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95화 (195/279)

35. 기억 ( 4 )

키릴로프의 방에선 엷은 한기가 스며나오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음산한 소리를 넘어 발을 들이민 드미트리는 맨살이 드러난 팔을 붙잡고 부르르 떨었다. 방 안에서는 비릿한 시약의 냄새와 철분의 냄새, 그리고 알콜솜의 날카로운 향기가 지릿하게 풍겨왔다. 죽음의 향기였다. 이 곳에는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군요. 빨리 자료만 찾고 나가야겠어요. 잔뜩 움츠러든 채 조심조심 발을 내딛던 드미트리는 문득 천장을 올려다보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뭐, 뭐야, 저건..."

거대한 검은 새 박제가 살아있는 듯 생생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제는 천장에 걸린 채 느릿하게 원형으로 움직였다. 악취미한 장식이었다.

"하여간 아지프 놈들의 미적 감각은 이해할 수가 없군요."

험한 말을 하며 몸을 추스른 드미트리는 곧 키릴로프의 책상에 도착해서, 제출할 증거를 찾기 시작했다. 철제 서랍의 맨 윗칸을 열어젖히자 호박이 한 무더기 나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벌레를 품고 있는 호박 화석이었다. 저 새 박제도 그렇고, 이 자는 고정된 생명에 기이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질겁하며 다음 칸을, 또 다음 칸을 조사하던 드미트리는 곧 중요한 자료를 찾아냈다.

"이게 이 자들이 그토록 염원하는 실험인지 뭔지의 청사진이겠군요."

중앙에서 나누어준 실험의 계획서였다. 어찌나 거리낌이 없었던지, 대놓고 겉표지에 대문짝만하게 해골을 새겨넣었기에 발견하기도 쉬웠다. 그 내용을 읽어나가던 드미트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이렇게 엄청난 규모일 줄은..."

예지로부터 대략적으로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본 아지프의 실체는 충격적이었다. 아지프의 마술사들은 타인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연구를 완성했을 때, 위계를 올릴 수 있다. 길 아잘록, 아지프의 7위계의 등장으로 자극받은 다른 모든 6위계의 마술사들은 자신들도 위계를 올리기 위해 제국을 파먹기 시작했다. 눈 앞의 계획서는 그 증거였다. 그들은 아잘록이 나하트의 실험을 따라하다 위계를 전진시켰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짧은 기간 내에, 나하트가 했던 모든 실험을 전부 따라하려 하고 있었다. 나름대로의 변형을 더해서.

"제국에 존재하는 모든 아지프의 6위계가 이런 짓을 하고 있다면..."

이 도시 하나에서 소모된 생명의 수만도 천문학적이었다. 그리고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제국의 곳곳에서, 아지프의 6위계 마술사의 수만큼 이 희생이 반복된다면...

"정말로, 세상이 멸망할 만큼 거대한 내전을 촉발시키는 것도 허언이 아니겠어요."

제국은 이런 짓거리를 방치하려고 했을 정도로 썩었단 말인가. 그런 조소를 입에 배어문 드미트리는 주섬주섬 계획서를 챙겼다. 그녀의 일족은 제국의 혼란을 바탕으로 독립하려 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끔찍한 혼란을 그저 방관할 생각은 없었다.

드미트리는 성실하게 채증을 계속해나갔다. 여러 문서와 편지 따위가 드미트리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왜 이런 일을 하면서 기초적인 암호화조차 해놓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순조로웠다. 아마도 이렇게 기소당할 것이라는 최소한의 염려조차 하지 않은 듯했다.

"응?"

그러던 중, 이질적인 것이 발견되었다. 옆 책상의 밑에 숨겨져 있던, 황금빛의 금고였다. 그 자체로는 특색없는 금고였지만, 그것은 칙칙하고 어두운 톤의 다른 기물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배치되어 있었다. 다가가 그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던 드미트리는, 곧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해냈다.

"이건 조디악에서 쓰는 암호문인데?"

틀림없었다. 그림 다섯 개와 문자 열 개로 이루어진, 조디악식의 암호문으로 금고는 잠겨 있었다. 왜 이런 게 여기에 보관되어 있단 말인가? 잠시 아연했던 드미트리는 굳은 표정으로 금고를 더듬어 열어젖혔다. 기름칠이 잘 되어 있던 듯, 문은 소리도 없이 열렸다.

"열쇠?"

금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두꺼운 하늘색 열쇠였다. 동그란 열쇠 구멍 너머로 방 안을 훑어보던 드미트리는, 곧 열쇠를 사용할 곳을 찾아 움직였다. 오른쪽 벽 구석에 있는 철문이었다. 문을 열자 방 안에 감돌던 지릿한 악취보다도 더 심각한 악취가 폭발하듯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윽...!!!"

소매로 코를 틀어막으며 드미트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철문이 숨기고 있던 것은 사육장이었다. 드미트리의 키만한 우리가 책장처럼 빼곡하게 양 벽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었고, 우리 속에는 얼마 전까지 무언가가 생활한 흔적이 가득했다.

"실험체를 여기서 기른 건가요?"

삭힌 젓갈같은 악취를 견디며 드미트리는 조심조심 사육장 깊숙이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우뚝 멈춰섰다. 사육장의 자그마한 우리 한 켠에서,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꾀죄죄한 몰골로 개목걸이를 차고 있는 꼬마였다. 이 사육장에 살아남아 있는 것이라곤 그 꼬마 하나밖에 없는 듯했다.

"괜찮습니까?"

그 앞엔 암갈색 건사료가 가득 담긴 밥그릇과 더러운 먼지가 둥둥 떠 있는 물그릇이 놓여 있었다. 얼마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는지, 그 그릇들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드미트리는 의외의 사실을 깨달았다. 그 꼬마의 귀에는 하얀 털이 수북히 자라 있었다. 키레넨이라는 증거였다.

"응?"

드미트리의 부름에 꼬마는 천천히 눈을 떴다. 겁먹은 표정이었다. 꼬마는 잔뜩 움츠러든 채로 물어왔다.

"누구세요? 아, 아저씨들은 다 어디 갔어요?"

아마도 이 꼬마는, 이 곳까지 잡혀와서 실험체로 사용되던 키레넨들의 마지막 생존자일 것이었다. 연민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며, 드미트리는 가능한 한 가장 밝은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안심하세요. 그 자들을 혼내 주고 당신을 구하러 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꼬마는 쉽게 마음을 놓지 못했다. 단단히 무기력을 학습당한 모양이었다. 머리를 수그리며 공벌레처럼 웅크린 꼬마는 또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죄송하다, 미안하다, 그런 말이 섞인 내용이었다. 딱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드미트리의 눈에 이상한 것이 비쳤다.

"그런데, 당신, 그 손에 그건 뭡니까?"

그 아이의 왼 손목부터 팔뚝까지, 살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마도 이들이 가한 실험의 후유증인 듯했다. 꼬마는 자신이 꾸짖음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통제를 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거듭했다. 필사적으로 꼬마를 달래려 애쓰던 드미트리는 곧 그 현상을 이미 한 번 보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때 그 구덩이..."

가짜 컨쿼러에 휘말려서 아이와 함께 빠졌던 함정, 그 함정을 가득 메우고 있던 괴물들의 상반신이 저랬었다. 그것을 떠올린 드미트리의 안색이 무서워졌을까, 긴장을 조금 푸는 듯했던 꼬마는 다시 웅크려서 벌벌 떨기 시작했다.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행동이었다. 난처해하던 드미트리는 곧 묘수를 떠올렸다.

"아, 혹시 율이라고 압니까?"

아마도 이 꼬마 역시 시장이 보호하던 아이들 중 하나였을 터였다. 그러면 시장이 맡아 기르던 꼬맹이들과도 면식이 있을 거라는 계산에서 꺼낸 말이었다. 그 말의 효과는 컸다. 벌벌 떨던 꼬마는 눈을 휘둥그레 크게 뜨더니, 조심스럽게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드미트리는 가슴을 펴고 짐짓 당당하게 말했다.

"그 아이들과 시장의 부탁을 받고 여기 왔으니 알지요."

그 말에 꼬마는 경계심을 풀었다. 곧 드미트리의 인도에 따라 우리를 빠져나온 꼬마는 어미새에게 달라붙는 아기새처럼 옷자락을 꼭 붙잡고 매달렸다. 체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어머니에게 매달리는 듯한 태도였다. 잘 구슬려서 사육장을 나서면서 드미트리는 기묘한 감개에 젖었다. 분명 키레넨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그녀였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위기에 빠진 동족을 구한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어렸을 때, 율사가 되고 싶다고 공부하던 때에는, 이런 일을 꿈꿨었던 듯한 기분이 어렴풋이 들었다. 가슴 어딘가에서 벅찬 뿌듯함 같은 것이 느껴져서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꼬마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 혹시 여기서 중요한 물건이나 기밀 같은 걸 엿들은 게 있습니까?"

다시 키릴로프의 방으로 빠져나온 드미트리는 꼬마의 어깨를 붙잡고 물어보았다. 조사는 이미 일단락된 상황이었지만, 방금의 사육장처럼 숨겨진 곳이 더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골똘히 생각하던 꼬마는 곧 한 구석을 가리켰다.

"응?"

커다란 대머리독수리의 박제가 있는 곳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밑바닥을 살펴보자, 확실히 다른 바닥과는 이질적인 점이 눈에 띄었다. 그 부분만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던 것이다. 낑낑거리며 박제를 옆으로 치우자, 쪽빛으로 빛나는 수정구가 나왔다.

"이건... 자동으로 대화를 기록하는 물건이군요."

좋은 증거가 될 것이었다. 감사의 표시로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은 드미트리는 수정구에 녹음된 대화를 듣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키릴로프와 조수가 나눈 대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신경을 곤두세워서 그 말을 듣던 드미트리의 얼굴이 또다시 당혹으로 물들었다.

ㅡ 그 율사를 죽이면 되겠지. 그리고 소니아 아바키렌, 그 여자의 금력을 빌린다. 한 배를 탄 몸이니, 제도의 돼지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 만큼 돈을 내어줄 테야.

"소니아? 그 얘기가 왜 나오죠?"

드미트리는 흘깃 자신 옆의 꼬마를 바라보았다. 그 손에 남은 자국은 분명히, 구덩이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도시는 소니아의 지원으로 키레넨의 거주구를 마련했다고 했다... 모든 것은 분명히, 그녀가 이 곳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당혹스러운 것은, 자신에게는 그에 관한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신경을 곤두세운 채 이야기를 듣던 드미트리의 안색은 이어지는 대화에 한번 더 창백해졌다.

ㅡ 그럼 저는 살았다는 거군요? 그 율사 계집년만 죽이면 되는 거란 말이군요? 감사합니다!

"이, 이래서 그렇게 집요하게 나를 노렸군요."

이 자들의 최우선 목표는 아이보다도 자신이었다. 저항할 무력이 없는 자신이니만큼, 아이가 없을 때 마주쳤더라면 바로 죽었을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과 식은땀을 동시에 흘리고 있을 때, 자신의 품에 안겨 있던 꼬마가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졌다.

"왜 그렇습니까? 어디 속이 안 좋기라도 합니까?"

"누,누나, 저, 저, 뒤에!"

드미트리는 영문을 모른 채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드미트리의 얼굴도 곧 꼬마의 얼굴만큼이나 사색이 되었다. 이 음성에 녹화되어 있던 조수, 키릴로프에게 얻어맞아 책장에 쳐박혀 있던 그 조수가 소란통에 잠에서 깨어났던 것이다. 서서히 몸을 일으킨 그는, 율사복을 입고 있는 드미트리를 발견하고 누런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손에는 붉은 빛무리가 아롱져 있었다. 그의 접근을 바라보며 사시나무처럼 떨던 드미트리는, 자신보다 더 떨고 있는 꼬마를 감싸듯 끌어안고 소리질렀다.

"도와주세요!"

도움을 요청하는 비명이었다.

*

한편, 그 때.

키릴로프는 비밀통로의 끝에서 레바테인에 가슴을 꿰뚫린 채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 바로 앞에는 바깥으로 달아날 수 있는 승강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반쯤 박살난 몸을 이끌고 지렁이처럼 기어 탈출을 도모하던 그는, 승강기에 몸을 싣기 직전에 아이에게 붙들려 가슴을 꿰뚫렸다. 그는 탁한 유백색의 흰자위를 희번덕대며 아이를 노려보았다.

"네놈은, 쿨럭, 어디서 파견된 개새끼냐."

"알 필요 없습니다."

"중앙 마탑에서 보냈나? 쿨럭, 아니면, 남부인가? 그 놈들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을 텐데, 왜 나한테만, 쿨럭, 이 난리인가?"

이 자는 마지막까지도, 라달라리아가 직접 움직였다고 생각하기보단 다른 파벌에게 사주당해 자신을 숙청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 정도로 제국의 구조가 뿌리깊게 썩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아이는 레바테인의 손잡이를 단단한게 움켜쥔 채로,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나는 누가 보내서 온 것도 아닙니다. 보낸 사람이 있다면 당신에게 희생당한 이 땅의 사람들이겠죠. 억울해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의 친애하지 않는 학우들 역시 전부 공평하게 처벌해줄 테니까요."

"쿨럭, 크학, 웃기는군. 마지막에 정말 재밌는 농담을 들었어."

키릴로프는 숨이 넘어가듯이 웃었다. 그 때였다. 도와주세요! 드미트리의 비명이 울린 것은. 아이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뒤를 홱 돌아보았다. 집행관처럼 하나로 모아 묶은 뒷머리가 크게 흔들렸다. 키릴로프는 비웃듯 말했다.

"안 가나? 자네의, 쿨럭, 그 쥐새끼만한 파트너가, 쿨럭, 죽어가는데?"

아이는 씹어뱉듯이 공양의 주문을 외웠다. 레바테인 끝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키릴로프의 몸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 매캐한 연기를 뒤로 하고, 아이는 온 힘을 다해 내달렸다. 바람이 몰아칠 정도로 재빠른 속도였다. 순식간에 통로의 끝에 다다른 아이의 눈에 저 멀리서 출렁대는 승강기의 철판이 보였다. 그 철판은 멀었고, 밑은 깊은 허공이었다. 하지만 복도의 끝에서도 아이는 속도를 멈추지 않았고, 복도 끝의 절벽을 박차고 크게 뛰어올랐다.

"흡!"

놀라운 도약력으로 뛰어오른 아이는 아름다운 호를 그리며 승강기에 착지했다. 큰 무게에 부딪힌 승강기의 사슬은 끊어질 듯 출렁거렸으나, 이미 아이는 문을 열어젖히고 방에 들어서는 중이었다. 벌컥! 문을 열어젖히며 아이는 외쳤다. 최악의 경우, 인질극을 대면할 생각도 마친 채였다.

"무슨 일입니까!"

그리고 아이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꾀죄죄한 꼬마를 보물처럼 꼭 끌어안고 있는 드미트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쓰러진 마술사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복장으로 보아 아지프의 4위계였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커다란 새 박제에 깔려 죽은 것처럼 보였다. 긴장을 풀지 않고 그 마술사에게 다가간 아이는, 마술사가 죽었음을 확인하고 한 시름을 놓았다.

"뭐야, 도와달라고 그렇게 외치더니, 이건 무슨 일입니까?"

대충 사태는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마술사 때문에 드미트리가 위험에 빠져 있을 때, 저 거대한 새 박제를 지탱하기 힘들었던 천장의 실이 끊어져 마술사를 덮쳤고,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난 모양이었다. 드미트리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말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잘못 들은 것 아닐까요? 누가 당신같은 사람한테 어,어린애처럼 구원 요청을 했다는 말입니까?"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는데요."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도움을 요청한 게 부끄러웠던 모양이었다. 아이가 피식 웃음을 흘리자, 이어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 이 사람은 뭐에요?"

드미트리가 구해낸 키레넨 꼬마였다. 그 꼬마는 커다란 검을 들고 달려든 아이가 무서웠던 듯, 드미트리의 품에 파고들며 물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곤란했던 드미트리는, 우물쭈물 대다가 이렇게 말했다. 평소의 재수없는 말버릇이 묻어난 듯했다.

"멍청하지만 충성스런 제 부하입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렇구나!"

어이가 없어진 아이는 뭔가 대꾸해줄까 했으나 꼬마가 덕분에 안심한 눈치라 그만두었다. 꼬마의 꾀죄죄한 머리를 세게 쓰다듬어 준 아이는 곧 상황을 확인하고 두 사람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떨어지려 하지 않는 꼬마 때문에 걷기 힘들어하는 드미트리에게 손을 내면서, 한 마디 곯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시죠, 우리 똑똑하신 율사님."

창피한 듯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히면서도, 드미트리는 그 손을 잡고 아지프의 마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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