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00화 (200/279)

36. 용기 ( 3 )

델로른의 햇볕은 차가운 아침에도 눈부셨다. 겨울을 견디고 연두색 새싹을 밀어올린 사과나무 가지마다 흰 햇살이 녹아들어 있었다. 그 평화로움과는 대비되게, 농장의 성가퀴는 긴장으로 가득했다. 어설프게 손질한 병장기를 꼬나쥔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던 것이다.

날개를 쉬던 새 한마리가 쇳소리에 놀라 푸드덕 날아올랐다. 그 성가퀴의 한가운데에 있는 망루, 원래는 창고였던 급조 망루 위에 올라선 두 사람의 시야를 새는 가로질러 날아갔다. 그 두 사람은 이리나와 뢰프였다.

뢰프는 수심에 가득찬 표정으로 저 멀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어찌나 들여다보았는지, 눈에는 망원경 모양의 자국이 생겼을 정도였다. 현재 델로른은 갑자기 광증에 빠진 레버넌트들에게 포위당한 상태였다. 망원경 너머로도 그들의 깨진 가면과,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괴이쩍은 살결이 똑똑히 보였다. 그 괴물들은 마치 순례라도 하는 것처럼, 불경한 행렬을 이루어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어떤 법칙이라도 있는 건가?'

눈살을 찌푸리며 뢰프는 중얼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북서 자치령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저 괴물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델로른에는 접근하지 않았다. 아니, 접근하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벽에라도 가로막힌 것처럼 델로른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폭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끼익! 외마디 비명이 울려퍼졌다. 방금 전의 그 새가 델로른을 벗어나다 레버넌트에게 붙잡힌 것이었다. 그 레버넌트는 깃털도 뽑지 않고 생살을 물어뜯었고, 그 위로 수십 마리의 레버넌트가 덮쳐들어서 그 자그마한 새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비위가 상한 뢰프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내려놓았다. 그 때였다.

"어! 아빠! 저기 봐!"

옆에서 함께 레버넌트의 동태를 감시하던 이리나가 소리질렀다. 흥분된 어조였다. 뢰프도 황급히 망원경을 다시 눈에 가져다댔다. 둥근 시야 가득히 살육의 현장이 담겼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랐다. 레버넌트가 살육당하는 쪽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흡!"

반짝이는 은발의 검사가 대검을 휘두르며 포위망을 쳐부수고 있었다. 기괴하게 웃자란 팔다리를 휘두르며 막아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우수수 살점과 핏물이 비산했다. 그 옆구리에는 자그마한 여자 하나를 달고 있는 것 같았다.

"저건!"

뢰프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 순간, 그 은발의 검사는 대검으로 거대한 호를 휘둘러 레버넌트 수십 마리를 단숨에 쳐부수고 델로른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망원경의 둥근 시야 가득 그 얼굴이 들어왔다. 몰라볼 수가 없었다. 그건 이 마을을 구해준 은인, 아이였다. 아이와 드미트리가 계획대로 델로른에 방문한 것이었다.

"어서 문을 열어라!"

망루 아래의 보초병들이 갑자기 나타난 방문자에 놀라 우왕좌왕할 때, 뢰프는 반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망설이던 보초병들은 뢰프가 곧 방문자의 정체를 말하자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다. 레버넌트들이 더 쫓아오지는 않나 뒤를 경계하며 걷던 아이는, 망루 위에서 손을 흔드는 뢰프를 발견하고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아, 아직 당신을 기억하는 모양이군요. 그럼 이만 내려주지 않겠습니까?"

옆구리에 매달린 채로 드미트리가 웅얼거렸다.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와는 다르게, 드미트리는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아이의 팔에서 내려온 후 등그림자에 숨어 델로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

"귀한 몸이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

뢰프는 한 팔로 아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 벽지까지 아이가 이룬 일들에 대한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가짜 컨쿼러에서부터 시작된 긴 이야기를 다 들려줄 수 없었던 아이는 짧게 대답했다.

"다시 한 번 이 땅을 구하러 왔습니다."

드미트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간단한 말로 의문이 해결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뢰프와,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더욱 어처구니 없었다. 그 말 한 마디만으로 모든 의문이 해결되기라도 한 듯이 환희에 찬 환성을 내질러댔기 때문이었다. 그 외침이 끝난 후, 뢰프는 아이와 드미트리를 이끌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현 상황을 안내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리나는 그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지금 네가 남기고 간 조합은 그대로 이름을 바꾸어서 자경단으로 활동하는 중이야."

그래서 조합장이었던 뢰프가 그대로 단장 역할을 하고 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원래부터 조직이 갖추어져 있던 덕분인지, 델로른은 레버넌트들에게 포위되었다는 위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꽤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 뢰프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아이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들 모두는 두 사람을 환영했고, 멋대로 감격하거나 용기를 얻거나 친절한 말을 건네왔다. 아이와 만나는 것만으로도 어떤 용기와 위안을 얻는 듯했다. 그 반응은 긴장된 표정으로 아이의 옆을 따라걷는 드미트리에게도 똑같이 돌아왔다. 드미트리는 여전히 율사복 차림이었다. 그들은 드미트리를 보고 멋대로 감격하거나, 멋대로 기뻐했다.

"여신님의 가호가 있기를."

"예? 예에에... 가호가 있기를."

드미트리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할머니를 보며 얼떨결에 중얼거렸다. 이런 종류의 사회적 상호작용은 드미트리가 겪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은 언제나 충돌이며, 계약으로서만 성립될 수 있다고 생각해온 그녀였다. 그녀의 부모를 제외하고, 어려서부터 겪어온 모든 만남은 항상 그랬다.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람들은 이토록 선뜻 타인을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니, 위기 상황이니까 멋대로 자신을 내맡기는 것 뿐이겠지요. 약자의 특성, 비겁한 습성입니다.'

온기가 남은 손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드미트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 동안, 뢰프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들려주는 중이었다.

"네가 떠나고 나서, 놀랍게도 조디악은 약속을 철저히 이행했다. 우리에게 손을 대지 않았고, 의외로 북서 자치령도 그리 나쁘게 운영되지만은 않았어."

드미트리는 잠자코 그 말을 듣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거점을 일부러 황폐화시키는 세력은 없으니까. 각지에는 투자, 구휼과 함께 일정량의 레버넌트가 파견되었고, 그들은 조디악의 일꾼으로 갖가지 부역을 해치워왔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이 땅의 모든 레버넌트들이 가면을 벗어던지더니, 얼굴을 부여잡고 박박 긁어대기 시작했지."

그리고 영문을 파악하기 위해 레버넌트에게 다가갔을 때, 그것들은 괴물이 되어 사람들을 습격했다. 그 결과가 아이와 드미트리가 보았던 그 텅 빈 마을이었다. 여기까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 표변이 일어난 일자였다.

"내가... 죽었을 날부터."

드미트리는 중얼거렸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뢰프는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는 레버넌트가 머물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각지에서 이 곳으로 피난민이 몰려오기 시작했지. 곧 자경단을 조직하고 울타리를 세워 방어에 나섰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어. 봤지? 저 이상한 포위를."

레버넌트들은 델로른에 접근하지 못했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일정 거리를 빙글빙글 맴돌 뿐이었다.

"덕분에 한 시름 놓긴 했다. 하지만 저게 대체 어떤 이유로 일어나는 건지 모르니 어느 날 갑자기 쳐들어올 가능성도 있어서, 경계를 늦추지 않고 감시하던 중이었지. 일단 이 포위다. 네 덕분에 조디악에게서 받은 물자가 남아 있어서 어느 정도 버틸 수는 있겠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몰라 걱정하던 참이었다."

그렇게 설명하는 뢰프의 등 뒤에서, 드미트리는 아이의 옆구리를 찔러 몸을 낮추도록 부탁한 뒤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제가 죽은 줄 알고, 이 곳을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제가 살아버린 바람에,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드미트리의 안색은 어두웠다. 그 말은 곧 그녀를 버림패로 썼다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각오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고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지도 못했다. 이 자치령에는 이미 수많은 키레넨들이 이주해 사는 중이었다. 이 학살과 난동의 희생자 중에는 그들도 분명 적잖이 섞여 있을 터였다. 국경 도시에서 보았던 실험체들이 불현듯 머리에 스치고 지나갔다.

'대체, 뭘 숨기고 있던 겁니까?'

표정을 굳히고, 마음 속의 소니아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며 드미트리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당신!"

보폭이 좁은 드미트리가, 성큼성큼 나아가던 뢰프와 아이에게서 멀리 뒤쳐졌을 때였다. 그 때를 틈타서 이리나가 앙칼지게 소리질렀다. 혹시 들킨 건가? 드미트리는 긴장한 채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이리나가 가리킨 것은 드미트리가 아니라 아이였다.

"아까부터 분위기가 이상해서 못 물어봤는데, 언니는 어따 두고 새 여자랑 놀고 있는 거야?"

짐짓 화난 듯 아이에게 다가간 이리나는 아이의 목옷깃을 잡아당기며 최대한 험상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당연히 다나도 아이 곁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혹시 바람이라도 피는 거야? 엉?"

"설마요."

아이가 피식 웃으며 반문하자 이리나는 손을 놓고 물러섰다. 그리곤 고개를 홱 돌려 드미트리를 쳐다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드미트리의 이모저모를 훑어보던 이리나는 곧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말했다.

"보니까 나랑 또래인 것 같은데, 말 편하게 해도 되지?"

"예? 예에에..."

혹시라도 들키지 않았을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한 드미트리였지만, 이리나에게는 그게 캥기는 점이 있다는 표시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앞장서 걸어가는 아이의 등을 손가락질하며 수근댔다.

"이미 훨씬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언니가 임자 찍어 놓았으니까, 혹시라도 저 인간한테 속아넘어가지 마라. 알겠어?"

아마도 그 언니란 다나를 뜻하는 것이었다. 반사적으로 어설프게 웃으며 흘려넘긴 드미트리였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았다. 스스로도 이유를 잘 알 수 없는 화였다. 아이와 동행한 이후로, 살면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감정을 여럿 느끼고 있었다.

"도착했다. 일단 여기서 머무르면 될 거다. 너희에겐 익숙한 장소지?"

그런 신경전이 오고가는 가운데 일행은 낯익은 건물에 도착했다. 황금으로 덧칠한 으리으리한 건물, 한때 조디악의 도박장으로 쓰였던 곳이었다.

"이곳을 피난민들의 거처로 쓰고 있단 말입니까?"

드미트리는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확실히 꽤 많은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그렇게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 땅에서 가장 값어치 있는 건물을 조합장인 뢰프나 간부가 외부인들에게 내주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건물 안에 들어간 이후 발견되었다. 한때 당당하게 들어왔던 건물 안으로 어색하게 발을 내딛은 드미트리는, 구석에서 의외의 얼굴들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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