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세 번째 동행 ( 4 )
아지프의 마탑은 화장터의 굴뚝처럼 솟아 있었다.
길게 늘어진 탑그림자는 음산해서, 도시 전체가 탑에 짓눌려 죽어가는 인상이었다. 텅 빈 대로에는 지나다니는 수레 하나 없었다. 아이와 드미트리는 구석진 뒷골목에서 내렸다. 잠시 두 사람을 가려주듯 서 있던 마차는 인사도 없이 떠나갔다.
거의 입술에 닿을 듯 바짝 타오른 꽁초를 발로 비벼 끄고, 아이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치이익, 담뱃불이 마지막으로 사그라드는 소리가 이상하게 귀에 크게 들려왔다. 드미트리는 겁먹은 눈동자로 사방을 살피며 그 뒤를 따랐다.
"마치, 유령들의 도시 같군요. 원래 여기가 이런 곳이 아닐 텐데..."
"어떻게 아는 겁니까?"
"몰라요. 그렇지만 조금은 기억이 나요. 여길 왔던 적이 있던가?"
아리송한 소리였다. 기억이 삭제된 탓일지도 모르지만, 아이는 드미트리의 이마에 딱밤을 날려서 대답했다. 휘청이며 넘어질 뻔한 드미트리가 자세를 바로잡고 항의하려고 할 때, 그 항의는 도로를 가득 메우며 달려오는 운구차의 소리에 삼켜졌다. 아이 옆에 붙은 드미트리는 그 운구차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저, 저건..."
운구차라기보다는 고기수레라고 하는 것이 더 알맞을 형상이었다. 흰 줄로 테두리를 두른 수레 위에 시체가 가득 쌓여서 쓰레기처럼 운반되고 있었다.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선 지독한 시체의 냄새에 화학 약품의 비릿한 잔향이 섞여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냄새는 저 멀리 솟은 마탑에서부터 끼쳐왔다. 아마도 저 마탑에서 실험에 사용한 시체들인 모양이었다.
"욱,우욱..."
지금의 드미트리는, 갓 율사 시험에 합격하고 고향에 돌아왔던 어린 시절의 인격에 가까운 상태였다. 이렇게 구역질나는 장면은 아직 보지 못한 상태였다. 구토감을 느끼고 헛구역질을 몇번 한 드미트리는 입을 떡 벌렸다. 저 너머에서 그 운구차와 같은 수레가 몇 대나 줄지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대체, 이 동네는..."
"가죠. 여기서 오래 머무를 시간이 없습니다."
아이는 그런 드미트리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드미트리는 영문을 모르고 쫓아갔다. 무언가를 경계하는 것인지, 아니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아이는 드미트리에게 계획의 세부적인 내용을 잘 말해주지 않았다. 곧 두 사람은 굳게 문이 닫힌 집 앞에 섰다.
"여기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 같은데요."
처마에 걸린 새집과 유리창에 걸린 거미줄을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아이가 독특한 방식으로 문을 두드리자마자 달라졌다. 눈만 내놓을 수 있도록 자그맣게 뚫어놓은 비밀문이 열리며, 두 사람을 훑어보더니 물었다.
"손님이우?"
"아지프의 마술사는 아닙니다."
그렇게 대답하자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꽤나 뚱뚱했다가 최근 살이 쪽 빠진 듯, 헐렁한 옷을 입은 안주인이 잽싸게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부산스레 하소연을 늘어놓는 안주인의 말을 듣고서야 드미트리는 이 가게가 왜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지 깨달았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간단 말입니까?"
"말도 마시우. 어느 날은 쌍둥이가 필요하다고 쌍둥이를 죄 잡아갔다가, 어느 날은 노인이 필요하다고 노인을 죄 쓸어갔다가... 무슨 물고기 쓸어가는 어부인 줄 알았수."
최근 폭주하기 시작한 아지프의 마탑이 기승을 부리기에, 그들의 눈에 띄는 것을 피하고자 이런 식으로 근근이 영업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마차에서 들었던 상인들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아이는 끝도 없는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안주인의 말을 가로막고,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네주었다. 아까 마차에서 연필을 빌려 그리던 것이었다.
"이런 옷을 부탁드립니다."
"허, 이게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수?"
혀를 내두르며 선금을 받아간 안주인이 꺼내온 것은, 드미트리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라달라리아의 율사를 호위하는 사람들, 집행관이 입는 예복이었다. 아이는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군데군데가 너덜너덜해진 옷을 내던지고 예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오히려 드미트리가 구석에 앉아 딴청을 피울 정도였다.
"다음 거는 찾기까지 좀 오래 걸릴 텐데, 저기서 앉아서 기다리슈."
옷깃을 여민 아이는 드미트리의 앞에 털썩 걸터앉았다. 눈처럼 새하얀 정수리와 뒷머리가 드미트리의 눈에 들어왔다. 상황을 몰라 눈만 껌뻑대고 있는 드미트리에게, 아이는 조용히 부탁했다.
"제도에서 파견된 집행관들은 다 특징적인 말총머리를 하죠?"
"예? 예. 저도 거기서 머무르던 시절엔 자주 봤습니다만..."
"그럼 부탁합니다. 제 머리도 그들과 비슷하게 손질해주십시오."
그제서야 드미트리는 아이가 집행관처럼 스스로를 꾸미려 한다는 걸 알았다. 주저하며 끈을 받아다 머리를 정리해주는 드미트리의 귀에 아이의 목소리가 잇달아 들려왔다.
"지금 이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그게 멸망의 전조입니다."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드미트리는 머리를 묶던 손을 멈추고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당신도 아마 아지프의 7위계가 탄생하는 것을 기점으로, 세계가 멸망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건 알고 있겠죠. 이게 그 과정입니다."
일곱 주신만이 마술로, 도구화된 신앙으로 가혹하게 지배하는 세계, 센디엘. 그 땅에서 존재할 의지를 잃어버리고 절망한 신들은 외신이 되어 날이 갈수록 더 거세게 세계를 덮쳐왔고, 그들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아지프는 더욱 더 가혹한 희생을 일삼아 제국을 병들게 만들었다.
"태초에 제국의 설계자는, 나머지 학파를 묶어 대 아지프 동맹의 형식으로 내부적 균형을 이루려 했으나, 외신의 침공이라는 당위 아래 그 균형은 무너지고 말았죠."
그건 드미트리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드미트리는 가만히 그 이야기를 경청했다. 아이의 목소리는 작지만 또박또박 뜻한 바를 말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지프의 7위계가 탄생하게 되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전쟁을 합친 것보다도 거대한 내전이 터집니다."
올라선 자는 다른 파벌을 숙청하려 들고, 파벌의 수장들은 자신의 실험을 완성해서 7위계가 되고자 제국을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즉흥곡처럼 수백, 수천가지의 선율을 그리며 멸망으로 향하는 길을 보여주었던 예지들, 그 예지들에서 단 한 번도 빗나가지 않고 반복되었던 전개 과정이었다.
"이 도시는 지금 7위계에 올라서려는 학장의 덧없는 욕심 때문에 죽어가고 있죠. 같은 일이 앞으로 제국의 도처에서 일어날 겁니다. 이것이 다른 파벌과의 경쟁이 아닌 내전이기에, 타락한 학파들은 민간인이 얼마나 죽든 개입하지 않고 방치할 것이고, 그래서 쇠약해진 제국은 외신에게 삼켜져 멸망하게 된다. 그런 미래가 준비되어 있겠죠."
아이는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어갔다.
"이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차별적인 살육은 명백히 불법입니다. 그리고 율사들은, 제국의 영토 안에서라면 자신보다 위계가 높은 마술사를 상대로도 맞서 싸울 수 있죠. 그러니 각지마다 율사와 집행관이 파견되어 이들을 처벌해야 하겠습니다만..."
"그럴 리가 없죠. 오히려 이길 만한 파벌과 유착하려고 들 걸요."
제도에서 그들의 실태를 똑똑히 보았던 드미트리가 단칼에 대답했다. 아이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게 원래 일어나야 할 일이었다. 아지프의 마탑주에 관련된 재판으로 호노레가 축출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아이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생겼을 일. 그러나 그 미래는 바뀌었다. 그것을 떠올리고 미소를 짓는 아이와 다르게,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린 드미트리는 아이의 머리를 아프도록 세게 묶었다. 소심한 복수였다. 그리곤 앙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요? 그 말을 지금 꺼내는 이유가 뭔가요. 성구의 마력을 충전하는 게 당신의 목적 아니었습니까?"
아이는 품 속의 성구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이대로 이 전횡과 내전을 방치했다간 세계가 멸망한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 말인가요?"
"예. 그리고 뜻을 함께해주기로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드미트리는 그 말을 듣고, 카이베크와의 공방전에서 있었던 성녀의 개입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과의 재판에서 성녀의 꽃을 사용했던 것을 떠올렸다. 아이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말했다.
"이미 아지프와 결탁하려는 세력은, 그 사람들의 노력으로 축출되었습니다. 이 세계에서, 라달라리아는 아지프의 이런 월권 행위를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적극적으로 율사와 집행관을 파견해서 단속할 겁니다."
"그런..."
우물대던 드미트리는 불현듯 깨달았다.
"그럼 당신이 여기서 이렇게 집행관 흉내를 내려는 것도, 라달라리아의 이름을 빌려서 이 도시의 마탑을 쓸어버리기 위해서인가요?"
"예. 아는 율사의 도움을 받아서 그렇게 할 겁니다."
드미트리는 천천히 곱씹었다. 아이는 지금 컨쿼러의 성구를 충전하기 위해, 이 도시를 지배하는 아지프의 마탑을 부숴야 하는 처지였다. 그리고 그렇게 마탑을 부수는 김에 자신과 동맹을 맺은 라달라리아의 체면을 세워주려 하는 모양이었다. 라달라리아의 율사와 집행관이, 악행을 저지르는 아지프의 마탑을 처벌한 것으로 연출해서.
"그 뿐만이 아니죠, 영악하군요. 컨쿼러가 준비되었다는 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극비로 해야만 할 테니까 말이죠, 성구의 존재를 숨길 생각이군요."
만약 그런 연출 없이 마탑을 부순다면, 사람들은 그 목적과 배후를 궁금해할 것이다. 누군가 그것에 의심을 갖고 추적해나가다보면 성구와 컨쿼러를 들킬 수도 있다. 하지만 적당한 명분과 연출을 보여준다면, 의심은 줄어들 것이다... 누가 세운 계획인지, 상당히 깔끔했다. 그렇게 고개를 주억거리던 드미트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만, 아는 율사?'
이렇게까지 계획이 잘 준비된 걸 보니, 아마 제도에서 율사의 파견을 요청해두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드미트리의 지식에서, 파견될 만한 율사는 한 명 밖에 없었다.
'그 분홍머리 여자?'
도박장에서 보았던 그 다나라는 여자 율사가 틀림없었다. 드미트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만약 그 여자가 여기에 찾아온다면, 그리고 드미트리가 아이에게 저항할 수 없는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라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떤 꼴이 될지는 불보듯 뻔했다.
"흐으음, 글쎄요. 하지만 지나치게 위험하군요."
막아야 된다. 그런 생각으로 드미트리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당신이 바라는 그림을 그리려면 말이죠, 그 율사라는 사람은 일단 능력이 있어야겠죠. 마술사로서의 능력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이 도시의 마탑주가 정확히 어떤 죄를 저지른 것인지, 후에 책잡히지 않을 수 있도록 완벽하게 기소하고 물증을 얻어낼 수 있는 수사관으로서의 능력 말입니다."
"그렇겠죠."
"그,그게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위험할 거에요. 당신이야 더럽게 강하니까 죽을 일이 없지만, 아지프의 괴물들을 상대로 당신이 그 율사까지 보호해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그럴 수도 있죠."
"맞아요. 맞아요. 위험하다는 건 정치적 측면에서도 위험합니다. 이게 라달라리아의 첫 개입 사례로 널리 퍼지면, 그 율사는 암살 대상이나 공적으로 찍힐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당신과 친한 사람을 그런 위험에 빠지게 만들고 싶지는 않지요?"
"타당한 걱정이군요. 그렇습니다."
"맞아요. 거기에 신뢰도 문제도 있죠. 여기 걸린 비밀이 한두개가 아닌데, 뭔가 이상한 눈치라도 채면 엄청나게 일이 복잡해질 테니 말입니다. 혹시라도 율사 파견을 요청했다면, 지금이라도 그만두는게..."
"파견 요청? 그런 건 안 할 겁니다."
됐다. 역시 위험성을 내세워서 협박한 게 통했다. 드미트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커다란 안도감 때문에, 드미트리는 한참만에 나타난 가게의 안주인이 자신의 손을 붙잡고 방으로 끌고 들어갈 때까지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 얼굴은 심지어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그 미소지은 얼굴이 다시 빨갛게 달아오른 건, 안주인의 방에서 나온 후였다. 안주인은 고함에 놀라서 꿈뻑꿈뻑 드미트리를 쳐다보았다.
"왜 나한테 이런 옷을 입히는 건가요!"
"왜 그러슈? 혹시 가짜일까 염려하는 건가? 걱정 마시우. 여기에 율사가 올 일이 없어서 통 꺼내볼 일이 없었지만, 우리 집은 제도와 정식으로 계약한 옷집이라우. 정품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드미트리는 지금 하얀 율사복을 입고 있었다. 당연히 여자용이었다. 심지어, 꽃을 꽂기 좋도록 옆머리를 틀어 묶어서 연한 귀밑머리가 보이게 머리까지 다듬은 상태였다.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드미트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품에서 연분홍빛 라일락을 꺼내어 그 머리에 꽂아주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율사 연기를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예?"
드미트리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조건을 검토해보았다. 나름대로 고위직 율사까지 올라간 경험이 있으며, 원래 적이니 위험에 처해도 상관이 없고, 서약으로 묶여 있으니 배신할 염려도 없다. 거기에 공적으로 찍혀도 괜찮다. 자신이 말한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셈이었다.
"자, 드미트리 즈다예비치 율사님. 같이 죄인을 벌하러 갑시다."
제법 천연덕스럽게 손을 내뻗는 아이의 손에 붙들려서, 드미트리는 도살장으로 가는 양처럼 옷가게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