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사자궁 ( 5 )
레버넌트 렉스.
큰 빚을 진 작센의 왕으로 만든 최강의 레버넌트. 드미트리는 처음부터 그것을 이 알현실의 바닥에 대기시켜두고 있었다.
"하하, 계약은 항상 잘 준비하고 하셨어야죠! 외부적인 난입을 금한다는 조항은 없었잖습니까!"
이런 이유에서였다. 천장에 닿을 듯 거대한 거체를 드러낸 레버넌트 렉스는 그 두꺼운 팔로 아이를 후려쳤다. 푸학! 아이가 재빨리 몸을 피해서 애꿎은 바닥이 잘게 부서졌고, 렉스는 괴성을 내질렀다. 아이는 알현실 벽의 여신상에 매달려서 그 공격을 피했다. 위태롭게 매달린 아이를 발견한 렉스는 다시 팔을 내뻗어 공격해왔다.
"림, 레바테인."
탁, 조각상을 박차고 뛰어올라 공격을 피한 아이는 크게 소리쳤다. 렉스의 주먹에 부서진 여신상의 조각이 잘게 비산했다. 츠츠츠, 아이의 텅 빈 손에 적색의 대검이 치솟고, 아이는 레버넌트 렉스의 기둥만한 팔에 안착했다. 자세를 바로잡은 아이는 팔을 박차고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흡!"
어느새 어깨까지 도달했다. 레버넌트 렉스의 거대한 가면이 코앞이었다. 구불구불한 적색의 대검이 크게 휘둘러진다. 스하악! 긴 쇳소리와 함께, 렉스의 가면이 형편없이 우그러져서 바스라진 조각이 흩날렸다. 그 모습을 본 드미트리는 안색이 창백해져서 비명을 내질렀다.
"이보십시오! 그건 계약 위반이지 않습니까! 분명히 아나테마로서의 힘은 쓰지 않는다고..."
"난입한 놈한테 쓰지 않겠다는 계약은 없었는데요."
"윽!"
그 말대로였다. 염려하는 얼굴로 대결을 지켜보던 림은, 드미트리의 일그러진 표정이 너무나 웃겨서 배를 긁으며 웃음을 토하고 말았다. 레버넌트 렉스에게 일격을 먹이고 착지한 아이는 레바테인을 수평으로 펼쳐 쥐고 달려들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레버넌트 렉스도 괴성을 내지르며 맞섰다. 깍지를 낀 렉스의 양 손에서 탁한 금빛의 기운이 몽실거리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금빛의 기운은 일렁이며 수십, 수백에 달하는 레버넌트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가면이 벗겨진 레버넌트였는데, 하나같이 고통받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버넌트 렉스, 채무자들의 왕답게 레버넌트 군사를 만들어 싸움에 밀어넣기 시작한 것이었다.
"추악한..."
아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레바테인을 길게 휘둘렀다. 흐느적거리며 팔을 내뻗던 레버넌트의 상반신이 비스듬히 토막나서, 몸뚱이가 모래처럼 무너져내렸다.
"응?"
그것에 눈살을 찌푸린 것은 아이가 아니었다. 물러서서 사태를 관망하던 빌헬름이었다. 그는 바닥에 흩뿌려진, 탁한 금빛을 띄는 모래를 한 움큼 집어 유심히 관찰했다.
"이건..."
곧 그는 사자궁의 도끼날에 모래를 발랐다. 놀랍게도, 사자궁의 도끼날, 데몬스폰의 피를 빨아들이는 그 도끼날은 웅웅 울리며 모래를 빨아들였다. 사자궁은 사내답게 굵은 눈썹을 찌푸렸다.
"탐욕의 군주? 그 데몬스폰의 기운인데."
사자궁은 악마를 다루는 전문가였다. 그의 지식이 이상함을 경고했다. 빌헬름은 홱 고개를 쳐들어 레버넌트 렉스를 바라보았다. 렉스가 레버넌트를 만들어내는 주먹 근처에, 이미 아이는 당도해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아압!"
한 번 휘둘러서 셋을 베어냈다. 우수수 쏟아지는 금빛 모래를 밟으며 높이 뛰어오른 아이는, 레바테인으로 레버넌트 렉스의 주먹을 잘라냈다. 금빛의 피가 튀어오르고, 레바테인은 이 레버넌트들을 뽑아내던 마술을 으깨듯 부숴버렸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주먹을 잃은 렉스는 피를 흘리며 난동을 부렸다. 알현실의 돌바닥이 깨져나가며, 렉스가 빠져나온 깊은 구멍으로 돌조각이 쏟아졌다. 그 깊게 뚫린 구멍 옆에 위태하게 선 아이를 노리고 육중한 팔꿈치가 날아온다. 아이는 민첩하게 팔꿈치를 부여잡고 올라타서, 천갈궁을 뽑아들었다.
"나와주세요."
천갈궁의 끝에서 그림자가 일렁이며 선주가 나타났다. 주변의 상황을 보고 쓴웃음을 지은 선주가 한 마디 핀잔을 주기도 전에, 아이는 유혼을 불러내어 던졌다. 유혼을 받아든 선주는 가소롭다는 듯 물었다.
"뭐냐?"
"빨리 이 괴물을 처리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죽는 거죠, 뭐."
"그러니 도와라? 누가 가르쳤는지, 참 마음에 드는 협상 방식이군."
그러나 거절하지는 않았다. 렉스가 몸을 뒤흔들어서 어깨에 올라탄 아이를 떨어뜨리려 시도한 것은 그때였다. 아이와 선주는 각자 검을 움켜쥔 채로 달려나갔고, 거대한 레버넌트 렉스의 몸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높다랗게 솟은 왕관이 선주의 칼질에 잘려 바닥을 뒹굴었고, 아이의 레바테인은 렉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당황한 것은 드미트리였다. 제약이 풀린 아이는 역시 괴물이었다. 5위계의 마술사도 쉽게 처리하지 못할 전력인 레버넌트 렉스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사색이 된 드미트리는 사자궁을 삿대질했다. 빌헬름은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도끼날을 매만지고 있었다.
"뭐,뭐,뭐하고 있습니까, 당장 협공해서 승부에서 이겨야죠!"
하지만 빌헬름은 드미트리에게 뜬금없는 소리를 꺼낼 뿐이었다. 드미트리의 멱살을 움켜쥔 빌헬름은 나직이 말했다.
"그러고 보면, 어째서인지 네 수장은 나를 직접 만나는 걸 피하고, 너를 시켜서 모든 일을 처리했지. 왜지?"
"왜라뇨?"
"소니아 아바키렌. 그 여자에 대해 알고 있는 걸 말해라."
"무,무슨...윽"
드미트리는 그 말을 듣자 두통을 느꼈다. 이미 그녀에 대한 많은 기억이 지워진 상태였기 떄문이었다. 드미트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녀가 키레넨의 나라를 건국해줄 희망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드미트리는 이마를 매만지며 외쳤다.
"지금 그딴 걸 논할 때가 아닙니다! 당신의 여동생을 살리고 싶지 않은 겁니까? 빨리 저 녀석을 쓰러뜨리세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때마침 가까이서 레버넌트 렉스의 목줄기를 부수던 아이는 그 말을 듣고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무슨 방법으로 성좌를 끌어들였나 궁금했는데, 결국 조디악답게 가족을 협상의 소재로 삼은 모양이었다. 그러느라 그의 목을 덮쳐오는 레버넌트 렉스의 이빨을 보지 못했다.
"정신 차려라, 멍청아."
쾅! 그 널빤지같은 이빨을 베어낸 것은 선주였다. 선주의 유혼은 렉스의 이빨을 베어냈을 뿐만 아니라, 아랫턱 전체를 베어내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잘린 입으로 피를 쏟으며 렉스는 크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닥쳐라. 이런 같잖은 수작질은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야."
"윽!"
멱살을 잡힌 채로 내던져진 드미트리의 하얀 뺨이 돌조각에 쓸려 피가 흘러내렸다. 마구 난동을 부리고 있는 레버넌트 렉스의 정면에 도달한 빌헬름은, 사자궁으로 장작을 패듯 렉스를 후려쳤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것이 최후의 일격이었다. 이미 레바테인에 의해 마술이 깨지고 전신을 난도질당한 렉스는, 그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쓰러져서, 자신이 뚫고 나온 깊은 구멍으로 떨어졌다. 쿵! 그 깊은 구멍의 밑바닥과 충돌한 몸뚱이는 굉음을 일으켰다. 샹들리에가 삐걱대며 흔들리고 먼지구름이 피어오를 정도였다. 그 소란을 뒤로 하고, 빌헬름은 도끼를 어깨에 걸머진 채 뒤돌아섰다.
"어쨌든 나도 성도 8궁의 일원이다. 무인의 긍지가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그 정도는 알고 있는 놈이란 말이다. 성좌끼리의 결투에 이상한 수작질은 필요 없다."
드미트리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원망스러운 눈길로, 근육이 꿈틀대는 빌헬름의 등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네놈들의 수장을 믿을 수가 없어졌다.'
빌헬름은 뒷말을 삼켰다. 이 세상에서 악마를 멸절하기 위해 살아온 자, 빌헬름 흐레스베인. 그는 데몬스폰의 전문가였다. 그리고 소니아가 독문의 마술로 개발해서 만들었다고 하는 저 레버넌트는, 어떻게 보아도 마술보다는 악마의 힘에 더 가까워보였다. 그 힘을 빌려서 결투에 임하는 것은 사자궁이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다. 선주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아까 방해받았던 싸움을 다시 재개해보자구. 전갈자리의 주인."
선주는 도끼를 걸머진 채 천천히 다가오는 사자궁을 바라보며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다는데."
"그럼 이제 당신은 들어가세요."
계약에 따라, 저 자와 싸울 때에는 아나테마로서의 힘을 써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헛, 말꼬리도 더럽게 짧아졌군. 건투해라."
아이는 천갈궁을 굳세게 잡고 다시 빌헬름과 마주했다. 레버넌트 렉스가 뚫고 빠져나온 커다란 구멍이 사이에 새로 생겼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까의 대치와 똑같은 구도였다.
'아니, 다른 점이 있지.'
이제 빌헬름은 자신이 참랑격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점. 그것만큼은 달랐다. 그 증거로, 사자궁을 갈무리하는 빌헬름의 자세는 아까보다도 한층 신중하게 변해 있었다.
'그래도 그것밖엔 없다.'
척, 발을 앞으로 내밀며 아이는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사선으로 내려 붙잡은 천갈궁의 끝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벽에 내던져진 드미트리는 흐트러진 앞머리 너머로 두 사람의 대치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다 아무렇지 않은 듯 서로에게 접근하고 있지만,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일촉즉발이었다. 꼴깍, 그 중압감을 못 이긴 드미트리가 침을 삼키는 순간, 두 사람은 기합을 내지르며 서로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쾅! 엄청난 충격파가 터져나가며, 불안하게 흔들리던 샹들리에는 결국 검압을 이기지 못하고 수천 조각으로 깨지기 시작했다.
*
한 편, 멀리 기나센의 저택.
아이를 단신으로 떠나보낸 륜은 불안에 떨며 정원을 거니는 중이었다. 밤 산책이었다. 역시 자신의 말대로 하도록 밀어붙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조바심에 잠들 수가 없었다. 한참을 정원을 서성이며 걷던 륜의 눈에 분수의 조각상이 들어왔다. 날개가 달린 여신상이었다. 물끄러미 그 여신상의 회백색 얼굴을 바라보던 륜은,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신님, 부디 그 사람이 다치지 않게 해 주시기를..."
그리고 갑자기 스스로가 우스워서 실소했다. 자신도 모략의 여신, 그 아나테마인 주제에, 무슨 신에게 기도를 한단 말인가? 그래도 기도하고 싶었다. 눈을 감고 두 손을 꼭 쥔 륜은 이제서야 사람들이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깨달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때였다.
"응?"
륜은 눈을 뜨고 먼 남쪽을 바라보았다. 어떤 맑은 소리를 들은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알현실 가득 맑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쿨럭, 쿨럭."
아이는 무릎을 꿇은 채로 피를 쏟아냈다. 장기가 뒤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어깨를 주축으로 엄청난 무력감이 밀려들어왔다. 악마를 잡는 사자궁의 절기, 라 크로이츠. 그 절반을 이루는 십자형의 낙인이 어깨 가득 새겨져 있었고, 상의가 찢겨나가 맨살이 드러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냥, 도끼에 매달린 채로, 몸을 던질 줄이야."
사자궁은 마지막에 비스듬히 솟은 돌조각을 박차고 뛰어올라 덮쳐왔다. 아이는 참랑격으로 맞섰다. 하지만, 이미 데몬스폰의 피를 듬뿍 머금은 빌헬름의 도끼를 피해 없이 막아낼 수는 없었다. 도끼날이 오른 어깨를 파고들었고, 살과 맞닿은 도끼날은 순식간에 낙인으로 형태를 바꾸어 아이의 우반신 전체에 십자형으로 새겨졌다. 그러나 아이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도끼날이 사라지며 나타난 사자궁의 진정한 모습, 세검을 후려치는 데 성공했고, 허공에 뜬 채로 그 충격을 받은 빌헬름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추락했다. 레버넌트 렉스가 뚫고 나온 저 깊은 구멍으로였다.
알현실 가득 울린 맑은 소리는, 그 세검을 천갈궁이 후려치며 난 소리였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저 깊은 구멍으로 떨어졌으니, 사자궁도 무사하진 못할 터였다. 깔끔한 최후였다. 무저갱처럼 깊은 구멍을 들여다보던 아이는 뒤돌아서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멈춰섰다.
"우우욱."
결국 승리한 건가. 어려운 싸움이었다. 되뇌이던 아이는 갑자기 구토감을 느끼고 입에 고인 것을 쏟아부었다. 타격을 입으며 내장 일부가 토막나기라도 한 것인지, 핏덩이와 위액이 뒤섞여서 흘러나왔다.
'괜찮으냐, 어린 순례자야?'
"괜찮아. 아, 그런데 이 낙인은 정말, 정말 거지같네. 세검까지 맞았다간 죽었겠어."
사자궁의 절기인 라 크로이츠. 그것은 이 낙인을 데몬스폰의 몸에 새기고, 사자궁을 찔러넣음으로써 완성된다. 낙인만을 새겨넣고 저 밑으로 떨어져 죽었기에 결국 그 절기는 완성되지 못했지만, 낙인은 몸에 남아서 아이를 괴롭게 하고 있었다. 아마도 한동안은 아이를 괴롭게 할 것만 같았다.
'이 낙인은 어떻게 할 작정이냐?'
"글쎄, 륜, 씨한테, 물어보면, 제거할 방법을 알려주겠지."
아이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리고 몸을 추슬러서, 멍하니 이 쪽을 바라보고 있는 드미트리에게로 걸어갔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악마인 주제에, 사자궁을... 성좌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말도 안 되는건 당신의 명줄이죠."
아이는 드미트리의 이마에 세게 딱밤을 먹였다. 악, 비명을 지른 드미트리의 이마에 새빨간 혹이 부풀어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더욱 세게 후려치고 싶었지만, 앞으로 드미트리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 이제 컨쿼러가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하십시오."
이제부터 드미트리는 스스로가 보증한 계약에 따라서 아이를 컨쿼러로 인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컨쿼러를 건네받을 때까지, 드미트리는 아이에게 해를 끼칠 수 없었고 충실히 도움을 주어야만 했다. 노예나 다름없었다. 얼굴이 흙빛이 된 드미트리는 흐느적거리며 몸을 일으켜서 앞장서기 시작했다.
이 전쟁을 일으킨 목표이자,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최후의 병기. 사소필렌의 성물인 컨쿼러가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아이를 안내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