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05화 (205/279)

37. 동료 ( 4 )

아이는 기묘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사자궁에게 찔린 상처 속에서 데몬스폰의 유해는 버섯처럼, 또는 시체에 꽃피는 구더기처럼 꿈틀대며 몸 깊숙이로 번져나갔다. 통제할 수 없는 생명이 몸 속에서 움트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번성이 끝나면, 그물처럼 퍼져나갔던 이물감은 곧장 다시 사그라들면서 머리로 현기증이 몰려왔다. 미제리코드가 작용하며 데몬스폰의 유해를 녹여낸 것이다. 밀물처럼, 또 썰물처럼, 아이의 몸 속에선 알 수 없는 생명과 죽음이 재생과 사멸을 어지럽게 반복하고 있었다.

그 혼란 가운데서 팔을 가눌 수는 없었다. 오른쪽 반신 전체가 어떤 괴물의 아가리에 물려 있는 느낌이었다. 천갈궁을 휘둘러 두어 번 격돌한 이후, 아이는 천천히 왼팔로 검을 옮겨 쥐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반신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두정을 기준으로 엄지 두 마디."

"무슨 소립니까?"

"거기서부터 마비가 시작되고 있겠군?"

그러나 사자궁은 노련했다. 아이가 검을 쥔 손을 바꾼 것만으로도 증상을 눈치채고 아프게 찔러왔다. 아이의 눈썹이 분노로 떨렸다. 저 말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번 결투에서는 아이가 우위를 가져갔지만, 이래서야 열세일 수밖에 없었다.

"이거 이렇게 시간을 끌 이유도 없겠어. 그냥 한 번만 찌르면 끝나겠는데."

"그럼 덤벼보시죠."

빈말로 끝나지 않았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자궁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가슴은 열려 있고 하반신도 무방비. 일견 엉망진창인 일격이었지만 옳은 일격이었다. 이렇게 방어를 도외시하더라도 한 방만 먹이면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아이는 눈을 부릅떴다. 닥쳐드는 칼끝이 똑똑히 보였다. 그 칼날을 목표로 천갈궁을 쥔 손에 온 힘을 불어넣었다. 몽실, 천갈궁의 칼날에서 그림자가 솟아올라 손잡이를 함께 붙잡았다. 마비된 오른팔 대신이었다.

"응?"

빌헬름의 입에서 당황한 음성이 터져나왔다. 천갈궁의 그림자를 저런 식으로 사용할 줄은 몰랐다. 그렇게 손을 맞잡은 그림자와 아이는 곧 익숙한 참격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참랑격인가! 푸른 검영을 뿌리며 닥쳐드는 일겨의 정체를 알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빌헬름은 목표했던 어깨를 향해 더욱 거세게 검을 찔러갔다.

후드득! 아이의 일격은 좁은 골목의 담벼락 둘을 전부 쳐부쉈다. 돌무더기가 쏟아지며 흙먼지가 크게 피어올랐다. 금속과 부딪힌 감각, 무언가를 베어낸 감각이 손 끝 가득 맺혀 있었다. 사자궁에 어깨를 내주기 직전에, 천갈궁의 날끝으로 그 검을 쳐내고 사자궁도 베어낸 듯했다.

"큭!'

그리고 그 직후, 무리한 운동의 반작용이 터졌다. 미제리코드를 꽂아넣은 등에서 피가 주륵 흘러나왔다. 아이의 몸 속에서 길항하던 데몬스폰이, 기회를 틈타 다시 한 번 날뛰기 시작한 것 같았다. 몸 속에서 다른 생명이 날뛰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어지러운 듯 비틀거리며 아이는 빌헬름이 쓰러진 흙구덩이를 향해 걸어갔다. 사자궁을 찾아 이걸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였다.

"죽은 줄 알았나!"

자욱한 흙먼지와 돌무더기 사이에서 빌헬름이 벼락처럼 튀어나와 아이를 덮쳐왔다. 마비 상태에 빠져 있던 아이는 그 기습에 속절없이 바닥으로 깔릴 수밖에 없었다.

"자, 네가 있을 곳으로 돌아가라!"

가슴팍 위에 올라탄 빌헬름은 사자궁을 광폭하게 찍어넣었다. 빌헬름의 상태도 성치는 못했다. 허리 끝이 베어져나가 있었고, 내장에 상처를 입었는지 입에선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사자갈기 같던 머리는 피와 먼지로 더러워진 채였다. 아이는 이를 악물고 손을 내뻗었다. 콱! 아이의 왼손이 사자궁의 칼날을 붙잡았다. 아이의 완력이 더 강한 탓에, 칼날은 코앞 지척에서 멈추었다. 두 사람의 손에 붙잡힌 칼날은 기묘한 원을 그리며 떨리기를 반복했다.

"있을 곳?"

"지옥 말이다!"

"내가 있을 곳은 기나센입니다!"

대치가 계속되었다. 칼날을 쥔 아이의 손바닥이 베여 피가 새어나와 바닥에 똑똑 떨어질 때까지도, 두 사람은 칼 하나를 두고 힘싸움을 게속하고 있었다. 이 대치의 승자가 이 싸움의 승자가 될 것 같았다. 손바닥 전체로 전해지는 쓰라림 덕분에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이는 이를 악물고 사자궁의 칼날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칼날을 밀쳐낸 뒤, 단숨에 빌헬름에게 박치기를 박고 전세를 뒤집을 생각이었다. 빌헬름 역시 생각이 있는 듯, 허리춤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 수상쩍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당신들 여기서 뭐 하고 있습니까?"

홱,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무너진 골목의 입구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그 자리에선, 마즈눈 위에 걸터앉은 드미트리가 당황한 얼굴로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이가 오지 않자, 제 발로 마즈눈을 찾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그녀의 이해력을 아득히 벗어난 것이었다. 드미트리는 마즈눈을 이끌고 두 사람에게 다가가, 우선 싸움을 중재했다.

"우선 그 칼 좀 치우세요!"

잠시 후, 세 사람은 가까운 우물가의 그늘에 어색하게 모여 앉아 있게 되었다.

*세 사람은 드미트리를 사이에 끼고 어색하게 모여앉아 있었다.

드미트리가 필사적으로 중재한 결과였다. 애초에 빌헬름이 아이를 뒤쫓게 된 계기가 드미트리의 의뢰였으니 그는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고, 아이 역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우선 내일까지 싸움을 멈추기로 서로 맹세한 후에, 빌헬름은 사자궁으로 아이의 몸에 남아 있던 데몬스폰을 거둬갔다. 그래서 사자궁은 세검 형상에서 도끼 형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해가 안 가는군. 저 녀석을 죽이라고 의뢰한 건 너 아닌가? 왜 말리는 거지? 네 소원이 이루어지기 1분, 아니 40초 전이었는데 말이야."

"그, 그건, 그땐 그랬습니다만."

"당신이 끝장나기 40초 전이었겠죠."

빌헬름은 붕대를 입으로 끊으며 불평했고, 아이는 씹어뱉듯 되받았다. 뜻밖의 폭로에 드미트리는 안색이 창백해져서 아이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도, 엣날 일임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이는 그다지 화난 듯 보이지 않았다. 눈치를 살피는 드미트리를 보고 빌헬름은 비꼬듯 말했다.

"홀렸나?"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드미트리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외쳤다, 사자궁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말했다.

":남자라곤 만나본 적 없는 악당 조무래기가 임무를 맡겨 놨더니 홀려서 배신한다, 흔히 있을 법한 이야기잖나. 그게 아니면 뭔데?"

"누, 누가 조무래기... 아닙니다! 제, 제가 두 사람을 중재한 건. 그건..."

말문이 턱 막혔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할 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꿀먹은 벙어리처럼 목소리만 가다듬던 드미트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석연치 않은 게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석연치 않은 것?"

"제 주인... 소니아 아바키렌의 행적과 관해서 말입니다."

짚이는 것이 있던 것일까? 불만이 가득해보였던 빌헬름은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붕대를 꽉 조여 매면서 말했다.

"얘기해봐. 그 석연치 않은 점을."

잠시 망설이던 드미트리는 곧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의 기억에 여러 번 지워진 흔적이 있던 것부터, 레버넌트의 괴이쩍은 변이, 그리고 아지프의 마탑에서 보았던 실험과 북서 자치령의 혼란까지. 처마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다시 짧아지고, 문설주에서 까악대던 까마귀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긴 이야기를 드미트리는 이렇게 끝맺었다.

"저는, 어디까지나 우리 민족의 부흥과 독립을 위한 수단으로 그 사람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련의 사태에서 그 사람이 희생시킨 것들 중에는, 우리 민족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우선 판단을 유예하자, 그런 결론을 내린 것 뿐입니다."

"민족... 민족이라. 이번 핑계도 그건가. 참 빌어먹도록 고전적이군."

드미트리의 진지한 어투에도 불구하고 빌헬름의 반응은 싸늘했다. 지겹다는 투와 냉소가 반쯤 섞인 투였다. 발끈한 드미트리는 고개를 쳐들고 반발했다.

"그 무슨...! 당신이 뭘 안다고...!"

"잘 알지. 그 놈들이 수족으로 부려먹는 게 어떤 종류인지 아주 잘 알아. 너 가족은 있나?"

"예?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없겠지. 그럼 친구는 있나? 연인은? 있어 본 적이라도 있나?"

"제가 그런 말에 일일히 대답해 줘야 합니까?"

희롱하는 말투와 다르게 빌헬름의 시선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떻게든 최대한 위협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는 드미트리를 내려다보면서,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주섬주섬 품에서 담배를 한 개피 꺼내 입에 물었다.

"없겠지. 아무 것도."

"네. 없습니다. 그게 뭐 잘못됐습니까?"

빌헬름은 그런 드미트리에게 곁눈질도 주지 않았다. 짙고 독한 연기를 내뿜을 뿐이었다. 어디선가 불아온 한 줄기 바람이 그 연기를 둥글게 말아올려서, 연한 보랏빛으로 녹아가는 하늘로 밀어올렸다.

"그 놈들이 제일 좋아하는게 너 같은 인간이다. 텅 빈 껍데기. 공허한 인간."

"무슨..."

텅 비어 있다. 어쨰서일까, 지금까지 빌헬름이 던졌던 어떤 말보다도 그 말이 드미트리에겐 더 아프게 들렸다.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떨 정도였다. 복잡한 표정으로 드미트리를 바라보던 빌헬름은 검지를 튕겼다. 꽁초는 담뱃재를 덧없이 흩날리며 또르르 바닥을 굴렀다.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관망하던 아이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당신은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는 모양이군요."

"알지. 너무 많이 알아서 탈이야."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빌헬름은 미간을 찌푸리고 아이를 노려보았다. 가증스럽다는 표정 같기도 했고, 왜 네가 이런 것을 묻느냐는 표정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했다.

"우리 가문 외에는 알아선 안 되는 내용이다만, 뭐 숨길 이유도 없겠지. 어차피 전부 죽을 테니까."

그리고 그는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첫마디는 충격적이었다.

"짐작하고 있었다만, 너희들의 말을 듣고 확신했다."

"소니아 아바키렌은 데몬스폰이다."

*델로른 사람들은 아침부터 긴장한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마을을 경비하기 위해 빙 둘러친 울타리에 모여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밝은 사람들에게는 여기서도 맨 눈으로 보였다. 기괴한 얼굴로 마을 주변을 배회하는 레버넌트들의 행진이.

"분명히, 늦어도 저녁까진 돌아온다고 했죠?"

마을 처녀 한 명이 망루 위에 악을 쓰듯 물었다. 망루 위에는 뢰프와 이리나가 올라서서, 망원경으로 먼 곳을 살피고 있었다. 여기에 델로른 사람들이 모인 이유는 간단했다. 아이와 드미트리가 떠나면서 남긴 쪽지 때문이었다.

'저 포위를 풀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저녁까진 돌아오겠습니다.'

간단한 두 줄이지만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또 델로른을 구해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염치 없이 두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만약의 사태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델로른의 시민들은 각자 최대한의 무장을 갖춘 채로 마을 경계에 나섰다.

"그런데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죠?"

누군가가 외쳤다. 어느새 초저녁이었다. 해는 이미 낙조를 흘리며 지평 아래로 잠겼고, 하늘은 저 먼빛부터 연보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레버넌트들은 여전히 목적 없는 행진을 계속하고 있었고, 망원경 너머로는 아무런 변화도 관측되지 않았다. 뢰프는 입술을 깨물었다. 혹시, 어떤 위험에라도 빠진 것인가? 구원할 특공대를 꾸려야 하나?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이 곳 상황이 끔찍한 걸 깨닫고 그냥 두 사람만 도망친 거 아닙니까?"

누군가가 소리쳤다. 사람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모였다. 이주민 출신으로, 아이의 활약을 직접 본 적이 없는 자였다. 아이에 관한 소문은 과장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수준이었으므로, 저렇게 염려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리나에겐 아니었다. 이리나는 그 사람을 삿대질하며 오랜만에 구수한 욕설을 쏟아냈다.

"알았어요, 알았어... 어!"

"말 돌리지 마 이 새꺄!"

"아니, 저기, 저 괴물들이!"

남자의 손짓을 따라 이리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마치 구름이 개이듯, 배회를 거듭하던 레버넌트들이 포위를 풀고 흩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무질서한 해산 사이로, 이 쪽을 향해 한 무리들의 사람이 걸어오는 것이 초저녁 달빛 아래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오빠! 결국 성공했구나!"

덧니를 드러내며 활짝 웃은 이리나는 얼른 망원경으로 그 쪽을 들여다보았다. 예상대로, 다가오는 사람은 드미트리와 아이였다. 넝마가 된 율사복과 집행관의 옷이 보였다. 그런데 예상 외의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야?"

커다란 도끼를 짊어지고, 머리터럭이 사자 갈기처럼 헝클어진 남자. 빌헬름이었다. 어째서인지 세 사람은 동행한 채 델로른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거기서 만난... 동료 같은 건가?"

거기에 하나 더 예상과 다른 것이 있었다. 세 사람 모두 표정이 이상할 정도로 밝지 못했던 것이다. 영웅의 귀환을 확인하고 마을 사람들이 만세를 부를 때도, 아이를 의심했던 남자가 허리를 직각으로 굽혀 인사할 때까지도 그 표정에 드리운 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드미트리가 심각했다. 이리나는 빼꼼 고개를 내밀어 그녀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악수와 찬사를 받으면서도,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