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용기 ( 4 )
그건 주름진 얼굴이었다.
당장 노동력으로 쓸 수 있는 건장한 이들만을 피난민으로 받은 것이 아니었다. 구석에는 몸을 가누기 힘들어 보이는 노인도, 어린아이도 옹기종기 모여 모포를 덮어쓰고 웅크려 바닥의 한기를 이겨내고 있었다. 그 옆을 스쳐지나가면서, 드미트리는 어안이 벙벙해서 물었다.
"저 사람들은 이 곳의 주민들입니까?"
행색만 보아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확인차 한 질문이었다. 뢰프는 머쓱한 듯 짧게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어수선하게 벌어진 사람들 틈을 헤쳐나갈 때마다, 기침과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아까 물자가 부족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선별 없이 무작정 아무나 받아들여도 될 만큼은 여유가 있나 봅니다?"
드미트리의 비꼬는 말투에 발끈한 건 이리나가 먼저였다. 눈썹을 일자로 곤두세우고 뭐라 소리치려는 찰나, 뢰프가 입을 막았다.
"이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대조적으로, 변명하는 어조였다. 머리가 복잡해진 드미트리는 다시 입을 다물고 뒤를 쫓아가던 중, 또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멀리서도 선명히 보일 정도로 솟은 귀털이 특징적인 두 사람, 키레넨 모자였다. 혹여라도 눈에 띄고 싶지 않은 듯 짙은 벽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놀라서 손가락질했다.
"키레넨까지 받았습니까? 피난민으로?"
사실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 땅에는 이미 많은 키레넨이 이주해 있었으니, 피난민들 중 그들이 섞이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당연하지 않은 것은 그들의 입장이었다.
"이들은 적...의, 잠재적인 배신자나 다름 없지 않습니까? 이들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받았습니까?"
뢰프는 깊은 한숨을 내쉴 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드미트리를 제도에 흔할 차별주의자로 생각한 듯싶었다. 또 변명 같은 말을 몇마디 읊조릴 뿐이었다. 드미트리는 혼란스러웠다. 차라리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을 크게 꾸짖었다거나, 어떤 확신에 찬 이상론 따위를 내세웠다면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뢰프의 목소리에는 힘도 없었고 확신도 없었다.
아마 스스로도, 물자가 부족한 고립지 한 가운데에 피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움을 바라고 찾아온 사람들을 죽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뒤섞인 것이, 옳은 일을 하면서도 변명조인 저 목소리였다.
뢰프의 옆을 걷던 아이는 조용히 드미트리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유 없는 악의에는 많이 노출되어 보았지만, 이유 없는 선의를 본 건 처음이었던 드미트리는 최초로 마주한 생애의 혼돈에 놀라 입꼬리를 떨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말없이 걷던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의 얼굴을 향했다. 이 사람과 동행한 이후로, 이전에는 경험한 적 없던 것을 참 많이 경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염려 때문인지, 아이는 드미트리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쑥스러운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심홍색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드미트리는 조용히 생각했다. 만약,
'조금 더 일찍 이 사람을 만났으면,'
"자! 이제 도착했구만!"
그 때 이리나가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서, 억지로 틈을 벌리고는 외쳤다. 어느새 두 사람이 머물 방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리곤 험상궂은 표정으로 드미트리를 노려보더니, 난폭하게 팔짱을 끼곤 걸어나갔다.
"여자용 숙소는 다른 곳에 있으니까, 따라와!"
저항 없이 끌려가면서도, 드미트리는 아까 하던 생각을 끝마치려 애썼다.
*방은 원래 투숙객을 위한 고급 객실이었다.
하지만 여러 피난민을 돌보기 위해 내부 설비를 뜯어간 모양인지, 양 쪽에 놓인 침대 말고는 곳곳이 휑하니 비어 있었다. 기름조차 아끼기 위해서인지, 방의 조명은 꺼져 있었다. 빛이라곤 먼지낀 유리창 너머로 흐릿하게 들이치는 달빛 뿐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아이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눈 아래서 곱게 피어오르는 주홍색 불꽃을 응시하면서, 아이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아직 안 자고 있습니까?"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돌아보자, 그 자리에는 드미트리가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아이가 입에 담뱃불을 문 채 쳐다보자, 그녀는 황급히 반대쪽 침대로 달려가선 벽을 보고 드러누웠다.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듯했다.
"무슨 일인가요."
"왜요, 안 됩니까? 원래 이 곳 전체는 내 건물이나 다름 없었는데?"
가시 돋힌 어조였지만 아이도 이제는 슬슬 그녀의 화법에 적응한 터였다. 고슴도치가 아무때나 바늘을 세우는 것처럼, 반사적으로 날선 말을 뱉을 뿐이었다. 순한 연기를 내뱉으면서, 아이는 말없이 드미트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본론이 나올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건물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도, 이 사람들보단 많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어..."
침묵이 이어졌다. 가느다란 팔 위로 둥글게 솟은 어깨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음. 이 도박장 지하에 있는 비밀 창고를 압니다."
아이의 눈이 커졌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그 저의를 알기 힘들어서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가 드미트리에게 가까이 접근하자, 그녀는 이불을 덮어 몸을 숨기고 웅얼거리듯 말을 이어갔다.
"지하에 있는 황소 석상의 뿔을 세 번 잡아당기면, 계단이 열립니다. 비밀 창고로 가는 계단이요. 원래 이 곳은 우리의 중심 거점 중 하나였으니까요, 꽤 많은 물자가 비축되어 있습니다. 뭐, 이 정도의 사람쯤은 일 년은 족히 버틸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말을 꺼내는 목적은 명확했다. 고립되어 위기에 처한 델로른 사람들에게, 그 창고를 개방해서 물자를 넘겨주라는 뜻이었다. 문제는, 갑자기 왜 그런 협조에 나섰느냐는 것이었다. 아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드미트리 곁에 앉자, 그녀는 또 쏘아붙이듯 말했다.
"왜요? 못 믿겠습니까? 그럼 당신이 그, 저, 그 외팔이 남자랑 같이 내려가서 확인해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왜 드미트리가 갑자기 이런 협조를 하는 것인지, 짚이는 점은 많았지만 하나도 명확하지 않았다. 어쩌면 조디악이 버린 키레넨을 이 마을 사람들이 받아들인 것을 보고 마음을 바꿨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드미트리가 보인 자신의 민족에 대한 집착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맞는 추론일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목소리는 지금껏 그녀가 그녀의 민족에 대해 말해왔을 때와는 달리 표독스럽지도, 당당하지도 않았다. 그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까 뢰프처럼.
"그게 원래 당신 목소리였군요."
아이는 그 말을 남기고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부드럽게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도, 드미트리는 이불을 덮어쓴 채로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방의 고요와 달리 그녀의 심장은 미칠 듯 뛰고 있었다.
'어쩌죠. 결국 말해버렸는데.'
그녀는 이미 조디악의 기밀 유지에 관련된 여러 계약을 마친 몸이었다. 그 중에는, 기밀을 적에게 누설해선 안 된다는 계약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협박을 당하거나 위협을 당할 때처럼,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위한 예외 조건도 있었지만, 지금 상황은 그 어떤 예외에도 해당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왜 자신이 이걸 말해주었는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멈춰 버리면...'
작은 손으로 가슴의 고동을 억누르며, 드미트리는 작게 웅크렸다. 파계 율사가 계약을 어겼을 때, 어떤 식으로 심장이 터지는지 들어본 적이 있었다. 혈류가 미친 듯이 가속되어서, 어느 순간 심장이 견디지 못하고 열매처럼 깨져버린다고 들었다. 계속 고동이 커질 때마다 다음 순간에 숨이 멈추지 않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몰랐지만 지금 그 심장을 가쁘게 뛰게 만드는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라 뿌듯함이었다.
*다음 날, 아이의 등장에 이은 낭보가 델로른 전체에 퍼졌다. 레버넌트들에게 고립된 이후 처음으로 생긴 낭보였다. 아이가 어떤 탁월한 안목을 통해 도박장 지하에 있던 비밀 창고를 발견해냈고, 거기서 대량의 곡식과 물자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말라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이었다.
점점 줄어가는 배급량 때문에 위기감에 젖어 있었던 델로른은 간만에 환성으로 가득 찼다. 마을 전체를 빙빙 휘감는 거대한 사람의 줄이 생겼고, 그 선두에선 마대자루 가득 물자를 받은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뢰프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아이는 그 옆에서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천사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그들은 자루를 걸머진 채로 연신 아이에게 인사했다. 아이가 난처할 정도로 진심으로 가득한 인사였다. 그들 중 하나가 천사라는 말을 꺼내자 아이가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일전에 아지프 놈들한테서 저희 마을을 지켜주신 천사 아니십니까?"
"아!"
북서 자치령 곳곳에서 피난민이 모였으니만큼, 그때 그 마을에서 온 사람도 있던 모양이었다. 벽에 기대 웅크려 앉아 있던 드미트리가 쿡 웃음을 터뜨렸다. 사라지면서도 연신 기도를 올리던 남자가 멀리 떠나가자, 드미트리는 나뭇가지로 바닥을 두드리며 말했다.
"천사? 당신 천사였습니까?"
"시끄러워요."
멋쩍은 대답에 드미트리는 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이 감사는 원래 드미트리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임에도, 그녀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드미트리의 공을 밝히려는 아이를 오히려 말릴 정도였다. 아마도 그녀가 사라진 후 북서 자치령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많은 심경의 변화가 있던 모양이었다.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어제 도박장에 들어서면서 보였던 태도 때문에, 드미트리는 피난민들에게 경원시되고 있었다. 아이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도 드미트리는 무시하고 지나갈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뭇가지로 흙바닥을 긁으며, 남의 일처럼 말을 꺼낼 뿐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는데, 뭐가 괜찮겠습니까."
"해결이라고 하면..."
"당신 설마 이 곳에 온 목적을 잊어버린 건 아니겠죠? 컨쿼러를 찾아서 인수받고, 당신들이 무기로 사용한다는 게 원래 목적 아니었습니까."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그것과 관련해서 오늘 밤 륜과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그런데 드미트리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저도 이 대단하신 천사님이랑 이제 그만 좀 동행하고 싶으니, 빨리 찾아서 넘겨드리고 헤어져야겠지요."
"그런가요. 저는 좀 섭섭할 것 같습니다만."
"섭.섭섭..."
중얼거리는 그녀의 얼굴이 잠시 불그락푸르락해졌다. 옛날에 그렇게 구타해놓고서 그런 말을 꺼내다니, 농락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기억이 지워지고 나서의 드미트리는 이전의 그녀와는 조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무튼! 그래서 밤새 그 물건의 위치를 고민해봤습니다. 의외로 간단하더군요. 이 레버넌트들은, 소니아의 명령을 듣고 여기에 쳐들어오려다 발을 묶인 겁니다. 그뤟죠?"
그리고 드미트리는 자신이 추론한 바를 이야기했다.
"이렇게 거대한 규모의 레버넌트들을 통솔할 수 있는 개체는, 이 지역 전체를 방위하는 사령관 역할을 맡기고자 만든 그 특수 개체밖에 없습니다."
레버넌트 마즈눈. 데몬스폰의 뼛가루를 이용해서 만든 특수 개체라고 했다. 그것을 만들 때 드미트리의 피가 소량 들어갔고, 그래서 그 개체의 지배권은 드미트리에게 있었다.
"그런데 제가 죽었다고 생각한 소니아가 마즈눈을 이용해 북서 자치령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을 겁니다. 하지만 마즈눈의 지배권은 여전히 제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 목숨을 염려한 마즈눈이 멈췄을 테고... 그게 지금의 이 교착 상태라는 분석입니다."
그러니 마즈눈을 찾아가서, 소니아에게 있는 곳으로 안내하라고 하면, 소니아가 있는 위치 즉 컨쿼러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아이의 머리는 잠시 복잡하게 헝크러졌다. 지금까지 드미트리는 아이에게 최소한의 협력만을 해왔다. 아지프의 마탑에서는, 그 입장을 이용해 태업을 하려고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이 말은, 드미트리가 아이에게 진심으로 협력할 때에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니 저를 그 마즈눈한테 데려가면, 찾아 드리죠. 소니아의 위치를."
그리고 마즈눈을 시켜서 레버넌트를 해산시키면, 델로른의 위기도 끝날 것이다. 그런 말로 드미트리는 말을 끝마쳤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푹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팔짱에 고개를 파묻은 채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이는 잠시 드미트리의 말을 곱씹었다. 이 순순한 태도는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음모인가, 의심하려 애썼지만 아무래도 의심이 가지 않았다. 어젯밤을 기점으로, 드미트리의 마음에 어떤 큰 변화가 찾아온 것 같았다.
"예. 당신의 말대로 하죠."
"단, 조건이 있습니다."
한참 고민하던 아이가 드미트리의 제안을 승낙할 때였다. 승낙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드미트리는 이렇게 말했다. 뭔가 조건이 있었던 건가? 아이가 긴장하고 귀를 기울이자, 드미트리는 어물거리며 말했다.
"거, 거기까지 가는 길은 위험할 테니까, 꼭 지켜주세요."
조건은 그게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