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기억 ( 5 )
이윽고 두 사람은 마탑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정상적인 건축물이라면 중심을 떠받치는 기둥이 있어야 할 공간이었다. 그 공간은 텅 비어 있었고, 설계 단계에서 교묘하게 위장되어 숨겨져 있었다. 드미트리가 입수한 구조도를 따라 벽 세 개를 연달아 쳐부수자, 그 공간의 정체가 드러났다. 숨겨진 방. 영핵이 있는 방이었다.
"윽!"
아이가 문을 열어젖히자 드미트리는 신음했다. 후덥지근한 열기가 얼굴 가득히 쏟아져 숨이 막혔다. 드미트리가 보호하고 있던 꼬마 역시 숨을 가득 들이켰다. 멀쩡히 방 안으로 발을 내딛은 것은 아이뿐이었다.
"마치 용광로 같군요."
방은 전쟁을 앞둔 대장간처럼 후끈했다. 좁은 방의 중심에는 금속성의 정육면체가 사슬에 매달려 허공에 둥둥 떠 있었고, 그 밑에 둥글게 뚫린 구멍에선 용암이 하얗게 백열했다. 저 정육면체 안에 갇혀 있는 것이 바로 이 마탑을 지탱하는 영핵, 마탑의 힘의 원천이었다. 이것을 탈취해서 힘을 다한 성구를 충전하는 게 아이의 목적이었다.
"그래서 저걸 어떻게 가져갈 생각인가요?"
드미트리는 힘겨워하는 키레넨 꼬마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이 마탑에 들어올 때부터 품고 있던 의문이었다. 저 거대한 물건을 잘라서 끌고 가기라도 하려고? 궁금한 듯 들여다보는 드미트리는 똑바로 정육면체를 바라보았다. 반질반질한 표면에 아이의 굳은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그 형상은 곧 품에서 성구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집어든 것은 그보다 더 흉악한 것이었다. 드미트리는 다급하게 외쳤다.
"당신 왜 칼을 꺼내는 겁니까?"
"물러서세요."
아이는 짧게 대답했다. 레바테인을 꺼내든 채였다. 더욱 다급해진 드미트리는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질렀다.
"설마 저걸 무식하게 부숴버릴 생각입니까?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나 알아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바테인이 붉은 호를 그렸다. 스하악! 쇠가 쇠를 베어내는 예리한 절삭음이 터지고, 드미트리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비스듬히 양단된 정육면체에서 하얀 빛이 회오리치듯 폭발적으로 터져나왔다. 꼬마를 꼭 끌어안고 바닥에 무릎꿇은 드미트리는 소리질렀다.
"탑 째로! 무너진단 말이에요!"
"잘 됐네요."
짧은 대꾸에 드미트리는 말문이 막혔다. 반으로 토막난 정육면체에서 엄청난 풍압이 쏟아져나와서, 바람은 방의 벽을 미친듯 두들기며 소용돌이쳤다. 정육면체를 묶은 두꺼운 사슬은 쩔렁거리며 굉음을 쏟아댔다. 태풍의 눈에 들어온 듯했고, 아이의 앞머리도 정신없이 펄럭였다. 아이는 눈을 부릅뜨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성구에 신기를 집중했다. 그러자, 곧 바람이 휘몰아치며 성구를 향해 몰려들었다.
"윽!"
눈을 뜨기 힘들어 드미트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가 팔을 내뻗고 당당하게 그 풍압을 견디는 모습이 흐릿하게 비쳤다.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이미 바람은 가라앉아 있었다. 성구가 영핵의 마력을 전부 흡수한 것이었다. 아이는 그 성구를 품에 집어넣고, 새집이 된 머리로 꼬마를 꼭 끌어안고 있는 드미트리에게 다가왔다.
"자, 가죠."
"어, 어딜 말입니까?"
"밖으로요."
"왜, 왜..."
"당신 말대로 이 탑, 이제 무너집니다."
쿠르릉, 섬뜩한 소리가 울린 것은 그와 동시였다. 동시에 드미트리의 머리로 커다란 벽돌이 떨어져내렸다. 턱! 그 벽돌이 드미트리의 정수리에 부딪히기 직전에 잡아챈 아이는, 여유롭게 벽돌을 던지며 말했다.
"그러니 빨리 도망쳐야죠."
"이...이..."
얼굴이 불그락푸르락해졌지만 별 다른 방도는 없었다. 곧 드미트리는 빠르게 달려나가는 아이를 뒤쫓기 시작했다. 이 탑은 건축될 때부터 영핵을 통해 구현해낸 것이어서, 에너지를 잃자 모든 구성물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계단도 무너져서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할 정도였다. 쿠르릉, 탑이 붕괴해가는 소리는 갈수록 더 거대해졌다.
"아!"
헥헥거리며 달리다 쓰러질 뻔한 드미트리는, 누군가가 자신을 번쩍 집어드는 것을 느꼈다. 아이였다. 아이가 자신과 꼬마를 집어들어 어깨에 짐처럼 매달고 달리고 있었다. 짐짝 같은 취급이었다.
쿠르릉!
따지고 싶었지만 눈 앞에 쏟아지는 바위의 비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아이는 도움닫기로 그 바위를 딛고, 허물어진 계단을 징검다리처럼 뛰어 건넜다. 곡예사 같은 묘기였다. 꼬마는 그것이 신기했는지 철없는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그렇게 내달린 아이가 도착한 곳은, 키릴로프가 탈출하려던 비밀통로였다. 그 끝에는 장식물로 위장된 승강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승강기의 레버는 해골 형상이었다. 그 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잡아당기자, 승강기는 큰 소리를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드미트리는 그제서야 안도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짓을 할 거면 말이라도 해주지 그랬습니까. 이제 내려주세요."
"안 됩니다."
"예?"
"아직 위험해요. 땅에 내리기 전까지는 불편하더라도 그대로 있어 주세요."
당황한 드미트리는 아이를 바라보고 뭐라 말을 꺼내려 했으나, 그 진지한 옆모습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학생 대부분이 여성인 율사 학교에서 지낸 기억만을 가진 상태인 드미트리는, 이렇게 길게 남자와 접촉해본 적이 없었다.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니라 하더라도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승강기에서 내려왔을 때, 그녀의 뺨은 연홍색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같이 매달려 있던 꼬마는 뒤를 바라보며 입을 크게 벌렸다. 하늘을 찌를 듯 거대하게 솟아 있던 아지프의 마탑이 신기루처럼 허물어지는 광경이 보였다.
"다리가 아픕니까?"
"예?"
아이의 물음에 드미트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내려달라는 말을 안 해서요. 힘들면 시청까지 이대로 가도 됩니다."
그제서야 자신이 땅에 내려오고서도 한참이나 아이의 목에 매달려 있었다는 걸 깨달은 드미트리는, 허우적거리며 바닥에 내려왔다.
*
마탑의 붕괴는 극적인 효과를 남겼다.
도시의 곳곳에 남아 있던 아지프의 잔당들은 그 웅장한 붕괴를 보고 공황 상태에 빠졌다. 아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드미트리를 내세워 일장 연설을 시켰다.
"죄인 키릴로프 글라다조프는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 제국민을 불법적으로 희생시켰으며, 응당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는 본보기로, 라달라리아가 더 이상 이들의 행태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드미트리의 낭랑한 끝맺음 뒤로 시민들의 환성이 터져나왔고, 이어 드미트리는 마탑의 잔당들이 공적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마탑이 붕괴하는 광경을 목도한 마술사들 입장에선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도주를 택했다. 아직 연단에서 내려오지 않은 드미트리의 눈에도, 로브를 뒤집어쓴 자들이 황급히 몸을 빼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이어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나왔다 함성은 드미트리가 연단을 내려와서도 계속되었고, 어떤 중년 여성은 드미트리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쏟았다. 이 모든게 낯설었던 드미트리는 어쩔 줄 몰라하며, 정말로 세상에 처음 나온 율사처럼 멋쩍어했다. 아이는 블로어를 들고 한 구석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칼을 품고 있는 아이에게 접근하는 것이 어려웠던 탓인지, 감사의 행렬은 주로 드미트리에게 집중되었다. 결국 과일과 빵, 떡 따위를 한아름 들고서야 드미트리는 겨우 사람들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부럽죠?"
"뭐가 말입니까."
"저한테만 사람들이 오니까 부럽죠?"
아이의 옆을 따라 걸으면서, 드미트리는 놀리듯 아이에게 말했다. 아이는 말없이 드미트리와 보폭을 맞추어 걷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쳐들고 으스댔다.
"옛날에 봤을 때는 뭔가 순한 인상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요즘엔 맨날 그렇게 담배나 피워대고 무게잡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안 오는 겁니다. 봐요, 당신이 더 노력했는데 저만 이렇게 답례를 받아버렸네요? 분하지 않습니까?"
"아뇨. 당신도 많이 노력했어요."
"그렇게 분하면 조금 정도는..."
더 약올리려던 드미트리는 의외의 칭찬에 말문이 막혀서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아무 내색 없이 걷고 있었다. 칭찬이 익숙지 않아 어떻게 받아쳐야 할 지 몰라 우물대고 있을 때, 결국 두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허름한 오두막이었다. 아이는 성큼성큼 방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왜 이런 곳에 사람을 끌고 옵니까?"
"거기 가만히 서 게세요."
드미트리의 항의도 무시하고, 아이는 오두막의 한가운데에 드미트리를 석상처럼 세워두고 작업을 시작했다. 삭제되어 있던 드미트리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작업이었다. 드미트리는 침을 삼키며 바닥을 쳐다보았다. 아이가 석회와 뼛가루를 이용해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려나가고 있었다.
"이런 고등 마법진을 당신이 어떻게 그립니까?"
아이는 지금 륜의 지시를 따라, 기억을 복원하는 마법진을 그리는 중이었다. 대꾸할 틈이 없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드미트리는, 아이가 블로어를 손에 꼭 붙들고 있는 것을 보고 낌새를 챘다.
"그 검에 뭔가 있는 겁니까?"
"잘못하면 아기때부터의 기억이 모조리 살아나서 백치가 될 수 있으니, 얌전하게 있으라고 하네요."
블로어 너머에서 들려오는 륜의 말을 전해주자 드미트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블로어를 똑똑히 바라보았다. 굉장히 불편할 텐데도, 아이는 마법진을 그리면서 블로어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 광경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가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저 검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군요. 그렇게 생각하자 지금까지 있었던 수많은 의문이 해결되는 듯했다. 드미트리는 슬쩍 아이를 떠보았다.
"그러고 보니, 당신 약혼자는 괜찮답니까? 신혼에 이렇게 다른 여자랑 바깥을 나돌아다녀도?"
"염려 고맙지만 별로 걱정은 안 된다고 전해 달라네요."
아이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마법진을 그리는 데 집중하느라 주의가 풀어진 탓이었다. 이 말 덕분에, 드미트리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저 검으로, 그 여자와 연결되어 있는 거군요.'
블로어의 기능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리고 아이가 어떻게 그렇게 거침없이 움직일 수 있었는지에 대한 확신도.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법진을 다 그린 아이는 블로어를 집어넣고 성구를 꺼냈다. 마름모꼴과 원형을 겹쳐 만들어진 마법진의 중심, 드미트리가 있는 그 곳에 성구를 겹쳐 내려놓은 아이는 마법진 바깥으로 물러서서 말했다. 륜이 알려준 사항들이었다.
"지금부터 당신의 억압된 기억을, 성구의 마력을 이용해서 전부 되살려낼 겁니다. 아마 기억이 지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별 문제없이 복원할 수 있을 거에요. 그 후엔, 바로 컨쿼러가 있는 장소로 저를 인도해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예, 예."
"그럼 시작합니다."
아이가 마법진에 손을 가져다대자, 곧 시린 빛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마법진 전체에서 둥글게 터져나온 흰 빛은 곧 폭발하면서 오두막을 가득 메웠다.
"윽!"
드미트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폭발이 끝났을 때, 드미트리는 마법진의 중심에 엎드려 입을 막고 있었다. 해일처럼 밀려들어오는 기억 때문에, 현기증과 함께 구토감이 상반신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윽고 마법진을 가득 메운 흰 빛이 가라앉고, 아이 역시 시술이 끝났다고 생각해 일어섰을 때였다.
번쩍! 다시 한 번 빛무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드미트리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감싸는 빛을 바라보았다. 그 빛 너머로 보이는 아이 역시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건 예정에 없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뭐, 뭐야?"
그리고 아까 시술 때처럼, 빛은 다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아이가 뭔가 손을 쓸 새도 없이, 같은 과정이 일곱 번이나 반복되었다. 아이는 황급히 블로어를 불러내 손에 쥐고 물어보았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이게 무슨 일입니까?"
ㅡ 나, 나도 모르겠네.
륜 역시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시술이 잘못되면 백치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그 경고를 떠올린 아이는 빠르게 빛무리로 뛰어들어 드미트리를 낚아챘다. 그녀는 이미 혼절한 상태였다. 아이가 드미트리를 데리고 마법진에서 빠져나온 후에도, 마법진에선 계속해서 빛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빛 속으로 달려들어 성구를 회수한 아이는, 드미트리를 업고 오두막을 빠져나왔다.
*
그날 밤, 시장의 저택.
"어지러워서 못 먹겠습니다. 더 곱게 다져서 주세요."
침대에 누운 채 드미트리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 말과는 달리, 낯빛은 전혀 어지럽거나 피곤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두막에서의 일 이후, 아이는 드미트리를 업고 시장의 저택으로 돌아가 하룻밤 묵고 가기를 청했고, 드미트리는 환자라는 명목으로 극진한 간병을 받게 되었다. 방금의 이상은 명백히 아이의 책임이었으므로, 피곤하니 쉬어야겠다는 드미트리의 말을 거부하지 못한 탓이었다.
"뭐 합니까. 당신 때문에 백치가 되어버릴 뻔한 사람에게 하는 대접이 고작 이겁니까?"
그리고 드미트리는, 아이와 만난 이래 최초로 찾아온, 자신이 우위에 선 상황을 십분 즐기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과일을 거의 주스가 될 정도로 곱게 갈고 있는 아이를 보며 희열에 찬 표정을 지었다. 곧 아이가 수저를 들이밀자, 드미트리는 거만하게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환자 방에서 흡연이라니요, 나가세요! 나가서 하세요!"
그리고 간병, 정확히 말하면 간병을 빙자한 생떼에 지친 아이가 창에 걸터앉아 담뱃불을 붙이자 손가락질하며 내쫓았다. 해 놓은 짓이 있으니, 아이는 군말없이 불을 끄고 바깥으로 나갔다. 방 바깥으로 걸어나간 아이는, 방문에 등을 대고 서서 블로어를 불러냈다. 방금 있었던 사태에 대해 륜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원인이 뭔지는 파악했나요?"
ㅡ 여러 가설을 세웠지만, 답은 하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저 마법진을 그릴 때, '지워진 기억을 모두 복원하라'는 명령문을 새겨넣었죠. 그런데 빛이 수십번 터졌다는 사실, 그건...
잠시 심호흡을 한 륜은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ㅡ 저 여자가 기억을 잃은 게, 이번 한 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이는 딱딱한 얼굴로 방 안의 드미트리를 엿보았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침대에 드러누운 그녀는 아이를 불러다 방 불도 끄도록 심부름을 시킬까, 고민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