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세 번째 동행 ( 6 )
드미트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시장이 들려준 설명을 곱씹었다.
이 지역은 중앙으로부터 소외된 지역이었다. 언젠가 아이가 들렀던 국경의 도시처럼, 국방을 명목으로 관리를 일임받은 아지프의 마탑은 책임을 방기했고 수탈 외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시장이 어렸을 때 도시는 궁핍하고 희망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소니아 아바키렌의 지원이 있었단 말입니까?"
따지듯 묻는 드미트리의 말에 안색이 노래진 시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드미트리의 소속을 라달라리아로 알고 있기에, 부정한 돈을 받았다고 추궁을 당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사죄를 구했기에, 드미트리는 시장을 추슬러 말을 이어가도록 시켜야만 했다. 시장은 더듬더듬 털어놓았다. 시장이 막 이 지역에 취임했을 무렵, 소니아에게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제국 각지에서 쫓겨난 키레넨을 이 지역에 보호해준다면, 계속 후의를 베풀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만..."
어차피 이 도시는 인구 부족으로 허덕이던 참이었다. 노동력이 늘어나는 것은 도시를 위해서도 기쁜 일이었기에, 시장의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 때 이후 이 지역에는 일정 수의 키레넨들이 섞여서 살아왔고, 시장은 시민을 보살피듯 그들을 보살펴 왔다는 말이 뒤따랐다. 드미트리는 가만히 곱씹었다. 즉 소니아는 돈을 써서 이 근방에 키레넨의 거주구를 만든 것이었다. 키레넨의 대표라는 소니아의 입지를 생각하면, 이런 제안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위화감이 드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왜? 나는 그 얘기를 처음 듣는 거죠?'
이곳은 북서 자치령에서 멀지 않았다. 그리고 이만한 규모의 거주구를 만들기 위해 드는 돈은 한두 푼이 아닐 터였다. 그런 거대한 재산 행사가 있었다면, 조디악의 총관이자 북서 자치령에서 오래 머물렀던 드미트리는 그 사실을 알아야만 했다. 혹시 삭제된 기억에 포함되어 있는 것인가? 이런 기억을 삭제할 까닭은 무엇인가? 드미트리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시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시장은 소니아와의 계약에 따라, 이 도시에 키레넨의 거주구를 꾸려 정성껏 보살폈다. 그런데, 이 도시에 자리잡은 아지프의 마술사 여럿이 키레넨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키레넨은 통제할 수 없는 신비한 힘을 핏줄에 품고 있기에 박해받는 민족이었다. 뒤집어 말하면, 좋은 실험 재료이기도 하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더럽혀지지 않은 실험 소체, 그러니까 키레넨의 어린 아이들을 실험 재료로 요구했고, 그때마다 시장은 이 시설을 통해서 그들을 보호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사에 이런 비밀 통로가 준비되어 있던 것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놈들의 폭주가 더욱 심해져서, 제국의 아이들까지도 요구해왔기에 두 종족의 아이들이 뒤섞이게 된 것입니다."
설명을 들은 드미트리의 입이 오묘한 곡선을 그렸다.
"믿기 어렵군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신께 맹세컨대, 그들에게서 받은 한 푼의 지원금도 사사로이 쓰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말입니다. 키레넨의 꼬마들은 제국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국의 관료인 당신이 목숨을 걸고 그들을 수십 년 동안이나 지켜왔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 이 말입니다."
"그런..."
"그냥 흉내만 내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아마 그 소니아라는 사람도 이런, 청사에 통로를 만들어서 빼돌리는 것까지 기대하진 않았을 텐데요."
그 말에 시장은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하얗고 푸석푸석한 머리터럭이 앙상하게 남은 정수리가 드러났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저는 제국의 관리이기 이전에 이 땅의 시장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아이들을 보호하는 게 시장의 의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드미트리의 입꼬리가 또 오묘하게 떨렸다. 시장의 태도는 진심처럼 보였고 시장의 말도 진심처럼 들렸다. 그리고 드미트리는 지금까지 이런 제국의 관리를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도 알 수 없었다. 이 불편한 상황은 의외의 개입으로 끝났다.
"이 자식, 역시 가짜지!"
"악!"
아까부터 드미트리에게 적대적이었던 키레넨 꼬마가 또다시 달려든 것이었다. 드미트리가 시장을 괴롭히는 것으로 오해하는 모양이었다. 어깨에 올라탄 꼬마는 날카로운 어금니를 드러내며 외쳐댔다.
"왜 할아버지를 괴롭히는 거야! 너 같은 가짜는 빨리 나가서 율이나 구해와!"
"이 버르장머리 없는 꼬맹이가, 악!"
드미트리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꼬맹이가 하얗게 드러난 맨 팔뚝을 세게 깨물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까지 진지한 분위기였던 장내에 한바탕 난리통이 벌어졌다.
"그만."
그 난리법석을 진정시킨 것은 억센 손이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희고 억센 손이 꼬마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올린 것이었다. 눈물을 글썽이던 드미트리는 그 사람을 보고 안색을 환하게 밝혔다. 그건 아이였다. 바깥에 모여 있던 마골귀와 아지프의 마술사들을 정리하고, 드디어 청사로 들어온 것이었다.
"아까 도망치라고 해도 싸우려고 들 때부터 알아봤지만, 참 용감한 녀석이구나."
"이거 놔!"
마구 난동부리며 아이도 깨물려고 몸부림치던 꼬마는, 아이의 다른 팔에 들린 꼬마의 얼굴을 보고 얼굴이 환해졌다.
"율!"
아까 통로로 나갔던 꼬마들 중, 유일하게 돌아오지 못했던 한 명의 꼬마가 아이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아이가 율을 내려놓자 키레넨 꼬마는 와락 끌어안고 볼을 부볐다. 율 역시 키레넨이었다. 귀에서 털이 길게 자라 삐져나온 것을 보면 확실했다. 아이는 무릎을 굽히고 꼬마들에게 얼굴을 가까이한 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속삭였다.
"안심하렴."
그 꼬마는 아이에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꼬마와 늙은이들만이 모여 있는 장내에서 아이의 신장은 도드라지게 컸고, 몸을 일으키자 자연스레 시선이 아이에게 집중되었다. 동화 속의 기사를 연상시키는 집행관의 복장으로 차려입은 아이의 콧날이 불빛 아래서 늠름하게 빛났다. 시장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저, 저, 이 분은, 누구이신지?"
대답한 것은 드미트리였다. 아이의 옆으로 쪼르르 달려간 드미트리는 가슴을 피고 자랑하듯 말했다.
"소개하지요. 이 지역에서 실험을 빙자한 학살을 벌이고 있는 마탑을 징벌하기 위해 직접 행차한 제 집행관입니다. 이 저택을 포위하고 있던 수십 마리의 인골귀를 처리한 것도 이 사람이에요!"
시장은 확인하듯이 꼬마를 쳐다보았다. 아이가 싸우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인지, 키레넨 꼬마는 이번에는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았다. 그저 잠들어 있는 율을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저, 이 분이 율사님의 집행관이신 건 알겠습니다만, 이 분 혼자서 마탑 전체를 벌하실 수 있단 말이십니까...?"
당연한 의문이었다. 드미트리가 자세하게 바깥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은 탓에, 시장은 당연히 바깥에 수많은 집행관과 마술사가 몰려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준비된 것이 이 한 사람 뿐이라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반응을 알아차린 드미트리는 아이의 옆구리를 두드리며, 준비해둔 말을 꺼냈다.
"이 사람은 보통 집행관이 아니니까요."
"보통 집행관이 아니라면..."
"현재 대륙의 유일한 성녀이신 호노레 블뢰유 님의 전속 집행관이자, 성도 8궁의 주인. 단테 아길리오 님이십니다."
그 말에 시장의 입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아이는 살짝 낯간지러움을 느꼈으나, 부정하지 않고 태연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단테의 위명은 사방에도 퍼져 있어서, 아이들 사이에선 환성과 감탄이 터져나왔다.
'연기력이 많이 늘었구나, 어린 순례자야.'
이 광경이 사뭇 희극적이라고 생각했는지, 림은 옆에서 킬킬대며 웃었다. 아이가 단테를 사칭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선례를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 도시를 기점으로, 이제 라달라리아와 아지프의 대립은 제국 곳곳에서 일어날 것이었다. 선례가 될 이 토벌은 가장 성공적이어야 했고, 또 전설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단테의 이름을 빌릴 필요가 있었다.
"의,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귀한 분이 어째서 이런 벽지에?"
"의심하시는군요."
"아니, 아닙니다."
시장은 벌벌 떨면서 부정했지만 의도는 뻔했다. 아이는 품에서 천갈궁을 꺼내 비껴들었다. 천갈궁의 형상은 단테의 금우궁과는 확연히 달랐지만, 그 품고 있는 고아한 기운은 비슷했다. 같은 뿌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었다. 저게 성도 8궁인가? 장내의 시선이 자연히 검끝에 모였다. 시선이 충분히 모이기를 기다린 아이는 조용히 손잡이를 세게 붙잡았다. 단단한 검 손잡이 너머로 신기를 밀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불이라도 붙인 듯 거대한 붉은 신기가 천갈궁 위에서 파도치기 시작했다.
"오오오..."
거대한 아지랑이가 시장의 눈동자 위에서 일렁였다. 그것이 범상치 않다는 것은, 살면서 한 번도 신기를 보지 못한 시장에게도 명확했다. 아이는 마지막 제안으로 의심에 쐐기를 박았다.
"정 확인해보고 싶으시면, 이 검을 움켜쥐어 보시면 됩니다. 불타지 않을 자신이 있으시다면 말이죠."
그리고 천장의 불빛을 받아 번뜩이는 손잡이를 내밀었다. 어울리지 않는 주인이 붙잡으면 그 주인을 불태운다는 성도 8궁의 전설은 유명했다. 겁먹은 표정이 된 시장은 손사래치며 아이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때를 틈타 드미트리가 쐐기를 박았다.
"이 정도면 우리 일행의 순수성은 증명이 끝났으리라 믿습니다. 쓰잘데기없는 의심 때문에 오래 걸렸군요. 지금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 도시 뿐만 아니라 제국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선례를 바로잡기 위해 중앙에선 무려 성좌를 이 곳에 파견해서 악인을 징치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드미트리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이제야 두 사람을 믿게 된 시장과 아이들은 희망으로 얼굴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 다음 두 사람은 시장과 아이들을 싸움의 현장으로 이끌었다.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아이의 뒤를 따라서, 시장과 꼬마들은 청사의 뒤편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리를 따라가는 오리새끼처럼 졸졸졸 줄을 지어서였다.
"우와..."
"이게 다 뭐야?"
"율, 정말로 여기서 살아남은 거야?"
그리고 싸움의 현장을 본 아이들은 하나같이 눈이 왕방울만해져서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무슨 전쟁이라도 일어난 듯한 현장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었다. 본보기를 만들려는 아지프의 의지는 독했다. 그들은 이 비밀 통로로 달아나는 꼬마들을 붙잡기 위해서, 열 마리가 넘는 마골귀를 투입했다. 열 마리의 마골귀면 천 명이 지키는 요새도 간단히 함락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전부, 전부, 성좌께서 처리하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