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용기 ( 2 )
"이게 당신이 자랑하던 번영한 자치령입니까?"
벌어진 참상을 보고 힐난조로 말을 꺼낸 아이였지만, 이내 드미트리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넋이 나간 듯 사방을 둘러보는 그녀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마도 이 폐허는 그녀에게도 예상 밖인 듯했다. 생각이 멈춘 듯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보다못한 아이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우선 어떻게 된 일인지 둘러보도록 하죠."
손을 붙잡혀서, 드미트리는 넋나간 듯 아이의 뒤를 따랐다.
십여 분을 돌아봐도 인기척은 없었다. 황량함 뿐이었다. 아마도 이 거점의 자랑이었을 분수는 산산조각난 채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도금 조각상은 상반신이 비스듬히 잘려 얼굴을 잃어버렸고, 큰 폭발이라도 있었던 듯 움푹 패인 땅거죽은 검게 죽어 있었다. 다른 곳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급스럽게 마련한 주택가도 부서졌고 초라한 거주지도 싸늘했다. 마굿간에선 가축들이 목줄에 매인 채로 발견되었다. 굶어죽은 듯 싶었는데, 옆구리에선 파리와 구더기가 검푸르게 들끓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구석에서 헛구역질을 했다.
"왜 이 거점이 이런 꼴이 됐는지, 짐작 가는 게 전혀 없습니까?"
"없, 우우욱!"
전장을 누비며 부패한 냄새에 익숙해진 아이와 다르게, 그녀는 썩어 눌어붙은 살의 악취를 견뎌내지 못했다. 한바탕 구역질을 하던 드미트리는 누군가 자신의 등을 두드리는 것을 보고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이가 등을 쳐주고 있었다. 드미트리의 얼굴은 순식간에 부끄러움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잠시, 일 좀 보고 오겠습니다!"
무작정 폐가를 빠져나간 드미트리는 으슥한 골목에 도달해서야 벽을 붙잡고 멈췄다. 이마에 벽의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조디악의 총관으로 활동했던 기억 대부분을 잃어버린 상태였기 떄문에, 지금 그녀는 저런 참상을 처음 본 충격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이런 걸로 충격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입술을 앙다물고 소매로 입을 스윽 닦은 드미트리는 곧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어떻게든 평정을 되찾으려 애쓰며, 골목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응?"
골목의 끝자락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사람의 형체였다. 유난히 팔이 긴 그것은, 쭈그려앉아 이쪽을 등진 채 무언가를 우적거리고 있었다. 생존자가 있던 건가? 두려움과 반가움이 섞인 채 드미트리는 그 형체에 가까이 다가갔다.
"저기, 말씀 좀..."
그리고 다가가 말을 붙인 순간, 홱 고개를 돌린 그 형체의 얼굴을 보고 경악하고 말았다. 그것이 먹고 있던 건 산채로 꿈틀거리는 회색 쥐였다. 그 괴물은 입가에 피를 가득 묻힌 채, 드미트리를 돌아보고 소리를 내질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레, 레버넌트?"
그제서야 그것의 정체를 파악한 드미트리는 소리질렀다. 이건 레버넌트였다. 황금 가면이 벗겨져 있고, 복장 역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어 눈치채지 못한 것뿐이었다. 그 얼굴은 괴이쩍으면서도 낯익었다. 얼마 전, 아지프의 마탑에서 보았던 그대로, 괴상하게 융해되고 응고되기를 반복하며 어지러운 형상을 그려댔기 때문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성을 잃은 그것은 폭주하고 있었다. 입에 문 채 으적거리던 고기를 내던진 그것은 더 신선한 고기, 그러니까 드미트리를 향해서 달려들기 시작했다. 드미트리는 황급히 몸을 숙여 피했다. 쾅! 금이 가 있던 벽이 부서지며 돌조각이 쏟아졌다. 이 변이된 레버넌트는 굶주린 상태에서도, 보통 레버넌트보다 훨씬 강하고 난폭했다.
"악!"
새된 비명이 어두운 골목 안을 울렸다. 어떻게든 기어서 달아날려던 드미트리의 등을 레버넌트가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찌익! 등 한복판에 강렬한 통증이 몰려왔다. 레버넌트가 옷째로 등을 물어뜯어 생살을 씹기 시작한 것이었다. 흉곽을 짓눌린 탓인지 비명 대신 눈물과 신음만 새어나왔다. 그 때였다.
퍽!
벽돌이 부서지는 듯한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드미트리는 압박에서 풀려났다. 눈물 고인 눈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달려온 아이가 레버넌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넣고 있었다. 드미트리의 비명을 듣고 찾아온 모양이었다. 레버넌트는 깔끔하게 벽에 쳐박혔다. 자욱하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흐릿한 시야 때문에 잘못 본 것인지, 주먹을 얻어맞은 얼굴이 일순 끈적한 기름처럼 터져나가는 듯 보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레버넌트는 다시 네 발로 지면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주먹을 펴서 가볍게 털어낸 아이는 대검을 휘둘러 맞섰다. 스하악! 예리한 절삭음. 레버넌트의 기형적인 몸뚱이는 단번에 비스듬히 조각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부패하는 살덩이처럼, 계속해서 부정형의 문양을 그리며 꿈틀대던 레버넌트의 얼굴은 그제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저게 뭐지?"
'이 여자한테 물어보는 편이 더 빠를 것 같구나, 어린 순례자야.'
검을 집어넣은 아이는 림과 대화를 나누며 드미트리에게로 다가갔다. 엉망으로 찢겨나간 드미트리의 등에는 선명한 이빨자국이 남아 있었다.
"괜찮습니까?"
"이, 이 정도, 아무렇지도..."
눈물을 글썽이며 허세를 부리는 드미트리를 번쩍 집어들어 어깨에 태웠다. 저항할 힘도 없는지, 드미트리는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골목을 나서려 할 때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먹이를 발견한 늑대 무리같은 울음이 사방에서 울려퍼졌다. 뒤를 바라보니, 어느새 수십 마리의 레버넌트가 홀연히 나타나 벽, 지붕, 나무 위에서 이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가면이 벗겨진 상태였고, 그 얼굴은 안개처럼 일렁였다. 가장 앞에 나선 레버넌트가 입을 크게 벌리고 울부짖었다. 공격을 알리는 그 굉음 한가운데서, 검은 혓바닥은 뱀처럼 꿈틀거렸다.
"흡!"
아이는 제빨리 땅을 박차고 마차를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맞서 싸워도 이길 자신은 있었지만, 부상을 입은 드미트리의 치료가 먼저였다. 운집한 레버넌트는 홍수처럼 길을 가득 메우며 아이를 뒤쫓았다. 꺾어진 골목을 돌아 그들을 따돌린 아이는 부서진 수레달구지를 박차고 담벽을 디뎌 지붕에 올라탄 뒤 건물들 위를 내달렸다. 사람이라기보단 고양이 같은 도주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한 발 늦게 도착한 레버넌트는 그 입체적인 도주 경로를 이해하지 못해 잠시 멈춰섰다. 선두가 멈춰섰지만, 뒤따르던 놈들은 정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선두를 들이박았다. 일대 난장판이었다. 거리를 가득 메울 듯 쏟아져나온 레버넌트들은 자신들키리 뒤얽혀서 팔과 머리를 허우적댈 뿐이었다. 몇 놈은 지붕 위를 뛰어 멀어져가는 아이를 보고 손짓했지만, 그 손짓은 소음에 묻혀서 결국 아이를 배웅할 뿐이었다.
*
그늘진 숲의 야영지.
"아야야..."
"좀 참으세요."
그대로 마차를 몰아 거점을 벗어난 아이와 드미트리는, 버려진 야영지에 도착해서 멈추었다. 어느새 저녁이었다. 야영지의 흔들리는 모닥불 근처에서, 아이는 드미트리의 상처를 봐주고 있었다. 뒤돌아선 채 쭈뼛거리며 등의 상처를 내보이는 드미트리와 다르게, 소독하고 연고를 펴바르는 아이의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됐습니다! 그 다음부턴 제가 혼자서 할 수 있습니다!"
또 손바닥 가득 회백색 연고를 부은 아이를 보고 드미트리는 당황한 듯 소리질렀다. 하늘에선 검푸른 숲 위로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진한 노른자색 햇빛은 삽시간에 녹아내리듯 숲 전체에 퍼져서, 그녀의 옆얼굴도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아이는 치료를 계속할 뿐이었다.
"얌전히 있어요. 잘못하면 평생 흉터가 남을지도 모르니까."
"나, 남아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평생 보여줄 사람도 없고."
어쩐지 서글픈 반박이었다. 하는 수 없이 드미트리는 팔짱을 끼듯 옷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물끄러미 모닥불을 응시했다. 불꽃 위에선 자신의 자그마한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불현듯 먼 옛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렸을 적, 딱 한 번, 이렇게 간호를 받아본 적이 있었다. 자신을 딸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부모에게였다.
"왜 이 거점이 이런 꼴이 되었는지, 추궁하고 싶지 않습니까?"
붕대를 이빨로 끊던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전히 모닥불을 응시한 채로, 드미트리가 그런 말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그 괴물은 이 거점을 지키기 위해 주둔했던 레버넌트들입니다. 그리고 레버넌트들은 소니아 님의 의지에 반할 수 없죠."
"그 말뜻은?"
"아마도 이 거점을 이 꼴로 만든 건 조디악일 겁니다."
아이 역시 어렴풋이 짐작하던 것이었지만, 의외의 대답이었다. 긴 추궁을 거쳐야만 드미트리의 입에서 정보와 인정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치료 역시 그것을 위한 일종의 사전작업이었다. 그런 아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드미트리는 스스로를 끌어안듯 꼬옥 팔짱을 끼고 말을 이어갔다.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저도 혼란스러울 뿐이에요. 이 거점을 만들 때, 그 분은 분명 이 땅이 우리의 번영의 장소가 되리라고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 이런 꼴로 만들어놓은 것인지... 생각하려 하면 할 수록 머리가 하얗게 아파오기만 합니다."
그리고 드미트리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아이가 자신의 옷을 벗어서, 하얗게 드러난 드미트리의 등을 덮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워낙 체구가 작은 그녀였기에 이불에 파묻힌 듯한 꼴이 되었다.
"그렇습니까."
"추궁하거나 고문하거나, 그런 작업 없이 바로 믿는 겁니까?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이를 보고 마음에도 없는 말이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아이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 순간 노을은 강렬한 진홍빛을 남기고 완전히 지평 너머로 저물었다. 세상을 가득 메운 찰나간의 찬란함 속에서, 아이의 얼굴은 유독 더 아름다웠다. 드미트리는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전에, 처음 보았을 때도 감탄한 적이 있었지만, 그 때에는 그저 우상으로 이용할 수 있으리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느새 길게 늘어진 속눈썹과 눈가 어딘가에 어린 슬프고 무거운 어떤 것이, 이전과는 다른 인상을 자아내고 있었다.
"속고 나서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십시오!"
노을이 끝나고 세상이 암전했을 때, 드미트리는 다시 홱 뒤돌아서서 앉았다. 그리고 잠시 침묵한 뒤, 생각한 것을 이어 말했다.
"저도 그 의문을 풀고 싶습니다. 그걸 위해선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해요. 지워진 기억 어딘가에 그 단서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단서? 어디서 찾을 생각입니까?"
"이 자치령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목격한 사람들이 있겠죠. 그들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하지만, 이 곳의 사람들은..."
이미 저렇게 폭주한 레버넌트들에게 끝장나지 않았겠냐고 아이가 되물려고 할 때였다. 드미트리는 아이의 겉옷을 망토처럼 여미며 말했다.
"아뇨. 딱 한 곳, 이 자치령에서 조디악에게만큼은 절대적으로 안전한 곳이 있습니다. 그 곳에 가서 정보를 얻으면 되겠지요."
"한 곳?"
"델로른."
아주 잠깐동안 아이는 그 지명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장소를 떠올린 것은, 드미트리가 조소를 베어물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저를 무자비하게 구타해서 맹세시켰던 마을 아닙니까. 조디악이 절대로 건드리지 못하도록."
"아!"
드미트리가 지금 목적지로 제시한 곳은, 다나와 함께 구했던 그 사과꽃으로 가득한 마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