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명장 ( 1 )
말먼지는 저 멀리서부터 자욱하게 솟아올랐다.
전쟁의 티끌이었다. 피, 눈바람, 뼛가루, 모두 그랬다. 말발굽이 눈 섞인 흙을 짓밟아 부옇게 일으키는 먼지는 그들 중 가장 가벼운 것이었다. 아이는 고개를 들어 그 먼지가 그리는 곡선을 바라보았다. 다시 앞을 본다. 후줄근한 병장기를 그러쥐고 어설프게 선 민병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작센에서 아이가 속한 선봉대를 지연시키기 위해 파견한 오합지졸이었다. 전장의 풍경에 섞이기에는, 그들은 저 말먼지보다도 어색했다.
부우우!
기수가 나팔을 불었다. 적을 만났다는 뜻이었다. 드디어 시작된 작센과의 전쟁에서, 아이는 선봉을 맡고 있었다.
"온다! 방패, 방패를 세워서 돌격을 막아라!"
선봉, 그 중에서도 선두였다. 적 지휘관의 메마른 비명이 그대로 들려올 정도였다. 말갈기에 닿을 정도로 몸을 바짝 숙인 아이는 천갈궁을 수평으로 곧게 뻗은 채 가속했다. 날카롭게 깎은 목책과 나무방패 앞에서 말은 멈춰섰고 상체를 크게 들었다.
"말을 노려라! 찔러 죽여!"
방패 사이에서 창이 솟아올랐다. 치렁하니 늘어진 마갑의 쇠비늘에 창이 부딪히며 어지러운 소리를 뿌렸다. 한낮의 햇빛은 쇠의 마찰 속에서 무지갯빛으로 부서졌다. 히히힝! 말의 비명이 울리고 잘린 털과 피가 흩뿌려졌다. 그러나, 이미 그 등자 위에 아이는 없었다.
"뭐야?"
말이 방어벽 앞에 도달했을 때, 이미 등자를 박차고 뛰어올라 방어진 안에 착지했기 때문이었다. 당황해서 뒤돌아선 민병들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천갈궁 파에톤, 그림으로만 보았던 그 검을 든 사내가 자신의 뒤에 있었다.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그 끝에서 그림자가 새어나와 냉혹한 인상의 사내를 그려냈다.
"덮, 덮쳐! 저 놈이다! 저 놈을 죽이면 작위와 영지를 내린다는 교지가 있었다! 덮쳐서 죽여!"
"저 놈부터 죽여라."
"그럴 생각이었어요."
다음 순간, 지휘관의 팔은 잘려서 허공을 날고 있었다. 아이가 일검으로 깨끗하게 토막친 것이었다. 고막이 터져라 비명을 내지르는 그의 가슴에 천갈궁이 파고들어 갈빗대를 찢어발겼다. 분비물이 축축하게 배어나오는 그의 바지를 짓밟으며 칼을 뽑아낼 때까지도, 민병들은 주춤댈 뿐 접근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눈 앞의 사내는 민병과 어중이떠중이들이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위명을 가진 자였다.
드디어 탄생한 기나센의 청년 성좌. 귀르겐의 정당한 후예이자 인마궁 아셀라이의 제자, 그 외에도 그를 기리는 수식어는 많았다. 저런 자와 맞서야만 하는가, 생각만 해도 탄식이 쏟아져나올 정도였다. 안 그래도 명분 없는 전쟁에 얻을 것 없이 종군하는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전설의 주인공 같은 풍모를 풍기는 아이를 직면하게 되면, 사기가 뚝뚝 떨어져나가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자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이 외침 하나에 대부분의 민병이 무기를 내던지고 엎드릴 정도였다. 오백여 명의 민병이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기나센의 선봉대를 막기 위해 설치된 이 군진에서, 이제 아이에게 반항하는 존재는 하나밖에 없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레버넌트 데미우르고스.
조디악의 병기인 레버넌트, 그 강화형인 미트라스보다도 강한 괴물. 지금까지 아이가 부숴온 다섯 개의 군진마다 도사리고 있던 괴물이었고, 작센군의 사기를 바닥까지 떨어뜨린 원흉이었다. 작센의 왕실은 조디악에게 장악당해 있었다. 기나센에서의 실패로, 평정을 잃어버린 조디악은 어떤 안배나 연출도 없이 그것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이렇게 대놓고 병력 사이에 레버넌트를 섞어넣을 정도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작센 사람들이 스스로를 꼭두각시 신세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사기가 곤두박질치는 것도 자명한 일이었다. 사나운 숫소의 상반신을 가진 데미우르고스는 엎드려서 떨고 있는 민병을 집어들었다. 졸지에 그 집채만한 팔뚝에 매달린 민병은 버둥거리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데미우르고스의 뜨뜻한 입김이 구역질나는 냄새로 얼굴 가득 몰려왔다. 데미우르고스는 민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먹어서 힘을 보충하고 아이와 싸울 생각인 듯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리고 울부짖으며 물러섰다. 어느새 유혼을 불러낸 아이가 그 팔뚝을 둥글게 도려냈기 때문이었다. 데미우르고스는 손에 쥔 민병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황망한 얼굴로 적장에게 감사를 보냈다.
"감, 감사합니다, 성좌님..."
"물러서세요!"
데미우르고스는 자신의 팔에 매달린 커다란 사슬을 무기로 사용했다. 두꺼운 사슬이 채찍처럼 바닥을 휩쓸었고, 목책과 망루가 부서지며 잔해가 흩날렸다. 그 잔해의 연기를 뚫고 주먹질이 짓쳐들어왔다. 깍지낀 손으로 내려찍는 일격이었다. 아이는 유혼으로 막아냈다. 쩡! 살과 검이 부딪힌 것인데도 엄청난 쇳소리가 터져나왔다.
"아직 자세가 서투르다. 유혼의 각을 더 예리하게 세워라."
둘의 대치를 바라보며, 선주는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다. 옆에서 팔짱을 끼고 훈수를 둘 뿐이었다. 호노레와 헤어진 날부터 선주는 이렇게 불친절한 방식으로 계속 수련을 돕고 있었다. 아이는 이를 악물고, 대치하는 와중에서도 유혼의 검날을 더욱 날카롭게 세우려 애썼다.
"흡!"
신기를 가득 그러담아 주먹을 떨쳐내고 휘둘렀다. 데미우르고스의 새까만 손마디 네 개가 동시에 베여서 피가 터져나왔고, 하얀 마디뼈가 드러났다. 데미우르고스는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아이는 유혼을 두 손으로 붙잡고 데미우르고스와의 거리를, 그리고 그 거리 사이에서 가장 예리한 각을 찾으려 애썼다.
이건가, 흔들리던 검의 초점이 잡혔다. 그러자 유혼은 검게 들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선주의 검술을 기억하고 있는 유혼이, 그와 비슷한 검세를 만나자 깊게 떨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유혼을 휘감은 신기는 검붉은 빛으로 번들거렸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데미우르고스는 굉음을 내지르며 가슴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 근육마다 울퉁불퉁하게 솟아나 있는 혈관이 폭발할 듯 부풀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벌써 몇 번이나 데미우르고스를 베어넘긴 아이는 저 동작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혈류 가속, 심장의 박동수를 일시적으로 높여서 일격의 위력을 높이는 동작이었다. 저걸 마치고 나면 데미우르고스의 속도는 순식간에 세 배 이상으로 폭증했다. 지금 베어야 해. 아이가 달려들려 할 때였다.
"뭐 하는 거냐? 각을 유지해라!"
선주의 서릿발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일부러 위기에 몰아넣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선주는 이런 무리한 명령을 거듭했다. 그러나 아이는 이를 악물고 그것을 준수했다. 얻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힘을 쥐어짜 검날에 밀어넣었다. 유혼의 꺼끌꺼끌한 손잡이 감촉이 손바닥 가득 몰려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혈류 가속을 마친 데미우르고스는 주먹을 내뻗어 아이를 덮쳐왔다. 주먹이라기보다는, 공성추를 발사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공기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시야 가득 검은 주먹이 몰려왔다. 아이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선주가 말한 그 예리한 각을 유지한 채로, 유혼을 휘둘러 맞섰다. 쾅! 다시 한 번 굉음이 울려퍼졌다. 후폭풍도 거셌다. 반쯤 기울어져 있던 목책이 쿵 소리를 내며 넘어졌고, 풍압에 흙바닥이 둥글게 터져나가서 다시 한 번 먼지가 매캐하게 피어올랐다.
"승, 승자는?"
"저걸 맞고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이야?"
민병들은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깊은 골짜기에서 불어온 바람이 연기를 걷어냈고, 곧 승자가 드러났다.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허리까지, 토막이 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큰 상처를 입은 우르고스는 기우뚱 뒤로 쓰러졌다. 아이는 숨을 좀 내쉬고 있을 뿐 평온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아이가 쥐고 있는 유혼의 형상이, 이전과는 조금 달라진 것이었다. 아이는 놀란 듯 중얼거렸다.
"이건?"
"이제야 조금 따라온 모양이군. 내가 쓰던 형상이다."
이전까지의 유혼이 거대한 늑대의 이빨 같은 인상이었다면 지금 것은 용의 어금니를 연상시키는 형태였다. 레바테인이 선주의 손을 거치면서 더욱 파괴적으로 변했듯이 유혼도 그렇게 바꾸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였다. 아이가 손을 놓자, 유혼은 원래의 모양으로 되돌아갔다. 아마도 아직 완전히 선주의 경지에 다다르진 못한 모양이었다.
"지금의 감각을 잘 기억하도록."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선주는 다시 천갈궁 속으로 돌아갔다.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침묵을 깬 것은 아이의 선언이었다.
"이제, 더 저항하실 분 계십니까?"
적을 대하는데도 공손한 말높임이었다. 이어 격렬한 환성이 터져나왔다. 저 청년 통령에 대한 미담과 이야기는, 이미 기나센과 핏줄을 공유하는 작센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나사렘에서 무관한 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북서 자치령에서도 그랬다고 했다. 하물며 동족이 투항하는데 죽이겠는가, 그런 기대감이 징집된 민병들 사이에는 은근히 깔려 있었다. 지금 아이의 태도는 분명히 자신들을 살려주려는 듯 보였다.
"없습니까?"
"없소! 제기랄, 나는 저기 콰르시 둔전촌에서 땅 부쳐먹고 살던 놈들의 촌장이오! 내가 대표로 나서겠소! 우리 모두는 나리께 항복하오!"
그와 동시에 찬성한다는 고함이 터져나왔다. 징집병, 그것도 선봉대를 지연시키기 위한 소모품으로 쓰인 자들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통령의 권한으로 그들에게 어떤 해코지도 가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했다. 그 말이 끝나자 환성은 더욱 크게 터져나왔다. 그 때였다.
"아니! 우리 영광스러운 작센 사람은 굴러먹던 고아에게 항복하지 않는다!"
어리고 앳된 목소리였다. 아이가 그 촌장이라고 밝힌 자의 어깨를 손수 두드려주고 있을 때, 어떤 어린아이가 외친 것이었다. 손에 단검을 든 그 어린아이는 아이의 목을 노리고 덮쳐왔다.
"죽어라!"
그리고 아이는 보지도 않고 그 꼬마의 팔목을 붙잡았다. 칼은 얼굴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삽시간에 주변의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촌장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순식간에 붙잡힌 토끼 꼴이 된 꼬마는 허공에 매달려서도 발버둥치며 외쳤다.
"우리 가문의 원수! 죽어!"
"가문?"
꼬마는 울먹이며 외쳤다. 아마도 이 아이는, 선봉대에게 너무 쉽게 진입을 허용해 멸문당한 변방 가문의 후예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어린 새싹도 자기 손으로 뜯어내기는 멋쩍으니, 군대에 복무시켜 처리하려고 한 듯싶었다. 그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이 빌어먹을 꼬맹이가!"
촌장은 대경해서 그 아이를 후려쳤다.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이건 명백한 암살 시도였다. 이 꼬마의 행동 때문에, 어쩌면 자신들의 항복까지도 통령을 안심시키기 위한 설계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군율이 적용된다면, 그 의심만으로도 민병 포로 따위는 전부 죽을 수 있었다.
"나리! 이 버릇없는 애새끼는 제가 직접 제 손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촌장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 꼬마를 죽여서 순수성을 입증하지 않는다면 투항병 전부가 죽게 생겼다, 그런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러진 창을 주워들었다. 그러나, 투명한 눈으로 꼬마를 바라보던 아이가 팔을 뻗어 제지했다.
"괜찮습니다."
"하...하지만..."
"이 녀석한테는 제가 직접 벌을 내리도록 하죠. 안심하십시오."
"그냥 죽여라!"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꼬마를 붙잡은 채로, 아이는 목책을 넘어 자신의 진중으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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