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세 번째 동행 ( 1 )
힘없이 걸어가는 드미트리를 앞세우고, 아이는 블로어를 꺼내들었다.
륜에게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손잡이에 힘을 밀어넣고 정신을 감응하기 시작하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ㅡ괜찮은가? 상황은 잘 끝났나? 어디 다치진 않았는가?
"귀 아파요."
피식 웃으며 아이는 자초지종을 알려주었다. 드미트리와의 내기의 내용, 사자궁의 등장, 그리고 자신이 승리해서 지금 안내를 받는 중이라는 것까지. 초조하게 이야기를 듣던 륜은 아이가 무사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ㅡ 다행이에요. 요 몇 시간 동안, 정말로 수명이 몇 년은 줄어드는 줄 알았어요...햐측!
"햐측?"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고민한 아이는 잠시 후에야 그게 기침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사람의 기침소리라기보단 고양이의 기침소리에 가까운 소리였다. 그 이상한 기침소리가 부끄러웠는지, 륜은 얼버무렸다.
ㅡ 아무것도 아니에요, 햐측!
얇은 옷차림으로 밤의 정원을 산책하느라 가벼운 코감기가 온 것이었다. 몇 번이나 그런 기침을 거듭한 륜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후에야 제대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ㅡ 그럼 드미트리는 내기에 입회했을 때, 가미온의 사도로서 이 내기의 이행을 보증했다 이거죠?
"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서라고도 했습니다."
ㅡ 그럼 지급의 이행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는 없겠군. 그건 파계 율사들이 규약으로 정해놓은 보증일세. 그렇게 선서한 이상, 선서한 자는 자신의 모든 열과 성을 다해서 승리자를 도와야만 한다네.
아이는 고개를 들어 드미트리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기운이 빠진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걷는 그녀의 뒷모습에선 확실히 어떤 저항의 의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따금씩 겁먹은 눈으로 힐끔힐끔 아이를 쳐다볼 뿐이었다. 아이가 블로어를 쥐고 있는 것이, 자신이 허튼 짓을 하면 베어버리려는 의도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ㅡ 다행일세. 이렇게 쉽게 컨쿼러를 얻게 될 줄은 몰랐어.
방에 들어가 드러누운 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꽤나 고생했다고 생각했는데, 쉽게 얻은 건가요?"
ㅡ 네. 가장 잘 풀린 축에 속해요. 지금까지 저는 예지에서 수많은 멸망의 사례를 보아 왔는데, 거의 모든 경우 컨쿼러는 제때 활용되지 못했어요. 견제를 이유로 여러 세력이 뭉쳐야만 움직일 수 있도록 설계해놓았기 때문에, 알력다툼과 암투가 너무 심했거든요.
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신이 보아왔던 사례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륜이 보아왔던 가상의 미래에서 컨쿼러는 늘 제때 활용되지 못했다. 어떤 경우에는 아탕칼리가 컨쿼러를 강제로 탈취한 다음 십자군을 일으키려다 컨쿼러가 소실되기도 했고, 어떤 경우에는 제국에 반발한 작센과 기나센의 연합국이 컨쿼러를 자침시키기도 했다. 사소필렌이 컨쿼러를 확보한 채 경쟁 세력들에게 경매를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ㅡ 그래서 정말 안타까웠어요. 어떻게든 조기에 확보해서, 사태의 초창기에 컨쿼러를 투입할 수만 있다면, 이것보단 훨씬 좋은 결과를 이뤄낼 수 있을 텐데 하고...
아이는 이미 전쟁을 통해 기나센과 작센을 통합한 상태였고, 어포슬과의 협조를 통해 다른 세력이 알력다툼을 일으킬 여지도 차단한 상태였다. 여기에 컨쿼러만 얻게 된다면 륜이 보아왔떤 어떤 미래보다도 좋은 상황이 현실이 되는 것이었다. 륜이 이렇게 신나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ㅡ 하지만 그것보다도 자네가 무사하다는 게 더 기쁘다네.
"말이라도 기쁘네요... 윽!"
어깨에 통증을 느낀 아이가 멈춰선 것은 그때였다.
ㅡ 왜 그런가? 그 음흉한 여자가 무슨 수작이라도 부렸나?
"헛것이라도 보입니까? 그렇게 멈춰 서서 무슨 소리를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습니까?"
륜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와 드미트리의 밉살스런 목소리가 들린 것은 동시였다. 앞장서 걸어가던 드미트리는 볼멘소리로 물었다. 아이는 잠시 현기증을 느끼고 휘청거리는 중이었다. 아까 사자궁에게 당한, 십자 모양의 낙인이 쑤셔왔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낙인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당신 뒷담이요."
"윽!"
푸르죽죽한 얼굴이 된 드미트리는 다시 고개를 홱 돌리고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블로어 너머에서 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ㅡ 어디 아파요? 부상이 심한가요?
"아뇨, 괜찮습니다."
부활을 꿈꾸는 악마의 뼈라고 했던가, 확실히 상처에 새겨진 낙인은 보통 부상이 아니었다. 매만지자 뼈가 웃자란 것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어렸을 때, 발이 부러져서 부목을 댄 적이 있었는데, 철로 된 부목을 이식한 듯한 느낌이었다.
ㅡ 그럼 그 파계 율사한테 부축이라도 해 달라고 하는 건 어때요?
"예?"
ㅡ 가미온의 선서라는 건 그 정도의 강제력이 있거든요. 약속을 지킬 때까지, 그 사람은 당신의 정당한 부탁을 거절해선 안 돼요.
그 말을 따라보았다. 드미트리는 얼굴이 불그락푸르락해져서 소태를 씹은 표정을 지었지만, 륜의 말대로 거절하진 못했다. 아이의 오른편에 다가온 그녀는 안간힘을 쓰면서 아이의 팔을 자신의 목에 걸었다.
"으그그극... 자! 빨리 갑시다!"
드미트리의 체구는 아이보다 훨씬 작았으므로, 옆에서 보면 거의 괴롭히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림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선서라는 게 효과가 좋기는 한 모양이구나, 어린 순례자야.'
그런 모습으로 한참을 움직여서 도착한 곳은, 왕성의 비밀 통로였다. 지하실의 간이 주방 벽 너머에 설치된 통로였는데, 구조상 절대로 그런 거대한 공간이 있을 수 없는 곳인데도 통로의 끝엔 거대한 공동이 있었다. 공간을 왜곡하는 마술을 걸어놓은 모양이었다.
"이제, 이제, 여기서 이 계단을 타고 쭉 내려가면, 컨쿼러가 나옵니다."
드미트리는 헥헥대며 말했다. 아이는 그제서야 부축을 그만두어도 좋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그녀는 체면도 잊고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있었다. 체력이 뛰어난 다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육체적인 능력이 정말로 빈약한 모양이었다. 이번엔 아이가 앞장서서 횃불을 들고, 나사형으로 길게 늘어진 계단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드미트리는 엉거주춤 아이의 뒤를 뒤따랐다.
이렇게 깊은 지하라면 축축한 습기나 곰팡이의 향내가 느껴질 법도 한데, 사방은 사막처럼 메말랐고 고요했다. 바람도 한 점 없어서 아이가 손에 든 횃불은 오직 움직임을 따라 흔들릴 뿐이었다.
"아."
절반쯤 내려왔을 떄, 아이는 탄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컨쿼러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저게 전부 황금인 건가?"
황금으로 이루어진 거인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전사와 같은 모습이었다. 어깨부터 주먹까지 덮는 거대한 건틀렛이 팔을 감싸고 있었고, 세 개의 날렵한 뿔이 달린 투구를 얼굴 전체에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겉면은 모두가 찬란한 금빛이었다. 횃불을 든 아이의 모습은 그 흉갑에 비쳐서 일렁였다.
"이거라면..."
그림자 섬에서 있었던 기억. 귀르겐의 기억으로 보았던 그 흐릿한 뼈 괴물의 형상을 떠올렸다. 또 아우렐리우스가 보여주었던 그 괴물의 구조도를 떠올렸다. 이 컨쿼러와 그 괴물, 헤카톤 케이레스는 자웅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크기가 비슷했다. 컨쿼러와 그 괴물이 팔을 맞잡고 싸우는 장면이 머릿속에 저절로 떠올랐다. 저 멀리서 아지프의 마술사들이 굉혈포를 날려대지만, 컨쿼러를 감싸는 장막이 그것을 막아내고, 밑에서는 기나센의 용병들이 해골과 칼을 맞대며 함성을 내지르는 장면이었다.
"이길 수 있다."
그 가슴에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구멍으로 향하는 계단까지 친절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저 구멍을 타고 컨쿼러의 속으로 들어가서, 성구를 이용해 컨쿼러를 가동시키면 확보는 끝나는 것이었다. 아이와 드미트리는 곧 그 구멍 앞에서 멈춰섰다. 컨쿼러를 돌려주고 나서 자신의 처분이 어떻게 될까, 그것을 염려하며 흙 씹은 표정을 짓던 드미트리에게 아이가 말을 걸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아이는 구멍의 문을 여는 손잡이를 붙잡고, 나직이 말했다.
"저는 당신 개인에게는 어떠한 호감도 없습니다. 용서할 생각도 없고."
"그런가요. 피차일반이네요. 그래서요?"
"그렇지만, 당신이 이루려고 했던 것에 아예 공감하지 않는다는 건 아닙니다."
드미트리는 눈을 크게 떴다. 금색의 눈알이 드러나 동그랗게 빛났다. 아이는 말을 이어갔다.
"이유 없이 원한을 사고, 이유 없이 차별 받고. 그게 어느 정도로 슬프고 힘든 일인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물건을 여기 준비하고, 멸망에 대비한 안배를 해 둔 것은 분명 당신들의 공로겠죠. 그러니 그것을 사용하는 대가로 한 가지만 약속하겠습니다."
"그게 뭔가요."
"멸망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게 되면, 차별 없는 나라 대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 그런 약속입니다."
아까 드미트리에게 협상의 조건으로 내걸었던 걸 무상으로 하겠다는 뜻이었다. 드미트리의 입술이 어색하게 떨렸다. 이런 자리에서 꺼내기엔 지나치게 동화적인 말이지만, 아이에 대한 정보 말고는 거의 모든 기억을 삭제당한 드미트리는 알고 있었다. 이게 이 사람의 본성이고, 진심이라는 것을.
"그럼 그냥 저희 말을 따라서 저희를 도와주면 안 됩니까? 악!"
드미트리는 이마를 감싸쥐고 쭈그려앉았다. 그 가당찮은 소리에 아이가 또 이마에 딱밤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주저앉은 드미트리를 내버려두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기다란 복도 그리고 내부가 드러났다.
"저것도 전부 금인가."
컨쿼러의 내부 구조는 놀랄 만큼 단순했다. 위태롭게 설치된 복도의 끝에는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그 밑에선 용광로처럼 금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물건을 떨어뜨렸다간 흔적도 없이 녹아내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게... 이런 모습인던가?"
아이를 뒤따라 복도에 들어선 드미트리는 컨쿼러의 내부를 보고 이상한 말을 흘렸다. 아이는 그 말을 무시하고 성큼성큼 복도의 끝으로, 제단으로 걸어들어갔다. 거기에는 성구를 설치할 수 있도록 준비된 석판이 있었다.
'어린 순례자야, 조심해라. 이 석판에서 어떤 강력한 마술의 흔적이 느껴지는구나.'
그 석판을 들여다본 림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석판에 성구를 올려놓으면, 컨쿼러는 가동을 시작해서 자신의 진중으로 이동할 것이었다. 그렇게 컨쿼러를 가지고 군세와 함께 귀국하면 목표 달성이었다.
"알고 있어. 이렇게 커다란 걸 움직이려면 보통 복잡한 마술이 필요한 게 아니겠지."
아이는 석판의 둥근 홈에 성구를 끼워넣었다. 맞춰서 제작된 듯이, 성구는 석판에 딱 맞는 크기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음?"
아이는 고개를 홱 돌려서 드미트리를 쳐다보았다. 드미트리는 조심조심 깨금발로 복도를 건너서 막 제단 가까이 다가온 참이었다.
"신기를 불어넣어야 하는 건가?"
석판 옆에 그려진 그림에는 그런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아이는 성구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자신의 몸에서 신기를 짜내어 성구에 불어넣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하던 컨쿼러 내부가 밝게 빛나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뭐, 뭐야?"
갑자기 성구에서 빠져나온 금빛의 실이 아이의 몸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컨쿼러 내부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아이가 당혹한 얼굴로 드미트리를 쳐다보았으나, 드미트리 역시 당황한 얼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위태하게 설치된 복도가 미친듯이 흔들렸고, 드미트리는 엉거주춤 아이의 팔을 붙잡고 매달려 있었다.
"저, 저도, 모르는, 아아악!"
치이익, 컨쿼러 안에 가득 들어차 있던 황금이 끓어오르며 하얀 수증기를 내뿜었다. 그 수증기 때문에 화상을 입을 듯한 열기가 휘몰아쳤다. 드미트리는 겁먹은 표정으로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황금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마도 이 컨쿼러 안에 가득한 황금은, 어떤 마술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드미트리가 아는 한 황금을 사용하는 마술은 하나밖에 없었다.
"가, 가짜?
컨쿼러의 겉면이 녹아내리며, 거대한 황금빛의 문자열로 변해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
쿠구구궁!
왕성 근처의 아름드리 나무에 올라타서 에바는 사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들려온 굉음에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굉음은 왕성 안으로부터 들려왔다. 아무래도 왕성 안에서 어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뭐야?"
에바는 놀라서 입을 벌렸다. 어찌나 크게 입을 벌렸는지, 송곳니가 드러나 하얗게 번뜩였다.
"왕성 전체가, 이상한 마법진에 파먹혔잖아?"
거대한 금색의 마법진이 마법진을 휘감고 있었다. 원형의 마법진은 위아래로 흔들리며 원통형을 이루었다. 마치 왕성을 훑어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나무에서 황급히 내려온 에바는 넋이 나간 듯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의 마술은, 조디악의 옆에서 살았던 에바도 생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번쩍!
그렇게 왕복을 거듭하던 마법진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그리고 세상을 덮을 듯한 흰 빛이 터져나왔다. 이제 에바 뿐만 아니라, 사방에서도 놀란 사람들이 튀어나와 웅성이고 있었다. 에바는 소매를 들어 빛을 막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공간 이동?"
왕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검고 깊게 뚫린 구멍만이 커다랗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에바는 지식을 더듬어 눈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했다.
"누군가가, 성을 통째로, 공간 이동시킨 거야?"
왕성에 준비된 컨쿼러는 가짜였다. 그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과, 성구를 박아넣기 위한 제단은, 성구의 힘을 이용해서 아이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준비된 안배였던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몰랐지만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파악한 에바는, 재빨리 나무를 타고 올라가 귀환하기 시작했다. 위급함을 알려야 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