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후일담 #1. 개선식
개선식은 대성황이었다.
한낮의 따가운 햇살이 기나센의 찬 공기를 뚫고 사람들의 머리 위로 쨍하니 쏟아지고 있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발 하나 들이밀 자리가 없었다. 길게 늘어진 난간과 나무 위에도 사람들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매달려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쿠웅! 발소리가 둥글게 퍼져나갔다.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거인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컨쿼러가 위풍당당하게 행진하고 있었다. 그 등에는 커다란 기나센의 국기가 어깨망토처럼 걸려 있었다. 말끔하게 새단장된 컨쿼러의 동체 위에서 햇살은 황금빛으로 부서졌다.
"좀 더 크게 팔을 흔들어주세요."
발코니처럼 개조된 그 중심부에서, 아이는 개선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작센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개선식이었다. 륜은 난간을 잡고 해맑게 웃으면서, 환성을 지르는 민중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그 옆에서 아이는 경직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이가 여전히 뻣뻣하게 굳어 있자, 륜은 슬며시 다가와서 팔짱을 꼈다. 아이는 잠시 륜을 내려다보았다. 딱정벌레의 껍질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이, 어쩐지 더없이 낯설어 보였다.
이 컨쿼러를 완전히 확보한 건 륜의 공이었다. 컨쿼러는 사소필렌의 성물이었다. 그것이 갑자기 북서 자치령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소필렌의 고위층은 공황에 빠질 정도로 당황했다. 륜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접근해서, 적절한 회유와 협박으로 5년간 컨쿼러를 대여하는 데 성공했다. 고작 5년이라고 생각하고 빌려줬겠지만, 5년 안에 세상은 미증유의 난세에 접어들 것이 분명했으므로, 사실상의 영구 임대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뤄내지 못할 파격적인 협상이었다.
"뭐해요, 개선 행렬이니까 좀 더 자랑스러워해야죠. 저 사람들은 당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는데."
륜의 팔에 난간 끝까지 끌려나온 아이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그 순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함성이 터졌다. 처음에는 어떤 단어라고도 할 수 없는 외침과 아우성이었던 그것은, 컨쿼러가 한 발 한 발 나아감에 따라 윤곽을 갖추고 단어로 매듭지어졌다. 아이 우르드라는 이름이었다. 그들은 아이의 이름을 선창하고 있었다.
륜은 아이의 팔을 끌어안듯 팔짱을 낀 채로 홍조를 띄고 그 함성을 듣고 있었다. 기쁨이 엿보였다. 특히 우르드라는 성이 뒤에 붙은 것이 기뻤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대조적으로, 아이의 표정은 경색되어갔다. 이름이 반복될 때마다 오히려 피로감과, 불안이나 초조 같은 어떤 것이 머릿속에서 일렁거렸다. 쿵, 컨쿼러가 강을 넘으며 유독 크게 도약했을 때, 아이는 견디지 못하고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고 말았다. 현기증이었다.
"괜찮은가?"
륜이 그런 말을 건넬 때였다. 뒤에서 누군가가 아이의 손을 잡아끌고, 컨쿼러 안으로 이끌었다.
"그러니까 저는 처음부터 반대했잖아요. 막 힘든 일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을 꼭 그렇게 구경거리로 삼아야 했나요?"
가시돋친 목소리였다. 팔을 잡아끈 것은 다나였다. 전쟁이 끝났음을 전해들은 그녀는, 블뢰유의 명에 따라 접선을 위해 기나센에 파견되어 있었다. 안에 마련된 기다란 안락의자까지 아이를 끌고 온 다나는, 자신의 옆에 아이를 억지로 앉혔다.
"많이 피곤한 건가요? 계속 얼굴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여전히 사방에선 자신의 이름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아스라한 이름들은 금속성의 동체 속에서 메아리치며 귓 속을 찌르듯 부숴댔다. 이름이 커질수록 현기증은 더욱 커졌다. 앞 이마를 쓸어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손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괜찮아요? 누울래요?"
기우뚱, 잠시 후 아이는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깨까지 늘어뜨린 다나의 분홍빛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다나가 자신을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에 눕힌 것이었다. 륜은 언짢은 표정으로 그걸 지켜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저 쪽의 방으로 들어갔다. 다나는 아이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올려 땀에 젖은 앞머리를 걷어내고, 자그맣게 말했다.
"말할 수 없는 일 같은 게 있었나요, 혹시?"
"그건."
다나의 초록빛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 조각 염려가 깃들어 있었다. 입을 열려던 아이는, 잠시 입을 닫고 회상했다.
기나센에 돌아온 후, 아이는 제일 먼저 륜에게 빌헬름과의 일을 들려주었다. 드미트리의 말도 함께였다. 곰방대를 입에 문 채 조용히 이야기를 경청하던 륜은,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가. 그건 나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일세."
그리고 그녀는 소니아의 거처에서 입수한 자료들을 쭉 펼쳤다. 거기에는 아이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어로 무언가가 엄청나게 적혀 있었다.
"그 단서를 바탕으로 이걸 해석해보겠네."
"그게 무슨 자료입니까?"
"그녀가 나름대로 아지프와, 길 아잘록에 대해서 조사하던 자료일세. 그런데 일부의 특징적 어휘를 빼면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고대어로 쓰여 있어서, 그 출처를 찾기 곤란해하던 참이었는데 말이지. 그녀가 오래 전부터 승천을 준비하던 데몬스폰이라면, 그걸 바탕으로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군. 좋은 정보였어."
륜은 빙긋 웃었다. 옆에 놓인 의자의 빨간 쿠션을 툭툭 치며 아이를 불렀다. 여기로 와서 앉으라는 뜻이었다.
"이번 원정은 유독 예상치 못한 일이 많았죠? 충분히 도움을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륜은 아이의 가슴에 얼굴을 폭 파묻으며 말했다. 한아름 팔을 벌려야 간신히 끌어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 마지막 위기만 남았으니까, 조금만 절 더 믿어 주세요."
"그 외에 할 말은 없는 건가요."
"예?"
륜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드미트리의, 죽음에 관해서, 할 말은..."
륜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이가 왜 그런 말을 꺼내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잠시 곰곰히 생각하던 그녀는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그 사람이 주선하고 있던 계약 때문에 꺼내는 말인가요?"
아이 우르드를 위해서만 행동한다. 그 계약이 깨진 것을 아이가 염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녀는 그게 틀림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이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혹시 당신이 그게 마음에 걸린다면, 새로 파계 율사를 하나 구해오도록 하겠네. 구해서, 똑같은 계약을 다시 맺도록 하겠네. 우리의 계약에는 변함이 없을 걸세."
"아뇨. 듣고 싶은 건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럼 뭐지? 아이는 스스로도 대답할 수 없었다. 말문이 막혔다. 입술이 살짝 떨렸다. 토해낼 수도 없고 삼킬 수도 없는 어떤 덩어리가 목에 걸린 기분이었다. 결국 나오는 건 한숨 뿐이었다. 륜은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수그린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감싸안아주었다.
"바보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을 죽이고도 죄책감을 느끼는 건가요?"
"아니, 하지만."
"그건 절대로 당신 탓이 아니니까, 자책하지 말아요."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비단 잠옷의 사락대는 촉감만이 이마에 가득 번져 있었다. 잠시 그렇게 안겨 있던 아이는 말없이 일어나 방으로 움직였다. 문을 열고 방을 나서려 할 때, 륜의 목소리가 륜의 발을 잡아끌었다.
"아, 드미트리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요."
우뚝, 발을 멈추고 들었다. 륜은 창문을 열어 공기를 환기시키면서 조용히 말했다.
"마지막에 적의 간부가 배신해서 협력했다, 이런 소문은 우리의 명분이나 협상 위치에 해를 끼칠 수도 있으니 말일세. 꼭 비밀에 부쳐줬으면 좋겠군."
어째서일까, 울컥 화가 치솟았다. 목에 걸려 있던 그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뜨거운 불덩어리로 변해 내장 깊숙이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그렇습니까."
쾅, 조명이 흔들릴 정도로 세게 문을 닫고, 아이는 방을 나섰다. 그것이 회상의 끝이었다.
"혹시 하기 어려운 말이 있다면, 제가 고민쯤은 들어줄 수 있어요. 저 여자가 힘들게 하나요?"
"그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결국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아이는 눈을 감았다. 아직도 저 멀리서 아스라히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으로부터, 환성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이의 눈에 들어온 건 낯익은 천장이었다.
벌떡 상체를 일으켜 사방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방이었다. 시간은 초저녁 아니면 새벽인 듯, 푸르스름한 밤공기가 달빛이 새어드는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마도 컨쿼러에서 잠이 들어버린 자신을 누군가가 여기까지 옮겨준 모양이었다. 상의는 벗겨져 있었다. 등에선 식은땀이 축축하게 흐르고 있었다.
"림, 있어?"
두 손으로 얼굴을 매만지며, 아이는 조용히 림을 불렀다. 스으윽, 옆에서 림은 부유하듯 모습을 드러냈다.
'무엇을 그렇게 괴로워하느냐, 어린 순례자야. 나는 잘 이해하기 어렵구나.'
"글쎄."
피식 웃은 아이는 탁상에 놓인 두꺼운 착화기로 담뱃불을 붙였다. 창가에 걸터앉아 하늘을 들여다보았다. 밤하늘로 흐릿하게 날아드는 연기를 응시하며 연신 담배를 토하던 아이는,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혹시 용광을 꺼내줄 수 있을까?"
스르륵, 이불보 위에 용광이 나타났다. 아이는 용광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칼날을 들여다보았다. 원래는 황금빛의 용 그림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던 그 검면은 눈에 띌 정도로 색이 바래 있었다.
'저번에 한 말은 진짜냐?'
림은 조용히 물어보았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오염된 컨쿼러에게 용광을 사용한 이후로, 아이는 용광의 힘을 끌어낼 수 없었다. 무언가가 부서져버린 감각이었다. 검 자체가 온 몸으로, 너는 내 주인이 아니라고, 거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용광을 들여다보던 아이는, 문득 용광을 집어넣고 어딘가로 움직였다. 벽에 걸린 까만 종을 세 번 울리고,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2층 건물에서 훌쩍 뛰어내린 것이지만, 날렵한 아이는 고양이처럼 착지했다.
'어딜 가는 게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그리고 해야 할 말도 있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아이는 밤공기를 뚫고 어딘가로 달려갔다. 도착한 곳은 호수였다. 통령의 자택 뒷편에 있던 호수. 그 자리에는, 이미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아!"
에바였다. 쪼그려 앉아 있던 에바는 아이가 다가오는 걸 확인하자 귀를 쫑긋거리며 말했다.
"왠 일이야? 힘들어서 푹 쉬고 있다고 들었는데, 호출을 다 하고."
그 종은 에바에게 할 말이 있을 때, 여기에서 보자는 신호를 주기 위해서 설치된 종이었다. 아이는 에바의 옆에 걸터앉았다. 물끄러미 에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에바는 드미트리를 언니라고 불렀었지. 옛날엔 가족처럼 지냈다고도 들었다. 그럼, 다를까.
"할 말이 있어."
"할 말?"
또 귀를 쫑긋거리며, 에바는 두 손을 깍지끼고 이야기를 듣겠다는 제스처를 보냈다. 아이는 잠시 망설였다. 드미트리의 말을 꺼내지 말라는 륜의 경고가 떠올랐다. 하지만, 결국 무시했다.
"네 언니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리고 아이는 두서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이 들은 그녀의 가정사를, 함께 했던 말을, 죽음의 전말을, 아무런 경황 없이 늘어놓았다. 에바는 조용히 그 얘기를 듣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 아이는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입을 멈추었다. 에바는 훌쩍거리며 울고 있엇다.
"그렇, 구나. 언니가, 죽었구나."
눈물. 그 눈물을 본 순간 비로소 마음 속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탁 풀려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에바가 다음 말을 꺼낸 순간, 다시 목이 죄여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쩔 수, 없었던, 거지?"
애써서 밝게 웃으면서, 에바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아이는 에바의 어깨를 붙잡고 소리지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않았어!"
"응?"
"어떤 죽음도, 어쩔 수 없지 않았을 텐데..."
스스로도 놀란 돌발 행동이었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아이는 할 말을 잃고 고개를 숙였다. 아, 그제서야 아이는 자신의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했다. 등에 따뜻한 촉감이 느껴졌다. 에바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것 같았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니까."
이런 말을 기대한 게 아니었는데.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듣고 싶었는지를 명확하게 깨달았다.
"언니도, 널 원망하진 않을거야. 응, 분명히 그럴 거야."
자신은 이런 따뜻한 위안과 위로보다는, 증오를, 또 처벌을 원하고 있었다.
에바의 품에 안긴 채로, 아이는 빌헬름의 비난을 떠올렸다. 공허한 껍데기라는 말. 그래서 드미트리가 회의하고 죽었다면, 자신은 얼마나 충만한 것인가. 어쩌면, 자신도 그저 떠밀려왔을 뿐 아닌가.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믿고 따르기로 했으니까. 같이 노력하자. 언니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에바는 어깨를 기댄 채로 이런 말을 꺼냈다. 아마도 그것이 그녀의 최선일 것이었다. 그런가, 나를 믿는 건가. 이렇게 초라하고 추한 나를. 침묵이 이어졌다. 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낸 아이는, 입에 물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연기는 향불처럼 쓰디쓴 향기를 남기며 하늘 끝자락으로 날아갔다. 아이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딘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네 말이 맞아."
림은 그 뒤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