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93화 (193/279)

35. 기억 ( 2 )

앞장서 걸어가면서, 아이는 블로어로 륜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ㅡ 의외였군. 제대로 둘 다 기소를 할 줄이야.

륜의 말에 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드미트리의 흉중을 읽은 륜은 아이를 채근해 감시를 하도록 시켰다. 일부러 제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태업을 저지르려 한다는 것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문 한켠에 숨어 드미트리가 고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드미트리는 밤새 하늘색 단발을 쥐어뜯으며 고민하고 있엇다. 그런데 그녀가 그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의외의 것이었다.

"아뇨, 고작 시간을 끌자고 그런 짓까지 할 필요는 없지요. 그 사람은 멍청하니까, 충분히 다른 방법으로도 시간을 끌 수 있어요."

혼자서 팔짱을 끼고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제대로 두 장의 기소문을 작성한 것이었다.

ㅡ 그 멍청한 사람이라는 건, 자네를 말하는 게 틀림없네만.

"놀리지 마세요."

블로어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조심 아이의 뒤를 따라 걷던 드미트리는 아이의 혼잣말의 의미를 알 수 없어서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들은 승강기로 향하는 문 앞에 도착했다. 찬 기운이 풍겨오는 암청색의 철문이었다. 경비대장에게 건네받은 열쇠를 써서 안에 들어가면, 이 마탑의 탑주, 키릴로프에게로 향할 수 있었다. 열쇠를 넣을 문 손잡이는 조류의 구개골을 본딴 듯 뾰족했다. 손을 넣어 매만지자 그 부리 속에서 우묵한 열쇠구멍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이는 우뚝 멈춰서서 드미트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까 건네받은 열쇠를 주세요."

"자, 잠깐만요!"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드미트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듯, 두 손으로 열쇠를 꽉 움켜쥐고 엉거주춤 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이건 말입니다. 그냥 주는 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예?"

아이가 눈살을 찌푸리자, 드미트리는 또다시 덜덜 떨면서 말했다.

"때, 때리지 말고 일단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누가 들으면 제가 상습 폭행범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맨날 때렸잖아요!'

아이가 눈살을 찌푸리자 드미트리는 다시 엉거주춤 머리를 감쌌다. 생각해보니, 먼 옛날, 도박장에서 만났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당신이 한 일에 비하면 싼 대가인데요. 왜요, 또 나쁜 일을 꾸미고 있습니까?"

"나,나쁜 일은 무슨..."

그러나 조디악의 총관으로서 쌓아올린 관록을 잃어버린 지금의 드미트리는, 표정을 숨기는 데 능숙하지 못했다. 얼굴 가득 어색한 기운이 번져서 입꼬리를 엷게 씰룩거렸다. 우선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아이는 드미트리의 말을 경청했다.

"원래, 당신은, 그러니까, 1층부터 이 마탑을 전부 올라가려고 했잖습니까. 그런데 저의 영웅적인 교섭능력 덕분에 이 열쇠를 얻어서, 쉽게 마탑을 부수고 성구의 마력을 충전할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요?"

"그, 그래서, 대가를 요구합니다. 공정한 대가요. 이 열쇠를 구한 건 저 덕분이니까, 당신은 대가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아이가 눈살을 찌푸리자, 드미트리는 또 엉거주춤 머리를 감싸쥐었다. 또 이마를 얻어맞을 것을 걱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눈을 감았다 떠도, 예상했던 충격은 다가오지 않았다. 질끈 감았던 눈을 살짝 뜬 드미트리는, 아이가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뭐, 말은 되는군요. 그래서요? 당신이 원하는 대가가 뭡니까?"

"그건, 그러니까, 이 일이 끝났을 때, 잠시 휴가를 주십시오."

"휴가?"

"저는 이래뵈도 나름 귀,귀한 몸이었단 말입니다. 원래는 최소 은 등급 이상의 마차가 아니면 타지도 않았던 몸이라구요. 말도 탈 줄 몰라요. 그런데 맨발로 여기저기 돌아다녔더니, 발이 퉁퉁 부어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겠습니다. 그러니 일이 잘 끝나면 이 도시에서 좀 휴가를 보내게 해 주세요."

굉장히 철없는 요구였다. 드미트리가 할 법한 요구라기보단,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나 할 법할 응석이었다. 스스로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지 얘기를 늘어놓는 그녀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아이는, 블로어의 손잡이를 쥐어잡고 다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ㅡ 이게 그녀가 생각하던 '지연시킬 다른 방법'인 모양일세. 기소문은 제대로 제출하고, 빌미를 잡아서 자네한테 떼를 쓰는 거지.

"그것,참..."

"왜,왜요! 저는 어떤 의미에서 당신에게 고용된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은 당신 아랫사람의 고충도 돌보지 않는 나쁜 통령입니까?"

말버릇대로 도발을 해 버린 드미트리는 아차하고 스스로의 입을 막았다. 아이가 성큼성큼 자신에게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억지로 열쇠를 빼앗으려는 건가? 두 손으로 열쇠를 움켜쥐고 가슴께로 가져갔을 때였다.

"윽?"

드미트리는 신음성을 흘렸다. 아이가 갑자기 자신의 발을 잡아서 들어올리더니, 신발을 벗기고 발바닥을 살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드미트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김이 나올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당황해서 외쳤다.

"더,더럽게, 뭐하는 짓입니까!"

"발이 부었다더니, 전혀 부어 있지 않은데요."

그러나 대조적으로 아이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그리고는 발바닥 뒤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아프면 마사지라도 해 줄 테니까, 휴가는 안 됩니다. 이런 곳에서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윽! 누가 그런 거 해 달래요? 놓, 놓으세요! 악!"

아이는 충실하게 드미트리의 말을 따랐다. 손을 놓자마자, 드미트리는 뒤로 쓰러져 대자로 눕고 말았다. 쿵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쓰러진 것이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드미트리는 계속 소리쳤다.

"아무튼 휴가를 주십시오! 이 도시에서 일주일은 머물러야겠습니다! 여독을 풀고 마차를 구하고 제대로 된 식사를 구할 때까지요!"

영락없는 떼쓰기였다. 드러누워서 그렇게 소리지르고 있자니, 스스로가 정말 처량해졌다. 아이의 한심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너무나 따가웠다. 하지만, 소니아가 자신을 발견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아이는 한숨을 내쉬며, 드미트리에게 다가가 억지로 열쇠를 빼앗았다.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당신의 협조에 대한 적절한 보상은 나중에 제공하도록 할 테니, 일어나세요. 어린앱니까?"

"꼭이에요? 맹세해야 합니다?"

확언을 받은 드미트리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이는 복잡한 심정으로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그 속셈을 알고 있는 입장에선 괘씸했지만, 기소문을 제대로 작성한 점을 생각하면 크게 꾸중하고 싶지도 않았다. 열쇠를 꽂아넣자 문은 육중하게 울리며 열렸다.

*

그 너머에 드러난 것은, 거대한 승강기들이었다.

"이런 규모는 처음 보는군요..."

드미트리가 그렇게 신음할 정도의 광경이었다. 여섯 개가 넘는 철판이, 육중한 사슬에 매달려 쉴새없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마탑의 끝과 연결되어 있는 듯, 천장을 올려다보니 까마득한 어둠만이 동그랗게 뚫린 채였다. 승강기가 있는 방을 가로지르며 아이는 천천히 사방을 돌아보았다. 승강기와 연결된 이 공간 전체가 어떤 정밀한 기계장치라도 되는 듯, 난해한 마법진과 톱니바퀴가 사방에서 빛나고 또 짤깍대고 있었다.

'마치... 어떤 생물의 위장에 들어온 것 같아요."

드미트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였다. 쉴새없이 산 제물을 거두어가고, 또 뼈로 내보내는 이 승강기는 말하자면 마탑의 내장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럴듯한 비유라고 생각하고 아이가 고개를 끄덕거릴 때였다.

"윽!"

갑자기 어깨에서 극렬한 통증이 느껴진 아이는, 한 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쓰러지듯 앉았다. 드미트리는 놀라서 그런 아이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왜, 왜 그러는 겁니까?"

"이 낙인 부분에서, 통증이..."

사자궁에게 당한 상처, 그 낙인이 갑자기 엄청나게 쑤셔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퍼덕이며 멀리 날아올라 있던 림도 황급히 아이에게 다가와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으냐, 어린 순례자야?'

그러나 아이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시야와 감각의 혼탁 때문이었다. 그 혼탁한 시야 속에서, 아이는 지금 아지프의 승강기에 어떤 남자와 함께 올라탄 상태였다. 이것과 똑같이 생긴 승강기였다. 끝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벽면은, 시체가 담긴 관을 벌집처럼 끝없이 덧대어 만든 것이었다... 아이가 어꺠의 통증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중후한 음성이 울렸다. 앞에 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ㅡ 말해 보게. 내게도 영혼이 있는 걸까?

"정신 차리세요!"

아이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 직후였다. 사자궁이 남긴 낙인 전체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어지러워진 아이는 자리에 앉아 가쁜 숨을 내쉬었다. 식은땀이 등골 가득 솟아 있었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쥔 채, 아이는 중얼거렸다.

"뭐였지, 방금 그건?"

'사자궁의 낙인이 보여준 에지구나.'

사태를 파악한 림은 날개를 퍼덕이며 말해주었다. 아이는 놀라서 림을 바라보았다.

"예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건 키레넨만의 특징이 아니다. 데몬스폰의 군주들 역시 미래를 엿볼 수 있지. 그 낙인은 지금 너와 한 몸이다. 아마도 그 낙인이, 이 승강기에서 어떤 불길한 미래를 예지한 모양이구나.'

"그래, 그렇,우욱, 구나."

'잠시 쉬거라. 예지를 본 후유증은 심신에 크게 남는단다. 그 몸상태로 싸움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게야.'

"그게, 좋겠어. 고마워, 림."

어지러워진 아이가 옆으로 쓰러지려고 할 때였다. 돌바닥의 차가운 감촉 대신,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머리 가득 번졌다. 놀라서 고개를 쳐들어보니, 드미트리의 자그마한 얼굴이 보였다. 그녀가 무릎으로 아이의 머리를 받치고 있던 것이었다. 아이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드미트리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지,지금 우리는 운명공동체니까요. 당신이 여기서 위험하면, 저도 위험해져요. 빨리 회복해서 나를 확실하게 지켜주십시오."

아이는 피식 웃었다. 그런 간호 아닌 간호가 있었던 덕분일까, 아이는 예지의 후유증에서 금세 벗어나 떨쳐 일어날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아이는 드미트리의 손을 잡고 조심해서 승강기 위에 올라탔다. 사슬에 매달려서 공중에 떠 있기 때문인지, 두 사람이 올라타자 승강기는 그네처럼 출렁거렸다. 간신히 중앙의 승강기, 키릴로프의 방으로 올라가는 승강기까지 올라탄 두 사람은 곧 함께 올라가는 레버를 당겼다.

철커덩!

커다란 소리와 함께 승강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건 그 직후였다.

"역시! 내 예상대로 그 빌어먹을 잡졸 놈이 비밀을 털어놓았구나!"

레버가 작동되자마자, 이런 목소리가 벽면을 타고 메아리쳤기 때문이었다. 아이와 드미트리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후,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중앙 승강기 외의 모든 승강기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드미트리는 그 승강기에 올라탄 것들을 보고 하얗게 안색이 질렸다.

"저, 저건?"

마골귀였다. 수십 마리의 마골귀가 승강기에 개미떼처럼 올라타서 이 쪽을 노리고 있었다.

"아, 물론, 이 놈들이 네놈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이미 파견한 놈들이 박살났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말이지, 율사년만을 노린다면 어떨까?"

이어서 비웃음에 가득 찬 목소리가 위에서부터 터져나왔다.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몸을 수련한 집행관이야 살지도 모르지만, 나약한 율사년은 바로 죽고 말겠지? 모두 저 승강기의 동력을 끊어라!"

"히이익!"

사방에서 마골귀가 달려들기 시작한 것은 그 때였다. 이 일련의 함정이 자신을 노린 것이라는 걸 깨달은 드미트리는 안색이 창백해져서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그 때, 레바테인을 불러내어 제일 커다란 마골귀를 토막치고 있었다. 새하얀 뼛조각이 우수수 허공에 흩날리고, 커다란 마골귀는 곧 크게 두 토막나서 깊은 어둠으로 떨어졌다. 역시, 내 편일땐 안심이군요. 드미트리가 한숨을 내쉴 때였다.

"적절한 보상을 할 때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군요."

"예? 보상이요?"

"저는 사실 당신을 무시하고 그냥 줄을 타고 올라가면 되는데, 여기서 이렇게 당신을 지켜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 정도면 충분한 보상이죠?"

드미트리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아니라고 했다간 자신이 죽을 테니까, 부정할 수가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또 다른 마골귀가 네 발로 뛰어들어 사슬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드미트리는 비명을 지르듯 긍정하고 말았다.

"예, 예, 인정합니다!"

스하악! 긴 쇳소리와 함께 마골귀가 토막나 바닥에 떨어진 것은 그와 동시였다. 승강기에서의 사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