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92화 (192/279)

35. 기억 ( 1 )

방 안에선 순식간에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키릴로프에게 말을 건 조수, 아지프의 4위계 마술사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갑자기 들려온 습격의 소식 때문이었다. 대조적으로, 마탑의 주인인 키릴로프는 싸늘한 표정으로 냉정했다. 그는 조수의 손에서 문서를 빼앗아 읽기 시작했다.

"큰일입니다. 침, 침입자가... 어떻게든 무찔러야!"

"음? 그렇군."

조수의 다급한 비명에도 불구하고, 키릴로프의 여유는 사라지질 않았다. 그가 읽고 있는 것은, 드미트리가 밤새 작성한 기소문이었다. 그는 천천히 읊조렸다.

"가장 악독한 경우의 학살... 그 주범으로 나를 지목했군."

"학,학살 말입니까?"

"어디 외부에 공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한 건가? 불필요한 미사여구와 선동적인 서술이 많군."

키릴로프는 재미있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조적으로, 조수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라달라리아에게 공적으로 선포된 자는, 공명심에 눈이 먼 수 많은 사냥꾼들과 싸워야만 했다. 키릴로프와 다르게, 조수는 공적으로 지정되고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는 두려움에 떨며 물어보았다.

"왜,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우린 위에서 시키는 지령을 따른 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글쎄다."

"위에서는 분명히 얘기가 끝나 있다고 그랬잖습니까!"

"감히 내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구나."

패닉에 빠져 웅얼대던 조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키릴로프는 곧 문서를 읽으며 미친 듯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입을 다물던 조수는 또 물어보았다.

"그럼, 저, 저도 그 기소문에 공적으로 이름이 올라 있습니까? 이 마탑의 모두도?"

키릴로프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는 목각인형처럼 딱딱하게 고개를 돌려 자신의 조수를 바라보고 말했다.

"아니다."

"예?"

"무슨 목적인지 모르겠다만, 이 기소문은 나만을 학살의 주범으로 지정했더구나."

조수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 말뜻은, 자신이 달아난다면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곧 경악으로 물들었다.

"좋아할 것 없다. 너도 다른 죄의 주범으로 지목되었으니까?"

"예?"

조수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키릴로프는 그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겹쳐진 기소문의 뒷장을 보여주었다.

"키레넨을 잡아들여 실험쥐로 이용한 것, 그 죄의 주범은 너로 걸려 있다."

조수는 당황해서 기소문을 받았다.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왜, 왜 그런 짓을? 이건 별건이잖습니까! 조, 조디악과도 이야기가 되어 있는 일인데..."

키릴로프는 또 원을 그리며 서성였다. 위를 쳐다보니 커다란 까마귀 박제가 보였다. 박제도 원을 그리며 천천히 부유하듯 흔들리고 있었다.

"나를 주범으로 지시한 건, 아마도 제도의 총의일 것 같다. 무슨 권력 싸움이라도 해보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네 경우는 달라 보여. 제도가 키레넨을 신경쓰는 경우는,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럼?"

"아마 여기에 파견된 율사가 개인적인 오지랖을 부린 것이 아닐까 싶군."

그 말에 조수의 안색이 밝아졌다. 키릴로프는 유영하듯 흔들리는 박제를 바라보며 또 서성였다.

"제국 곳곳에서, 학장과 파벌들의 지시로 계속되고 있는 희생제, 그걸 막고자 하는 게 라달라리아의 총의라면 말이지. 그걸 막을 순 없겠지. 하지만 여기 파견된 말단 율사의 개인적인 오지랖 정도는 막을 수도 있을 듯 싶다."

"어, 어떻게 말입니까?"

"그 율사를 죽이면 되겠지. 그리고 소니아 아바키렌, 그 여자의 금력을 빌린다. 한 배를 탄 몸이니, 제도의 돼지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 만큼 돈을 내어줄 테야."

그 말을 들은 조수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심지어 그 낯빛에는 감격도 스며 있었다. 아지프의 4위계 마술사답지 않게, 이 조수는 굉장히 어리숙했다. 뭐, 그 어리숙함을 믿고 일부러 조수로 키운 거지만. 키릴로프는 그 얼굴을 보며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었다.

"제국민을 학살한 혐의는 받아들여야만 하겠지만, 그 계집년을 죽이고 소니아와 연락하면 키레넨 건은 묻을 수 있을 테다."

"그럼 저는 살았다는 거군요? 그 율사 계집년만 죽이면 되는 거란 말이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할 게 있나."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조수에게 다가간 키릴로프는, 그 덥수룩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순간이었다. 키릴로프의 창백한 손이 유백색으로 번쩍이며 섬광이 터져나왔다. 그 섬광 속에서, 조수는 목을 붙잡고 켁켁거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나 살자고 하는 일인데 말이지. 너는 여기서 나자빠져 뒹굴다가, 키릴로프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죽어줘야겠다. 네 이름이... 렌디였던가? 렌디. 참 병신같은 이름이지만, 이제부턴 내가 렌디로 살아주마."

"끄아아아악!"

키릴로프는 조수를 집어들어 내던졌다. 노인답지 않게 굉장한 완력이었다. 쾅! 조수는 구석의 책장에 큰 소리를 내며 처박혔다. 먼지덮인 책이 수북히 쏟아져내려서, 정신을 잃은 조수를 무덤처럼 감쌌다. 키릴로프는 손을 털며 방을 나섰다. 건방진 침입자를 죽이고, 신분을 바꾸어 위기에서 탈출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쾅! 문은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충격으로, 까마귀 박제는 살아있는 듯 어지럽게 흔들렸다.

*

한편, 마탑의 1층.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마도 어떤 실험의 실패작이었던 듯, 반은 뼈가 드러나 있고 반은 살이 달라붙은 채로 날뛰던 문지기 거인이 최후를 맞았다. 정면으로 쳐들어온 아이의 레바테인이 오른 어깨부터 왼쪽 허리까지, 깔끔하게 양단했던 것이다. 쿵! 거인이 쓰러지자 핏물은 해일처럼 쏟아졌다. 마탑의 1층 바닥 전체를 피로 물들일 정도였다.

"맙소사, 저 커다란 놈을?"

"혼자서 이 탑을 부수겠다는 게 진심이었나 보오!"

아지프의 마탑 1층에는, 마술사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용역을 제공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아이를 보고 두려움 반, 선망 반으로 찬 시선을 보냈다. 아이는 레바테인의 날을 검지로 쓸어내리며 그들의 동태를 살폈다.

방전, 아이와 드미트리는 이 탑의 정면으로 침입했고, 법을 집행하러 왔노라고 선포했다. 돌아온 반응은 비웃음과 염려, 그리고 이 문지기 거인이었다. 그리고 아이는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수 많은 반란병을 제압해온 이 거인을 쓰러뜨렸다. 그러자 사람들의 반응도 바뀌었다. 두려움과 경악이었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인 것 같군요.'

아이가 싸울 때까지만 해도 조용히 숨어 있었던 드미트리는, 곧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누가 책임자인가, 금세 알아낼 수 있었다. 드미트리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방금 거인을 풀어놓으라고 한 경비대장에게 다가갔다.

"당신이 이 곳의 책임자겠군요?"

"그,그,그렇습니다. 지혜로우신 율사님, 저는 그저, 그저 월급 주시는 분들의 지침에 따랐을 뿐이라..."

드미트리는 짧은 수염이 잔디처럼 자란 그의 턱을 두 손가락으로 붙잡았다. 작은 체구임에도 위압감이 뿜어져나와서, 경비대장은 덜덜 떨며 드미트리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직접 저와 제 집행관을 '건방진 정신병자들'이라고 말한 걸 들었는데요? 그것도 위에서 내린 지침인가요?"

"아, 아닙, 아닙니다. 그건 그냥 말실수입니다. 이 놈이 아침을 잘못 먹어서..."

"아, 말실수 말입니까. 저는 이해할 수 있죠. 그럼 제 집행관도 말실수라고 생각해줄까요?"

드미트리가 다른 손가락으로, 레바테인을 매만지는 아이를 가리켰다. 그러자 경비대장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벌벌 떨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저 거인이 얼마나 많은 반역자와 탈주병들을 죽여왔는지, 또 압도적으로 죽여왔는지 알고 있는 경비대장이었다. 그런 거인을 단칼에 죽여버린 아이는, 그 거인보다도 몇 배는 더 위험한 괴물로 보였다. 드미트리는 샐쭉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죄송합니다, 제가 눈이 멀어서 그만...!"

"말로 사과하지 말고 성의를 보여주십시오."

"어, 어떤...?"

돈이라도 바라는 것인가? 경비대장의 반문에 드미트리는 경비대장의 턱끝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이 마탑은 제국의 공익과 관련없는 사사로운 탐욕을 위해, 제국민을 학살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그 부역자를 어디부터 어디까지로 정의할지는 전적으로 제 재량에 달려 있죠. 저는 아주 냉정하고 엄격하게 그 재량권을 활용할 겁니다."

"부,부디 자비를..."

경비대장 뿐만 아니라, 1층에 가득한 아지프의 피고용인 모두에게 하는 말이었다. 드미트리의 또박또박한 발음이 사람들의 귀로 흘러들었다. 일부러 입을 다물어 잠시 긴장감을 고조시킨 드미트리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 수사와 처벌에 협조해준다면 말입니다, 그 협조자는 면죄를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처음으로 나온 부드러운 제스처였다. 즉, 지금부터 마탑을 부수는 데 협조하면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잠시 후, 사람들은 앞다투어 드미트리에게 마탑 내부의 정보를 넘겨주기 시작했다. 비밀 통로, 물자와 인질을 숨겨둔 곳, 비밀 실험실, 마탑을 유지시키는 근간이 있는 영핵으로 가는 길 등등. 드미트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들을 경쟁시켰다. 아이에게는 없는 재주였다.

"저는 만족합니다만, 저기서 팔짱을 끼고 있는 무시무시한 집행관이 만족할까요?"

이따금씩 아이를 팔아먹어서, 정보를 더 캐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때문에 아이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해야만 했다. 그러면 지레 겁먹은 사람들은 숨기고 있던 극비 정보도 술술 늘어놓았다. 제일 중요한 정보와 단서는 경비대장에게서 나왔다.

"그러니까, 마탑주가 머무는 꼭대기층과 직결된 승강기가 있다는 겁니까?"

"예에에... 극비리에 제물을 거둬들일 때 쓰는 승강기입니다. 건설용 승강기들 사이에 있어서 눈치채기 힘듭니다만, 그 중앙에 있는 놈만 향하는 위치가 다릅니다."

그리고 경비대장은 공손하게 주석으로 만들어진 열쇠를 바쳤다. 그 승강기의 궤도를 틀어주는 열쇠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원래 1층부터 모든 층을 쳐부수며 올라갈 생각이었던 두 사람에게, 정말 커다란 보상이었다. 드미트리는 기쁜 표정을 숨기며, 탐탁찮은 듯 열쇠를 받아들였다.

"그걸 알고 있다는 건, 당신이 그 제물을 바치는 하인 역할을 했다는 말이군요?"

"아, 아니, 아닙니다!"

"거짓말까지 하려는 건가요?"

드미트리가 금빛 눈을 드러내며 노려보자, 경비대장은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아지프의 제물이라면 병든 아이들이나 약자들일 텐데, 그들을 직접 식탁에 갖다 바치는 하수인 역할을 한 사람이라..."

드미트리는 턱을 매만지며 서성이기 시작했다. 경비대장의 안색이 노랗게 변했다. 드미트리는 경비대장을 부역자로 넣을까 말까 고민하는 척을 하면서, 흘깃 그 낌새를 살폈다.

'정말로 가진 걸 다 털어놓은 것 같군요.'

만약 가진 게 조금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이 상황에서 무조건 털어놓았을 터였다. 꽤 높은 직위에 있던 만큼 특별히 수를 더 써서 심문한 것이었다. 드미트리는 여전히 탐탁치 않은 척 연기하며 경비대장을 안심시켰다.

"뭐, 어찌 보면 당신도 시대의 피해자겠지요. 눈 감아 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경비대장은 드미트리의 율사복 소맷자락을 붙잡고 거의 흐느끼듯 대답했다. 난처해진 것은 드미트리였다. 산만한 남자가 자그마한 여자에게 매달려 우는 모습은 옆에서 보기에도 좋은 꼬락서니가 아니었다. 아이가 다가가서 억지로 떼어주어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흐느끼던 경비대장은 문득 아이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함께 하신 저 분은 대체 누구이시길래, 저토록 용맹하십니까? 이름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질색하며 물러나 소매를 닦던 드미트리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대답했다. 단테라는 이름을 들은 1층의 사람들은 놀라서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은, 아이와 드미트리가 1층을 벗어나 비밀 통로를 통해 승강기로 향할 때까지도 유지되었다. 두 사람이 완전히 통로로 사라졌을 때, 1층에선 커다란 환성이 울려퍼졌다.

"서운하겠어요, 공을 뺏겨서?"

드미트리는 아이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그리고 아이가 자신을 돌아보자 스스로도 깜짝 놀라서 얼굴을 굳혔다. 아무리 옆에 오래 있어서 친숙해졌다 한들, 지나치게 스스럼없는 행동거지였기 때문이었다.

"천만에요."

그리고 아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는 지금, 블로어로 검을 바꾸어 허리춤에 쥐고 걸어나가는 중이었다. 무슨 생각에라도 골똘히 빠져 있는지 더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이 정도로는 화를 안 내는 거겠죠? 드미트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마에 딱밤을 맞은 것은 그렇게 방심했을 때였다.

"악! 갑자기 무슨 짓입니까?"

"멋대로 남의 약혼자를 팔아먹은 벌이라는데요."

"무슨 다른 사람이 명령한 것처럼...!"

분노한 드미트리를 뒤로 하고, 아이는 다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마탑의 탑주, 키릴로프에게로 가기 위한 승강기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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