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동료 ( 5 )
이리나의 방은 살풍경했다.
온통 회색과 잿빛 투성이였다. 구석에는 읽다 던져둔 낡은 책과 포커 한 벌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고, 창문은 커튼도 없이 휑했다. 여자아이의 방이라기보단, 도박이 취미인 아저씨의 방 같은 모양새였다. 드미트리는 반쯤 질렸다는 얼굴로 그 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젠장. 분명 여기쯤에 박아둔 것 같았는데... 좀만 더 기다려!"
이리나는 그 구석에서 옷장을 들쑤시며 방 안을 한층 더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드미트리에게 옷을 찾아주기 위해서였다. 오늘 밤, 마을을 둘러싼 포위가 끝난 기념으로 축제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런저런 난리통을 겪으면서 드미트리의 옷은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축제에 그런 옷을 입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찾았다! 아, 내가 열네살 때 입던 건데, 나풀나풀한게 안 어울려서 몇 번 못 입었어. 너한텐 잘 맞을걸?"
한참을 헤매던 이리나는 활짝 웃으며 촌스러운 옷을 꺼내왔다. 무조건 화려한 옷감을 쓰고 꽃을 크게 박아넣으면 예쁘다, 그런 유치한 감각이 느껴지는 디자인의 옷이었다. 예전의 드미트리라면 질색을 하며 거절했을 것이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군말없이 헤진 율사복을 벗고, 이리나가 건네준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지금까지 드미트리가 입어왔던 옷들과 입는 방법이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쉽게 옷을 입지 못하고 손을 헤매자, 이리나가 짐짓 한숨을 쉬며 다가와 끈을 턱 붙잡았다.
"아, 아, 저기..."
"됐어. 이런 건 원래 언니가 가르쳐주는 거야."
아마도 당신은 내 나이 반절밖에 안 될 텐데요? 순간적으로 욱해서 받아칠 뻔 했지만, 등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길 때문에 멈추었다. 고개를 푹 숙이자 정갈한 나뭇바닥이 보였다. 열심히 끈을 묶어주던 이리나는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이건 뭐야? 어제 다친 거야? 아팠겠다."
"조금... 하지만 이제 괜찮습니다."
아마도 어제 물린 상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리나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댔다. 창백하도록 흰 살빛 때문에, 검붉은 흉터는 더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뭔가 위로할 말을 찾고 싶었다.
"너 처음에 봤을 땐 재수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까 꽤 용기 있는 녀석이었네."
"예?"
"그렇잖아? 저 괴물들을 뚫고 오빠랑 같이 싸우다 다친 거지? 나라면 무서워서 절대로 그렇게 못 했을걸. 요점은, 그러니까 장하다는 거지."
혹시라도 상처가 보이지 않도록, 허리 부분의 끈을 더 세심하게 꾹 묶은 이리나는 드미트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드미트리는 부들부들 떨었다. 굴욕감과 동시에 묘한 뿌듯함 같은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표정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이리나는 황급히 덧붙였다.
"아, 그렇지만 옛날에 한 말을 뒤집는 건 아냐! 오빠는 이미 임자 있으니까. 너 같은 꼬맹이는 안 돼."
"그런가요. 당신이 보기에도."
"응?"
이리나는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을 할 때의 표정이 너무 슬퍼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안해진 이리나는 휘파람을 불며 말을 흐렸다.
"어, 뭐, 나는 바보니까,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지 않을까?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리곤 방을 빠져나가려 들었다. 그 모습에 드미트리는 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머리를 벅벅 긁는 이리나를 불러서 멈춰세웠다.
"잠깐만요."
"왜?"
이리나는 엉거주춤 뒤돌아섰다. 드미트리의 흐릿한 하늘빛 머리칼이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드미트리는 자신의 머리에 꽂혀 있던 꽃을 뽑고, 꽃대를 돌리며 잠시 만지작거렸다. 이걸 주는 게 맞는 걸까. 정말 율사일 때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런 망설임과는 달리,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부디, 받아 주세요."
"이, 이걸? 왜? 나한테?"
율사들이 친애하는 누군가와 작별할 때, 행운을 기원하는 뜻으로 건네주는 꽃이었다. 이리나는 당황해서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살짝 발돋움해서 이리나의 옆머리를 붙잡은 드미트리는, 떨어지지 않도록 예쁘게 꽃을 고정하곤 중얼거렸다.
"그냥, 저한테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이니까요. 잊지 말아주었으면 해서."
"고, 고마워."
부끄러운 듯 옆머리를 매만지던 이리나는 후다닥 달아나버렸다. 드미트리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 빈자리를 바라보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주머니에 집어넣고, 집을 나선 것이었다. 그건 팔찌였다. 의뢰의 대가로 빌헬름에게 주기로 했던 팔찌. 주머니에 묵직하게 자리잡은 팔찌를 꼭 붙잡은 드미트리는, 이윽고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빨리 와!"
드미트리가 다시 이리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초저녁 무렵이었다. 이미 축제는 꽤나 진행되어 있어서, 어른들은 술에 취해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커다란 통돼지도 자취를 감춘 후였다. 통돼지를 굽기 위해 설치되어 있던 커다란 모닥불은 이제 저녁빛을 밝히는 모닥불이 되어서, 몇 명의 사람들은 그 주위에서 흥겹게 춤을 추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조용히 이리나 옆에 앉아서, 무릎을 끌어안았다. 옆에서 이리나는 어떤 이름을 소리지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유난히 쭈뼛거리던 남녀는 그 말을 듣고 머쓱한 듯 웃음을 지었다. 굉장히 즐거워 보이네요. 드미트리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봤던 어떤 축제보다도 자그마한 축제지만, 사람들의 면면은 어떤 때보다도 즐거워보였다.
특히 중심에 있는 저 사람이 그랬다. 아이는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끊임없이 마을 사람들과 춤을 추고 있었다. 델로른 사람들 입장에서야 어울리고 싶겠지. 그래도 적당히 때를 봐서 사양하고 끊어야 할 텐데, 거절하는 법을 너무 모르는 탓에 언제까지나 저러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겁니까?'
드디어 끝인가, 생각했더니 또 다른 마을 처녀의 손을 붙잡는 걸 보자 부아가 치밀었다. 중요한 할 말이 있는데. 속으로 불만을 토한 드미트리는 다시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서 아이를 노려보았다.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능숙하게 춤을 추었다. 륜이 가르친 솜씨였다. 짧은 춤곡의 마디가 끝나고, 여자가 손을 놓았을 때, 드미트리는 벌떡 일어나서 아이에게 다가갔다. 손을 잡아채서 인적 드문 곳으로 끌고 갈 생각이었다.
휘이익! 그런데 의외의 휘파람이 들려왔다. 드미트리가 아이의 손을 확 잡아챘을 때였다. 돌아보니, 이리나가 짓궂은 표정을 지은 채 춤곡을 선창하고 있었다. 드미트리가 나선 이유를 오해한 모양이었다.
"어, 잠깐, 이런 게..."
입술을 흐물거리며 반론을 시작할 틈도 주지 않고, 경쾌한 춤곡이 다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드미트리는 엉거주춤 아이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가 부드럽게 리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이를 악물고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부드러운 눈길을 보고 벙어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다른 사람들을 거절하지 못한 아이의 우유부단함을 비난한 것이 무색하게, 그녀도 한참이나 춤을 추고 말았다.
"아."
익숙지 않은 옷 때문일까, 곡조가 빨라질 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휘청한 드미트리는 곧 얼굴 가득 전해져오는 온기를 느꼈다. 고개를 들어보니, 쓰러져서 아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게 된 것 같았다. 주변에서 왁자한 웃음과 휘파람이 치솟았다. 그 사이로 아이의 걱정스런 음성도 들렸다.
"괜찮아요?"
고개를 들고 싶지만 들 수 없었다. 십중팔구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빠른 노랫소리, 아스라한 웃음소리 사이로 자그마한 쿵,쿵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이게 이 사람의 심장 소리일까. 그런 생각을 할 때, 노래가 끝났다.
"언,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겁니까. 할 말이 있어요. 따라오세요."
끝나자마자, 드미트리는 아이의 소매를 붙잡고 억지로 잡아끌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따라가던 아이는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해가 완연히 저문 자줏빛 하늘 너머에서, 하나둘씩 별이 떠오르고 있었다.
*툭 건들면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이었다.
인적 드문 들판, 유난히 새하얀 바위 옆에 나란히 앉아서, 드미트리와 아이는 한참이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중요한 할 말이 있다던 그녀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지만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다시 닫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어딘가 체념한 듯도, 달관한 듯도 했다. 아이는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 어제 들었던 말, 말인데요..."
빌헬름이 들려주었던 말을 뜻했다. 아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예."
"오늘 새벽에, 잠에서 깨고 나서... 확신하게 됐습니다. 전부 사실이에요."
"그런가요."
아이는 자그맣게 대답했다. 두 사람은 빌헬름이 들려주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소니아 아바키렌은 데몬스폰이다.'
빌헬름은 이런 선언으로 이야기의 포문을 열었었다.
"먼저 얼마나 이해도가 있나 묻지. 데몬스폰이라는 괴물들이 어떤 괴물이라고 알고 있나?"
아이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 자신도 그 피를 반쯤 이었다는 사실을.
"그냥...그 비롯됨과, 원인을 알 수 없는... 불가해한... 그리고 강력한 괴물들. 아닙니까."
빌헬름은 비꼬듯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연기력이 수준급이군. 그래. 세간엔 그렇게 알려져 있지. 하지만 원인이 없는 건 없다. 우리 가문은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 대부터, 데몬스폰을 사냥해 온 가문이다. 우리는 그 실체를 알아."
뜸을 들이던 빌헬름은 이어 말햇다.
"데몬스폰은, 사실 신으로 승천하지 못한 신성이다."
"예?"
"말 끊지 말고 들어. 아, 담배 있나?"
아이가 마뜩찮은 표정으로 품에서 담배를 꺼내 내밀자, 빌헬름은 예의없이 홱 채가선 입에 물었다. 담배 끝을 손가락으로 비비자 불이 붙어 연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신기를 이용한 것 같았다. 참 쓸데없는 재주였다.
"그 말대로다. 외신이 신이 된 후 자신의 존재의의에 절망해 괴물이 된 놈들이라면, 데몬스폰은 자신의 의의조차 찾지 못해 승천하지 못한 놈들이다. 비존재다. 그리고 놈들은 항상 승천할 기회를 노리고 있지. 수천 년 전부터 그랬다."
후우, 깊게 쏟아낸 빌헬름은 밉살스럽게 중얼거렸다. 여자들이나 피는 순한 놈이군. 어른 흉내 내려고 담배를 피는 게냐? 아이는 눈섭을 꿈틀거렸지만 빌헬름은 이미 다음 말을 계속하고 잇었다.
"놈들의 승천을 막기 위해서, 처음에는 그 놈들에게 악마라는 이름을 붙였다. 신의 적대자로, 불경하고 악한 것으로 퍼뜨려 탄압하려 들었다. 근데 그랬더니 문제가 생기더란 말이지."
빌헬름은 흘깃 드미트리를 보곤 다시 말했다.
"신들이 영성을 존중받지 못할 정도로 세상이 혼란해질 때, 경건함이 웃음거리가 될 정도로 도탄에 빠졌을 때, 민중들이 그 악마에게 몰려가더라 이 말이야. 오직 신의 대적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말이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그 무렵엔 아직 몰랐던 거지. 인간의 방식을. 빌헬름은 연기를 토하며 덧붙였다.
"그래서 몇 차례 난리를 겪은 끝에, 세상은 다시 한 번 그들의 이름을 빼앗았다. 그러면서도 불경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악마의 살붙이라는 뜻은 남겼지. 그리고 그들이 신이 되지 못한 탈락자들이라는 사실은 철저히 말소했다. 그래서 남은 이름이 데몬스폰이다."
연애담을 말하는 듯한 가벼운 어투였다.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온 것은, 어디서도 들을 수 없을 이 세계의 진실이었다. 반토막난 담배를 입에 문 채, 빌헬름은 흘깃 아이를 쳐다보았다. 예상대로 아이의 얼굴은 더없이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어쩐지 그게 밉살스러워서, 연기와 함께 담배를 토해낸 빌헬름은 아이의 손에 가볍게 담배를 지졌다.
"윽."
"엄살 떨지 마라. 봐라, 이게 그 증거다."
담뱃불을 떼는 순간, 아이의 살은 이미 아물어 있었다. 재생력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이 기이한 재생력은 어떠한 대가도, 악한 행동도 요구한 적이 없었다. 데몬스폰이라는 명칭이 절대적인 선악과 관련이 없다는 빌헬름의 말이 맞다면, 그것은 분명 이치에 닿는 일이었다.
"그리고... 말했다시피, 우리 가계는 대대로 데몬스폰을 죽여 왔지."
다시 한 번 뜨끔한 열기가 손등에 번져갔다. 빌헬름이 무언가를 토해내듯 아이의 손을 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입술을 세게 깨물며, 자신을 노려보는 빌헬름을 마주 노려보았다.
"이유를 알려주십시오."
"끝까지 모른 체 할 셈인가? 뭐, 좋아."
빌헬름은 아이가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는데, 모르는 척을 하는 중이라고 확신하는 듯 했다. 멋대로 아이의 담뱃갑에서 다음 담배를 꺼낸 드미트리는, 또 불을 붙이며 질문을 던졌다.
"말했다시피 데몬스폰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의 의의를 찾는 것, 그리고 숭배를 받아 신으로 승천하는 거다. 그럼 질문이다, 반푼이. 이름도 빼앗겼고, 신의 대적자 역할도 빼앗겼다. 모든 신성을 빼앗긴 자가 숭배받기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해야 할 것 같나?"
어려운 질문이었다. 적어도 아이에게는 그랬다. 대답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들려왔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드미트리에게서였다.
"그건... 그건, 건국입니다."
키레넨의 나라를 세우겠다. 그 말을 일상적으로 주워섬기던 소니아 곁에 오래 머물렀기에 즉답할 수 있었다. 빌헬름은 또다시 순한 연기를 토해내며, 툭 중얼거렸다.
"정답이다. 그리고 그게 내가, 그리고 우리 가문이 계보를 이어가며 데몬스폰을 사냥해온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