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97화 (197/279)

35. 기억 ( 6 )

륜과 대화를 마친 아이는 금세 방으로 다시 찾아왔다.

폭신한 거위깃 이불을 덮어쓰고 실실 웃던 드미트리는 그 낌새를 눈치채고 재빨리 돌아누웠다. 아픈 흉내를 내기 위해서였다. 어색한 신음과 밭은기침을 여러 번 내뱉고 있을 때, 의자를 끌어당겨 침대 곁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몸이 많이 안 좋습니까?"

그 목소리는 진심인 듯 부드러웠다. 드미트리는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홱 돌아누워서 답했다.

"예. 당신 때문에요."

"미안해요."

이 사과도 진심인 것처럼 들렸다. 드미트리는 자그맣게 입술을 흐물거렸다. 죄책감이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렇게 심하지는 않다고 말할까? 고민하는 머리와는 반대로, 입이 내뱉는 건 더 심한 투정이었다.

"백치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 당신은 모를걸요? 거기에 아까부터 발열,오한,구토 등등... 아무튼 많이 아픕니다!"

그리고 드미트리는 금색 눈동자를 크게 떴다. 갑자기 아이가 자신의 이마에 손을 들이밀었기 때문이었다. 검을 오래 쥐어 굳은살이 박혀 있을 텐데도, 어쩐지 부드럽게 느껴지는 손이었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큰일이군요."

당황한 드미트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오늘 밤은 유난히 달빛이 밝았다. 아까 아이가 열어두었던 창에서 흰 달빛이 흐붓하게 쏟아져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열을 재던 아이가 손을 거둘 때까지, 드미트리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의 상태에 대한 진단을 들었습니다.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기억이 조금씩은 돌아오고 있을 거라고 들었는데, 생각나는 가장 옛날 기억이 뭔가요?"

"그거 꼭 말해야 하는 겁니까?"

툴툴대던 드미트리는 다시 정자세로 누워서, 이불을 턱 아래까지 확 잡아당겼다.

"그 전까지는, 음,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는데요. 이제 가물가물하게 어린 시절 기억이 좀 나는 것 같군요."

그 날도 이렇게 달이 훤한 밤이었다. 전날 부모님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들었던가, 그랬던 유년의 자신은 밤늦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달에서 찾아오는 아이 도둑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렇게 밝은 밤에, 고양이가 이끄는 마차를 타고 날아와선 나쁜 아이를 잡아간다는, 어린애를 겁주기 위한 내용이었다...

"당신에게도 부모님이 있었습니까?"

그런 추억담을 진지하게 늘어놓던 드미트리는, 아이의 놀란 듯한 반응에 눈살을 팍 찌푸리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그럼 없는 사람도 있습니까?"

"아뇨, 죄송합니다. 제가 말을 실수했군요."

그리고 아이는 씁쓸하게 웃었다. 환한 밤이었기에 그 표정은 드미트리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어딘가 슬픈 듯한 기색이었다. 그 눈을 마주 바라보던 그녀는 불현듯 아이에 관한 정보를 떠올렸다. 천애고아로, 전쟁터를 헤매다 용병단에 주워졌다는 내용이었다. 어쩌면 당신에게는 별로 당연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군요. 우물대던 드미트리는 무안함을 달래고자 계속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였다. 왜 자신이 율사가 되었고, 또 파계하게 되었는지까지의 경험이 마른 입술을 타고 새어나왔다. 아이는 두 손을 포갠 채 조용히 그 이야기를 경청했다. 처음에는 어물거리며 이야기를 늘어놓던 드미트리였지만,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어조는 격정적으로 변해갔고 어투에 가시가 돋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남긴 편지를 발견했을 때의 이야기를 할 때쯤에 되어서는, 이미 기억을 잃기 전의 드미트리와 비슷한 어투로 변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저는 이 종족을 용서할 수 없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아이는 침묵했다. 북받친 드미트리는 상반신을 일으키고 앉아서 작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이야기를 계속해나감에 따라, 그 때의 기억이 차츰 생각남과 함께 감정들 역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마치 처음으로 경험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눈꼬리에는 자그맣게 눈물도 맺혀 있을 정도였다. 그런 드미트리를 잠시 바라보던 아이는, 그녀를 부드럽게 침대에 눕히고 다시 이불을 덮어 주었다.

"확실히 많이 힘들어 보이는군요. 당신이 바랬던 대로, 여기 며칠쯤 머무르면서 쉬다 가도록 하죠. 당신이 몸을 회복할 때까지요."

"예?"

"방금 전 대화를 나누면서, 당신은 아마도 기억이 조금씩 회복되는 걸 느꼈을 겁니다. 기억을 살리는 마술이 불완전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당신의 행적을 되짚어가면서 천천히 기억을 되살려야 할 거라고 하더군요."

"그런...윽!"

갑자기 두통을 느낀 드미트리는, 이번엔 진짜로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아이의 말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과거를 더 회상하려 하자, 심하게 부하가 몰렸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그런 드미트리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오늘은 이미 충분히 많은 기억을 되살렸습니다. 더 이상은 위험해요. 며칠간 여기서 쉬면서, 컨쿼러가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그 대략적인 위치를 기억해내고 알려주십시오."

*

그 후로도 꽤 오래 드미트리를 간병하던 아이는, 새벽이 깊어서야 문으로 빠져나갔다. 턱, 조용하게 문이 닫히자 드미트리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하얗게 칠해진 천장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결국, 휴가를, 아니지, 시간을 지연시키는 데 성공했군요."

오늘 낮에 발표한 성명은 드미트리의 이름으로 작성되었다. 그렇기에 소니아는 곧 그것을 알아챌 것이고, 알아챈다면 구출대를 파견할 것이다. 그 때까지 시간을 지연시키고자 했던 드미트리의 계획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대로 성공한 셈이었다. 그렇게 자평한 드미트리는 억지로 웃으면서, 옆으로 돌아눕고 중얼거렸다.

"역시, 예상대로 순진하기 그지 없어서, 꾀병에 속아넘어갔군요. 이제 계획대로 소니아 님의 구출대를 기다리면..."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 소니아에게, 미심쩍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까 아지프의 마탑에서 경험한 일이 그 원인이었다. 이불에 주름이 어지럽게 생기도록 꼭 잡아당기면서, 드미트리는 낮의 일을 떠올렸다.

"드미트리 총지배인님?"

꼬마를 끌어안고 눈을 꼭 감은 드미트리는, 의외의 호칭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당장이라도 두 사람을 죽여 없앨 듯, 양 손 가득 검붉은 마력을 충전했던 조수였다. 그 조수는 드미트리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력을 흩어버리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왔다.

"아, 건방진 율사 하나가 왔다고 하길래 뭔가 했더니 총관님이셨군요! 이것도 다 소니아, 그분의 계략입니까?"

"예? 예?"

"하하, 제대로 들키지 않으려고 여장까지 하신 모양입니다? 제법 잘 어울리시는군요."

마치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듯한 투였다. 드미트리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기억이 삭제된 탓인지, 도저히 상대가 누군지 떠올릴 수 없었다. 조수는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큰일입니다. 이대로라면 그 분께서 지시하신 일이 전부 덜미를 잡히게 생겼습니다. 그 분께 꽤나 중요한 일인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일을 그르쳐도 괜찮은지요?"

"아, 물론 상황은 저도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 일 말이지요. 안 그래도 제가 그 일 때문에 이렇게 온 것 아니겠습니까."

그 일이 뭔지 전혀 감도 잡히지 않았던 드미트리였지만, 임기응변을 발휘해서 그렇게 대꾸했다. 조수는 그 말에 화색이 되어서는 외쳤다.

"역시 조디악의 안배는 믿을 만 합니다그려. 그 꼬마는 그럼 직접 처리하려고 데리고 계신 겁니까?"

"예? 예에에... 이 꼬마도 키레넨이라서 말입니다. 제가 직접 처리할 생각입니다."

드미트리로서는 이 꼬마는 자신이 보호하겠다는 뜻의 선언이었다. 하지만 조수는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럼 손을 더럽히지 말고 넘겨주십시오. 제가 제물로 바쳐서, 이 곳에서 탈출할 유령마를 불러내겠습니다."

"히이이익!"

그 말에 꼬마는 사색이 되어 드미트리에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드미트리 역시 난색을 표하며 꼬마를 등 뒤로 감추었다. 조수는 그 행동에 미심쩍은 표정을 짓더니, 뭔가 말을 꺼내려고 들었다. 쿵! 그 때였다. 조수의 머리 위에서 삐꺽대던 새 박제가 떨어져 조수를 덮친 것은. 두 사람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조수는 순식간에 거대한 새 박제에 깔려 불귀의 객이 되었고, 한 발 늦게 도착한 아이가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

"저기, 괜찮아요?"

그 일촉즉발의 상황을 떠올리며 부르르 떨던 드미트리가, 회상에서 벗어나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은 작은 목소리 때문이었다. 눈을 떠 보니 꼬마가 눈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낮에 드미트리가 구해낸 키레넨 꼬마였다.

"아까 할아버지한테 들었는데, 율사님이 많이 아프다고 그래서, 그래서 왔어요."

그 꼬마는 걱정스러운 눈망울로 드미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뇨, 전혀 안 아픕니다. 기특하네요."

그 사이에 씻긴 것인지, 땟국물로 가득했던 꼬마의 얼굴은 솜털이 말갛게 비칠 정도로 깔끔해졌다. 마치 고양이처럼 가만히 손길을 받던 꼬마는, 그 후에도 떠나지 않고 침대 곁에서 머뭇거렸다. 드미트리는 금세 그 이유를 눈치챘다.

"무서워서 같이 자고 싶습니까?"

꼬마는 부끄러운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 낮에 생사의 고비를 넘겼으니, 충분히 그럴만한 일이었다. 드미트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이불 안으로 꼬마를 들였다. 그녀의 체구 역시 그렇게 큰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침대는 두 사람이 들어가고도 넉넉했다. 드미트리의 품에 안기자마자 꼬마는 곧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저도, 이런 날에는, 이랬었는데 말입니다."

잠든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는 드미트리는 그러나 잠들지 못했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녀의 영민한 머리는 어떤 가설을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도시는 소니아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키레넨의 거주지가 되었다. 그리고, 아지프의 마탑에선 이 키레넨 꼬마를 데리고 어떤 실험을 하고 있었다. 이 꼬마의 몸에서 발견된 이상한 살결의 일렁임은, 소니아가 아이를 함정에 빠뜨릴 때 사용했던 구덩이, 그 구덩이 가득했던 괴물의 특징과 일치하는 것이다. 거기에, 아지프의 마술사는 소니아의 후원이 있었다고 언급했다.

"그건, 그러니까."

소니아가 이 도시를 키레넨 사육장으로 만들어서, 어떤 실험을 사주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왜?"

알 수 없었다. 동시에 반론이 마음 속에서 떠올랐다. 소니아 님은 키레넨의 번영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인데, 그런 일을 할 리가? 하지만 경험한 증거들은 너무나 선명했다. 그렇게 뒤척이던 드미트리의 마음 속에 또 다른 반론이 떠올랐다. 그런데 나는 왜 소니아 님을 믿는 거지? 기억은 방 안에 고인 어둠보다도 더 깜깜했다. 그것을 떠올리려고 애쓰자, 아까보다도 훨씬 심한 두통이 몰려와서 드미트리는 신음을 흘렸다. 아무리 그 내용을 떠올리려고 애써도 고통만 가중될 뿐이었다.

"윽..."

신음을 흘리던 드미트리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입을 닦았다. 고통을 더 심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건에 자신이 연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죽도록 불안했다. 고개를 숙이자, 자신의 옷자락을 부적처럼 붙잡고 새근새근 잠든 꼬마의 얼굴이 보였다.

"후우우..."

그 불안감은 무겁고 컸다. 한시라도 빨리 기억을 되찾아서, 그 불안감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렇게 꼬마의 볼을 쓰다듬으며 밤을 지새우던 드미트리는,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결국 꾀병은 못 부릴 것 같군요."

창 밖에서는 먼 산들이 아침햇빛으로 시리게 깨어나고 있었다.

*

가짜 컨쿼러가 이동되었던 구덩이.

아이와 드미트리가 피를 흘리지 않고 빠져나왔기에, 여전히 그 괴물들로 가득했던 그 구덩이는, 그러나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남은 것이라곤 피와 살점 뿐이었다.

"이거 굉장하군!"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이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작센의 성에서 죽지 않고 빠져나왔던 사자궁, 빌헬름의 목소리였다. 그는 지금 골조만 남은 가짜 컨쿼러 위에 올라타서 폭발적으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특별한 것이 들려 있었다. 전대 백양궁, 이 구덩이에 가득한 괴물들의 수장 노릇을 하던 그의 목이었다. 아이와 드미트리를 쫓아 이 구덩이에 도착한 사자궁은, 이틀 밤낮으로 구덩이의 괴물들과 싸워 모두 소탕해낸 것이었다.

"생각보다도 더 좆같은 일거리였어. 사냥감이 둘로 늘었군."

툭, 잘린 채로도 여전히 괴이쩍게 일렁거리는 그 목을 바닥에 내던지고, 사자궁은 구덩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드미트리가 아이를 업고 질질 끌며 올라갔던 그 발자국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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