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기억 ( 3 )
마골귀들은 승강기의 견인 사슬을 목표로 달려들었다.
싸움은 그 사슬을 지키는 방어전 양상이었다. 유독 상반신이 거대한 마골귀가 개구리처럼 움츠렸다가 도약해왔다. 대검을 휘둘러 흉곽을 양단했다. 스각! 뾰족한 소리와 함께 토막난 뼛조각이 철판 위를 굴렀다. 벽을 박차고 또 한 놈이 날아들었다. 자세가 무너져 검을 휘두를 틈이 없었다. 아이는 이를 악물고 허리힘을 담아 가슴팍을 돌려찼다. 퍽! 발끝 가득 단단한 감촉이 번졌다. 갈비뼈가 부러져 흰 뼛가루를 흩날리면서, 마골귀는 마탑의 돌벽에 부딪혀 산산조각난 후 깊은 어둠으로 떨어져갔다. 부서진 견갑골 파편이 승강기의 철바닥에 튕겨 드미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겁먹은 표정으로 움츠려 앉은 드미트리는 자그마한 비명을 내질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공세는 쉼없이 이어졌다. 드르륵, 승강기를 끄는 사슬 소리가 돌벽에 부딪혀 음산하게 메아리쳤다. 아이와 드미트리가 탄 승강기를 포위하듯 감싼 네 개의 승강기에서, 쉴새없이 마골귀는 쏟아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어. 또 달려든 마골귀 하나를 박살낸 아이는, 굵은 사슬을 밧줄처럼 타고 올라가 레버를 세게 잡아당겼다. 드르르르륵, 사슬이 찢어지는 듯한 금속음이 울리고, 아이가 탄 승강기가 높이 치솟기 시작했다.
"히이익!"
드미트리는 어깨를 끌어안고 자그마한 비명을 질렀다. 억지로 승강기를 끌어올렸기 때문에, 승강기의 바닥이 미친 듯 출렁거렸기 때문이었다 겁먹은 눈으로 항의라도 하려고 아이를 쳐다보는 순간, 이미 아이는 그 자리에 없었다.
"어, 어디 가는 겁니까?"
"방어만 해선 끝이 없어요! 저 네 개의 승강기를 다 쳐부수고 오겠습니다!"
가볍게 풀쩍 뛰어내리며 외친 말이었다. 드미트리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 아이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거대한 뼈 괴물들이 가득한 철판 위에 뛰어내리면서도, 아이는 전혀 겁먹지 않고 당당했다.
"림, 레바테인!"
츠츠츠, 그 손에서 적색의 대검이 치솟았다. 빙글 회전하자 붉은 검의 폭풍이 몰아쳤다. 아이를 둥글게 포위한 채 달려들던 마골귀들은 두개골을 잘리고, 가슴이 토막나고, 척추가 부러져 사방으로 떨어져내렸다. 일순 아이를 둘러싼 공간이 텅 비었다. 레바테인 위에서는 붉은 신기가 파도처럼 넘실대고 있었다. 두 손으로 그 손잡이를 쥐어잡고, 아이는 그 승강기의 사슬을 후려쳤다.
스가악! 예리한 쇳소리, 레바테인은 승강기를 끌어당기던 두꺼운 사슬을 종잇장처럼 베어넘겨버렸다. 철판이 기우뚱하며 추락하기 시작한 것은 그 직후였다. 아이는 재빨리 줄을 붙잡고 뛰어내려 다음 승강기로 건너갔다. 착지하자마자, 또 한 바탕의 살육극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살육극은 아름다웠다. 드미트리가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였다. 분명히 위태한 발판 위에서 수십의 적과 맞서고 있는 것인데도, 아이의 발동작은 거침이 없었고 칼날은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정확히 한 마리씩을 쳐부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레바테인에 두개골부터 요추까지를 꿰뚫린 마지막 마골귀의 처절한 비명을 뒤로 하고, 아이는 드미트리가 기다리는 원래의 승강기로 돌아왔다. 이십 분도 되지 않아 둘을 포위하던 네 개의 승강기를 전부 박살낸 것이었다. 돌아온 아이는 레바테인을 크게 휘둘러 뼛조각을 떨쳐냈다. 마탑의 푸른 조명을 받아 뼛가루는 섬뜩한 푸른 빛으로 번쩍이며 흩날렸다. 드미트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대, 대단하네요. 생각보다도 훨씬 더."
"아직 긴장을 풀 단계가 아닙니다."
"예?"
드미트리가 눈썹을 크게 뜨며 물어보았다. 아이는 레바테인을 비껴든 채로, 빙글 돌아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많은 마골귀가 있다면, 그 조종자도 마땅히 있어야 합니다. 이 근처에요. 그리고 이렇게 많은 놈들을 조종할 수 있는 건 이 탑의 탑주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탑주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쿵! 굉음이 울린 것은 그와 동시였다. 당황해서 위를 쳐다보니, 아까까지 움직이지 않았던 사슬이 미친 듯 움직이고 있었다. 사슬의 숫자는 여덟 개, 이번에는 여덟 개의 승강기가 저 밑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분명히 더 많은 괴물을 태우고 있을 터였다.
"큭!"
아이는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뛰어내렸다. 집행관처럼 보이기 위해 한 줄로 묶은 뒷머리와 앞머리가 풍압에 미친 듯 휘날렸다. 턱, 오른손을 바닥에 대고 착지한 아이는 재빨리 상체를 일으켜 적의 수효를 살폈다. 그리고 당황으로 동공이 커졌다.
"응?"
이 여덟 개의 승강기는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이는 고개를 쳐들어, 드미트리가 있는 저 위의 승강기를 바라보고 소리쳤다.
"함정입니다! 당장 뛰어내려요!"
"예?"
드미트리는 눈을 껌뻑거리며 멍청하게 반문했다. 아이는 답답해져서 소리질렀다.
"빨리!"
그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멀리서 늙었지만 굵은 목소리가 주문을 외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주문의 영창이 끝나자, 번쩍, 붉은 섬광과 함께 혈사포가 터져나와서 위의 승강기를 후려쳤다.
"으윽!"
처음부터 키릴로프의 목적은, 아이가 아니라 드미트리였다. 그래서 두 사람을 분리시키기 위해 텅 빈 승강기를 올려보낸 것이었다. 아이는 당황해서 위를 쳐다보았다. 다행히도, 드미트리는 혈사포의 폭발에 휘말리지 않았다. 반쯤 부서져서 세로로 매달린 철판을 붙잡고 발을 버둥거리는 중이었다. 저 멀리서 다시 혈사포의 주문을 외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다급하게 외쳤다.
"그냥 뛰어내려요! 빨리!"
'그, 그렇지만, 그러면..."
"받아 줄 테니까!"
난리통에 드미트리의 신발이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드미트리는 눈을 꼭 감고 뛰어내렸다. 정확히는 떨어져내렸다는 표현이 더 맞을 터였다. 그녀는 낙법이고 뭐고 아무것도 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저 위에서 혈사포를 조준한 키릴로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년놈들, 함께 불타 죽는 걸 자처하는군!"
바닥으로 형편없이 떨어지는 드미트리의 뒤로, 새빨간 빛줄기가 뒤따랐다. 드미트리 바로 위에 겹쳐서 혈사포를 쏘아낸 것이다. 드미트리를 받아내면 혈사포를 얻어맞을 수 밖에 없는 설계였다. 그러나 그 미소는 순식간에 당황으로 바뀌었다.
쾅! 폭음, 그리고 연기. 아이는 한 손으로 드미트리를 받아들고, 한 손으로 레바테인을 휘둘러 혈사포를 쳐부순 것이었다. 마술을 쳐부수는 레바테인의 힘, 그걸 사용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붉은 포연이 매캐하게 피어오르고 승강기가 미친 듯 덜컥거렸지만, 드러난 아이와 드미트리는 멀쩡했다. 떨어져내린 드미트리는 아이의 목을 붙잡은 채로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있어서,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아무래도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저 자의 목표는 당신인 모양이군요."
"보,보상으로 저를 무조건 지켜준다고 했죠? 버리면 안 됩니다!"
드미트리가 안색이 새파래져서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이의 대응을 듣자, 그 안색은 더더욱 새파래졌다.
"그러니 이대로 업고 싸워야겠습니다."
"예?"
목에 짐짝처럼 드미트리를 매달고서, 아이는 곧 번개처럼 벽의 요철을 밟고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았다면 물 위를 걷는 것만큼이나 신기할 묘기였지만, 일반인의 신체능력으로 거기 휘말린 드미트리에게는 지옥이었다. 쾅! 그런 아이에게 잇달아 혈사포가 발사되었다. 그러나 아이에게 당도하기도 전에, 혈사포는 레바테인의 칼끝에 부서져 산산조각났다. 키릴로프는 눈이 개구리처럼 툭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서 더듬거렸다.
"라달라리아의 마술 중에 저런 것도 있던가? 대체 어떻게 자꾸 내 포격을 무효화하는 것이냐!"
그러나, 마골귀를 전부 소모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거듭해서 혈사포를 발사하는 것밖에 없었다. 저 무효화에 횟수 제한이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바람도 무색하게, 아이는 벽을 타고 혈사포를 쳐부수며 거침없이 키릴로프에게 전진해갔다. 이제 키릴로프의 위치가 사정권에 들어왔을 때였다. 아이는 레바테인을 집어넣고, 허리춤에서 천갈궁을 뽑아들었다.
"뭐냐?"
천갈궁 끝에서 그림자가 흘러나와 선주의 형상을 띄었다. 아이는 군말없이 림에게 새로운 검을 요구했다.
"림, 유혼."
유혼을 건네받은 아이는 선주에게 휙 던져주었다. 얼결에 손잡이를 붙잡은 선주는, 곧 레바테인을 꺼내드는 아이와 멀리서 맺혀가는 혈사포의 빛무리를 보고 의중을 눈치챘다.
"이젠 무슨 하인처럼 부려먹으려고 하는군."
"안 하면 바둑에 안 어울려 드릴겁니다."
"알았다."
키릴로프의 절박한 혈사포가 터져나온 것은 그와 동시였다. 아이는 벽을 박차고 도약해서, 한 손으로 레바테인을 비스듬히 휘둘렀다. 스하악! 마술의 핵을 쳐부순 감각이 손끝에 전해졌고, 짙은 포연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여기까지는 지금까지 있었던 것과 같았다. 차이점은, 그 뒤에서 아이를 따라 크게 유혼을 휘두르는 선주였다.
쾅!
요사스러운 붉은 빛을 띄며 포연을 빨아먹은 유혼은, 곧 거대한 반월형의 검기를 쏘아냈다. 키릴로프가 있는 곳으로였다. 화살처럼 날아간 검기는 키릴로프가 몸을 받치던 포대에 쳐박혀 그 일대를 산산조각냈다. 마탑이 기둥쨰로 흔들리는 굉음 뒤로, 키릴로프의 찢어지는 비명이 뒤따랐다.
"끄아아아악!"
옛날, 북서 자치령에서 인골귀 부대를 홀로 쳐부쉈던 그 기술이었다. 레바테인으로 아지프의 포탑을 쳐부수고, 유혼으로 역이용하는 기술. 선주도 즐겨 사용했던 것이니만큼, 긴 대화 없이도 연계를 성공할 수 있었다. 키릴로프의 비명은 낮고도 음산했다. 삶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강한 것인지, 뱀의 것을 닮은 헐떡이는 소리가 들끓었다.
그 비명 아래에서, 아이는 덜덜거리며 올라오는 승강기에 착지하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여전히 아이의 목을 껴안고 매달려 있었다. 눈은 질끈 감은 채였다. 더 이상 격렬한 움직임이 없는 걸 깨달은 드미트리는, 겁먹은 듯 왼쪽 눈부터 천천히 떠서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끝,끝났습니까?"
"예. 이제 그만 매달리고 직접 걸어다니세요."
"악!"
아이는 내동댕이치듯이 드미트리를 내려놓았고,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간신히 일어섰다. 사방을 살핀 그녀는, 마탑 구석의 처참한 흔적을 보고 정말로 키릴로프가 끝장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서야 센 척을 하기 시작했다.
"흐흠, 아지프의 마탑도 별 것 아니었군요. 당신도 말입니다, 명색이 세상을 구하네 어쩌네 하려는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저 정도는 더 가볍게 이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놈, 아직 살아 있는 모양이다."
"예?"
먼 곳을 노려보던 선주의 말이 들려오자 드미트리는 태세를 바꾸어 다시 아이 뒤에 숨었다. 그 촌극을 무시하고, 아이는 선주와 대화를 나누었다.
"명줄이 질긴 놈이군. 그걸 맞고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도주를 시도하고 있는 모양이다. 놈의 마력이 질질 새면서도 멀어져가는게 느껴져."
"그런 것도 느낄 수 있습니까?"
"빨리 쫓아가서 숨통을 끊어야 후환이 없을 거다."
선주는 그 말만을 남기고 천갈궁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귀를 기울이자, 과연 멀리서 키릴로프의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 최대한 억제한 신음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아이는 곧 드미트리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저는 잠시 떨어져서 저 놈을 마무리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은 마탑주의 방에서 증거로 쓸 물건들과, 마탑의 영핵의 위치를 찾아 주세요."
"잠깐! 저 혼자요?"
드미트리는 당황해서 아이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아이는 피식 웃으며 아까 드미트리가 한 말을 돌려주었다.
"아지프의 마탑은 별거 아닌 거 아니었습니까? 혹시 혼자 움직이는게 무서우면, 같이 가줄 수도 있는데요."
"누가 말입니까!"
결국 아이는 승강기를 박차고 뛰어올라 키릴로프가 달아난 자리로 멀어져갔다. 승강기에 홀로 남겨진 드미트리는, 그제서야 자존심을 좀 굽힐 걸 그랬다고 후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드르륵, 덜컥. 최상층, 마탑주의 방에 도착한 승강기가 멈춘 것은 그 때였다. 드미트리는 심호흡을 하고, 조심조심 나아가 마탑주의 방문을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