로 그가 데몬스폰의 피를 이어받았음을 알아냈다. 그래서 사자궁을 완벽하게 꾀어낼 수 있는, 이런 제안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자궁 빌헬름은 운명의 예지에서 벗어난 자였다. 이것은 륜도 알아챌 수 없는 내용이라는 뜻이었다. 빌헬름은 천천히 그 제안을 곱씹었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맹세하지."

"계약은 성립되었습니다."

쩡, 공중에 튕긴 동전이 천장의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어지럽게 빛났다.

*

북서 자치령 도박장의 뒤편, 어두컴컴한 호수.

도박장의 불이 꺼지고 유령처럼 빠져나온 드미트리는 그 캄캄한 호수 앞에 섰다. 얼마 전 아수라장을 겪었던 이 호수는 물이 탁하고 어둡기 그지없어서 안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 앞에 선 드미트리는 심호흡을 하고, 호수로 몸을 내던졌다.

첨벙!

깊은 물소리를 들으며 드미트리는 호수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물이 잔뜩 밀려들어와 눈을 질끈 감은 그녀는, 밑으로 자맥질하며 눈을 부릅떴다. 기포 방울 몇이 뽀르르 위로 솟아났다. 그 거품 뒤로 웅장한 모습이 드러났다.

그 호수 밑에는, 정말 예상할 수 없는 물건이 숨어 있었다. 그건 거인이었다. 수십 층의 건물이나 절벽보다도 더욱 거대한 황금 몸체의 거인, 사소필렌의 지고의 성물, 컨쿼러였다.

이 용맥에서 컨쿼러는 신기를 빨아들이며 담금질되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늠름하군.'

볼을 가득 부풀려 헤엄치면서 드미트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컨쿼러야말로 조디악이 북서 자치령을 먹어치우려 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이 황금 거인은, 사소필렌이 위기에 처했을 때 사용하기 위해 마련된 최고의 성물이었다. 이제는 나올 수도 없는 사소필렌의 7위계의 마술사가 직접 혼의 일부를 바쳐 연성해낸 전략병기다. 조디악은 누대에 걸쳐 이것을 빼돌려 가짜와 바꿔쳤고, 보관할 장소를 필요로 했다. 아지프와 카나기가 손댈수 없는 북서 자치령의 용맥, 이 곳은 그것을 담금질하고 또 숨기는데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헤엄쳐서 그 안으로 들어간 드미트리는 물을 뚝뚝 흘리며 컨쿼러의 심장부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둥글게 융기된 흉곽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열려 있었다. 마술이 내부를 휘감고 있어서, 해저에 있음에도 공기가 통했고 숨을 쉴 수 있었다.

그 끝에 있는 것은 소니아였다. 소니아는 황금을 바른 스테이크를 먹으며 입가에서 피를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그 앞에 엎드려 고했다.

"계획의 첫 단추는, 성공했습니다."

기나센에서 패배한 그들은 곧 상대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면밀히 분석했다. 예지, 또는 그에 준하는 불완전한 독심. 두 가지로 결론이 났고, 자신들의 주무기로 공격당하는 입장이 된 조디악은 한참이나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자신들의 약점이 아나테마이듯이, 상대의 약점도 아나테마일 것이란 결론을 내린 조디악은 온 힘을 기울여 성좌 네메아를 포섭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소니아는 괴물처럼 울부짖으며 스테이크를 물어뜯었다. 최근, 피를 엄청나게 쓴 소니아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인간의 말을 거의 꺼내지 못했다. 드미트리는 무릎꿇고 기어서 소니아의 앞에 엎드렸다. 드미트리는 희미하게 말했다.

"이미, 성좌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상대의 예지는 무력화됐을 겁니다."

그럼 남은 것은 불완전한 독심술.

그에 대한 대비로 드미트리는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정했다.

진짜 무기인 이 컨쿼러는 어둠 속에 숨기고, 자신은 기억을 조작당해 작센과 성좌가 주무기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다. 진심으로 작센의 용병들과 성좌가 조디악의 마지막 수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므로, 만약 상대가 독심술로 자신의 계획을 읽어주면 상대를 올가미에 걸리게 할 수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것을 위해 드미트리는 이제부터 조디악의 표면상의 수좌가 되어서, 소니아에게 기억을 삭제당하고, 작센에서 전쟁을 지휘해야만 했다. 뇌를 내맡겨서 기억을 삭제당하겠다는 결정은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죽을 확률이 농후했고, 살더라도 후유증이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소니아에게 앞서서 그 계획을 제시했다. 그녀의 결심은 그 정도로 단단했다.

소니아의 손톱이 드미트리의 머리로 다가왔다. 드미트리는 이를 악물었다. 기억 전체를 잃어버리더라도 키레넨 민족의 부흥, 그것만큼은 잃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크아아아아악!"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면서, 드미트리는 마음속으로 계속 한 글자를 되뇌었다. 그 한 글자가 기억을 말소당한 자신의 새로운 영혼이 되어주길 바랬다. 그건 빈이라는 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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