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명장 ( 6 )
"내가 이 군사를 일으킨 까닭은, 이 작센에 사는 나의 동포들을 핍박하고 약탈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앞에 닥친 대적을 상대하기 위해서, 해묵은 원한을 접고 하나로 통합되어야만 하기에 부득이 아름답지 못한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카이베크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아이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아이에게는 좌중을 압도하는 힘이 있어서, 성 안팎의 모두는 아마도 신기로 증폭되었을 그 목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 증거로 저는 이 땅에 발을 들이민 이후로, 한 사람의 가엾은 백성도 죽이지 않았고, 단 한 뙈기의 밭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함성이 터져나왔다. 군진에서 거둔 민병들에게서 터져나온 함성이었다. 그 함성은 선명하고 우렁찼다.
"우리의 진정한 적은 제국, 자신들이 흘려야 할 피를 우리에게 대신 흘리도록 강요하는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기나센에서, 우리 동포의 땅에 숨어들어 제국의 끄나풀 짓거리를 하던 세력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끝없는 반목과 증오의 전쟁에 몰아넣어서, 제국에 대항할 힘을 잃게 하고자 획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조디악입니다."
아이는 숨을 골랐다. 거짓말을 말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조디악은 제국에 맞서는 쪽에 가까웠지만, 지금 진실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을 몰아붙일 명분이었다. 제국도 적이고 조디악도 적이라면, 그냥 둘은 하나로 합쳐지는 편이 정치적으로 이해하기 쉬웠다.
"저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거지?"
"좀 닥쳐봐!"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가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사방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치솟았다.카이베크만은 그 때 전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 연설의 내용이 이미 작센 각지에 뿌려져 있다고?'
그 사전준비를 위해서는 이곳에 도착하기 한참 전에 이미 글을 완성해 뿌려야만 했다. 그렇다면, 저 자는 이미 내가 화친을 거듭 거절할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거절당할 제안을 왜 했단 말인가...
"그리고 내가 군사를 일으킨 까닭은! 우리 동포들의 땅, 작센을 정벌하고 압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포의 땅을 좀먹고 있는 조디악을 몰아내기 위해서, 그 이유 하나뿐입니다!"
다시 한 번 함성이 터져나왔다. 국경 요새의 사람들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작센의 왕실이 조디악에게 장악되었음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것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고 불안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이의 말은 지금 교묘하게 그 불안감을 두들겨서 자신의 길을 열고 있었다.
"이 땅에 당도했을 때, 저는 수성의 명장 카이베크 공이 국경 요새에 임했다는 말을 듣고 전율했습니다. 애국자로 이름난 그라면, 저와 함께 작센을 좀먹는 제국의 끄나풀들을 무찌르는 데 힘을 보태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부러 진군을 늦추고, 동포들을 거두면서 카이베크 공과의 접선을 준비했습니다."
카이베크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저 통령은 지금 교활하게 진실과 거짓을 섞어서 소설을 쓰고 있었다. 반박할 증거를 내세우기 어렵다는 걸 이용한 것이었다. 숨을 들이쉰 아이는 이어 말했다.
"그러나 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처참한 모욕과 조롱이었습니다."
카이베크가 아이를 자극하기 위해 보낸 문서, 그것을 아이는 증거로 제시했다. 이미 이 연설은 사방에 나붙어 있다고 했지. 아마도 그 나붙은 연설마다 문서의 사본도 증거로 첨부되어 있을 터였다. 카이베크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를 악물었다. 급작스러운 화친 제의, 그 맥락은 전장에서는 매우 선명했지만, 맥락이 종이에 온전히 담기지는 않는 법이었다. 아이의 소설 속에서 그 문서는 아이의 말에 대한 증거로 보였다. 아니, 보이게 만드는 힘을 성도 8궁인 저 자는 가지고 있었다. 아이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는 무자비하게 자신의 군세를 이용해, 나조차 건드리지 않았던 자국민을 학살하고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학살을 보다 못한 저는 군사를 물릴 테니 학살을 멈추라는 제안을 건넸습니다. 나는 이 자리에 조디악을 무찌르러 온 것이지, 자국민을 죽이기 위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설사 내 제안을 믿지 못해 처음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더라도, 이 두 번째 제안만큼은, 애국자인 카이베크 공이라면 받아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이는 연출을 시작했다. 천갈궁을 꺼내든 아이는 검을 휘둘러 높다란 바위를 쪼갰다.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돌조각이 튀고 그림자가 피어올랐다. 마치, 자연스럽게 터져나온 분노를 이기지 못해 검을 휘두른 듯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거절했습니다!"
이제 웅성임과 탄식은 작센의 성벽으로까지 번졌다. 아이의 연출이 이뤄낸 효과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내 제안에서 비롯된 말미를 이용해서 더욱 근면하게 작센의 동포를 살육하고 그 피륙을 약탈하기 시작했습니다. 무려 두 번이나 그 짓을 반복했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저 연설을 막아야 한다. 카이베크는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자신이 들고 있는 문서, 그 문서에 적혀 있는 다음 대사 때문이었다. 그는 황급히 옆에 선 궁수의 활을 빼앗아 화살을 걸고 시위를 당겼다.
"그가 제국의 끄나풀이기 때문입니다!"
피융! 예리한 소리와 함께 화살이 아이의 발치에 꽂혔다. 보통 사람이라면 간담이 서늘해질만한 암살 시도였고, 입을 닫게 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팔을 휘저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조디악과 한 패였으며, 이미 조디악에게 장악당한 작센의 왕실이 그에게 전권을 주고 여기에 파견한 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제국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닥쳐라!"
카이베크는 목에 핏줄을 세워가며 고함을 내질렀다. 다시 시위를 끝까지 당겨서 화살을 쏘았다. 아이의 얼굴을 향해 날아간 그 화살은, 그러나, 아이의 손짓 한번에 너무도 무력하게 손에 붙들려버렸다. 손에 힘을 쥐자 화살은 재처럼 흩어져버렸다.
"나는 군인이다! 나는 내 조국의 존속을 위해 존재하며, 그것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나의 미덕이다! 그대는 지금 그대의 허황된 말을 따라 배신하지 않았다고 해서, 정무적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고 해서, 나를 비겁자로 몰아가는가!"
어떻게든 저 연설을 흐뜨러뜨려야 했다. 저 연설은 말의 형태를 한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불만이 가득 차올라 있던 요새 내부의 사기가 이상할 정도로 요동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말단병들 중에는 적군의 연설에 감화되어 함성을 내지르는 놈도 보였다. 막아야 한다, 막아야 한다... 그 한 마디가 카이베크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그 말이 끝난 직후였다. 아이는 피식 웃더니, 빈정거리듯이 대답했다.
"외세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 자국민을 죽이고 뇌물을 바치고도 아주 당당하시군요."
"뭐?"
카이베크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아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어서 외쳤다.
"이 자는 이미 제국에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파병의 대가는 이 땅 전체를 제국에 자치령으로 넘기는 것이었습니다!"
이 선언이야말로 결정타였다. 국경 요새를 지키는 병사의 절반은 향토병이었다. 고향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고향이 약탈당하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모인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의 고향을 통쨰로 잘라 생지옥에 쳐넣는 것을 대가로 원군을 불렀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들은 그 사실을 몰라야만 했다. 카이베크는 그래서 부관을 죽여가며 입단속을 했던 것이었다
"파병을 독촉하기 위해서 그는 이미 라달라리아의 여러 사원에 뇌물을 바치고, 심지어 개인적인 여흥으로 미래를 점치는 제사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 재원은, 이 땅에서 자신의 전권을 남용해 갈취한 작센 사람들의 재산으로 마련했습니다!"
또 아이는 교묘하게 사실을 비틀어 혐의를 덧씌우고 있었다. 카이베크는 쓰러질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단속, 단속이 낫겠다. 카이베크는 뒤돌아서서 외쳤다.
"저 자의 말은 전부가 거짓이다! 이 자는 군량이 부족해서 퇴각하기 위해 비겁하게 화친을 요청한 것이고, 지금 저 연극을 하는 것도 내분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반응은 차가웠다. 파병의 대가, 그것을 처음으로 듣게 된 자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카이베크는 초조해져서 칼까지 빼들고 외쳤다.
"더 이상 저 연설을 듣지 마라! 저 근거 없는 말에 현혹되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그러나, 카이베크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근거는 있었다. 이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보여온 아이와 자신의 전략이 바로 그 근거였다. 이 정략이 목적이었건 무엇이었건 간에, 아이는 결국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선의를 보여서 징집된 민병 모두를 구해냈다. 반면 자신은 농부처럼 근면하게 자국민을 살육하고 약탈했다. 심지어 두 번이나 자의적으로 그 약탈의 대상을 넓히기까지 했다. 어느 쪽의 이야기에 마음이 갈 지는 뻔한 것이었다.
"당장 성 아래로 내려가라!"
카이베크가 외칠 때였다. 그러나 이미 아이의 연설은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제국의 부역자 카이베크 아인샤프, 그 자를 무찔러야 하기에 저는 이 천갈궁을 들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만, 그 자 외에 이 성 안에 갇힌 동포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귀르겐 경에게 물려받은 성좌의 이름을, 그리고 기나센의 통령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왕실의 가장 큰 부역자이자 이 전쟁의 원흉인 카이베크를 묶어 바치고 항복한다면, 그 외의 모든 동포들에게는 한 점의 책임도 묻지 않겠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이의 눈에는 술렁거리는 요새의 풍경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 연출을 위해서 천갈궁을 가슴 근처로 가져가 맹세하는 모습을 보여준 아이는, 올라탄 바위에서 내려오며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거짓말을 쏟아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그 후 요새는 순식간에 안에서부터 붕괴되기 시작했다.
탈영병이 속출했고 항명하는 자도 속출했다. 이 고장 출신의 장교 몇은 카이베크에게 아이의 말이 거짓임을 입증해달라고 직소했고, 카이베크는 그들을 곤장을 쳐서 쫓아냈다. 입증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놈들은 군량이 부족해서 이런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내가 훌륭하게 포상하겠다! 놈들의 수작에 넘어가지 말고 귀를 씻어라!"
이렇게 아무리 독려해도 쓸모없는 일이었다. 군사들 앞에서 그렇게 소리치는 카이베크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그렇게 해서 승리하면 우리에게 뭐가 돌아옵니까요?"
"뭐?"
평소라면 감히 할 수 없는 말대꾸였지만, 그런 말대꾸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지금 성 안의 상황은 흉흉했다.
"어디서 굴러먹던 돈귀신 놈들이 지금 나라를 개처럼 따먹고 있는 건 사실 아닙니까. 어차피 따먹힐 거면 저 동포들한테 따먹히는게 낫지, 우리가 대관절 왜 외간놈한테 따먹히기 위해서 뒈져야되는지 모르겠다 이 말입니다."
"그것은 정치하는 자들이 할 일이다. 군인은 정무적 판단을..."
"옘병, 정무적 판단이고 지랄이고..."
베어야 하나. 구시렁거리는 병사를 보며 카이베크는 망설였다. 그러나 벨 수 없었다. 이 자의 생각은 아마도 지금 자신을 노려보는 병사들 모두의 생각과 같을 것이었다. 함부로 베어냈다가는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카이베크는 이를 악물고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