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91화 (191/279)

34. 세 번째 동행 ( 7 )

그 전력이 부서진 뼛조각과 돌덩이가 되어서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손을 대면 베일 듯 날카로운 절단면을 조심스레 매만지며 시장이 물었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자신이 정말로 죽음 문턱 앞까지 갔다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장은 다리에 힘이 풀려서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가 오지 않았다면, 이 무시무시한 괴물 떼거지에게 깔려 즉결 처형당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하나둘씩 그 사실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과 찬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드미트리는 그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다.

레바테인에 반토막이 나서, 처참하게 처박힌 마골귀의 잔해 위에 올라타서 드미트리는 턱을 쳐들었다.

"이제부터 저는 이 마탑의 실태를 제국에 기소할 겁니다. 더욱 엄정한 법의 실천을 위해 협조해주십시오."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진심에 찬 환성이 터져나왔다. 눈을 감고 으스대던 드미트리는 가슴에 강렬한 충격을 느끼고 눈을 떴다. 뭔가 했더니 아까 드미트리의 편을 들었던 제국의 여자 꼬마였다. 드미트리의 작은 품에 얼굴을 파묻은 그 꼬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정말 고마워, 똑똑한 언니."

"언, 언니라니..."

"그럼 이제부터 언니만 믿으면 되는 거지?"

드미트리의 입이 또 다시 물결치듯 흔들렸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야 그 기분의 정체를 대강이나마 이해할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율사가 되기 위해 막 제도로 유학을 떠났을 무렵에는 드미트리도 이런 꿈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런 잇속이나 악의 없이, 위기에 처한 힘없는 사람들을 구하는 율사가 되어 감사를 받고 싶다는 꿈이었다. 그 이후 있었던 수 많은 풍파 때문에 잊어버린 꿈이었지만, 기억을 삭제당한 상태이기에, 그리고 이런 진심으로 가득한 감사를 몇 번이나 들었기 때문에 어렴풋이 그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언니?"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을 묻는 꼬마에게 드미트리는 큰소리치듯 대답했다.

"맞아요, 저만 믿으면 됩니다!"

다시 한 번 터지는 환성 속에서, 아이는 의외라는 듯 드미트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그 이후, 청사의 집무실.

드미트리는 산더미처럼 문서가 쌓인 책상에 밤늦도록 앉아서 깃펜을 사각대고 있었다. 다른 모든 방의 불이 꺼졌고, 도시의 불빛마저도 모두 저물었는데도, 이 방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워낙 많았던 탓이었다.

시장은 기꺼이 자신의 집무실을 드미트리를 위해 내주었고, 자신이 모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모아 드미트리에게 건네주었다. 방치되었다고는 하나 어쨌든 제국의 청사였다. 집무실에는 제도와 통신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내일까지 기소문을 완성해서, 세계에 이 지역의 실태를 알리고 정당성을 확보한 뒤 마탑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드미트리의 계획이었다.

"어디 보자, 행정행위가 아니라는 증명은 이걸 첨부하면 되겠고..."

그리고 드미트리는 몇 시간째 서류를 모아서, 정연한 손놀림으로 문서를 작성해나가는 중이었다. 비록 율사로서의 힘은 모두 잃어버린 그녀이지만,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과 법률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기소문을 쓰는 데에는 딱히 마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때 5위계의 율사라는 고위직에 올랐던 그녀가 작성하는 기소문은 깨끗했고 막힘이 없었다. 한참이나 일필휘지로 글을 작성해나가던 드미트리의 오른손이 멈추었다.

"문제는, 희생자 중 제국민이 아닌 키레넨도 섞여 있다는 건데..."

키레넨은 제국의 법률에서 제국민과 같은 권리자로 여겨지지 않았다. 고로 별건의 기소문이 필요했다. 펜 끝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두 번째의 기소문을 작성하기 시작하던 드미트리는,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펜끝을 멈췄다.

"가만, 가만. 생각해 보자구요."

내가 왜 이렇게 성실하게 기소문을 작성하고 있는 거죠? 드미트리는 스스로 그런 질문을 던지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나는, 어디까지나, 협박 당해서 움직이는 입장인데... 말이죠."

어쩌다보니 흐름에 따라 아이의 말대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드미트리는 아이와 한 편이 아니었다. 맹세를 어긴 게 아니게 되는 정도로만, 느슨하게 명령에 따르기만 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태업을 하는 노동자와 같은 이치였다.

"그럼 이런 기회를... 나를 위해 사용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드미트리의 영민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소니아와 연관관계가 있다고 했다. 아이의 목적은 마탑을 부수고 성구의 마력을 충전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이 마탑을 부수면서 라달라리아의 목적을 이루려고도 하고 있었다. 한 가지 일을 하면서 많은 소득을 얻으려고 꾸미고 있었고, 그래서 이야기는 복잡해졌다. 그렇다면, 그 복잡함을 이용한다면...

"일부러 한 쪽의 기소문만 제출한다면?"

키레넨에 관해 저지른 혐의에 대한 기소문만을 제출한다. 그렇다면 키레넨이 아닌, 일반 제국민을 희생시킨 아지프의 마술사들은 저항할 명분을 얻게 된다. 아이는 이 지역의 사례를 최초의 선례로 만들려 하고 있으므로, 다시 한 번 그들을 기소하고 승인을 얻고 토벌할 떄까지 발목을 붙잡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은 소니아 님과 연관이 있으니까... 기소문이나 판결문에 어떻게든,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드러낼 수만 있다면."

사용 가능한 암호만 일곱 가지가 떠올랐다. 기소문에 그 암호를 섞어넣는 건 드미트리에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일부러 결함 있는 기소를 제출한다면, 이 도시에 아이는 발목을 붙잡히게 되고, 드미트리의 위험을 눈치챈 소니아는 구출대를 파견할 지도 모른다. 아니, 드미트리가 알고 있는 소니아라면, 분명 구출대를 파견할 것이다. 어느새 드미트리는 펜을 멈추고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후후후. 고작 그 맹세 따위를 믿고 이 나에게 전권을 넘긴단 말입니까? 아쉽게 됐군요. 어쨌든 기소문을 제출하기는 한 것이니까, 내 심장이 터질 일은 없습니다. 당신은 법률 지식이 없으니 함정에 빠진 줄도 모르고 빠져들고 말겠죠!"

일부러 키레넨에 관한 혐의만을 기소해서, 제국민에 대한 기소를 흘린다. 그래서 시간을 잡아끌고 소니아에게 신호를 보내 구출을 기다린다. 자평하기로는, 어떻게 이런 계획을 떠올렸는지 스스로가 감탄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모략이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지금까지 작성한 기소문을 파쇄하려던 드미트리는, 문득 결함을 깨닫고 손가락을 멈췄다.

"그런데..."

그 결함은, 드미트리의 이익이나 안전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제국민에 대한 기소문을 포기한다는 사실 자체에서 오는 결함이었다. 제국민에 대한 기소문이 발표되지 않는다면, 아지프의 마술사들은 제물 거두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미 거둔 제물들에 대한 희생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럼... 사람들이 꽤 많이 죽게 될 텐데요."

제때에 기소문을 발표하지 않으면, 많은 제국민이 죽게 될 것은 명약관화였다. 드미트리는 기솜누을 찢어버리려던 손에 힘을 풀고, 기소문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눈을 감고 이마에 손을 짚었다. 밤새 일하느라 땀에 젖은 앞머리의 감촉이 손등에 느껴졌다.

기소문을 제때 발표하지 않으면 많은 제국민이 죽을 것이다. 어쩌면 시장도, 꼬마들도 위험해질지 모른다. 하지만 제대로 기소를 했다간 아이가 순식간에 이 도시를 떠나버릴 것이므로, 소니아에게 자신이 구출될 시간적 여유가 없어진다. 즉 딜레마는 명확했다.

일부러 반쪽짜리 기소를 해서 소니아의 원군을 부를 것이냐, 아니면 제대로 기소를 하고 얌전히 아이를 뒤따를 것이냐.

"정신 차리십시오, 드미츄어 즈다키렌. 당신이 언제부터 제국민 따위의 안위를 신경썼습니까? 그들은 당신에게 개나 돼지와 다름없는 것 아니었습니까."

스스로에게 들려주듯 그런 말을 중얼거린 드미트리는 다시 눈을 뜨고 기소문을 집어들었다. 다시 그 기소문을 파쇄하기 위해 힘을 주려는 순간, 불현듯 낮의 일이 떠올랐다. 언니, 라고 부르며 자신에게 안기던 꼬맹이의 녹색 눈이 떠올랐다. 시장으로서의 본분을 다했을 뿐이라는, 시장의 앙상한 정수리가 떠올랐다.

"윽..."

그 때문에 힘을 주지 못하고 다시 기소문을 내려놓고 말았다. 드미트리의 이마에는 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몇 번이나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결국 한 시간이 지나도록 기소문을 찢지 못한 드미트리는, 갑자기 괴성을 내지르며 머리를 마구 쥐어뜯고 말았다.

"으아아아악!"

괴성에 깜짝 놀란 새가 밤가지를 딛고 푸드득 날아올랐다. 기름등이 흔들리며 문간에 그림자를 뿌려댔다. 그리고, 그 문간 뒤에는, 블로어를 쥔 채 가만히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어쩔 셈이냐, 어린 순례자야.'

"더 기다려봐."

림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며, 슬쩍 문 너머로 드미트리를 바라볼 떄까지도, 드미트리는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

아지프의 마탑.

마탑의 탑주인 5위계의 마술사, 키릴로프 글라다조프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는 칙칙한 회색 돌바닥 위를 서성이며, 이따금씩 신경질적으로 지팡이로 바닥을 후려쳣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왜 아직도 소식이 없나?"

계속해서 실험체를 제공하라는 요구를 묵살하고, 심지어 빼돌리기까지 하는 시장을 처벌하기 위해 정예 부대를 파견했는데도, 소식이 없기 때문이었다. 밤중까지 오지 않았을 때에는, 그저 즐길 것이 많아서 그랬으리라고 생각했다. 새벽까지 오지 않았을 때에는, 마골귀의 통제가 힘들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날, 정오까지도 돌아오지 않는 것은 심했다.

"무슨 변고가 있는 것인가?'

이 정도까지 복귀가 늦어진다면, 그들은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니라 돌아오지 못한 것이라고 추정하는 게 타당했다. 변고, 무슨 변고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런 세력도 없는 이 벽지에... 스스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마음을 달래고 있을 때였다.

"탑주님! 큰일입니다!"

벌컥, 문이 열리며 자신의 경망스러운 조수가 나타났다. 키릴로프는 한쪽 눈을 경련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체통 없이 호들갑을 떠는 것이냐?"

큰 일이 아니라면 경을 칠 줄 알아라. 그런 말을 하려던 키릴로프는 충격으로 말을 삼키고 말았다.

"제도에서, 제도의 법원에서, 우리를 공적으로 선포했습니다!"

"뭐? 라달라리아의 창녀들이 왜?"

이미 얘기가 다 되어 있던 것 아니었나? 탑주의 안색이 노랗게 변했다. 혹시 그 부대가 돌아오지 않는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그런 것인가?

"공적, 공적이라니, 그럼 죄목이 무엇인가?"

"저, 저, 반포된 판결문을 받아왔습니다. 그 죄목은..."

쾅!

탑의 문을 쳐부수는 폭음이 울린 것은 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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