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예고된 재회 ( 4 )
난장판으로 중지된 회합은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재개됐다.
아까의 난동 때문에 이번 회합에선 모두가 검을 풀어놓고 입장했다. 레고르는 백양궁을 풀어놓으면서, 무심코 손잡이를 건네받으려는 병사에게 말했다.
"조심해라. 잘못 손대면 한 줌 재가 된다."
자격 없는 자가 손을 대면, 성도 8궁은 소유주를 불태웠다. 극도로 긴장한 탓에 그 사실을 잊어버렸던 병사는 질겁해서 손을 뺐다. 너른 바위에 놓인 대태도 위에 아이는 천갈궁을 끌러 포갰다. 그 옆에선 단테의 금우궁이 날을 파랗게 빛냈다. 세 개나 되는 베루스가 이름 모를 바위에 함께 모여 있었다. 그 검날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고, 아이는 휘장을 헤치고 회담장 안으로 들어갔다.
"둘이 아는 사이였나? 이거 놀랍군."
이신은 이미 상석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흑단목 장죽을 입에 물고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까의 소란을 빌미로, 이신은 이 회담의 주도권을 이미 가져가 버렸다. 그래서 저 도발에도 아이는 별달리 대답할 수 없었다. 의자를 거칠게 끌어 빼내고, 털썩 앉는 게 고작이었다.
"이제 좀 제대로 서로를 존중하면면서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군."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이신은, 화롯불에 장죽을 칼처럼 꽂으며 말했다.
"예의를 지키게. 예의만 잘 지켜준다면, 우린 서로 힘을 합칠 수 있을 걸세."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시죠."
이신은 턱짓으로 레고르를 가리켰다. 그러자 레고르는 어딘가에서 커다란 지도를 꺼내 탁상에 펼쳐놓았다. 카나기의 전통대로, 누른 종이 위에 검은 먹으로 그려진 센디엘의 지도였다.
"이 군세의 목표는 아마도 여기, 여기, 여기. 이렇게 세 군데겠지? 이 세 마탑을 모두 정벌하는 것이 그대들의 목표일 테고."
서쪽, 동쪽과 남쪽의 마탑을 차례로 가리키며 이신은 말했다. 단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나?"
"합류점인 이 가도에서 증원군을 기다리고, 가능한 한 군세를 크게 부풀려서 서쪽부터 각개격파할 생각이었소. 이들은 내전 중이고, 또 체계상 유기적인 협력이 불가능하니, 후방을 급습당하거나 포위될 염려가 없을 테니 말이오."
"정론이야, 정론인데..."
치이익, 빨갛게 끝이 달아오른 장죽을 꺼낸 이신은 그것으로 지도를 내려찍었다.
"이 늙은이는 조금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싶군."
지도는 장죽의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새까만 구멍을 남기며 자그맣게 타올랐다. 아이는 그 장죽의 끝을 바라보았다. 이신이 가리킨 곳은, 남부 마탑이었다. 아지프의 현 학장이 장악한 곳이었다.
"나는 이 군세가 이 중앙 가도로부터 세 개로 쪼개져서, 세 개의 마탑을 각개 격파할 것을 주장하는 바일세. 그리고, 가장 강한 전력인 자네가 이 곳을 노려야 해."
단테를 바라보며 이신은 다시 한 번 나지막하게 말했다. 단테가, 나아가 라달라리아 측의 군세가 학장이 기다리는 남부 마탑으로 향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이신을 바라보던 단테는 반문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를 듣고 싶소만."
이신은 뜸을 들이고 대답했다.
"이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뭔가."
아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의외로 이신은 곧바로 핵심을 풀어놓았다.
"그건 길 아잘록, 아지프의 7위계일세."
헙, 하는 소리가 울렸다. 아까부터 안절부절 못하던 여주교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그러나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얼굴을 굳히고 있을 뿐, 딱히 놀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신은 입에 담배를 가져가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다들 놀라지 않는군. 그래. 그 자가 이 내전을 촉발한 도화선일세. 그 자를 잘라내야만 이 위기는 끝이 나는 것이고, 우리는 승리하는 것이지."
이신은 은연중에 우리라는 말을 썼다. 아이는 소리내어 지적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자는 지금 종적을 알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 젊은 친구. 그 자는 지금 숨을 죽이고 숨어 있지. 하지만 그 숨죽임이 도망자의 숨죽임은 아닐세. 오히려 연주자의 숨죽임에 가깝지."
"무슨 소리입니까?"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저 숨어 있기만 할 리가 없다는 말일세. 그는 반드시 나타날 게야. 절정부를 기다리면서, 백건에서 손을 빼낸 채 기다리는 연주자처럼, 자신이 극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을 기다리면 숨죽이고 있다 이 말이지."
이신은 주먹을 쥐어가며 말했다. 굵직한 음성을 따라 수염이 푸들푸들 떨렸다.
"아지프의 대마도사, 그들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 하나하나가 군대와 같다는 것이지. 그들이 가장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이미 충분히 시체가 쌓인 전장이야. 고로 놈의 등장 시점도 대충은 짐작할 수 있지. 전투가 충분히 격화되었을 때, 시체가 충분히 쌓였을 때, 하지만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을 때. 아지프가 위기에 몰려 있을 때 놈은 구원자를 자처하며 나타나 죽음의 군대를 일으키겠지."
지금 아잘록은 아지프에게 견제를 받아 추방된 몸이었다. 그래서 그는 전쟁의 전면에 전혀 얼굴을 비추고 있지 않았다. 아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건 저희도 대략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희생을 내기 위한 방법으로, 최대한 군대를 집결해 양을 바탕으로 각 마탑을 찍어눌러서 각개격파를 꾀하고 있던 것이고."
"그래선 안 돼."
"왜죠?"
"시간을 주기 때문일세. 아지프의 최대 약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대답은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앉아 있던 륜이 툭 한 마디를 던진 것이었다.
"정치."
"그래, 젊은 친구. 아내가 대신 잘 대답해주었군. 정치일세. 놈들은 협력과 공생에 파멸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인간으로 자라나기를, 그들의 신앙에게 강요받고 있지. 지금 우리가 이렇게 그들을 밀어붙일 수 있는 이유도, 그들의 처참한 단결 수준에서 비롯된 거란 말일세."
이신은 장죽 끝으로 연기를 토해내곤 말을 이어갔다.
"자네의 계획대로 마탑을 하나씩 부순다면, 아잘록은 어느 순간 난입해서 우리에게 큰 피해를 입힐 걸세. 그리고 그 피해를 바탕으로, 아직 남아 있는 마탑과 접촉해 교섭을 시작하겠지. 궁지에 몰린 마탑들은 아잘록을 지도자로 받아들일 거야. 그러면 끝장일세. 지금 이 형국은, 전적으로 아잘록이 아지프로부터 추방되어 있기에 성립될 수 있는 형국이야. 그 추방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을 주면 패배할 수밖에 없지."
"그럼?"
"시간을 주지 말아야 해. 군을 셋으로 쪼개서, 세 마탑을 동시에 쳐부수는 속전속결을 교리로 채택해야 한다 이 말이야. 저기 저 금우궁이 성녀와 힘을 합친다면, 아직 군대를 본격적으로 일으키지 못한 마술사 정도는 이겨낼 수 있겠지. 아잘록이 난입할 장소에 금우궁과 그를 따르는 군세를 보내고, 나머지는 둘로 갈라져 남은 마탑을 격파해서, 놈들이 통합될 시간을 주지 말아야 한다. 그게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일세."
아이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생각했다. 이신의 말은 정연했다. 마치 오래 전부터 준비하기라도 한 것처럼, 꺼림칙함이 느껴질 정도로 정연했다. 하지만 허점이 있었다.
"좋아요. 의도는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모순점이 있습니다."
"뭔가?"
"그 전략이 성립하려면, 길 아잘록이 저 세 마탑 중 어느 마탑에 난입할 지, 정확하게 예측해야만 합니다. 당신은 이 구원군의 운명을 걸고, 그 장소를 예측할 수 있습니까?"
"그거야 하늘에 맡겨야지. 아무 곳이나 찍어도 세 번 중 한 번은 성공하는군. 이야, 자애롭도록 높은 확률 아닌가."
"지금 장난합니까!"
대놓고 빈정대는 투였기에, 아이는 참지 못하고 소리질렀다. 하지만 이신은 여전히 껄껄 웃으며 말할 뿐이었다.
"내가, 카나기의 학장을 세 번이나 재임한 이 내가, 그 정도도 예측 못해서 그냥 주사위 놀음에 수백만 명의 목숨을, 더해서 내 학장직을 걸었다 이 말이지. 재미있군, 재미있어."
반어법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장내에 다시금 험악한 기운이 감돌았다. 중재에 나선 건 단테였다.
"미리 생각해 둔 복안이 있으시오?"
"자네는 저 천둥벌거숭이보단 예의가 있군. 있지. 있고 말고."
이신은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레고르는 또 무언가를 꺼내 지도 위에 펼쳐놓았다.
"이건..."
그건 문서였다. 해골의 문양이 찍힌 문서. 아마도 아지프의 내부 문건들, 그것도 극비로 관리되는 문건들이 틀림없었다. 이신은 입에 장죽을 물고, 장죽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이건 내가 카나기의 정보망을 이용해 내부에서 건져올린 자료들일세."
"어떤 자료입니까?"
"길 아잘록, 그 자에 대한 자료들. 이미 장부상으론 폐기된 자료도 여럿 있지."
그 말대로였다. 정말로, 이신은 오늘을 하루 이틀 준비해온 것이 아닌 듯했다.
"이 모두가 길 아잘록의 생애에 관한 자료이며, 기록이며, 관찰과 연구의 결과일세. 나는 이 모든 문서를 씹어먹듯이 검토했지. 아마도, 나는 지금 그 자신보다도 그를 잘 이해하고 있을 게야."
그는 문서를 뒤적이며 이어 말했다.
"그는 어디에 난입할지를 선택하겠지. 어디를 고르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게야. 그렇다면, 그 선택지를 알아내는 방법은 하나일세. 그 인간의 삶을 통째로 씹어먹듯 되짚어서, 그 선택을 하는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지."
나한테는 오히려 그게 더 쉽다네. 이신은 짧게 덧붙이며 껄껄 웃었다. 참 다양한 웃음소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신의 말이 내뿜는 기세에 압도된 사람들은, 가만히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우선, 그의 유년 시절로 돌아가볼까.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네."
한참을 뒤적이던 그는 21번 실험체에 관한 문서를 꺼냈다. 귀조에 관한 실험과, 기묘할 정도로 정서가 결핍된 소년이 기록된 문서였다. 모두 그 문서를 읽게끔 하여 충분히 충격을 준 후, 이신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자. 장점이라고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그 하나뿐인 자. 그에겐 삶이 결여되어 있어. 일반적으로 인간을 생에 결박하는 정념들... 가족, 연인, 친지, 그 모든 게 결여되어 있단 말일세.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언어로 짜올린 무정한 구조물인 학문, 그리고 마술 뿐이었다네. 그래서 그는 처참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7위계에 오를 수 있었지."
아이는 뚫어져라 그 문서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서의 끝에는 넷으로 쪼개진 산양의 두개골 문양이 찍혀 있었다. 이신의 말은 계속 귀를 간지럽혔다.
"하지만 말일세, 이런 삶의 방식이 말이야, 7위계에 다다른다 해서 끝날까?"
그리고 이 말에 고개를 들었다. 이신은 뜸을 들이며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 끝나지 않겠지. 그는 평생을 더 높은 학문을 위해, 더 높은 경지를 위해 나아가면서만 살아왔어.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쯤에서 멈췄을 수도 있겠지. 이룬 경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찾아나갈 수도 있을 게야. 하지만 그에게는, 그 나아감... 진보하는 것 외의 삶이라곤 아무것도 없단 말일세. 어떻게 멈출 수 있겠나."
어쩐지 그 말투에선 처연함이 느껴졌다. 희미한 동병상련 비슷한 무언가가, 그 말꼬리의 떨림에서 느껴졌다. 감상적이었군. 이신은 일부러 장죽을 거세게 빨아들여 목소리를 탁하게 만들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 짐작할 수 있지.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8위계에 이르는 것일세."
"8위계? 말도 안 돼요.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해 노력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나."
참지 못하고 반문한 아탕칼리의 여주교에게, 이신은 쏘아붙이듯 말했다. 여주교는 다시 안색이 하얘져서 스스로의 입을 막았다.
"그것을 바탕으로 역산하면, 이 전쟁의 목표로 그가 노리는 것도 명확해지지."
"그게, 뭔가요."
"이런 가정을 해볼 수 있어. 만약 그가 정말로 아지프의 학장 자리가 목적이었다면, 이렇게 먼 길을 돌아갈 이유가 있었을까. 그에겐 아직 시간이 많아. 그렇다면, 다음 학장 선거를 기다리면 되는 것 아니었나. 그런데 왜 이렇게 세계에 혼란을 불러일으켰단 말인가? 고작 학장 자리를 위해서?"
생각해본 적 없는 관점이었다. 이신은 담배를 뻐끔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이 전쟁의 결과로, 아마 제국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변할 걸세. 어쩌면 멸망할지도 모르지. 아지프 역시 대동소이할 게야. 동의하나?"
"그렇겠지요."
"그럼 명확하지. 이 혼란이, 그리고 제국의 멸망이 아잘록이 노리는 것이었던 게지."
딱, 장죽을 내려찍으며 이신은 선언했다.
"그는 제국을 해체하고, 재건할 생각일세."
"재건, 한다면..."
"위정자는 그 국가의 속성을 재요약하기 마련이지. 그는 이 제국을, 오직 자신의 연구를, 8위계로의 진취만을 위한 국가로 바꾸어 버릴 게야. 존재하지도 않는 8위계를 위한 국가로 말일세."
말은 없었다. 이신은 천천히, 동물을 관찰하듯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했다. 그런가, 비약이라고 생각하고 있나. 그렇다면 이쯤에서 자료를 꺼내야겠군. 나조차 경악하게 만들었던 그 물건을.
"그 근거를 보여주지."
이신은 다시 한 번 손을 튕겼다. 레고르는, 품 가장 깊숙한 곳에서 다섯 번이나 접힌 문서를 꺼냈다. 이신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두 이걸 읽어보게. 돌아가면서 한 번씩."
이신은 그 문서를 끝에서부터 돌아가며 읽도록 권유했다. 아이의 차례는 세 번째였다. 여주교는 얌전히 그 문서를 두 손으로 받아서, 빠르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는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읽어내려갈수록, 그 녹색 눈이 경악으로 물드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끝까지 다 읽었을 때에는, 공포에 질린 듯 입을 벌릴 정도였다. 그 다음으로 문서를 건네받은 단테의 반응도 비슷했다.
"이 무슨..."
무의식적으로 문서를 구기려 들었기에, 이신이 혀를 차서 만류했을 정도였다. 정독을 마친 단테의 얼굴에는 분노와,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한 생경함이 뒤섞여 있었다. 드디어 아이의 차례였다. 단테의 떨리는 손에서 문서를 받아들고, 아이는 그 내용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