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동료 ( 6 )
"그들에게 국가는 은폐된 종교다."
숭배의 대상에 신 대신 위정자를 올려놓은 종교와 다를 게 없다. 빌헬름은 덧붙였다. 이번에는 조금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머릿속에 기나센에서의 일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수많은 정치적 난맥상과, 추잡함과, 통령의 죽음과, 그저 환호할 뿐이었던 민중들의 면면이 이미 아이의 머릿속엔 깊이 박혀 있었다.
"어떤 데몬스폰들은 좌절해서 괴물이 되어 광야를 떠돌았지만, 영악한 놈들은 여지없이 인간을 흉내내서 권좌에 오르려 들었지. 그리고 불필요한 전쟁과, 불필요한 혼란을 일으켜 광신자들의 피를 공양받고 승천하려 들었다."
여지없이. 빌헬름은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돌아보면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의 배후엔 언제나 그들이 있었다. 첫 번째 십자군도 그랬지. 이천만이 죽었다. 그 죽음에는 광신 외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치익, 담배 끝이 주홍빛으로 작열하며 내며 재를 사방에 흩날렸다. 빌헬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의 이성의 총합이 이천만의 죽음을 바래서 이천만이 죽은 건 아닐 텐데 말이지."
"그럼..."
"그 배후에 있던 건 승천을 노리던 데몬스폰이었다. 오직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숭배받기 위해서 그 놈은 이천만을 죽음터로 몰아넣었다. 만약 끝까지 성공했더라면, 그 놈은 승천해서 전쟁이나 광신의 신이 되었겠지."
"그 자는 지금 어떻게 됐습니까?"
빌헬름은 담뱃불로 자신의 도끼를 가리켰다.
"저기. 내 도끼가 되어 있지."
그 놈의 목을 친 것이 자신의 선조라는 말이 뒤따랐다. 빌헬름은 딱딱하게 굳은 아이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때부터 우리 가문은 고독한 싸움을 이어 왔다. 데몬스폰이 신의 원형이라는 사실은 너무 위험한 정보다. 그걸 들은 미치광이들이 어떤 짓거리를 할 지 모르니, 함부로 어디 털어놓고 협조를 바랄 수도 없으니 말이다. 답은 암살행뿐이었다."
"그렇습니까."
"날 이해하나?"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여기서 죽어줄 건가?"
도끼날로 아이를 가리키며, 빌헬름은 매섭게 말했다. 아이는 조용히 그 도끼날을 바라보았다. 달빛으로 시리게 빛나는 도끼날에는, 자신의 얼굴이 반사되어 비치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네 행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네가 기나센의 통령이라는 사실도, 구역질나는 위선으로 가득한 포고문도, 위선과 모략으로 가득한 행보도 들었다."
"그건... 아닙니다."
"연기는 이제 피차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넌 무슨 신이 되고 싶어 이 세상을 아사리판으로 만들고 있는 거지? 얼간이의 신이냐?"
빌헬름은 아이의 뺨을 툭 툭 건드리며 빈정댔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턱, 그 손을 붙잡은 아이는 빌헬름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어투와는 달랐다. 그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닙니다."
"뭐가 말이냐."
"당신이 말할 수 없는 이유로 비겁한 암살행을 하고 돌아다녔듯이, 나에게도 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그걸 설명할 의무는 없을 것 같군요."
손을 붙잡힌 채로, 빌헬름은 아이의 심홍색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천천히, 담배를 입에 가져간 그는 연기를 세게 토해내고 휙 팔을 뿌리쳤다.
"공허한 자들을 규정하는 건 원한이다. 원한을 대행한다는 말로, 사람들을 끌어모아 무언가를 강요하는 놈들은 대개 국가가 아니라 자신의 교회를 세우려는 놈들이었다. 너는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아마 그 여자는 그럴 거다."
그 여자는 아마도 소니아를 뜻하는 것일 터였다. 드디어 이야기가 맞물리는 느낌이었다.
"원래부터 데몬스폰들은 의의를 찾지 못한 빈 껍데기들이다. 놈들의 뱃속에 있는 건, 숭배받고 싶다는 욕망과 승천에 대한 갈구 뿐이지. 그래서 놈들은 찾아 헤맨다. 자신의 빈 껍데기 속을 채워줄 경전을, 대행할 만한 원한을."
경전, 그 말에 아이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마레의 책이 떠올랐다. 마레에 대한 아우렐리우스의 예언도 떠올랐다. 머뭇거리다 그 얘기를 들려주자, 빌헬름은 더욱 심증을 굳힌 듯 단호하게 말했다.
"여지가 없다. 소니아 아바키렌은 데몬스폰이다. 키레넨이라는 민족의 원한을 반석으로 삼고, 그 책을 들보 삼아서, 자신의 나라를 세울 셈이었을 터다. 그리고 그 나라는, 데몬스폰이 세운 나라가 늘 그랬듯이, 국가가 아니라 그녀를 위한 교회가 되었을 게다. 부정할 수 있나?"
드미트리의 안색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 마차에서 보았던 소니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헤매면서 마주쳐왔던, 수 많은 소니아의 잔혹성을 떠올렸다.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네놈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실패할 위기에 처했단 말이지. 그래서 그 여자는 예비해두었던 최후 수단을 가동한 모양이다."
레버넌트. 그것들은 극도로 비참한 꼴이 되었을 지라도, 일단은 인간이었다. 굳이 채무자와 계약을 한다는 거추장스러운 방식으로 레버넌트를 끌어모은 이유도 그것이었다. 애초에 의문점은 있었다. 이런 고등 마술은, 고작 5위계를 표방하던 소니아가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레버넌트를 폭주시켜서 이 땅의 마력을 모두 긁어모으고, 이성 잃은 자들의 추앙을 받으며 억지로 신으로 승천하겠다는 계획을 말이다."
"그게... 가능합니까?"
"비슷한 계획을 세운 놈들은 여럿 있었다. 실패하면, 괴물이 되어 알아먹기도 힘든 형태로 변해선 사방에 재앙을 일으키고 다니더군. 말하자면 축양과 같은 것이다. 성공률이 높다면 최후 수단일 이유가 없지 않나."
담배를 뻐끔거리며 빌헬름은 말을 줄였다. 드미트리는 곱씹었다. 아지프의 마탑에서 보았던 실험들, 반쯤 레버넌트화 되어 있던 키레넨들, 그 실험이 이 최후수단을 위한 안배였나. 그렇게 생각하면 아귀가 맞았다. 머리를 쥐어뜯었다. 자신이 인생을 바쳐 헌신해온 것의 실체는, 그녀의 짐작보다도 더욱 더 허무하고 추악했다.
"내가 들려줄 얘기는 여기까지다. 나는 이 자리에서 네놈을 쳐죽이고, 팔찌를 받은 다음, 이어서 이 꼬맹이에게 소니아의 위치를 찾아 그 여자를 죽일 생각이었다. 후련하군."
할 말을 다했다는 듯, 빌헬름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아이는 천천히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의 말에 거짓은 없는 듯 들렸다.
"그렇다면... 소니아는 제 적이기도 하겠군요."
"네가? 넌 그것과 동족 아닌가?"
아이는 씹어뱉듯 말했다.
"당신이 뭐라고 지껄이든, 나는 내 양심을 다해 이 세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아도 상관 없어요. 어차피 당신은 나보다 약하니까."
"헛, 주둥이는 살아 있구만 그래."
빌헬름은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내일, 이 자리에서 다시 싸워보자, 천갈궁. 너도 이 무기들의 규칙은 알고 있겠지. 이긴 놈이 진 놈의 무기를 먹어치울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어차피 서로 성도 8궁인 김에, 서로 죽이고 진 놈의 힘을 이어받는 거다. 그리고..."
"그리고?"
"이긴 놈이 소니아를 찾아 죽이는 걸로 하자구."
왜, 겁먹었나? 빌헬름은 다시금 도발했다. 아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와 얼굴을 맞대고 으르렁거렸다.
"내일 이 자리에서 보죠."
사실상의 동의였다. 그 이후, 세 사람은 함께 델로른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이것이 어제 있었던 대화의 전말, 그리고 소니아와 북서 자치령을 둘러싼 긴 이야기의 내막이었다.
*회상이 끝날 때쯤, 별하늘을 가로질러 유성 하나가 떨어졌다.
"이제 날이 밝으면, 정말로 싸우러 갈 겁니까."
끌어안은 무릎에 반쯤 얼굴을 파묻은 드미트리가 물었다.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옆구리에 찬 칼자루가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졌다.
"나를 원망한다거나, 예전처럼 나를 때린다거나... 죽인다거나. 그런 건 안 할 건가요?"
말없이 드미트리를 쳐다보았다. 그녀 나름대로 죄책감에 시달리는 듯했다.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따듯한 촉감이 손바닥 가득 번졌다. 어쩐지 그걸 바라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드미트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굳이 이 손을 떼어내고 싶지 않았다. 자그마한 입술이 달싹이며 무언가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럼 가기 전에, 말 좀 몇 마디 들어줄 수 있을까요."
손을 머리에 얹은 채로, 그녀는 얘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부모님에 관련된 얘기였다. 키레넨이라서 차별을 받았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딸도 딸로 기르지 못하고 속여서 길렀다는 것, 죽음의 내막까지 전부.
그녀의 가슴 깊이 박혀 있는 이야기였지만, 털어놓으니 의외로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다 늘어놓는 데에는 5분도 걸리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가, 털어놓으면 이렇게 짧을 과거 속에서, 나는 계속 살아왔던 건가. 드미트리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 지 궁금했다. 예상대로, 그는 슬픈 눈망울로 이 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불쌍하다거나, 그러니 내 행동은 정당했다거나...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말이 맞았다는 말을... 들려주고 싶었어요."
어떤 말이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빌헬름이 처음에 했던 말, 공허한 사람이라는 말을 뜻하는 듯했다. 평소의 달변과 다르게, 더듬거리며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가족을 잃었을 때부터, 저는 민족을 위하겠다고, 그렇게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그냥, 무언가를 증오하고, 싫어하고, 그런 것으로밖에 살아있다는 체감을 느낄 수가 없었어요. 내 민족으로 친애의 대상을 한정하면, 나머지 모든 세상을 다 증오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 민족이 정작 무언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갑작스러운 고해였다. 하지만 갑작스럽다기에는, 너무나 진한 울림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진작부터 품어 왔던 회의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조하듯 웃으며 그녀는 툭 덧붙였다.
"그 말대로, 전 그냥 빈 껍데기였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말을 찾기 힘들었다. 그저 더 세게 머리를 어루만질 뿐이었다. 음미하듯 눈을 감고 아이의 손을 받아들이던 드미트리는, 다시금 중얼거렸다.
"그런데, 당신과 함께한 며칠간... 겪어본 적 없는 걸 많이 겪었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도, 호의를 만나는 것도, 누군가를 구해본 것도,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라는 말을 더듬거리듯 중얼거리던 드미트리는 덧붙였다.
"그래서 당신이 너무 싫어요. 왜 이런 걸 알려줘 버린 건가요."
전혀 예상 외의 말이었다.
"너무 화나고, 부럽고, 질투납니다."
"예?"
"당신과 쭉 같이 있었던 사람들은, 쭉 이렇게 살아왔던 거겠죠?"
아이는 가만히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조용히 말을 꺼냈다.
"혹시, 소니아를 죽이고 나면... 저희 쪽에 합류하고 싶은 거라면, 저는 괜찮습니다. 힘을 다 해서 자리를 알아볼게요."
그 말에 드미트리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자조적인 느낌이 드는 웃음이었다. 몇 차례, 거세게 고개를 저은 그녀는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왼쪽 눈에서는,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이제 다 기억해버렸는걸요."
"어째서..."
"다 기억했습니다. 저는 소니아의 곁에서, 어떤 일이건 앞장서서 수행했으니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그녀가 이상하다는 걸, 목적이 민족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게 말입니다. 그런데 그 때마다 도망쳤어요."
선언하듯, 숨을 몇 번 몰아쉬고 말했다.
"그 때마다, 무서워서... 이미 몸담은 이 조직이, 조디악이, 민족을 위한 게 아니면, 나도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게 무서워서... 도망쳤어요. 비겁하게."
아이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드미트리의 기억이 이상할 정도로 여러 번 지워져 있었던 걸 떠올렸다. 그 이상함을 들킬 때마다, 소니아가 드미트리의 기억을 지우고 또 지웠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 생각을 눈치챘는지, 드미트리는 또 자조하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싫죠? 그러니까, 저는 아무 것에도 진심인 적이 없던 겁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어꺠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팔을 내뻗어 어깨를 감싸고, 아이는 조용히 말했다.
"비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니까, 이제부터라도 잘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비겁하다는 겁니다. 당신이, 이렇게 말해줄 것도, 알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도망치지 않을 생각입니다."
쿨럭, 간신히 말을 마친 드미트리는 갑자기 심장에 손을 대곤 피를 토했다. 한 줄기의 피가 그녀의 입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발작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심장을 쥐어짜듯 움켜쥔 그녀는, 연속해서 기침을 토하며 쌕쌕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습니까?!"
깜짝 놀란 아이가 드미트리를 무릎에 눕히자, 그녀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피를 토하면서도, 그녀는 슬며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힘없는, 그러나 어딘가 뿌듯해보이는 미소였다.
"계약을, 어긴, 대가입니다."
"무슨 계약이요!"
"빌헬름에게... 팔찌와, 제가 기억해낸 사실이, 들어있는 쪽지를... 지금 집으라고, 말해 두었습니다."
빌헬름과 아이가 싸워야만 하는 이유는, 드미트리가 보증한 계약 때문이었다. 그 계약을 스스로 부쉈다는 뜻이었다.
"소니아는, 매우 강한 모양이니까... 당신과 그 자가 만신창이가 되어서 싸우기보다는, 힘을 합쳐서 함께 무찌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잘 했죠?"
"잘 하지 않았어요! 그것 때문에 목숨을 버린 겁니까!"
이게 그녀가 생각한 도망치지 않는 방법, 책임지는 방식인 듯했다. 아이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두 손을 깍지낀 채 심장을 여러 번 펌프질했다. 고동은 손바닥으로 느껴질 만큼 강했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여전히 엷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손을 붙잡을 뿐이었다. 쿨럭, 밭은기침을 한 그녀는 태연한 척 말했다.
"아뇨, 이건 복수입니다. 제가 륜과, 당신의 약혼 계약을, 보증하고 있었으니... 이제 그녀는 당신을 배신할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당신이 너무, 싫으니까... 배신당해서, 비참하게 죽으세요."
이럴 때까지도 솔직해질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이는 이를 악물고 더 세게 드미트리의 심장을 살리려 애썼지만, 막을 방법은 없었다. 박동은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잠시 후에라도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마침내 아이가 고개를 떨구고 손을 늘어뜨렸을 때, 뺨에 가느다란 손가락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해도 괜찮을까요."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목소리가 자그맣게 흘러들어왔다.
"제가 먼저, 그 여자들보다 먼저 당신을 만났더라면...:"
이전과는 다르게, 어쩌면 처음으로, 소녀다운 가냘픈 목소리였다.
"동료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 질문을 마지막으로, 드미트리는 이제껏 없을 정도로 세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견디기 힘들 만큼 고통스러워 보였다. 일으켜서, 으스러지도록 세게 끌어안았다. 조금이라도 진정시켜주고 싶었다. 등으로, 드미트리의 가느다란 팔다리가 자신을 매달리듯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자그마한 뺨이 보였다. 더 세게 끌어안으며, 아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예. 분명히."
*"빌어먹도록 별이 밝은 날이군. 이럴 땐 운수가 더러운데."
빌헬름은 머리를 긁적이며 드미트리가 건네준 꾸러미를 가슴에 밀어넣었다. 거기에는 여동생을 위한 팔찌와, 부디 아이와 함께 힘을 합쳐 싸워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죽을 텐데. 꾸러미를 열어서 내용물을 확인한 순간 빌헬름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이, 있나?"
그리고 지정된 장소로 걸어갔을 때, 빌헬름은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새하얀 바위 앞에, 한 쌍의 남녀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앉아 있었다. 남자 쪽은 세게 끌어안고 있는 반면, 여자 쪽은 축 늘어진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죽었군. 빌헬름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예상과 다른 것도 하나 있었다.
"너, 울고 있는 거냐?"
심장이 멈춘 드미트리를 끌어안은 채로, 아이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빌헬름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는 악마는 처음 보는군. 넌 뭐냐? 변종이냐?"
"아뇨. 그냥, 인간입니다."
"헛, 말은. 일어나라. 질질 짜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빌헬름은 그 말과 함께 뒤돌아서서,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하늘 한 가운데 솟아오른 달빛이 그 뒤를 비추었다. 그 때까지도, 아이는 조용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마지막 대답에 대한 의문이었다. 들었을까, 듣지 못했을까.
품에 안긴 드미트리를 하얀 바위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다. 잠에라도 빠진 듯 보였다. 흐트러진 그 하늘빛 단발을 쓸어내리고, 아이는 조용히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소니아 아바키렌을 없애기 위해서.
조디악과의 길고 긴 싸움, 그것이 드디어 종지부를 눈 앞에 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