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명장 ( 5 )
기나센, 텅 빈 소렌의 저택.
륜은 찬 바닥에 엎드려 무언가를 계산하는 중이었다. 펜을 열심히 움직이던 륜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전 중에 세 번이나 눈을 감고 적의 의중을 읽으려 들었건만, 여전히 그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소니아는 어디에 숨었는지 종적 자체가 잡히질 않았고, 모든 감각이 뿌옇게 일렁이는 가운데 드미트리의 마음만이 전달되어왔다.
ㅡ 아, 이게 짝사랑인가. 정말 애달프군요.
ㅡ 우린 동료가 될 겁니다.
그 목소리는 동굴 속에서 울리는 흐릿한 메아리처럼 밀려왔다. 륜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된 영문인지, 드미트리의 마음 속에서는 아이와 관련된 기억만이 들려왔다.
'마치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제외하곤 전부 지워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불쾌했다. 분노도 치솟았다. 어쨌든 아이 우르드는 자신의 약혼자였다. 그에게 수작을 부리던 기억을 엿보는 것이 유쾌할 리가 없었다. 머리를 쥐어뜯는 손에 힘이 들어갔고, 종이 위를 사각대던 펜은 어지러운 선을 난잡하게 그렸다.
"분명히 적은 성좌를 확보했을 텐데..."
이렇게 모략이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 성좌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크게 달라질 것이었다. 초조함과 조바심이 마음 속에서 치솟았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을 버둥거리던 륜은 축 늘어졌다. 조바심을 갖지 말라고 했죠. 속으로 중얼거리던 륜에게, 블로어의 통신이 들려온 것은 그 때였다.
ㅡ 당신 말대로 이런 문서가 왔습니다.
인삿말도 없이 아이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카이베크에게서 건네받은, 도발적인 거절 문서의 내용이었다. 내용을 들은 륜은 그러나 그 단도직입적인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 많이 걱정했네만, 국경 요새 수성전은 우리의 계획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일세."
ㅡ 근거가 있습니까?
"그렇다네. 내 장담하지. 카이베크 아인샤프, 그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람일세. 그 신념의 옳고 그름과는 관계없이, 그것을 관철하는 자세만큼은 한결같은 인간이지. 한 번 이런 선택을 내린 이상, 그는 이제 여지없이 우리가 준비한 패배까지 걸어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네."
ㅡ 우리...우리라. 그럴,까요.
조디악의 개입으로 예지가 흐려지기 전, 자신이 읽었던 수순대로 상황이 흘러가자 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신나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아이의 반응은 륜처럼 긍정적이지 못했다. 그제서야 분위기를 읽은 륜은 조심스럽게 말을 줄였다.
ㅡ 왜 그래요? 군막에서의 생활이 힘든가요?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 그물침대에 앉은 아이는 블로어를 쥔 채로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한 계획, 그 계획을 수행할 때 륜은 가끔씩 섬뜩할 정도로 거리낌이 없었다. 아마도 그걸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겠지만. 블로어의 검날을 만지작거리며 아이는 침묵했다. 블로어에 새겨진 글자의 깊이가 손 끝에 전달되어 왔다.
ㅡ 혹시, 거기서도 잠을 잘 못 자고 있나요?
륜은 아이의 침묵을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검이 웅웅대며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ㅡ 그러면 안 돼요. 잘 자고, 잘 먹고, 몸 관리를 잘 하셔야 되는데.
"그랬으면 좋겠군요."
아이는 검을 끌어안은 채로 그물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가죽이 둥글게 맞물려 난해한 무늬를 그리는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뒤척이며 옆으로 돌아누웠을 때, 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ㅡ 그럼, 호, 혹시.
"혹시?"
ㅡ 자장가를 들려줬으면 하는 건가요?
꽤 예전의 일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총관을 죽이고 잠이 오지 않아서 멍하니 누워 있을 때, 륜에게 머리를 기대고 잠들었던 날이 있었다. 아이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윽고 멀리서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륜의 목소리는 성가대의 그것처럼 맑고 따뜻했다. 이런 따뜻한 목소리와 그 섬뜩함이 어떻게 한 사람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 것인가, 아이는 눈을 감은 채로 그 의문을 되새기다 잠에 빠져들었다.
"동이 텄습니다. 가볍게 세안하시고 아침의 업무를 시작해주십... 응?"
기나센의 청년 통령은 잘 때도 검을 안고 잔다.
"그런가, 성도 8궁이 될 자는 이렇게 검을 사랑해야 하는 것인가!"
아침에 아이를 깨우러 들린 부관에 의해서, 그런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다음 날이었다. 자신이 생포한 포로들 사이에서 뜬금없는 존경과 함께 그 소문을 접하게 된 아이는, 멋쩍음을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
"이게 무슨 소리인가."
국경 요새의 안, 군무 회의실에서 카이베크의 수염은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불길할 정도로 아무런 장식도 없는 종이가 붙들려서 카이베크를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제도로부터 날아든 종이였다.
"또, 또 한 달을 미뤄야 한단 말인가? 지금 이 문서가 내게 전하는 게 그게 맞는가?"
거기에는 얼마 전 받았던 것과 정확히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재판이 길어지게 되어, 원군의 파병이 한 달 늦어진다는 내용이었다. 청야전의 배후지를 넓혀 약탈을 자행하고, 논밭에 불을 지르고, 라달라리아의 사원에 기부금을 전달한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회의 중간에 난입해 그 문서를 전달한 전령은 생전 처음 보는 카이베크의 분노에 놀라 넙죽 고개를 숙였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그렇습니다."
"기부금은 이미 전달하지 않았던가!"
"저, 그것이, 이번에는 미래를 점치는 제사를 올려보지 않겠느냐고... 제안이 왔습니다만."
"그래서?"
"제사 비용을 내면, 자신들이 대가 없이 그 제사를 치뤄주겠다고..."
"말장난이 심하군. 결국 돈을 내놓으라는 것 아닌가."
이것도 같았다. 이 파병을 연장할 권한을 가진 라달라리아, 그들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들은 구실을 바꾼 뇌물을 요구하고 있었다. 문서를 쥔 카이베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는 순식간에 형편없이 구겨졌다.
"빌어 쳐먹을. 이 자들에게는 전쟁이 그저 돈벌이로 보이는가? 이토록 현실 감각이 없단 말인가? 일을 그르쳐도 한 달은 어떻게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진,진정하십시오!"
그 때였다. 또다른 전령이 회의실의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달려들어왔다. 두 번째의 전령은 화살에 묶인 편지를 꺼내 전달했다. 이것도, 전에 보았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 수모를 당하고도 또 전쟁을 멈출 것을 제의한단 말인가?"
청년 통령의 편지였다. 조금 더 길고 조금 더 매끄러운 수사로, 전쟁에 고통받을 국민들의 피해가 커질 테니 서로 군사를 물리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결국 얼마 전과 같은 상황의 반복이었다.
"장군..."
"제국이 어떤 식으로 행동할 지 알 수 없으니, 지금이라도 화친을 받고 훗날을 도모하시는 것이..."
수런거리는 부름 속에서 카이베크는 고심했다. 청년 통령은 여전히 군진을 느릿하게, 최소의 희생으로 해체하며 진군하고 있었다. 그러니 빠듯하지만 여유는 있었다. 한 달치의 군량을 더 확보하기 위해서, 또다시 배후지를 넓혀 약탈을 자행할 여유였다.
"화친할 것인가, 아니면 청야전을 재개할 것인가..."
전자는 재침을 막아낼 수 없었고 후자는 믿을 수 없는 조력자인 제국에게 목줄을 맡겨야 했다. 참모들은 어지럽게 갑론을박했다. 전자를 고르든, 후자를 고르든 도박이었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망설이던 카이베크는 장내의 소란을 가라앉혔다.
"내 투구를 가져와라."
협정을 거부하고 청야전을 지속하겠다는 뜻이었다. 굳게 다문 카이베크의 입에서 결연함이 내비쳤다. 누군가가 말을 더듬으며 항변했다.
"장군! 이미 거듭된 약탈로 군의 사기와 여론은 최악입니다. 여기서 한 번 더 약탈을 거듭하시면, 군율을 유지하는 게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카이베크는 더욱 엄하게 말할 뿐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만일 이대로 어물쩍 협정을 맺어버린다면, 이미 자신이 죽여 버린 부관과, 백성들과, 수 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어떻게 되는 것이며, 이미 불태운 논밭과 마을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 모든 것을 헛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카이베크는 다시 항전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결국 그날부로, 카이베크는 다시 한 무리의 기병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섰다.
기병은 또 다시 한 달어치의 민가를 불태우고 성으로 돌아왔다. 누군가가 일부러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그와 동시에 청년 통령 역시 마지막 군진을 해체하고 있었다. 요새 성벽에 서서, 카이베크는 새까맣게 몰려오는 적군을 바라보았다. 이내 탄식을 흘렸다.
"정말로 군진의 민병을 전부 살려서 찾아왔는가..."
그 선봉에는, 어떻게 보아도 작센인의 행색을 한 자들이 잔뜩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기다란 창을 들고 정렬해 있었다. 그 창검과 기치 위에서 한낮의 햇빛이 부서졌다. 그 창검의 숲을 헤치고, 흰 머리의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였다.
"저 자가 천갈궁인가."
소설이나 동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어딘가 비현실적인 기운이 그 용모에서 느껴졌다. 카이베크는 댓돌을 더욱 세게 움켜잡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의외였다. 군진의 민병을 전부 살린다는 어수룩한 결정 때문에, 한 명의 애송이를 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야무지게 다물어진 입과 턱선에선 수많은 아수라를 돌파한 자의 노련함이 느껴졌다. 그는 곧 선봉을 벗어나서도 한참을 걸어서, 기나센군과 성벽 사이의 너른 공터에 섰다.
"쏠까요?"
부관 하나가 활을 집어들고 외쳤다. 얼굴은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무심하게 청년 통령을 바라보던 카이베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만둬라."
아마도 화살은 저 자를 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공터의 한 가운데에 당도한 통령은, 곧 품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천갈궁이었다. 그가 너울거리듯 검을 휘두르자, 거기서 그림자가 쏟아져나왔다. 바라보는 자들은 무의식적으로 탄식을 흘렸다. 의중을 알 수 없었으나, 불길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그림자는 성인의 키만큼 거대한 장궁으로 변했다. 아이는 그 장궁에 시위를 걸고, 편지를 묶은 화살을 꺼냈다. 햇빛이 쏟아져서 눈이 부셨다. 찡그린 아이는 시위를 당겨서 성벽의 한 가운데를 겨냥했고, 활줄을 당겼다.
피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살은 카이베크 바로 옆의 성벽에 처박혔다. 화살은 막 건져올린 물고기처럼 거칠게 꼬리를 떨었다. 그 한 가운데에는 종이가 묶여 있었다. 카이베크는 눈짓으로 자신의 부관에게 지시했다.
"가져와라."
아마도 저 청년 통령은 무언가 전달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또 똑같이, 세 번째의 화친 제의일지도 모르겠다고 카이베크는 생각했다. 그러나 펼친 종이에 담긴 글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으로 시작했다.
[ 당신이 보고 있는 이 문서는, 이미 같은 내용으로 작센의 각지에 뿌려지고 있는 문서입니다. ]
카이베크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성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천갈궁으로 만들어낸 장궁을 회수한 통령은, 오연하게 서서 이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이 쪽지를 받았다는 것을 확인해서일까?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이 자그마한 돌성에 갇힌 동포들이여! 그대들을 구하기 위한 구원군이 왔습니다!"
[ 이 자그마한 돌성에 갇힌 동포들이여! 그대들을 구하기 위한 구원군이 왔습니다! ]
문서에 적힌 것과 정확히 같은 내용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