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불면증 ( 4 )
상의를 벗어던진 채로 집에서 빠져나와서 아이는 한참이나 밤거리를 걸었다. 구석진 사거리에 도착해서야 추위를 느꼈다. 머리가 차가워지며 가벼운 자기혐오가 찾아왔다. 화낼 이유가 있었나. 천천히 걸어서 그늘진 돌담 아래 걸터앉았다. 거리에는 인적이 없었다.
"어이, 거기! 그 깨진 곳부터 갈아엎으라고!"
인부 몇이 마차가 지나다니도록 두껍게 지어진 다리를 보수하고 있을 뿐이었다.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 아래서 아이는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부지런히 석재를 나르거나, 무언가를 펴바르거나, 불을 피워서 철통을 달구고 있었는데, 이 추위에도 불구하고 다들 얇은 옷을 입거나 상의를 벗고 있었다. 아마도 노동의 열기 때문에 그들만은 더운 듯했다.
"어이! 젊은 놈! 어디서 농땡이 부리고 있나!"
양철 통을 나르던 사내 한 명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이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아마도 차림새를 보고 아이를 인부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는 짐짓 험상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땀을 많이 흘린 모양인지, 길게 자란 수염이 젖어서 목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 어린 놈의 자식이 벌써부터 꾀나 부리고 말이야. 분명히 아까는 최선을 다하고 농땡이 안 피겠다고 하지 않았나? 엉?"
아까는 본 적도 없을 텐데. 하지만 아이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자기혐오 때문일까, 어른의 잔소리가 이상하게 달게 느껴졌다. 그의 손에 이끌려 다리로 걸어간 아이는 곧 커다란 솔을 받았다. 새단장한 다리에 흰색 안료를 발라서 말끔하게 만드는 것이 주어진 임무였다.
"음."
양철통에서는 흰 안료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화학적인 냄새가 찌르는 듯 얼굴을 덮쳐와서 아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찰박, 솔을 흰 물감에 깊게 적시고 난간을 칠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잘 칠해지지 않았다. 아이는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지금 나한테 이런 잡일을 하라는 거냐?"
"당신 때문에 내가 여기 있잖아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천갈궁으로 선주를 불러서 일을 맡긴 것이었다. 선주는 툴툴대면서도 솔을 받아서 일을 도와주었다. 그 일은, 놀랍게도, 재미있었다. 마침내 자신이 맡은 난간이 전부 하얗게 물들어서 주변의 풍광과 하나된 것처럼 녹아들었을 때, 아이는 자그마한 뿌듯함을 느꼈다. 선주를 다시 천갈궁에 갈무리하고, 아이는 난간 아래로 흘러가는 겨울 강을 들여다보았다. 시원한 물소리가 귀를 씻어내리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휴식시간이 찾아왔다. 물감통을 데우던 불에 감자나 마른 생선 따위를 굽기 시작했고, 얼떨결에 끼어든 아이에게도 한 접시가 돌아왔다. 연노랑 속살이 포슬포슬한 겨울감자였다.
"괜찮습니다."
또 구역질이 날 게 뻔해서 아이는 거절했다. 그런데 수염난 인부는 막무가내였다. 기어이 아이의 손에 접시를 들려주었고, 망설이던 아이는 감자를 한 입 깨물었다. 입안 가득 뜨거움과 고소함이 퍼져갔다. 구역질은 찾아오지 않았다. 게눈감추듯이 감자를 전부 먹어치웠다. 인부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며칠은 굶은 것처럼 먹는구만. 더 줄까?"
"아뇨, 됐습니다."
"튕기기는."
그러면서 이번에 그가 던져준 것은 담배였다. 까맣게 말라죽은 잎이 거칠게 비죽비죽 돋아 있는 싸구려였다. 쭈그려앉아 피웠더니 굉장히 매운 냄새가 났다. 콜록대며 담배를 피는 아이의 옆에 앉아서, 껍질째로 감자를 우적우적 먹던 인부는 말했다.
"그만 속썩이고 일찍 들어가라."
"예?"
"임마. 이 아저씨가 너 같은 새끼들 한두번 본 줄 알아. 별것도 아닌 걸로 죽상쓰고 무게잡고 앉아서 농땡이치고 있으면 무조건 집 나온 어린 놈이지."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는 매운 연기를 연신 뿜어대며 이런저런 조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하는 말인데도, 그 조언에는 은근히 걱정이 묻어 있는 듯했다. 내용이야 어찌되었든 그 잔정은 싸구려 연기를 타고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어쩌면 륜도 그런 생각으로 다가온 것 아니었을까, 아이는 검지로 담뱃재를 튕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 다리는 왜 보수하고 있는 겁니까?"
한참이나 얘기를 나눈 뒤 아이는 툭 물었다.
"못 들었나? 어디서 귀빈이 온다는 것 같던데. 통령이 바뀌고 오는 첫 손님이니까 잘 모셔야 된다고 여기저기서 난리도 아니야."
"귀빈?"
그리고 그 때, 멀리서 마차가 어둠을 뚫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화려한 마차였다. 어수선하게 모여 있던 인부들은 황급히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아이도 엉거주춤 물러서 있었다.
"어."
그리고 문제점을 발견했다. 양철통 하나가 진로를 막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두워서 마부가 확인하지 못한 듯, 마차는 다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이는 재빨리 뛰어나가 양철통을 끌어안고 옆으로 뛰었다. 보통 사람은 인식도 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히히힝, 놀란 말이 상체를 일으키며 멈춰서고, 마차는 출렁거리며 다리 위에 섰다. 양철통을 옆에 내려다놓은 아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충돌은 겨우 피할 수 있었다. 벌컥, 그와 동시에 마차의 옆문이 열렸다.
"아이 우르드 씨?"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 반응을 보고 확신했는지,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아이의 손을 붙잡고 마차 안으로 끌어들였다.
"맞군요."
그건 호노레였다. 단테와 다나를 저택에 남긴 채로, 밤중에 기나센을 돌아다니다가 아이를 발견한 것이었다. 객석에는 호노레 혼자였다. 주변의 낌새를 둘러본 호노레는, 관록으로 뭔가 이상함을 깨닫고 얼른 아이에게 들어올 것을 청했다.
"말해봐요. 왜 여기에, 그, 웃옷도 벗고 막일을 하고 계셨나요?"
호노레는 반쯤은 걱정하듯이, 반쯤은 추궁하듯이 물었다. 아이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호노레는 놀리듯이 물었다.
"혹시 바람이라도 피웠나요? 그러다가 집에서 쫓겨났다거나?"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에는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도박하다가 쫓겨났나요? 사기라도 당했나요? 호노레는 놀리듯이 계속 터무니없는 질문을 던졌다. 대답하지 않으면 더욱 더 터무니없는 내용인 걸로 결론을 내려버리겠다는 협박이었다. 견디다 못한 아이는 한숨을 내쉬고 축약한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천갈궁의 힘을 끌어내려고 수련을 하고 있었는데, 그 수련 때문에 당신의 약혼자랑 갈등이 생겼다, 이 말인 거군요?"
결국 요약하자면 그랬다. 멈춘 마차에서 골똘히 생각하더니 호노레는 말했다.
"그럼 일단 제가 머무는 곳으로 갈까요?"
"예?"
"저도 자주 싸워봐서 아는데, 그럴 때에는 충분히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을 갖는 게 좋답니다."
빙그레 웃으며 호노레는 제의했다. 사실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경쟁자로 고생하는 자신의 제자에게 조금 도움을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이는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의 경험에서부터, 그 방에 더 머물러서 좋을 것이 없겠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 끄덕임을 보고 미소를 지은 호노레는 마차를 다시 출발시키고 물었다.
"그런데 대체 그 검에 깃든 영혼이라는 게, 얼마나 무섭길래 남한테 보여주지도 못할 정도인 건가요?"
"아주 위험합니다."
"저한테만 살짝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아이는 난색을 표했다. 호노레는 라달라리아의 마술사였고, 선주는 마술사에 대한 끝없는 증오를 간직한 사람이었다. 함부로 보여주었다가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몰랐다. 하지만 호노레는 그 완강한 거절 때문에 오히려 호기심이 더 동했는지 끈질기게 아이를 채근했다.
"그럼 저쪽 끝까지 물러나서 기다리세요."
결국 진 것은 아이였다. 충분히 경고한 뒤에, 마차의 끝까지 엉덩이를 옮겨 앉고 아이는 천갈궁을 뽑아들었다. 검날의 끝에 그림자가 몽글거리며 모이기 시작하더니, 곧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차가운 인상의 그림자가 형성되었다.
"와, 정말 싸가지없게 생기긴 했네요?"
호노레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말했다. 막 생겨난 선주는 그 말을 듣고 분노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호노레의 얼굴을 보자마자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블뢰유?"
"응?"
호노레는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선주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귀신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호노레에게 맹렬하게 덮쳐들었다.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냐?"
그리고 선주가 호노레에게 다가가기 직전, 아이는 황급히 천갈궁을 거둬들였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호노레는 당황해서 두 팔로 얼굴을 가린 채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
텅 빈 아이의 방.
륜은 무릎을 꿇은 채로 망연히 앉아 있었다. 아이가 자신에게 화를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상냥하고 착한 사람이 자신에게 화를 내는 상상을 륜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충격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결국 저질러버린 모양이군.'
그렇게 한참이나 앉아 있는 륜에게 다가온 것은 림이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륜은 무기력하게 어지러운 방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림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부터 전에 없이 초조해하고 있다고는 느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너는 그렇게도 너와 서약한 사람을 믿지 못하고 있었나?'
"그렇지만... 위협이,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서는..."
'아무것도 안 하지 않았다.'
그리고 림은 속사정을 들려주었다. 귀르겐과의 싸움 이후로 아이가 누구보다도 큰 부담감을 지고 있었으며, 강해지기 위해서 두려워하던 선주와 손을 잡으려고 했다는 것을. 륜의 속눈썹이 떨렸다.
"그럼, 왜 저한테 그런 말을..."
'아마도 염려해서겠지. 내 옛 사도는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야. 너에게 어떤 식으로든 해를 끼치지 않을까, 나름대로 염려해서 이 방에 틀어박혀 있었을 터다.'
륜은 황망하게 아수라장이 된 방을 들여다보았다. 피가 묻은 나무토막과 부서진 귀신의 얼굴이 널브러진 방이었다. 스스로 이 방에 갇혀서 그의 약혼자는 무거운 짐을 자기 혼자 걸머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 나는 그런 줄 전혀 모르고..."
'그대는 오직 다가오는 위협을 막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했지. 그 명분에는 당위가 있다고 나 역시 생각한다. 그래서 딱히 제지하지 않았지. 하지만 그 초조함이 너무 앞서서, 내 사도를 그대의 검이나 도구쯤으로 사용하려 한다면, 나는 좌시할 수 없다.'
륜은 고개를 수그렸다. 이 방에서, 그의 약혼자는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서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일주일을 보냈다고 했다. 그럼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그를 더 몰아붙이는 게 아니라 평안과 위로를 주는 것 아니었을까. 그런 후회가 밀려들어왔다.
*
"우선 여기서 씻고 옷 좀 갈아입어요."
호노레 일행이 머무는 저택. 호노레는 이 뜻밖의 손님을 자신의 일행에게 소개시켜주기 앞서서, 커다란 목욕탕에 밀어넣었다.
"당신의 연인이 당신을 다시 보기를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모르죠? 그런데 이런 꼴로 나서서야 되겠어요? 빨리 들어가서 말끔하게 씻고 단장하세요."
그게 호노레가 건넨 말이었다. 당신의 연인? 아이는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을 이해하지 못했다가, 곧 다나를 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노레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닫았다. 욕탕은 스무 사람이라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화려했다. 아이는 별수없이 그 말대로 뜨거운 욕탕에 들어가 몸을 씻기 시작했다.
"나와보세요."
폐인 생활로 묵은 때를 씻어내며 아이는 중얼거렸다. 잠시 후, 벽에 걸어놓은 천갈궁에서 그림자가 흘러나와 선주의 모습을 이루었다. 사라지기 직전과 마찬가지로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아이는 물었다.
"당신은 한 번도 저 사람을 본 적이 없을 텐데요. 어떻게 호노레 씨를 알고 있는 거죠?"
"호노레? 아, 그 이름이 호노레인가?"
선주는 중얼거리며 아이의 옆으로 다가왔다. 욕탕에 걸터앉은 그는 무섭게 중얼거렸다.
"후손이, 아직도 이어질 줄은 몰랐군."
"예?"
"그녀는 후손이다."
천 년 전, 선주가 마술사라는 이유로 죽였던 연인.
호노레는 그 연인의 후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