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198화 (198/279)

36. 용기 ( 1 )

아이와 드미트리가 탄 마차는 넓고 아늑했다.

시장이 답례로 준비한 마차였다. 사람을 빈틈없이 채운다면 서른 명도 너끈히 들어갈 법한 마차의 구석에서, 아이는 나무토막을 조각하고 있었다. 앞에 마주앉은 드미트리는 손을 뺨에 대고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율사복 차림이었다.

아셀라이에게 조각을 배운 후부터, 틈이 날 때마다 조각을 연습한 아이의 솜씨는 이미 흠 잡을 데가 없었다. 칼날의 서늘한 빗면이 나무를 부드럽게 도려내기를 거듭해서, 존재하지 않았던 형상을 새겨나가는 과정은 아름다웠다. 마치 처음부터 나무토막 안에 들어 있었던 어떤 형상을 꺼내는 듯이 자연스러웠다. 이번에 아이가 조각한 건 말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마차를 끌고 있는 말이 분명했다.

"소재 선택이 특이하네요. 단순파를 좋아합니까?"

그 전에 조각한 건 마차 내부에 걸려 있는 장식용 등롱이었다. 그다지 미술에 조예가 깊은 건 아니지만, 나름 교양있는 대화를 많이 나눠본 드미트리는 기억을 더듬어 말을 꺼냈다. 마무리로 말의 관절부를 매만지던 아이는 손놀림을 멈추고 물었다.

"그게 뭔가요?"

"그런 것도 모른단 말입니까? 신화나 영웅담 대신, 주변의 사소한 사물과 일상에서 마주치는 것들에게서 소재를 구하는 사조 말입니다."

드미트리는 의기양양해져서 어디서 요약으로 보았던 말을 늘어놓았다. 드미트리의 겉핥기 지식을 새 지저귀는 소리처럼 건성건성 들으며 아이는 조각을 계속했다. 말 조각을 마치고 새 나무토막을 집어들었을 때, 드미트리는 의기양양하게 이런 말을 꺼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정말로 눈에 보이는 걸 옮기기만 해서는 호응을 받을 수 없어요. 아시겠지만 말입니다, 요즘 추세는 인문주의라서 말이에요. 조언을 드리자면 사람을 소재로 삼는 게 더 좋은 호응을 얻을 겁니다. 그, 밀레탕트의 <신록>처럼..."

"사람이요?"

"예에에..."

드미트리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 새 나무토막을 집어든 아이가, 진지하게 자신을 쳐다보며 나무토막을 매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곤 칼날을 대담하게 들이밀어 조각을 시작했다. 조각되고 있는 것은 언뜻 보아도 여인의 흉상이 틀림없었다. 혹시 그런 말을 했다고 나를 조각하려는 건가요? 졸지에 모델이 되어 당황한 드미트리는 다리를 다소곳이 모아 정좌하고 귀밑머리를 살짝 매만졌다. 조각이 시작된 후 아이는 거의 이 쪽에 눈길을 보내지 않았지만, 어쩐지 계속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자꾸 헛기침이 나왔다. 갑자기 침묵이 찾아온 마차 안에는 사각대는 소리와 바퀴가 굴러가는 희미한 소리만이 낮게 울려댔다.

"다 됐다."

"어디 봐요."

그리고 아이가 조각을 마치자, 드미트리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뺨은 살짝 상기된 채였다. 그러나, 그 표정은 흉상을 보자마자 딱딱하게 굳었다. 거기 조각되어 있는 건 자신이 아니라, 륜이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 표정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고 입술을 깨문 드미트리는 아이의 손에서 륜의 흉상을 빼앗아선 이모저모 품평하기 시작했다.

"흠, 너무 미화가 심한 거 아닙니까? 그 여자가 이렇게 눈이 크던가요? 머릿결도 너무 좋게 표현한 것 같은데요."

옆에서 굽어보던 림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또 드미트리의 불평을 한 귀로 흘리면서,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이 마차는 북서 자치령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기억을 희미하게 되찾은 드미트리가, 아마도 그 곳에 컨쿼러가 숨겨져 있을 확률이 제일 높다는 의견을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그 땅을 확보한 이유는, 단순히 아지프와 카나기가 접근할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세계의 멸망의 주원인은 남부에서부터 짓쳐들어오는 외신과, 제국 내부의 마술사들이었다. 곡로 자치령은 멸망의 위기에서 가장 안전한 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멸망 이후 키레넨의 나라를 세울 땅으로 북서 자치령을 선택했다.

"그 수사를 끌어들일 때, 우리는 이 땅에 많은 지원과 투자를 거듭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만, 사실은 그 일이 없어도 기반을 닦을 생각이었습니다. 당연하죠. 앞으로 우리의 민족이 살아갈 터전이 될 곳이니까요."

소니아가 하필 사소필렌을 선택한 이유도 그것이라는 말이 뒤따랐다. 폐허가 된 세상을 재건하는 일에 가장 쓸모가 있는 신앙이 사소필렌이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마치 설득을 하듯 이런 저런 정보를 늘어놓던 드미트리는, 한참 지난 후에야 이런 결론을 내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거대한 물건을 숨길 장소는 북서 자치령밖에 없다, 그게 제 생각입니다."

그 말을 륜과 함께 검토한 아이는, 곧 드미트리의 말을 따랐다. 그녀가 진심을 담아 한 말임을 륜이 확인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륜은 색다른 사실도 확인시켜주었다.

"아무튼 당신의 재능은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안목이 부족해요. 지금 우리가 향하는 북서 자치령의 거점에는 미술관도 있으니까요, 제대로 보는 눈을 길러드리죠."

"미술관? 그런 것까지 마련했나요?"

"물론이죠. 당신도 직접 보면 놀랄 겁니다. 상상도 못할 아낌없는 투자로 아무것도 없던 빈농촌을 훌륭하게 개발해놨으니까요. 말만 앞서는 그 여자와 다르게, 착실하게 대안을 준비해놓았죠."

"그 여자?"

"우리를 감쪽같이 속이고 당신에게 붙은 이 여자 말입니다. 이전 피해자로서 조언을 좀 드리고 싶은데요."

드미트리는 륜의 조각상을 바닥에 내려놓은 채 은근히 말했다. 아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륜이 확인시켜준 또다른 사실이란, 그 많은 대립에도 불구하고 드미트리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이를 조디악의 편으로 회유하는 것을.

"마음은 고맙지만 딱히 필요 없는 조언이군요."

그 일환으로 우선 륜과의 이간질을 시도하는 듯했다. 이런 식의 대화가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되었기에 아이가 선제적으로 입을 막으려 들었지만, 드미트리는 멈추지 않았다.

"내기할까요? 지금 제 말을 들어두지 않으면 언젠가 당신, 후회하게 될 텐데요."

"당신 몫의 조각은 안 만들어줘서 삐졌습니까? 적당히 시간날 때 당신 몫도 만들어 줄테니 이제 그만하죠."

"누, 누가 삐, 아니, 어린애인 줄 압니까!"

당황한 드미트리는 화를 내면서도 입술을 흐물거렸다. 역효과였다. 지금까지 더 폭력적인 대응에 길들여져 왔던 드미트리는, 이 정도라면 자신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넘겨짚어 버린 것이었다. 드미트리는 더 대담하게 말의 수위를 높이기 시작했다.

"감히 저희가 선하다거나, 어쩔 수 없었다거나, 이런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손을 더럽히면서 다가올 재앙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 건 그 쪽이나 이 쪽이나 똑같지 않습니까? 오히려 우리가 해 놓은 준비에 그 여자가 무임승차하는 중이지요."

"그쯤 하죠."

"아니요. 그만 못하겠습니다. 제가 볼 땐 말입니다, 이미 당신은 그 여자의 피해자입니다. 옛날에 보았을 때는 훨씬 더 당당하고 구김살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통령이니, 성좌니, 원하지도 않는 자리를 받고 원하지도 않는 죄를 짓게 이용당하면서, 훨씬 괴로운 얼굴이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당신도 절 이용하려고 접근한 건 똑같지 않나요."

"그래요. 당신은 강하니까, 아마도 이 세상엔 당신을 이용하려는 사람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데 왜 저는 안 되고 그 여자는 됩니까? 차, 차이점이라면, 저희 쪽이 더 현실적이고 명확한 목표를 가진 것밖에 없을 텐데!"

대화하던 도중, 스스로도 잘 알 수 없는 오기가 치솟아서 드미트리는 그렇게 외쳤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조가 비아냥조일지언정, 언제나 냉철한 거래를 제시해왔던 드미트리답지 않은 논변이었다.

"그, 그 여자는 어떤 측면에서, 저희보다 더 악하지 않습니까. 그 여자가 어떻게 당신을 옭아맸는지, 뻔하죠. 세상의 위기를 볼모 삼아 당신을 협박했을 겁니다. 당신은 순진하니까, 이 세상 전체를 인질로 잡힌 것처럼 거기 당했겠죠. 우리도 같은 수를 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소한 우리가 우리 민족 바깥에게는 악당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서도, 드미트리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도발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 날 기나센에서 쫓겨나면서 품었던 기억이 되살아나며 입을 계속 움직여서 멈출 수가 없었다. 차가운 표정으로 창밖의 빛을 등지고 선 아이의 얼굴에 음영이 짙게 깔렸다. 손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접근하는 것이 보였다. 드미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꼭 감으면서도 외쳤다.

"예언할까요, 언젠가 그 여자를 동료로 삼은 걸 후회하게 될 겁니다! 배신당할 테니까요!"

"그럴 걱정은 없습니다."

한 대 얻어맞을 거라는 생각과 다르게, 부드러운 촉감이 머리에 닿았다. 드미트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가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듯 두드리고 있었다.

"당신이 보증해줬으니까요."

"그 무슨... 아!"

아이 우르드를 위해서 살아간다는 보증. 그것을 자신이 해주었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 당시에는 에바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지만, 자신이 살아 있는 한 두 사람의 결속은 굳건한 것이었다. 힘이 쭉 풀린 드미트리가 바닥에 형편없이 주저앉는 것을 뒤로 하고, 아이는 다시 구석으로 돌아가 조각을 시작했다. 아이는 또 커다랗게 나무토막을 잘라내면서 말했다.

"당신이 보기에는, 제가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까?"

무릎을 끌어안은 채, 드미트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빗면에 묻은 톱밥을 털어내면서 아이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제 선택입니다. 제가 짊어져야 할 죄일 테고요. 당신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알겠습니다만, 억지로 저를 미화하진 말아 주십시오."

웅크린 드미트리는 갑자기 감정의 기복을 느꼈다. 진심을 털어놓은 적이 이번이 처음이어서일까, 딱히 그런 내용이 아닌데도 고백을 거절당한 듯한 기분을 느낀 탓이었다. 손톱을 곱씹던 드미트리는 문득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았다. 황금으로 장식된 창틀 너머로, 북서 자치령의 무성한 수림이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했다. 억지로 입꼬리를 움직여 비꼬듯 웃으며, 드미트리는 선포했다.

"북서 자치령에 도착하고 나서 후회하지나 마시죠. 저희가 얼마나 그 불모지를 잘 가꾸어놓았는지 두 눈으로 보고 나면, 저희가 나은 대안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팩 고개를 돌리더니, 그대로 옆으로 누워 이불도 없이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

다음 날, 예정된 목적지에서.

"이게, 아닌데..."

아이보다 한 발 앞서 마차에서 내린 드미트리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분명히 천금을 투자해서 잘 정비해놓은 거점이, 황량한 폐허로 초토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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