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12화 (212/279)

38. 예고된 재회 ( 2 )

단테가 이 밤중에 아이를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또 그다웠다.

"대련을 부탁한다."

스릉, 품에서 검을 꺼내며 단테는 나직하게 읊조렸다. 멀리서 불어온 바람에 들불이 일렁였다. 불길의 주홍빛 꼬리를 따라서, 단테의 흰 뺨에선 그림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 예언을 알게 된 이후로, 진력을 다해 수련을 거듭했다. 들었어. 빌헬름을 이겼다면서?"

그 얘기가 단테의 귀에도 흘러들어간 모양이었다.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목 한 켠이 아려오는 듯했다. 자신의 목에서 도끼날을 거두고 멀어지던 빌헬름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이겼다고 하기에는 조금... 비겼다고는 할 수 있겠죠."

"그 자의 비열한 수법을 생각하면 사실 상 이긴 거나 다름없겠지.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

단테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배경으로 타오르는 들불 때문에, 등지고 선 단테의 얼굴에는 음산한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수련의 성과를 확인하고 싶다. 도와줄 수 있겠나."

"기꺼이."

자신의 수준을 점검하기 위해 대련을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아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여덟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단테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금우궁을 집어들었다. 촤르륵, 검 끝에서부터 금속성의 무언가가 비늘처럼 전신에 퍼져나갔다. 잠시 후, 날렵한 전신 갑옷이 단테의 몸을 감쌌다.

주인에게 방호력을 제공해주는 금우궁의 힘이었다. 전에도 보았던 것이었지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었다. 투구였다. 이전과 다르게, 두꺼운 눈가리개가 생긴 그 투구의 머리에는 길다란 장식술이 말꼬리처럼 늘어져 있었다. 술은 화려한 붉은빛이었다.

"간다."

단테는 금우궁을 정면으로 집어들었다. 넓적한 검면에 아이의 얼굴이 반사되어 빛났다. 투구 안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진한 쇳내가 깃들어 있었다. 쾅! 단테가 달려들자, 뛰쳐나간 자리의 땅거죽이 깊게 패이며 불똥이 흩날렸다. 어깨를 노린 찌르기였다. 아이는 훌륭하게 받아쳤다. 이어, 빙글 회전하며 단테의 목을 베어버릴 기세로 천갈궁을 휘둘렀다. 챙, 단테는 손잡이로 칼날을 막고 뒤로 물러섰다.

"확실히 이 전보다 나아졌군."

두 발자국 물러서서, 예각으로 금우궁을 집어든 채로, 단테는 조용히 말했다.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들불 때문에 두 사람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일렁이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달려들어 칼을 맞부딪히고 쇳가루와 불똥을 흩날렸다. 치열한 대련은 그렇게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윽!"

팽팽했던 그 대련은 이십여 분이 지나서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 번의 실수로 자세가 무너진 아이를, 단테가 집요하게 맹공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휘청이며 한 발자국 물러난 아이를 단테는 매섭게 난타했다. 찌르기, 후려치기, 참격, 하단 베기, 이어서 턱을 쪼갤 기세로 올려치기. 아이는 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빨을 세게 깨물며 막아내려 애썼다. 손아귀 전체에 충격이 연이어 터져서, 팔뚝 가득 얼얼함이 올라왔다.

이번엔 어깨를 찌르는 척, 비스듬한 참격이 날아들었다. 뒤로 물러서며 겨우 막아냈다.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몇 발 더 물러서려던 아이는 등을 적시는 열기 때문에 발을 멈추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아이는 들불 바로 앞까지 밀려난 상태였다. 등골 가득 맺힌 땀이 들불의 열기로 기화되면서 흰 연기를 사방에 뿌렸다.

"더 할 건가?"

반면, 단테는 아직도 평온한 모습이었다. 어쩔까, 부상을 신경쓰지 않고 달려들면 일격 정도는 먹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단테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였다. 대련에서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는 것 자체가 패배를 뜻하는 것이었다. 아이는 한숨을 내쉬며, 천갈궁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졌습니다. 완패군요."

수련에 매진했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분명 강하고 위력적이었지만 어딘가 감정적인 빈틈이 남아 있던 이전과는 다르게, 지금의 단테에게선 한 치의 틈도 엿볼 수가 없었다. 사람이라기보단 바다나 산악 같은 자연물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이 전에도 성도 8궁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은 단테였다. 그가 세계의 멸망을 전해 듣고 절치부심한 결과, 지금은 더한 괴물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 사람보다 강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은연중에 품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아니, 한 번이라도 내가 실수했다면 내 패배였을 거다. 대단하군."

단테는 투구를 벗으며 말했다. 빈말이 아닌 듯, 그의 길다란 금발도 땀에 젖어 얼굴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다시 한 번 악수한 두 사람은, 대련을 시작한 언덕으로 올라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일부러 어깨를 위주로 노렸는데, 반응이 없더군. 다행이야. 그 때 내가 박아넣었던 쐐기는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지?"

널찍한 바위에 걸터앉은 단테는 우선 그것부터 말했다. 쐐기. 선주를 억누르기 위해 단테가 금우궁의 조각을 쪼개 박아넣은 그걸 뜻했다.

"예.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네 안에 깃들어 있는 그 자가 널 불편하게 한 적은 없었나? 대화를 시도하거나, 유혹하거나."

단테는 아직도 선주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도 대화했는데요. 자꾸 바둑 두자고 사람을 귀찮게 합니다.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아이는 참고 고개를 저었다. 단테에게 굳이 그런 말을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다행이군. 이건 노파심이지만, 혹시 그 자가 힘을 준다고 유혹하더라도 절대로 쐐기를 뽑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아지프보다도 그 자가 더 무섭다."

의외의 발언이었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단테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더운 탓인지, 그는 금우궁의 갑옷은 물론 상의까지 벗어던진 채 앉아 있었다. 귀공자 같은 외모와 대비되게, 승모근이 굵은 뱀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등에는 칼자국과 흉터가 여럿 새겨져 있었다.

"당신도 무서운 게 있나요?"

잠시 말을 삼키던 단테는, 아이가 담배를 꺼내 입에 붙이자 얼굴을 찌푸리며 핀잔을 주었다.

"성장한 줄만 알았더니, 안 좋은 습관도 생겼군. 몸에 좋지 않은 습관이다. 줄여라."

"끊으라고는 하지 않는 건가요?"

"끊으라고 말하면 끊을 건가?"

"아니요."

"그러니 그렇지. 쓰잘데기없는 말버릇도 늘었군."

아이는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핀잔이었다. 남자에게 이런 말을 들어본 건, 어린 시절 도린 이래로 처음이 아닐까. 이런 감상이 치솟았다. 흰 연기는 희뿌연 흔적을 남기며 저 멀리로 날아갔다.

"무서운 게 있냐고 물었다만, 많다."

"죽음이라던가?"

"아니. 내 소멸은 별로 무섭지 않다. 다른 이를 덤덤하게 죽여왔듯이 스스로의 죽음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게 칼잡이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윤리일 테니까."

잠시 입을 다물었던 단테는 아이가 두 번째 개비를 꺼낼 때가 되어서야 말을 꺼냈다.

"하지만 무섭다. 내가 마땅히 지켜야 할 사람들을 남겨놓고 죽는 건."

"그런가요."

"어쩌면 내가 진정으로 무서워하는 건, 적이 아니라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

이해할 수 있는 얘기였다. 아이는 단테의 말을 들으며 흰 연기를 토해냈다. 통령이 피던 담배의 끝향에선 언제나 연한 육두구의 향기가 났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단테는, 혀를 차면서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무슨 의미인가요?"

"나도 하나만 빌려줬으면 좋겠군."

아마도 아이가 너무 맛있게 피는 바람에, 회가 동한 것 같았다. 어이가 없어진 아이는 픽 실소하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뭐야, 방금은 끊으라면서요?"

"끊는 게 아니라 줄이라고 했다. 말해봤자 못 끊는다고 하지 않았나."

본인 이야기였던 모양이었다. 화가 났던 이유도, 금연 중인데 옆에서 피워대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즐거워져서 소리내어 웃은 아이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의 위기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공유하는 몇 안되는 동지이기 때문일까, 몇 번 만나본 적 없는데도 친밀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단테도 마찬가지였던 듯, 그답지 않게 계속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베루스에 관한 얘기를 기억하나?"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도 8궁, 그 모두가 베루스라는 진짜 이름을 잃어버린 신의 유골을 다듬어 만든 것이며, 그렇기에 충분히 자격있는 자라면 성도 8궁을 합칠 수 있다는 이야기.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더 무를 갈고닦고, 더 강한 자일수록 많은 성도 8궁을 하나로 합일할 수 있다는 얘기도 기억났다.

"너와 대련하며 내 수준을 가늠했다. 지금의 나라면 아마 네 개 정도까진 무리없이 합일할 수 있을 것 같군."

"네 개, 그럼 저는요?"

"세 개... 아니, 조금 못 미치겠군. 두 개 정도는 무리없이 다스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가요."

"실망하지 마라. 순전히 내 짐작이다만, 나는 성도 8궁 중 두 개를 합칠 수 있는 것도 너와 나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단테를 쳐다보았다. 입에 담배를 문 채 무심하게 연기를 흘리고 있는 단테는, 빈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네 나이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성취야. 어쩌면 너는 인마궁의 말대로, 언젠가 베루스를 완성하고 진명을 찾아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럴 일은 없을 걸요."

"왜?"

"이 전쟁이 끝나면, 저는 칼을 놓을 생각이라서."

단테는 소리내어 웃었다. 이 사람의 웃음소리는 이런 음색이구나, 기억에 남을 정도로 특이한 웃음소리였다.

"그건 담배보다 더 끊기 어려울 걸."

"이건 진심인데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네가 검을 쥐는 게 아니라 검이 너를 쥐기 시작하지. 세상이 너를 움켜쥐고 놔주지 않을 테다. 아마도."

"그런가요."

"그게 칼잡이의 운명이다."

아이는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적막과 고요가 너른 풀밭을 가득 메웠다. 단테는 입에 문 담뱃불이 입술에 닿을 때까지도 꽁초를 버리지 않았다. 마침내 꽁초가 완전히 검게 스러졌을 때, 툭 내던진 단테는 말했다.

"약속 하나 할까."

"어떤 약속인가요?"

"네가 죽으면, 네 천갈궁은 내가 가져가겠다."

단테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거꾸로, 내가 죽으면 금우궁은 네가 회수했으면 좋겠군."

그게 제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 뒤따랐다. 아이는 물끄러미 단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내려다보는 투명한 녹색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이게 그 무서움을 이겨내기 위한 그의 방법일까.

"예. 약속하죠."

죽으면, 서로의 검은 서로가 물려받기로.

단테가 내민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툭 맞부딪혀 맹세한 아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깊은 새벽이었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진군이 시작될 걸 생각하면, 이제는 돌아가서 잠을 청해야 했다.

그 때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온 세상을 떨쳐 울리는 듯한, 산악이 무너지고 해일이 몰아치는 듯한 굉음이 적막한 밤공기를 찢고 퍼져나갔다. 아이와 단테는 표정을 딱딱히 굳히고 굉음이 터져나온 쪽을 바라보았다. 먼 하늘, 희뿌연 보랏빛으로 가라앉은 저 먼 하늘에서, 무언가 크고 무서운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굉음은 재차 터졌다. 더욱 더 크고, 선명하고, 또 많은 수의 굉음이었다. 이제는 육안으로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하늘을 날며, 기다란 수염을 늘어뜨리고, 온 몸으로 불가해한 곡선과 직선을 옹송그리며 날아드는 괴물.

"용, 용이다."

아이는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언젠가 맞섰던 악룡 우스무, 그 용이 새끼로 보일 정도로 거대한 용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괴성과 불을 내뿜으며 날아들고 있었다. 그건 카나기의 용군단이었다.

카나기의 용군단이, 구원군의 숙영지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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