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명장 ( 7 )
그러나 상황은 더더욱 악화되었다.
"라달라리아에서, 그 성녀가, 뇌물을 받은 자신의 부하를 심하게 질책했다고?"
"예에에... 그리고 사과의 뜻으로 받은 기부금의 세 배를 사회에 환원한다고..."
카이베크는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성녀는 사죄를 형식으로 내세웠지만 이게 무슨 목적인지는 손에 잡힐 듯이 선명했다. 카이베크가 뇌물로 라달라리아를 매수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 사실이 전제로 깔린 대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즉 성녀의 권위로 입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르겠군. 제국과 기나센은 적이 아닌가? 성녀가 왜?"
성 안팎의 여론은 더욱 더 흉악해졌다. 이제 카이베크와 장교들을 보고 공공연히 침을 뱉거나, 경례를 생략할 정도였다. 자신에게 들리라고 커다랗게 가래침을 뱉는 하급병을 보며, 카이베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카이베크의 한숨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지방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온건파, 처음부터 기나센과의 전쟁을 바라지 않았던 자들이 일제히 성명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ㅡ 기나센의 젊은 통령의 제안은 그의 긍지이며, 나는 그의 명예를 믿고 그에게 동참하려 한다.
ㅡ 그는 이미 자신의 삶으로 자신이 삿된 의지를 품지 않음을 증명했다. 반면, 나라를 지키라고 전권을 받은 카이베크는 이미 그 전권을 악용해 자국민을 학살하고 개인적 축재와 뇌물 행사를 저질렀다. 어느 쪽의 편을 들어야 하는가는 명확하다.
ㅡ카이베크는 애국을 말하지만 애국은 결국 애민이다. 백성 없는 그의 국가는 황폐하고 피폐하다. 나는 백성을 살린 젊은 통령의 말을 믿겠다.
온건파와 연락을 유지하고 있던 륜이 작업해둔 것이었다. 여론은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카이베크는 조디악이 장악한 왕실을 위해 청야전을 수행했다. 명분 없는 전쟁을 위해 명분 없는 수단을 사용한 셈이었다. 이렇게 양상이 여론전 양상으로, 정치전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면, 카이베크에게 좋을 것이 전혀 없었다.
청년 통령은 노련했다. 작센 내부에서 그런 반응이 터져나오자마자, 화답하듯 두 번째의 문서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 죄를 지은 것은 제국에게 부역한 카이베크 단 한 사람 뿐. 자신은 부역자 외에는 건드리지 않겠다. ]
그것이 문서의 골자였다. 용기 있게 나서준 작센의 귀족들에 대한 칭찬도 섞여 있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나를 목매달아서, 자신의 색깔을 증명해라 이건가."
카이베크를 공박하는 성명을 내면, 작센 내부로 진공하더라도 그 지역은 침략하지 않겠다. 그런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승전의 대가로 카이베크의 영지와 재산만을 받아가겠다, 그런 의미도 함의되어 있었다. 그리고 청야전을 치른 자를 비난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작센 내부의 거의 모든 영주와 귀족들은 카이베크를 온갖 수사를 동원해 비난하기 시작했다.
내부에서는 군기 문란과 탈영, 항명이 들끓어올랐고, 외부에서는 비난이 포위하듯 조여왔다. 그런 와중에 정작 싸워야 할 적의 군세는 성을 둘러치고 주둔하고 있을 뿐 어떤 공세도 취하지 않았다. 그 고요한 군세를 바라보며 카이베크는 탄식했다.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나. 아아, 공성전 따위는 할 생각도 없었던 것이군."
이제 카이베크에게 남은 희망은 하나밖에 없었다. 제국에서 파견해줄 원군이었다. 그리고 포위가 한 달째 지속된 후에, 밤을 틈타 제국에서 찾아온 전령은 그 마지막 희망마저 완전히 부숴주었다.
"원군 파병이 무산되었단 말인가."
묵묵히 문서를 들여다보던 카이베크는 문득 현기증을 느꼈다. 제국은 처음부터 원군을 보낼 생각이 없었다. 자신은 신기루를 믿고 사막을 달려온 셈이었다.
"그런가, 6개월 후의 파병, 6개월치의 군량, 우연히 일치할 리가 없지."
칼 한번 휘둘러보지 않았는데, 어느새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교수대에 매달린 신세가 되어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설계한 것인가? 느릿하게 진군해올 때부터? 화친을 제의할 때부터? 아니면, 설마 군량을 갖추지 않고 급하게 진공해온 것조차 설계였던가. 이 전략은 내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전략이다. 군량이 없기에 내가 왔고, 내가 왔기에 청야전을 지휘했고, 내가 스스로 목을 메어 죽었다. 그런가, 그것도 나를 불러내기 위한 것이었나...
"어디서부터 계획된 것인가... 어디서부터."
넋이 나간 듯 읊조리는 카이베크의 눈에, 멀리서 치솟아오르는 불길이 보였다. 방화였다. 누군가가 성문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그 비열한 개새끼를 잡아 죽여!"
"명장은 지랄, 잡으면 얼굴에 오줌을 갈겨 주마!"
"이 쪽이다, 이 쪽이야."
"어이, 죽이는 건 안 돼, 살려서 통령께 바쳐야 한다!"
이윽고 들려오는 괴성은, 분명히 작센의 억양이었다. 카이베크는 손에서 편지를 놓치고 탄식했다.
수백 년간 함락되지 않았던 국경 요새는, 결국 이렇게 허무하게 함락되었다. 전투 한 번 없이 무혈로 입성한 것이었다. 다음 날, 아이가 성문 앞에 섰을 때, 성문은 안에서부터 부드럽게 얼렸다.
두 달. 그것이 이 요새를 함락하기까지 걸린 시간의 전부였다.
*
카이베크는 초주검이 된 상태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쿨럭, 커헉."
피범벅이 된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그는 아이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부서진 이빨 사이로 하얀 숨이 연신 쏟아져나왔다. 아이가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이 성에 입성했을 때, 성난 향토병들이 이미 그를 이렇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패배자를 관람하는 취미가 있나."
가르랑거리던 그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이것이었다.
"좋지 않은 취미야. 네 수명을 깎아먹을 테다."
"아닙니다."
아이는 손수 카이베크를 묶은 십자가를 풀어주려 다가갔다. 그러나, 카이베크는 아이의 손에 침을 뱉었다. 침에는 피와 노란 장액이 섞여 있었다. 아마도 이미 내장 어딘가가 터져서, 역류하고 있는 듯했다. 카이베크의 눈은 아직도 야수처럼 날카롭게 살아 있었다.
"동정은 필요 없다. 죽여라."
"동정이 아닙니다. 나는 이 장소에, 당신과 거래하기 위해 왔습니다."
"거래? 거래는 줄 수 있는 것이 있을 때 성립되는 것인데."
"이미 당신의 영지의 모든 권리는 저희 기나센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처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입성하고 나면, 그들에게 어떤 해코지도 끼치지 않고 잘 보호하겠습니다."
그 말에 카이베크는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쇠를 긁는 듯한 비통한 웃음소리였다.
"그래, 그걸로 받고 싶은 건 무엇인가?"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군인은 정치로부터 투명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저 애국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섬겼다는 걸 말입니다."
카이베크는 눈을 떨었다. 이 자가 할 말인가. 하지만 아이의 눈에서 비꼬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디악이 믿을 수 있는 작센 내부의 장군이라고는 당신밖에 없었죠. 그러니 아마 당신이 가지고 있을 겁니다."
"뭘 말인가."
"컨쿼러의 성구."
성구(聖球). 컨쿼러를 가동하기 위한 마력의 핵이 되는 보물을 뜻했다. 아이가 알기로 컨쿼러는 지금 작센의 왕성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성구와 성물이 한 자리에 있으면 그것을 뺴돌렸다는 사실을 들킬 것이므로, 성구는 성물과 다른 곳에 보관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작센 내에서 입지가 없는 조디악이 성구를 숨길 장소라곤 카이베크의 영지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이와 륜은 카이베크를 이 장소로 인도한 것이었고, 카이베크의 영지를 건네받을 것을 노리고 모략을 전개한 것이었다.
얻은 성과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카이베크라는 거대한 희생양을 발판으로, 그들은 조디악이 장악한 일부 세력을 제외한 작센 전체와 정서적 통합에 성공했다. 일반적인 전쟁이라면 결코 얻지 못했을 수확이었다. 어젯밤 륜은 신나서 그 사실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아이는, 어쩐지 자꾸만 쓴맛이 느껴졌다.
"성구?"
"어쩌면 당신은 그게 무엇인지 모를지도 모릅니다. 이만한 크기의 황금 공이라고 하면 알겠습니까?"
짚이는 것이 있었다. 카이베크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자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아마도 목숨보다 귀하게 숨기라는 명을 받았겠지요. 그것을 숨긴 장소를 알려주십시오."
카이베크는 침묵했다. 침묵 끝에 피식 웃는다.
"이봐, 거래는 대가를 치를 수 있을 떄 하는 것 아닌가."
"예?"
"자네는 내 처의 목숨을 보전해줄 수 없어."
아이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천갈궁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죠. 성구를 건네준다면,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미 죽은 사람을 어떻게 지킨단 말인가."
아이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이건 륜의 예지에 없던 일이었다. 아마도 륜의 예지가 막힌 후에 무엇인가 이상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죽였다."
"그게...무슨."
"무고한 자들을 수없이 학살하러 떠나는 남편이 부끄러워서, 출군하기 전날에 독을 마시고 죽었다. 내가 죽인 거야."
아이는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예지에 이런 내용은 없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륜과 아이가 움직인 결과 바뀐 미래일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죄책감이 일렁였다.
"그럼... 그럼."
빠르게 그 인질에 갈음하는 다른 대가를 찾아서 거래를 제시해야 하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죄책감이 그것을 가로막았다. 무심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던 카이베크의 눈에 이채가 띄었다.
"우습군. 그런 건가. 이 정략은 네가 지휘한 게 아닌 건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런 걸로 죄책감을 느끼는 자가, 어떻게 나를 이 꼴로 몰아넣을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륜의 존재를 어렴풋이 눈치챈 모양이었다.
"조심해라. 그 자가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아마도 너도 결국 그 자에게 잡아먹힐 운명처럼 보이니까."
"그렇,습니까."
대화를 나누며 자꾸 머리를 쳐들었기 때문일까, 눈에 가득 맺혀 있던 피눈물이 씻겨나가서 성 너머에서 출렁거리는 산맥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이 성채에 수백 번을 올라섰음에도 한 번도 저 경치를 바라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왜 보지 못했을까.
"인간은... 정무적 판단을 해야 한다고 했나."
어째서인지 부관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그 순간, 먹구름이 걷히며 노을이 비끼어 쏟아졌다. 찰나의 시간동안, 세상은 끝부터 끝까지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눈이 부신 아이는 주먹을 들어 얼굴을 막고 눈을 찡그렸다. 그러느라 카이베크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정원의 호수 밑바닥."
"예?"
"그 곳에 있다. 동포를 위해... 잘 써다오."
그 말이 카이베크의 유언이었다. 다시 흘러든 먹구름이 하늘을 가려서 노을이 잦아들었을 때, 드러난 카이베크는 평온한 표정으로 죽어 있었다. 평온한 얼굴이었다. 가까이 다가간 아이는, 그 눈을 감겨주고 이제야 십자가에서 그를 풀어줄 수 있었다.
명장의 최후는 그렇게 고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