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10화 (210/279)

6권 후일담 #2. 21번

카나기의 금지, 백양궁이 숨겨져 있는 지하 동굴.

엄하게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그 곳에 누군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땋아올린 여자아이였다. 유얀 아이신고르. 카나기 학장의 손녀인 그 꼬마는 지금 조심조심 사다리를 타고 햇빛 하나 들지 않는 동굴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옆구리에는 주먹밥이 가득 찬 대나무 광주리가 들려 있었다.

"어디, 여기쯤에..."

조심조심 대나무 광주리를 내려놓던 유얀은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사람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두웠던 탓이었다. 사다리를 더듬더듬 찾을 때가 되어서야 드디어 발견했다.

"여기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오라버니?"

그건 레고르였다. 레고르는 한숨을 쉬며 줄을 당겨 바깥과 연결된 다락문을 열어젖혔다. 자그마한 빛이 쏟아져 벽을 비추었다. 날짜를 세기 위한 검흔은 동굴 벽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어느새 레고르가 백양궁의 주인이 되기 위해 이 동굴에 갇힌 지도 몇 달이 되었다. 그런데 최근 몇 주동안, 꾸준하게 이 자리에 먹을 것을 놓고 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 뜻밖의 호의를 마뜩찮아하던 레고르는 잠복을 결심했고, 드디어 이 자그마한 범인을 잡아낸 것이었다. 레고르는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했다.

"분명히 학장님이 여기에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위험하니까."

"그치만...오라버니가 너무 오래 안 나오니까, 걱정되서..."

울상이 되어서 안절부절못하는 유얀을 보고, 레고르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 지하의 용맥에서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독룡을 하도 많이 처치한 탓일까, 레고르의 손톱은 일부러 물들인 것처럼 새까만 빛으로 번들거렸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레고르는 주먹밥 하나를 집어들어 무성의하게 입에 던져넣었다. 유얀의 안색이 환해졌다. 소금과 참기름밖에 들어있지 않은 주먹밥이지만, 주린 몸에는 나름대로의 별미였다. 몇 개를 더 삼킨 레고르는 툭 말했다.

"이제 곧 나갈 참이었으니까."

그 때였다. 동굴 저 안 쪽에서 깊은 울음소리가 터져나온 것은.

"어,어..."

활짝 웃고 있던 유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 소리를 들어온 유얀은 그 소리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용이 몸을 뒤트는 소리였다. 저 깊은 어둠 속에서 용 한마리가 용틀임을 하며 날아들고 있었다.

"피해요!"

레고르를 꼭 껴안으며 유얀은 소리쳤다. 레고르의 반응은 대조적이었다. 정면으로 날아드는 용의 아가리를 똑똑히 노려보며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우직! 무언가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난 것은 그와 동시였다. 무언가 단단한 것에 부딪히기라도 한 듯, 용의 머리가 피투성이가 되어 으깨져 있었다. 레고르가 휘두른 검로를 따라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저 단단한 용의 머리를 박살낼 정도로 튼튼한 방어막이 생겨난 것이었다. 유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라버니, 이게 설마..."

"네 짐작이 맞다."

백양궁 하말. 공간을 응축해 방어벽을 만드는 힘을 가진 성유물의 힘이었다. 약이 바짝 오른 용은 몇 번이나 방어벽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쿵! 커다란 충격음이 동굴 안에서 메아리쳤다. 열 번쯤 박았을 때, 방어벽은 드디어 견디지 못하고 유리처럼 부서져 흩날렸다. 여기까지인가, 아직 수련이 더 필요하겠군. 레고르는 백양궁을 내던지고 대태도를 집어들었다. 그야말로 순간이었다. 대태도를 뽑는 순간, 이미 용은 비스듬히 잘려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대단하군. 대단해."

대태도를 밀어넣고 다시 하말을 집어들 때였다. 짝, 짝, 메마른 박수가 동굴 안을 메웠다. 흘깃 뒤돌아보자, 길게 기른 수염과 흰 옷이 눈에 들어왔다. 이신 아이신고르였다. 일어난 소란을 듣고 찾아온 듯했다. 유얀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레고르 뒤로 숨었다.

"결국 해낸 건가?"

"예."

레고르는 백양궁을 보란 듯 쥐어잡으며 말했다. 모든 성도 8궁은 자격 없는 자가 쥐면 그 자를 불태우는 힘을 가졌다. 저렇게 하말을 쥐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신을 흡족하게 만들어주었다. 그의 입은 쭉 찢어져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조용한 어조로, 레고르는 그가 가장 바라고 있을 대답을 들려주었다.

"백양궁을 제 것으로 다스리는 것, 성공했습니다."

이 동굴에서의 수련으로, 레고르는 공석이던 백양궁의 주인이 되는 데 성공했다.

*사실을 전해듣자마자, 이신은 레고르를 자신의 별채로 이끌었다.

유얀은 엄히 혼내 방으로 돌려보낸 후였다. 훗날이 두려운 것인지, 유얀은 어린애답게 훌쩍이며 안색이 창백해져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잔디가 무성하게 자란 산길을 따라 걸으면서, 레고르는 이신의 뒤통수에 조용히 말했다.

"외람된 말입니다만, 유얀을 엄하게 처벌하실 생각이신지요."

이신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무얼, 귀엽지 않나. 자기 낭군을 걱정하는 게 어찌 허물이겠나. 그래도 내 당부를 어겼으니 겁이나 좀 줄 생각일세."

"낭군...?"

반문하려던 레고르는, 그가 자신을 유얀과 약혼시키려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이신은 진심으로 그 꼬맹이와 자신을 엮어둘 생각인 듯했다. 백양궁의 계승에 실패했다면 말이 달라졌겠지만. 레고르가 입을 다물자, 에단이 레고르의 귀를 깨물며 놀렸다.

'이제야 왜 내 사도가 나를 돌아보지 않았는지 알겠구나. 저런 꼬마를 좋아할 줄은 몰랐어.'

기어오르지 말고 닥쳐라, 망령. 눈짓으로 험하게 받아친 레고르는 다시 말없이 이신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시간은 초저녁을 지나 밤으로 향하고 있었다. 먹물처럼 캄캄한 밤하늘이 흘러내리듯 먼 지평부터 적셔갔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때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거대한 외침이 멀리서 아스라히 퍼져나왔다. 레고르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외침이 합창하듯 퍼져나가고 있었다.

"저건..."

그 외침의 주인은 용이었다. 먼 밤하늘을 뚫고, 수십 마리나 되는 용이 웅장한 대형을 이루며 밤하늘을 뚫고 날아가고 있었다. 이 멀리서도, 어둡게 가라앉은 밤공기 속에서도, 그 거대한 위용은 똑똑히 보였다. 이신은 나지막히 말했다.

"용군단일세."

"그건 알겠습니다. 저게 왜 모여 있습니까?"

"그야, 내가 소집했기 때문이지."

우뚝, 이신이 멈춰섰다. 레고르는 긴장한 채 발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돌아선 이신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말했다.

"저 동굴 안에서만 있었으니 몰랐겠군. 그 동안 바깥에선 말일세."

다시 한 번 거대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선두에서 날아가던 용이 입에서 새빨간 불꽃을 내뿜으며 토해낸 외침이었다. 그 귀가 먹먹해지는 울림이 가라앉은 후에, 이신은 조용히 말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네. 아주 거대한 전쟁.,"

하늘을 가득 메운 불꽃 때문에 순간적으로 이신의 얼굴은 역광에 감싸였다. 음산한 그림자가 그의 얼굴을 가득 메웠다. 레고르는 그 얼굴을 가득 메운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건 희열이었다.

"학장님이 배후에서 일으킨 겁니까?"

이신은 빙긋 웃으며 다시 뒤돌아섰다. 어느새 목적지인 별채에 도착해 있었다. 드르륵, 장지문을 열고 신발을 벗은 이신은 구들장 위에 발을 올리며 말했다.

"자세한 얘기는 들어가서 하도록 하지."

사람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인가, 별채에 놓인 화로는 뜨끈했다. 화로 속에선 장죽불이 끓고 있었다. 방석 위에 앉아 장죽을 입에 가져간 이신은, 연기를 한 모금 내뿜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짐작이 맞아. 내가 사주한 전쟁으로 이미 제국 내부는 난장판이 되었다네."

이신은 레고르가 동굴에 있는 동안 있던 일을 들려주었다. 레고르는 무릎을 꿇고 앉아 경청했다. 제국은 셋으로 쪼개져서, 사실상의 내전 중이었다. 아지프의 세력이 셋으로 쪼개져 서로 내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시체와 죽음으로부터 군대를 일으키는 자들이었고, 민간인의 희생에 대해 특수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무덤으로부터 멋대로 군대를 일으켜 다른 세력을 습격했고, 무덤이 모자라면 민간인을 죽여 충당했다. 즉, 그들의 내전은 제국을 파멸로 치닫도록 만들고 있었다.

"어떻게 그걸 사주할 수 있었느냐, 그걸 궁금해하는 모양이군."

레고르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이신은 무언가를 꺼내어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너무 거대한 사건은 사건을 보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법일세. 사람을 봐야 해."

그건 자료였다. 레고르는 물끄러미 탁상에 올라온 자료들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에 관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방대한 양의 자료들이 두서없이 쌓여 있었다. 이신은 그것들 중 가장 위에 놓인 것을 집어들어 가리키며 말했다.

"길 아잘록. 이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들어는... 본 것 같습니다."

"그래, 어떤 의미에서 자네의 원수이기도 하니, 모를 리가 없겠지."

이신은 담뱃불을 뻐끔대며 말했다. 아라딘폴 공성전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이미 방대한 조사를 끝마친 그는 레고르를 뼛조각 사이에 쳐박은 것이 아잘록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 자는 원래 아지프의 평범한 신도 출신이었는데 말이야. 동생과 함께 귀조를 접붙이기 위한 위험한 실험에 참가한 이후 정식으로 입교를 허락받았다고 하더군. 귀조에게 최종적으로 선택받은 게 그였던 덕분에 이뤄낸 일이었지."

레고르는 조용히 말을 경청했다. 이신의 말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특기할 점은, 그런 것치고는 매우 마력을 다루는 재능이 떨어졌다는 사실이야. 범재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하고, 둔재라고 해야 할 수준이었다고 하더군."

"둔재... 말입니까?"

"허허허, 대체 어떻게 둔재가 6위계의 대마도사가 될 수 있느냐, 그런 질문이로군?"

이신은 웃으며 장죽을 털어냈다. 은 위에 그려진 잉어가 화로 속에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건 그의 성격 덕분이라네. 그는 선천적으로 감정과 욕망을 느끼지 못하는 몸이었다고 하더군. 어쩌면 귀조의 영향일지도 몰라. 어렸을 적에는 감성이 풍부하고 재능도 뛰어나다는 식의 보고서가 여럿 있었는데, 실험을 끝마친 뒤에는 정 반대가 되어버렸거든."

레고르는 이신에게 건네받은 자료를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관찰자가 실험을 막 끝마친 직후의 길 아잘록에 대해 서술한 몇 가지 기록이 남아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그 기록을 읽어나갔다. 그 기록에서, 길 아잘록은 21번 실험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고 있었다.

'21번 실험체는 위험하다. 21번 실험체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정서적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 이 결핍의 정도는 일반적인 수준을 크게 벗어난다. 서로의 등을 인두로 지지라는 체벌을 받았을 때, 그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동료의 등을 지졌다. 당할 때도 어떠한 망설임도 분노도 없었다. 처음에는 무통으로 의심하여 별도의 실험을 진행했지만, 그의 통각계통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21번 실험체는 한참의 학습을 거친 후에야, '인간은 고통을 피하고 싶어한다'라는 명제에 동의했다. 이는 철저하게 학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21번 실험체가 가진 인간에 대한 관념은 거의 모두가 지식의 형태로 주입된 것이다.'

그 외에도 그 보고서는 담담한 어조로 21번 실험체, 즉 길 아잘록의 이상성을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었다. 그 보고서는 이런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가끔씩 21번 실험체는 인간이 아닌 어떤 종이, 인간의 흉내를 내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 문장은 어째서인지 레고르의 폐부를 찌르는 듯 다가왔다. 마지막까지 읽은 레고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이신은 담뱃재를 털어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 성향 덕에, 그는 인간을 유혹하는 어떤 욕망과 정분에도 굴복하지 않고 꿋꿋이 연구를 진행했지. 정서가 극도로 결핍되어 있는 그에게는, 이성과 논리로 이루어진 학문이야말로 몸담을 유일한 영역이었을 테야. 마침내 토끼를 이기는 거북이처럼, 50여년을 느리지만 묵묵히 전진한 끝에 6위계에 도달한 거란 말일세. 알겠나?"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7위계가 되었다."

이 말에는 레고르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신은 못된 이야기꾼이었다. 그런 레고르의 반응을 즐기듯 일부러 말을 끌더니, 침묵이 한참 흐른 후에야 이야기를 재개했다.

"꾸준한 것 외에는 재능이 없는 둔재가, 모두를 짓밟고 올라서 최고의 성취를 얻었다. 자네라면 어떻게 느낄 것 같은가?"

"시기하고 질투하겠지요."

"그 말대로일세. 아지프의 고위 마술사들은 시기, 질투와 함께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품게 되었지. 저 둔재가 7위계의 성취를 얻어낸 건, 천재였던 나하트 칼벨레인의 실험 성과를 도둑질한 덕이다. 그런 생각 말일세."

이신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 비밀을, 나하트의 실험일지와 함께 아지프의 대마도사에게 뿌렸다네. 조금씩, 조금씩... 악기를 연주하듯이, 갈등과 내분을 유도하면서 말이야. 학장 선거는 환상적인 배경이 되어주었지. 그 결과가 지금 이 제국을 집어삼키고 있는 저 내전일세. 이제 이해가 되었나?"

레고르는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이신은 그 기색도 읽어내고 덧붙였다.

"만약 다른 세력이었다면 이토록 쉽게 내분을 일으킬 순 없었겠지. 하지만 아지프의 내부를 뒤흔드는 건 어린애 손목을 비트는 것보다도 쉬워."

"왜, 그렇습니까?"

"그들에게 집단이란 확장된 나에 불과하기 때문일세."

이신은 후욱 연기를 쏟아내고 다시 말했다.

"집단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충돌할 때, 그들은 여지없이,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모두 자신의 이익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네. 그런 자아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아지프의 고위직에 올라갈 수가 없어. 지도자는 속한 집단의 사상을 재요약하고, 또 집약하기 마련이니 말일세. 한 쪽만 택하는 인간이란 전진 방향이 고정된 철로와 같아. 예측하고 다스리는 건 오히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어린아이보다도 쉽지."

레고르는 주먹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등골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눈 앞의 노인은, 정말로 정치에 관해서는 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기색을 눈치챘는지, 사람 좋게 보이는 너털웃음을 흘린 이신은 다시 말했다.

"중요한 건 어떻게 했느냐가 아니지, 왜 했냐겠지. 안 그런가?"

"예. 어째서 그런 전쟁을 획책하신 겁니까?"

"이걸 위해서."

이신은 드르륵 서랍 문을 열더니 붉은 실로 봉해진 문서를 꺼냈다. 그건 황제의 표시였다. 봉서를 올려둔 채로, 이신은 득의에 찬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미 제국은 붕괴할 정도로 흔들리고 있어. 무력을 담당하는 아지프가 미쳐 날뛰고 있으니, 그들을 제지할 힘도 없는 상태지. 이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선 외부 세력의 도움을 바랄 수밖에 없다."

"그 말뜻은..."

"그래. 우리밖에 없다네. 이 봉서는 아마도 우리의 제국 내에서의 마술 행사와 군대 진입을 허락하는 대가로, 협력을 요청하는 봉서일 걸세. 대가로는 군무집정관 자리가 주르륵 따라오겠지."

레고르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오직 이것 하나만을 위해 세계를 도탄에 빠뜨렸단 말인가. 대단한 수완이고 실행력이었다.

"거기서 끝날 리가 없겠죠."

"눈치가 빠르군. 손녀는 걱정하지 않고 편히 눈감아도 되겠어. 맞는 말이야. 가장 중요한 대가는, 우리가 칼자루를 쥔 채로 제국의 젖줄기에 들어서도 된다는 사실 그 자체일세. 일단 제도를 먹어치우고 나면, 우린 말 그대로 무제한의 요구를 무한정으로 관철할 수 있지."

그 말대로였다. 여기서 제국의 특혜를 받고, 셋으로 쪼개진 아지프를 사냥하러 나서는 구원군 역할은, 그야말로 세계 전체를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달콤한 역할이었다. 이신은 처음부터 이 역할을 맡을 생각으로 배후에서 움직여온 듯했다.

"그리고 그 전쟁 속에서, 자네의 역할은 그 누구보다도 중요해질 걸세. 제국 내부로 짓쳐들어갈 우리 군대의 선봉을 자네에게 맡기고 싶다네. 괜찮겠나?"

백양궁을 넘겨준 것도 그 안배였나. 레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이신은 크게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봉서를 끌르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막 전달된 이 봉서에는 십중팔구 우리의 참전을 바라는 내용이 적혀 있겠지. 아마도 제국의 마지막 칙령이 될 이 역사적 문서를, 함께 확인해보는 것도 별미겠군."

레고르는 이신이 단단하게 묶인 봉서를 풀어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불현듯, 어떤 꺼림칙함 같은 것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레고르는 두서없이 물어보았다.

"그런데 학장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뭔가?"

"길 아잘록은, 그 실험이라는 것에 동생과 참가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동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야, 죽었지. 그런 건 왜 묻나."

"아니, 별 일 아닙니다.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죄송합니다."

봉서에 정신이 팔린 덕분에 이신은 크게 괘념치 않는 듯했다. 마침내 봉서는 활짝 열렸다. 그 봉서를 손에 든 이신은 이빨이 드러나게 웃으며 내용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제국은 미증유의 위기에 처해 있다..."

내용은 그의 예상대로였다. 아지프의 내전이라는 거대한 위기를 겪는 제국을 지키기 위해 황실이 모든 수를 강구했으나, 도저히 방법이 없고, 고통받는 백성들을 더 이상 지켜보기 힘드니 전통을 깨고 원군을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예상과 다른 것이 있었다. 흡족하게 내용을 읽어가던 이신의 얼굴은, 마지막 문장에 가서 밀랍처럼 하얗게 굳었다.

"그러니, 천갈궁의 주인 아이 우르드와, 제국의 맹방 기나센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그 다음에는 혹여라도 기나센을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당부가 적혀 있었다. 즉 이것은 카나기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봉서가 아니라, 기나센에게 협조하라는 내용의 봉서였다. 이신은 벌떡 일어나 봉서를 화로에 집어던지며 외쳤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레고르는 타닥이는 봉서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것이 륜이 바꾼 역사의 내용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카나기와 이신 아이신고르의 이름이 들어가 있어야 할 그 마지막 문장은, 어포슬의 활약으로, 또 컨쿼러의 존재로 인해 이렇게 바뀐 것이었다.

원래의 운명에서, 카나기는 세계를 구원한다는 명분과 이익만을 취하고 실제로 구원하지는 않으며 세계를 더욱 더 심각한 혼란으로 이끌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진실로, 이 세상의 안위를 걱정하는 군대가 아지프의 마탑을 향해 짓쳐들어가고 있었다.

*"전군, 일제 사격!"

쇠뇌와 불화살이 비처럼 떨어졌다. 화살비를 견디지 못한 인골귀 수십이 바닥에 뼛조각으로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그 사격이 끝난 후, 흰 머리의 검사가 뛰어들어 인골귀 일곱을 일검에 베어넘겼다. 그건 아이였다.

"천갈궁이 함께하신다! 모두 돌격!"

나팔 소리와 함께 기마대가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이는 이를 악물고 레바테인을 두 손으로 세게 쥐어잡고, 눈 앞에 닥친 커다란 해골을 베어갔다.

그 무렵, 아이는 이미 아지프와의 전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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