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세 번째 동행 ( 5 )
아지프 마탑에 의한 학살이 일어나고 있는 도시, 그 도시의 청사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청사의 그늘진 구석에선 수십 명의 어린아이와 한 명의 노인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노인은 이 도시의 시장이었다. 연신 한숨을 내쉬는 그의 손에서 불길한 문서가 빛났다. 독벌을 벌집처럼 품은 해골 문양이 새겨진 문서, 아지프의 문서였다.
"녹색 눈을 가진 열한살 이하의 아이들을 영광스러운 의무를 위해 제공해라...."
문서를 읽는 시장의 입술 밑에서 흰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흘깃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수십 명의 어린아이들이 비쳤다. 하나같이 불안한 표정으로 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장은 그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녹색 눈을 가진 아이들을 골라냈다. 그리고, 구석의 비밀문을 열어젖혔다.
"곧 무서운 사람들이 너희를 찾으러 올 거란다. 그 전에 이 통로로 빠져나가렴."
문 뒤에서 자그마한 구멍이 드러났다. 체구가 작은 어린아이나 간신히 들어갈 법한 자그마한 비밀 통로였다. 시장은 지금 시민들의 요청에 따라 수 많은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었고, 아지프에게서 제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들을 때마다 이렇게 아이들을 피난시켜서 숨겨왔다. 지난 몇 개월 간, 이 통로는 수십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구해냈다.
"뒤도 보지 말고 쭉 달아나서, 멀리 도망쳐야 한다. 알겠지?"
선별된 아이들은 의젓하게 시장의 명령을 따랐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되었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통로의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아이들을 보며 시장은 통로의 문을 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방법도 언제까지 통할런지..."
이미 그들이 낌새를 챈 기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물을 걷어가러 찾아왔다가 허탕을 친 마술사들의 싸늘한 표정을 떠올린 시장은 부르르 떨었다. 올 떄마다 요구한 종자들만 없으니 참 신기할 노릇이라고 그들은 비아냥댔다. 다음에도 그렇다면 정말 신기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협박이었다. 하지만 시장은, 이 땅에선 드물게, 관료의 본분을 다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의 상식에 이런 부당한 요구에 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시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통로 너머에서, 저 멀리서 괴물의 괴성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끌고 다니던 뼈괴물, 마골귀의 흉성이 틀림없었다.
"설마, 설마 눈치챈 건가?"
몇 번이나 같은 방식으로, 비밀 통로로 아이들을 빼돌렸으니, 그들이 눈치챘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리고 지금 바깥에 그들이 괴물을 몰고 왔다. 오늘도 통로로 아이들을 내보내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을 생포해서 추궁하려는 계획일 터였다.
쾅쾅쾅!
흉성에 이어서, 철판을 덧댄 통로가 미친 듯 울려댔다. 누군가가 기어서 달려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연달아 울리는 불길한 소리들로 겁먹은 아이들이 신음과 비명을 질러댔다. 그 소란 사이에서 시장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쩌지?'
이 비밀문을 열 것인가, 아니면 닫고 모른 척 할 것인가. 갈등은 깊었지만 판단은 짧았다. 시장은 드르륵 철문을 열어젖혔다. 불쑥, 몇 사람이 통로에서 쏟아지듯 빠져나왔다. 그 뒤로 괴물의 흉성이 또다시 길게 울려퍼졌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쿨록, 콜록, 먼지가..."
그리고 시장과 아이들은 빠져나온 사람들을 보고 당황했다. 전혀 처음 보는, 자그마한 여자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콜록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통로로 들여보낸 세 명의 아이들 중, 두 명의 아이들을 옆구리에 품은 채였다. 하늘색 단발을 단정하게 정리한 그녀는 흰 율사복을 입고 있었다. 그건 드미트리였다.
시장의 예상대로 바깥에선 아지프의 마술사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때마침 당도한 드미트리와 아이가 꼬마들을 구출해 이 통로로 보냈던 것이었다. 통로가 작아서 몸집이 자그마한 드미트리만 통로를 통과할 수 있었고, 아이는 지금 괴물들과 싸우는 중이었다.
"콜록, 콜록, 아, 안녕하십니까?"
따지자면 은인인 셈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시장과 아이들은 드미트리의 어색한 인사에 침묵으로 대답했다.
*
"그러니까, 여기서 일어나는 중대한 위법 행위들을 단속하러 제도에서 오신 율사님이란 말씀이십니까?"
드미트리를 포위하듯 둥글게 둘러앉은 꼬마들, 그 사이에서 시장은 조용히 말했다. 왜 청사에 시장 혼자 남아있느냐고 물었더니, 사태가 좋지 않아 모든 관원들에게 강제로 휴가를 내려서 혼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예. 최근 이 지역에서 끊이지 않는 탄원과 분노를 듣고 여신님께서 내려보내신 법관,그게 바로 저랍니다."
드미트리는 가슴을 펴고, 최대한 여성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일부러 내던 소년 목소리가 배여 있어서 어투가 조금 어색했다. 그 때문인지, 여전히 의심스러운 시선이 가시지 않자 드미트리는 자신이 데려온 꼬마를 무릎으로 불러 앉히고 말했다. 꼬질꼬질한 가운데도 녹색 눈이 빛나는 여자 꼬마였다.
"이 가련한 아이는 보았을 겁니다. 저와 제 집행관이 이 도시를 순찰하던 중, 여신의 뜻에 반하는 무리를 보고 지체없이 처벌에 나선 것을요. 그렇지?"
"응!"
꼬마아이가 그렇게 말해주자 의심이 조금 누그러졌다. 밖에서 울려퍼지고 있는 마골귀의 괴로운 흉성, 그리고 칼 부딪는 소리가 증거가 되어주었다. 시장은 탄식하며 말했다.
"허허, 무려 120년이 넘도록 제도에서 방치된 도시라서, 구원은 없을 줄 알았건만..."
"120년이요?"
그 말에 오히려 드미트리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제국의 변방이라지만, 이 곳은 율사의 법령이 효력을 가지는 제국의 일부였다. 그런데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이상했다.
"여기에 파견되셨는데 모르셨단 말입니까?"
시장의 눈에서 다시 의심이 피어올랐다. 어떤 정치적 사정이 있었는지, 아니면 농간이 있었는지. 이 도시는 제국의 감찰로부터도, 행정과 보살핌으로부터도 유리된 곳이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아지프의 마술사들 역시 함부로 전횡을 저지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모르셨다면, 어떤 탄원을 들어서 여기에 내방하신 것인지?"
"여, 여신님의 뜻으로?"
드미트리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뇨, 아뇨.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고 말고요."
"수상해!"
누군가가 소리를 내질렀다. 돌아보니, 드미트리가 안고 데려온 또 다른 꼬마였다. 그 아이는 드미트리에게 삿대질하듯 달려들었다.
"이 꼬맹이, 우리를 다 속여서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 아니야?"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제가 직접 구했잖아요!"
"거짓말! 괴물 보고 벌벌 떨다가, 형이 빨리 도망치라니까 대충 통로로 들어온 거잖아! 그래서 율도 버리고 왔잖아!"
그 말에 드미트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 꼬마의 말대로, 통로의 끝에선 많은 아지프의 마술사들과 마골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랬기에 아이가 그들을 제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괴물들의 위용에 놀란 드미트리가 벌벌 떨고 있을 때, 아이는 꼬마들을 구해 대피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통로는 네 사람이 지나가기엔 너무 좁았고, 그래서 꼬마 하나는 아이에게 맡기고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그 꼬마의 이름이 율인 모양이었다.
"버리다니요, 제 집행관은 강하니까요. 강한 사람 옆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판단한 것 뿐입니다."
"거짓말! 벌벌 떨면서 도망쳣잖아!"
"누가 벌벌 떨었습니까?"
"이런 꼬맹이를 어떻게 믿으란 말이야! 애초에 이거 율사는 맞는 거야? 꼭 남자 꼬맹이가 여장한 것처럼 옷도 안 맞고!"
"누가 꼬맹이입니까!"
얼굴이 빨개져서 꼬맹이와 삿대질을 반복하는 드미트리. 그것을 보고 주변의 시선도 싸늘해졌다. 자신이 구해줬는데도 의문을 제기하는 꼬맹이가 괘씸해진 드미트리는 그 꼬마를 집어들고,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다.
"키레넨?"
그 꼬마의 귓바퀴 속에서, 털이 길게 자라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키레넨의 특징이었다. 거기에 피부색도 키레넨의 피부톤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제국의 영토에 왜 키레넨 꼬마가? 사방을 살펴보니, 이 꼬마 외에도 키레넨으로 추정되는 아이들이 상당수 있었다. 아마도 이 변방의 도시는, 나름대로 곡절이 많은 곳인 모양이었다. 그런 드미트리의 당혹을 아는지 모르는지, 꼬마는 발버둥치며 소리쳤다.
"이거 놔! 이 가짜 사기꾼아!"
드미트리가 의외의 사실 때문에 당혹해할 때였다. 드미트리의 무릎에 앉아 있던 꼬마가 사태를 진정시켰다.
"그만. 버르장머리 없는 짓은 그만해."
그 말에 키레넨 꼬마의 난동이 멈췄다. 드미트리는 자신의 무릎에 앉은 꼬마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키레넨이 아닌, 제국민이었다. 그 꼬마는 먼지로 얼굴이 더러운 가운데도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언니는 우리를 다 버릴 수도 있었는데, 끝까지 꼭 끌어안고 데려왔는걸. 착하고 용감한 언니야."
드미트리의 입이 어색함으로 물결치듯 떨렸다. 실눈 사이로 금색의 눈동자가 자그맣게 드러났다. 이런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어색함을 가다듬은 드미트리는 큼,큼 헛기침을 하고 상황을 정리했다.
"맞아요. 이 꼬맹이가 믿건 안 믿건 그건 저 꼬맹이의 자유지만 말입니다, 저는 이 곳에 만연한 학살자들을 구속하고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파견된 율사가 맞습니다. 그리고 아주 유명한 제 집행관은 지금 저 바깥에서 당신들을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지요. 이제 당신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소를 완성해서 학살의 주범인 아지프의 마탑주를 처벌할 겁니다. 그러니 협조해주십시오."
갑자기 등장한 구세주치고는 뭔가 어설프고 못미더웠지만, 그래도 시장 앞에 나타난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시장은 곧 드미트리의 요구에 진지하게 협조하는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드미트리가 제일 먼저 물어본 것은 그것이었다.
"여기에 이민족이 꽤나 섞여 있는 걸로 보이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 말에 시장은 쩔쩔매기 시작했다. 아마도 드미트리가 키레넨 아이의 생떼 때문에 불쾌해졌다고 생각한 듯했다. 사죄를 청하는 시장을 손사래로 제지하며 드미트리는 거듭 물었다.
"아뇨, 그런 문제가 아니라 순수하게 궁금해서요. 당신이 여기서 보호하고 있는 아이들 중 상당수가 키레넨인 것 같은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그 말에 시장은 대답을 꺼려했다. 아무래도 함부로 남에게 말하기 뭐한 내용이 얽혀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꼭 필요한 질문이냐는 물음이 돌아왔지만, 키레넨에 관련된 것은 드미트리에겐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 집요하게 물어보자 시장은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그리고 드미트리는 황금색 눈을 크게 뜰 정도로 놀라서 되물었다.
"소니아 아바키렌? 그 이름이 왜 나옵니까?"
전혀 기억에 없는, 의외의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