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예고된 재회 ( 1 )
죽음은 해일처럼 밤낮으로 몰려왔다.
낮이면 함성과 나팔소리 아래에서 피와 살점이 흩날렸고, 밤이면 들불 위에서 뼛가루와 잿가루가 뒤섞여 흩날렸다. 아지프가 일으켜 병사로 삼지 못하도록, 시체를 태우기 위해 일으킨 불이었다. 들불은 새벽이 지나야 가라앉았으므로, 전장의 밤은 언제나 뒤늦게 끝났다.
"구원군을 일으킨 지 이제 한 달째군. 다행일세. 예상보다 열흘 빠르게 중앙 가도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어."
싸움이 끝나고 너른 공터 위에 세운 아이의 천막 안에서, 륜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대로였다. 내전이 발발한 후 컨쿼러를 앞세워 기나센에 진입한 지 한달 째.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 가도는 애초부터 제국의 모든 곳에 병력을 파견할 수 있도록, 군사적인 목적으로 닦아놓은 가도니 말일세. 여기를 손에 쥐는 순간 셋으로 갈라진 아지프의 세력은 손쉽게 각개격파할 수 있을 걸세. 한 시름 놓았어."
그리고 그렇게 아지프의 세력을 박멸하고, 어포슬을 장악해 제국 내부를 조금씩 개혁해나가면 위기는 끝이었다. 오늘 낮의 전투는 전에 없이 격렬했다. 아지프 역시 이 가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방전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전투는 결국 컨쿼러와 아이의 활약 끝에 구원군의 승리로 끝났다. 전장의 뒤에서, 두 손 모아 기도하며 승리를 기다리던 륜은 지금 매우 기분이 좋은 듯했다.
"다행이군요."
"조금 더 칭찬해줄 수는 없는 겐가?"
륜은 짐짓 화난 듯 뺨을 부풀리고 치근댔다. 오늘의 승리에는 륜의 공이 꽤 컸기 때문이었다. 구원군의 구성에도, 오늘의 승리를 위한 전략적 안배에도 그녀의 손길이 있었다. 오늘 정도는 기뻐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어색한 웃음을 지을 뿐, 여전히 어딘가 수척해보이고 말이 없었다.
"불안한 점이라도 있는 건가요? 아니면 어딜 다쳤나요?"
륜은 곰방대에서 입을 떼고 아이의 바로 옆으로 움직였다. 팔을 붙잡고 억지로 안기듯 착 달라붙었다. 성난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무슨 아빠한테 매달리는 어린애도 아니고, 그만 좀 치근대요!"
두툼한 장갑을 끼고, 하얀 김을 뿜는 냄비를 손에 든 다나가 꺼낸 말이었다. 지금 아지프를 토벌하기 위해 모인 구원군은, 크게 기나센과 아탕칼리와 라달라리아의 세 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나는 라달라리아와의 긴밀한 협조를 위해 아이 곁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쾅! 손에 든 냄비를 책상에 내려놓으면서, 다나는 억지로 륜의 겨드랑이를 잡고 들어올려서 다른 자리에 앉혔다.
"자, 자. 걱정되는 건 이해하지만 말이죠, 아이 씨는 힘들게 일하고 왔으니까, 귀찮게 굴면 안 돼요. 알겠죠?"
이 천막에서 함께 머무르게 된 이후로, 다나는 게속 륜을 어린아이 취급하고 있었다. 너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억지로 의자에 앉혀진 륜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을 텐데요. 조금 윗사람을 존중하는 게 어떨까요."
"윗사람? 아, 원래 따지고 보면 당신은 아이 씨 이모 뻘이라고 했었죠? 죄송해요. 아이 씨와 또래가 같은 제가 이모 뻘인 당신을 함부로 대해서."
"지금 말 다했나?"
"다 했으면요?"
림은 두 사람을 지켜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다나와 륜이 함께 머무르게 된 지도 어연 한 달이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두 사람은 틈만 나면 이렇게 서로를 물어뜯었다. 아이는 잠자코 턱을 괸 채 싸움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말리려고 들면 상대 편을 드는 거냐며 날카로운 반응이 돌아왔기에, 이게 아이로서도 최선의 대응이었다.
"애초에 계속 그렇게 말투가 오락가락하는 거 진짜 무섭거든요? 뭐에요? 정신적으로 불안하다고 어필하는 거에요?"
"불, 불안정하다니, 그런 심한 말을!"
륜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게 약점이구나. 다나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허리에 팔을 올리고 더 쏘아붙이려고 할 때였다. 달그락, 냄비의 뚜껑을 여는 소리 때문에 멈추었다. 아이가 열어젖힌 것이었다. 접시를 사람 수대로 꺼내온 아이는 자리에 앉아 조용히 말했다.
"내일 해야 할 일도 있으니까요. 이쯤하고 식사를 하는 게 어떨까요."
서로 머리채를 잡을 기세였던 두 사람은 그 선언에 조용해졌다. 접시에 음식을 담는 소리만이 천막을 가득 메웠다.
"이건 어디서 가져온 겐가?"
"제가 한 게 아니라서 모르겠는데요. 어떤 병사가 진상한 걸 조리했다고 들었어요. 윽."
그건 치즈 스튜였다. 기나센의 특산물로, 거의 썩기 직전까지 염소젖을 숙성시킨 치즈로 만든 스튜. 다나는 께름칙한 얼굴로 그 걸쭉한 당근색 국물을 한 스푼 떠서 입 근처에 가져다댔다. 악취인지 풍미인지 모를 진한 향기가 풍겨왔다.
"뭐야, 이거 상한 거 아니에요?"
륜은 태연하게 국물을 홀짝 마시고는 말했다.
"북부식이군. 숙성 기한이 길고 잘라내서 버려야 하는 부분도 많아서 이렇게까지 잘 숙성하기 힘든데, 꽤 귀한걸 바친 모양이야."
원래부터 기나센 사람들만이 먹는 특이한 음식 취급을 받는 음식이었다.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다나가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도, 나름대로 토박이인 륜이 쉽게 먹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참 식성도 대단하군요, 당신은."
맛있다는 듯 스푼으로 샬롯을 쪼개 삼키는 륜을 보며, 다나는 질렸다는 듯 말했다. 륜은 냅킨으로 입을 닦고 비웃었다.
"이것도 못 먹나? 편식이 심하군."
"당연하죠! 이걸 먹는 당신 나라 사람들이 이상한 거거든요?"
"들었지, 그렇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륜은 아이의 옆구리를 쿡 찌르면서 말했다. 아이는 멍하니 자기 몫으로 돌아온 스튜 그릇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건더기가 가라앉아서, 맑은 국물 위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다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혹시 아이 씨도 이걸 좋아하는 건가? 잔망스럽게 입을 가리고 웃는 륜의 모습으로 보아서, 자신이 실수를 한 것 같았다.
"노, 농담이에요. 저는 식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교양 없는 사람이 아니랍니다."
"그런가? 그럼 안 들고 뭐 하고 있나."
꿀꺽. 침을 삼킨 다나는 천천히 스푼으로 국물을 떠서, 눈을 질끈 감고 한 입 삼켰다. 숫제 독약을 먹는 듯한 태도였다.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어찌나 냄새가 고약한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정도였다. 륜은 그 모습을 보며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약이 올랐는지, 그런 륜을 노려본 다나는 결국 꿀꺽 삼키는 데 성공했다.
"봐요, 됐죠!"
"오, 대단해. 밥도 먹을 줄 아는 군,그래."
륜은 무성의하게 박수를 쳤다.
"이런 거 얼마든지 할 수 있거든요? 바란다면, 추,충분히 끓일 수도 있어요."
"장하군. 대단해."
다나의 얼굴은 불그락푸르락해졌다.
"지금 바보 취급 하는 거죠?"
"글쎄, 그건 느끼기에 달려 있지 않겠나."
또 두 사람이 말싸움을 시작할 때까지도, 아이는 멍하니 붉은 국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젖내와 살내가 뒤엉켜 썩어들어가는 듯한 진한 향기를, 또 국물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구역질이 치밀었다. 드르륵, 아이는 의자를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다른 곳에 좀."
"어!"
당황하는 두 사람을 천막에 남겨두고, 성큼성큼 천막을 빠져나왔다. 다나와 륜은 그 뒤를 뒤쫓지 못했다. 밤하늘은 여전히 하얗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지프의 무기는 시체였다.
그들은 시체로부터 군대를 일으켰고, 시체를 연료로 포격을 일삼았다. 전장에 흩뿌려진 시체는 그들의 자원이었다. 그래서 승패와 상관없이. 들판은 언제나 불타올라야만 했다. 전몰자들을 한데 모아 사르고, 연기와 재가 걷히고 나면, 알아볼 길 없는 이름 없는 유골이 들판 가득 남았다. 그 텅 빈 안공을 아이는 잊기 어려웠다.
불길은 오늘도 아지랭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비척이며 걸어온 아이는 야트막한 구릉 위에 앉았다.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몽글거리며 천갈궁의 끝에서 그림자가 피어났다. 선주였다.
"왜 또 죽상이냐. 넌 참 다양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죽상을 짓고 다니는구나."
"그런가요."
아이는 고개를 숙여 언덕 아래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선주가 했던 요구가 떠올랐다. 지옥도를 그려달라는 요구였지. 저 모습을 그대로 조각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쯧. 무릇 군인 된 자라면 네 몸은 오롯이 네 몸이 아닌 법이다."
"무슨 뜻인가요?"
"왜 결식을 하고 잠도 설치면서 스스로 몸을 망치냐 이 말이지. 뭐냐, 혹시 너도 그 계집애처럼 편식이라도 하는 게냐?"
아까 식사 시간 때부터 이 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이는 무릎을 끌어안고 멍하니 말했다.
"아까 그 치즈 말인데요. 누가 준 건지 알고 있습니다."
"뭐?"
"어제 새벽에, 우연히 마주쳤거든요. 저보다 조금 작은 청년이었습니다. 제 얼굴을 보자마자 상기된 얼굴로 다가와서 인사하곤 말하더군요. 제가 우상이라고. 저를 보고 싶어서 자원했다고... 어머니가 준비해준 귀한 치즈가 있는데, 부디 받아주셨으면 한다고."
선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녀석은 어디에 있나."
"저기에."
아이는 칼끝으로 불길이 타오르는 지평선을 가리켰다. 멀리서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진홍색의 불꽃은 혓바닥을 낼름거리는 것처럼 흔들렸다.
"낮의 전장에서 우연히 봤습니다. 늑골이 부서진 마골귀를 처리하려고 달려들다가... 부러진 뼈에 찔려서, 쓰러지는 걸."
그리고 아이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선주는 또 입을 다물었다. 해줄 말을 찾기 어려웠다. 이 녀석은 스쳐지나가는 모든 죽음을 마음에 담아두는 건가. 선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사고방식이었다.
"그래서? 그 녀석은 네 몸과 정신을 피폐하고 괴롭게 만들기 위해서 죽은 거냐?"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이 없었다. 선주는 멋대로 아이의 품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 입에 물었다. 어슴푸레한 그림자 위로 담배 연기가 치솟았다.
"거인의 숙명이란 그런 거다. 발걸음마다 짓밟힌 시체가 남기 마련이야. 매 발걸음마다 슬퍼하고 울어제끼다간,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게 될 거다."
넌 타인의 죽음에 좀 무뎌질 필요가 있다. 그런 조언이었다. 아이는 그런 선주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당신도 절 비난해주지 않는군요."
"뭐? 최선을 다해 비난하고 있는데."
선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뭐냐, 멱살을 붙잡혀서 살인자라고 시원하게 욕이라도 쳐먹고 싶은 게냐? 네 그 애새끼같은 죄책감을 공감받고 싶어서?"
어떤 의미에선 정곡이었다. 아이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다시 한 번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 선주는, 숨결처럼 담배 연기를 토해내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네 윤리의식은 명백하게 비정상이다. 공감해줄 사람은 아마 너 혼자밖에 없을 거다. 그러니 그런 감상주의를 원한다면, 너 스스로 해라."
"스스로... 그런가요."
아이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주는 그 모습을 보고 만족한 듯, 꽁초를 저 멀리 던져버리고 그림자의 형태로 변해서, 천갈궁으로 빨려들어갔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림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저 녀석이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하는 건 처음 보는구나. 전생을 통틀어서 말이다.'
"그래?"
'지독할 정도로 친구가 없는 녀석이었으니, 당연한 일일 지도.'
림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아이는 그 웃음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어쩐지, 갑자기 허기가 몰려오는 듯했다. 돌아갈까, 아이는 이슬이 맺힌 풀숲에 손을 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멈춰섰다. 그 때, 누군가가 어둠을 헤치고 뒤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사라졌다고 해서 꽤 찾아 헤맸다. 여기에 있었군."
그부드러운 금발을 늘어뜨린 오똑한 코의 미남자가 뒤에 서 있었다. 잠시 멍했던 아이는, 반갑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하셨군요?
그건 금우궁 알데바란의 주인, 단테였다. 단테 역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손을 꽉 쥐어잡았다. 억센 힘과 강인함이 손바닥 전체로 아릿하게 전해져왔다.
"반갑군.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또 많이 변했구나."
"좋은 쪽으로요?"
"아니. 수척해졌어."
아이는 손을 마주 흔들며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