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예고된 재회 ( 5 )
첫 장에는 이 문서의 작성 경위와 폐기 경위가 적혀 있었다.
아직 길 아잘록이 5위계였던 시절, 아지프의 중앙 마탑에선 그를 고위 관료로 추천했다. 관례에 따라서, 길 아잘록은 개혁안을 작성해 제출해야만 했다. 원래라면 그저 형식적인 미사여구로만 빼곡히 문서를 채워 제출해도 문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몸이었다. 그래서 이 문서에는 그의 국가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여성스러운 글씨체의 작성 경위 밑에는, 그에 대비되는 굵고 두꺼운 글씨체로 폐기 경위가 붉게 적혀 있었다. 대조적으로, 매우 짧았다. 공개하기 부적절함. 폐기 요망.
표정을 찌푸리며 아이는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자 여백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히 글자로 뒤덮인 페이지가 나타났다. 그 글자의 홍수를 보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신은 입에 장죽을 문 채로 뚫어져라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 죽음이란 무엇인가. 생물의 죽음에는 명확한 물질적 정의가 있지만, 추상적인 것의 죽음에는 보다 복잡한 정의가 필요하다. 만약 더 이상 진보하지 못하는 것을 죽음이라고 정의한다면, 제국은 죽어 있다. 죽은 채로, 천 년을 누워 있다. ]
그 이유는 낭비 때문이다... 이런 서문을 시작으로, 이 글은 온갖 것을 낭비로 지목하기 시작했다. 음악, 문학, 건축, 나아가 역사와 교육까지도 이 문서는 부정하고 있었다. 그 관점은 인간을 대하는 인간의 관점이라기보다는 가축을 대하는 농부의 관점처럼 보였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매우 초보적인, 또는 급진적인 사회실험가의 글로 취급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부턴 달랐다.
[ 그러나, 지금까지 지목한 모든 낭비는, 이 제도에 비하면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
페이지는 거기서 끝나 있었다. 아이는 침을 삼키며 페이지를 넘겼다. 이신은 짧게 그 제도를 지목했다.
[ 그건 가족이다. ]
그는 가족을 효율화의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잠시 어이가 없어 멍해진 아이는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아까 여주교가 지은 표정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 가족은 근본적으로 기만이다. 비효율과 불합리를 불러일으키는 가장 문제적인 제도이다. ]
힘주어서 쓴 듯, 글자의 끝이 거칠게 뭉개져 있었다. 기계가 쓴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건조하기 그지없었던 이 문서에서 유일하게, 희미하게나마 감정이 엿보이는 문장이었다. 가족에 대한 비판은 그 이후로도 이어졌다.
[ 빈부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가. 세습이다. 세습의 원인은 가족이다. 모든 이들이 자신이 일군 부를 죽음으로서 사회에 환원한다면 이 세상의 불평등은 얼마나 줄어들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부를 세습받지 못한다면 이 세상의 공정은 얼마나 진보될 수 있을 것인가. 가족이라는 기만에 속아 진보는 막혀 있다. ]
[ 전쟁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인가. 욕망이다. 욕망의 원인은 가족이다. 한 사람의 인간이 소모할 수 있는 총량은 정해져 있다. 가족은 이를 무한대로 확장한다. 아들이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더 많은 고기를 사냥하고 더 많은 피륙을 약탈하며, 아내가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전쟁에 목숨을 던져 전몰한다. ]
그 후로도 이런 비판은 10여 페이지에 걸쳐 이어졌다. 아이는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자는 진심으로, 진실로, 가족이라는 제도 때문에 세상의 모든 부조리와 악행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이는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이 문서는 이런 글귀로 끝을 맺었다.
[ 나는 하루종일이라도, 이 가족이라는 원시적 제도로 말미암아 낭비된 자원과 좌절된 진보의 목록을 읊을 수 있다.
어쩌면 나 자신도 그 목록에 이름을 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야 한다.
이성을 예리하게 갈고 닦아 인류를 들여다본다면, 인류의 진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가족과 출생임을 알 수 있다.
인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
출생은 통제되고 신고되어야 하며, 미신고된 출생자는 폐기해야 한다.
통제되지 않은 출생은 그 태어난 자에게도, 세계에게도 재앙이기 때문이다.
출생한 아이는 국가에서 모두 수거하며, 누가 누구의 아들딸인지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어 가족을 해체해야 한다. 이렇게 수거된 아이들은 가진 재능에 따라 국가가 도맡아 역할을 부여해주어야 한다.
우수한 자는 마술사와 연구자로 분류하여야 하며, 열등한 자는 노동자로 분류하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국가의 미덕, 약간의 기만으로 불만을 무마할 수 있을 것이다.
100년간, 이 작업을 네 세대만 반복하다면, 가족이라는 제도는 형식적으로나마 말소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개혁은 근본적으로는 힘들 수 있다.
자신의 재생산된 복제물, 아들 또는 딸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대상에 광증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는 것은, 비단 인류 뿐만 아니라 씨내림을 받는 생물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결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의 근본적인 이념지향은 가족의 해체와 역할 흡수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나는 믿으며 또 주장한다.
이것이 죽어버린 제국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이다. ]
문서를 다 읽은 아이는 잠시 멍하니 책상을 쳐다보았다. 사회적 담론에서, 괴기함과 두려움을 읽어낼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이는 천천히 그 문서를 옆에 앉은 륜에게 건네주었다. 륜의 의견은 별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듯, 이신은 륜이 문서를 펼치기도 전에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내가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 알겠나?"
아이는 침묵했다. 그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이신은 껄껄 웃으며 재를 털어내고 말했다.
"그는 우리 모두가 광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미친 건 그 자야. 냉소적으로 세상의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제 손으로는 유의미한 것 한 개도 내어놓지 못하지."
이신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 이 늙은이는, 수백 개의 전장을 지나오면서, 이렇게 허무에 잡아먹힌 자를 수없이 보았다네. 길 아잘록, 그 자는 여기 적힌 사상을 실현하고야 말 게야. 그리고 이 세계 전체를 자신의 그 알 길 없는 실험을 위한 제물로 희생시키려 들겠지."
단테는 이를 악물고 문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마도 그는 이신의 말에 설득된 모양이었다. 주교도 마찬가지였다 눈물을 글썽이며 성호를 긋고 자그맣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실험의 핵심적인 인물이 말이지. 지금 남부 마탑에 있다네."
이신은 이번에는 자신의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어떤 인물에 관한 서류철이었다. 길 아잘록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이도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겉장에 크게 적힌 이름을 보고 아이는 신음을 흘렸다.
"마리아 칼벨레인. 길 아잘록의 등장 이전까지, 아지프를 대표하는 대마술사였던 나하트 칼벨레인의 딸일세."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마탑에서 끔찍한 실험을 당할 때, 항상 차가운 얼굴로 무언가를 받아적고 있던 여자였다. 언제나 차갑고 도도한 인상으로, 사무적인 말 외에는 누구와도 대화를 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것뿐이었다면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다른 아지프의 마술사들과 조금 달랐다. 아주 가끔씩, 그녀는 실험을 마치고 녹초가 된 자신에게 사과를 하곤 했다. 그리곤 박하향이 진하게 나는 흰 사탕을 한 알씩 물려주곤 했다.
"아..."
가끔씩 나하트 칼벨레인은, 자기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광기에 빠져 이상한 난동을 부리곤 했다. 그 때마다 마리아는, 나하트가 수술용 단검을 마구 휘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강하게 끌어안곤 했다. 그러면 나하트의 광증은 씻은 듯 가라앉았다. 그를 말릴 수 있는 건 마리아 뿐이었다. 기억에 남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 여자는, 처음으로 길 아잘록이 개인적인 관심을 보인 대상이다. 이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 그는 자신의 다리만큼의 영혼을 포기했어. 그래서 지금도 절뚝거리며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지."
"그렇다면, 그 자의 연인입니까?"
프흐흐흐흐, 여주교의 질문에 이신은 또 터진 가죽북에서 새어나오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여주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에게 연인 같은게 있을 리가 없지. 이 여자는 실험체다."
이신은 또 다른 문서를 꺼냈다. 아까 보았던 아잘록의 필체로 적힌 문서였다.
"마리아 칼벨레인, 그 여자를 실험체로서 소상하게 관찰하고, 또 검토한 문서다. 길 아잘록, 그 자가 아무도 모르게 작성하여 개인실 마룻바닥에 숨겨놓았던 걸 운 좋게 입수했지. 학회에 제출하고자 쓴 자료가 아니라 그 자신이 스스로 알아보기 위해 작성한 자료라서, 해독에 어려움을 겪고 있네만... 이건 확실하지."
아잘록이 진행하고 있는 어떤 실험에, 마리아 칼벨레인은 아주 중요한 실험체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
"나는 그게 8위계로 올라서기 위한 실험이라고 생각하고 있네만, 또 모르지. 여하튼 이 여자는 다리 한 쪽만큼의 영혼을 바칠 정도로 중요한 실험체란 말일세. 그리고 이 여자는 지금 남부 마탑에, 학장의 인질로 잡혀 있어. 이제 내가 하려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나?"
"그럼, 아잘록이 난입할 장소는..."
"당연히 남부일세. 혼란을 틈타 마리아를 구출하고, 이어 남부에서부터 반격을 시작하려 들겠지."
그것이 이신의 결론이었다. 아무도 반론을 꺼내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씨익 웃으며 장내를 둘러본 이신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며 말을 꺼냈다.
"어떤가, 반박할 것이 있나?"
이신의 예상대로 아이도, 단테도, 여주교도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은 전혀 예상외의 곳에서 들려왔다.
"그럼 병력은 어떻게 쪼갤 생각인가."
"응?"
말을 꺼낸 것은 륜이었다. 여전히 눈으로는 아잘록이 쓴 문서를 읽으면서, 륜은 무심하게 말했다.
"자네의 말대로라면, 이제부터 구원군은 셋으로 쪼개져야 하겠지. 아잘록이 난입할 때, 아직 그가 군세를 일으키기 전에 개인전으로 처리해야 할 테니 개인전의 최강자인 단테가 남부로 향해야 할 테고. 그럼 나머지 두 곳은 어떻게 병력을 배분할 생각인가?"
"젊은 친구, 말버릇이 고약하군. 예의를 갖추게."
"별로 젊지 않으니, 그 쪽이나 예의를 차려줬으면 좋겠군."
륜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이신은 잠시 험악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가, 도발이라고 판단하곤 마주 웃었다. 호탕한 듯 웃어젖혔지만, 떨림 끝에선 불쾌함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자네 말대로일세. 남부에는 라달라리아의 군세와, 황군을 파견해야겠지. 단테와 블뢰유가 선봉에서 마탑을 공략하고, 난입해올 아잘록을 조기에 처치해줄 걸세. 그리고 동쪽은, 가장 세력이 약한 곳이니 가장 쉽게 접수할 수 있는 곳일 터인데... 이건 아탕칼리에게 양보하지. 신의의 표시로 말일세."
"감, 감사합니다."
여주교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가장 쉬운 전장을 선물로 받게 생겼으니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서쪽은, 우리 근거지와 잇닿아 있으니 말일세. 우리가 직접 지키지 않고서야 체면이 서지 않지. 기나센에서 온 원군과, 우리 군이 함께 토벌하면 되겠군. 합리적이지 않나?"
"다르게는 안 되나?"
"다르게? 어떻게 말인가?"
"서쪽 마탑은 우리 기나센 혼자서도 쳐부술 수 있어. 그러니 그대들은 동쪽이나, 남쪽을 토벌하는 걸 돕는 게 어떻겠나."
륜의 도발적인 질문에 이신은 다시 한 번 웃어젖혔다.
"그럴 순 없지, 젊은 친구. 정치를 잘 모르는군. 군대는 고향을 지키기 위해 녹을 먹는 것이야. 우리의 근거지를 우리 손으로 지키지 못하고 남의 도움을 받아서야, 면이 서지 않는다 이 말이야. 그건 명예롭지 못한 일일세."
"명예? 정말로? 그게 이유인가?"
"아니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군."
장죽불이 불길하게 뻐끔거렸다. 륜은 문서를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다.
"궁금한 게 있는 건 이쪽일세. 굳이 증인이 되어 줄 다른 학파들을 전부 먼 곳으로 치우는 저의가 말이야."
이신은 담뱃불을 뻐끔거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륜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제안을 이해하려면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을 했었지. 글쎄, 내가 볼 때 이신 아이신고르라는 사람은, 고작 명예를 위해서 전쟁에 뛰어들 정도로 강직한 사람이 아닌데 말일세."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겐가."
"제국 내에서는, 학파간의 전면전을 막는 억지력이 작동하고 있지. 그런데 우리 둘 사이에서는 그런 억지력이 작동하지 않지 않나. 우린 어디까지나 외부군이니 말일세. 거기에, 자네는 지금 갖은 이유를 대가며 증인이 되어줄 다른 학파들을 전부 멀리로 치워버리고 있지 않나.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지."
"증인? 무슨 증인 말인가?"
"아지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자네들이 우리의 배후를 쳐 몰살시키고는, 아지프의 소행이었다고 발뺌하는 것을 막아줄 증인 말일세."
이신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핏기 없는 혈색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주름진 밀랍처럼 보였다. 륜은 피식 웃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우리를 선봉으로 앞세우고 배후를 급습해 전멸시킨 다음, 컨쿼러를 빼앗고, 아지프의 소행이라고 억지를 쓰더라도, 누가 증언해준단 말인가? 이제 아지프를 대신해 제국 제일의 학파가 된 카나기가 그렇게 주장하는데 말일세."
륜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대노한 듯 수염을 푸들푸들 떨더니, 륜 앞까지 걸어갔다. 륜의 자그마한 체구를 이신의 그림자가 덮었다. 다음 순간, 모두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신이 상식 밖의 행동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더러운 년."
이신 아이신고르, 그가 륜의 얼굴에 침을 뱉은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결례였다.
"이, 무슨!"
화가 난 아이가 자리에서 뛰쳐나듯 일어나 이신의 멱살을 잡으려 할 때였다. 륜은 아이의 소매를 잡고 속삭였다.
"참아요. 이게 저 자가 바라는 거니까."
정곡을 찔렸을 때, 반박할 말이 없으니 판 자체를 부숴버리기 위해서 계산적으로 도발했다는 뜻이었다. 말뜻을 알아들은 아이는 분을 삭이며 자리에 앉았다. 이신은 틈을 주지 않고 소리질렀다.
"네 년 말은 그러니까, 우리가 명예를 저버리고 동지의 뒤통수를 칠 거라는 말이냐? 쓰레기같은 겁쟁이에 버러지같은 계집년, 꺼져라! 대의를 말한 건 네가 먼저 아니었나! 그런 입으로 대의를 말한단 말인가!"
상황이 우습게 되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대의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던 이신이, 거꾸로 팔을 걷어붙이고 대의를 내세우고 있었다. 지적할 만한 상황이지만, 수염까지 떨며 진노하는 이신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그런 말을 꺼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륜은 빙긋이 웃으며, 소매를 들어 침을 닦아냈다.
"인정하지. 나는 겁쟁이에, 쓰레기고, 버러지같은 계집년일세. 하지만 말이야, 그런 자가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는 것도 대의 아니겠나?"
돌려 한 말이었지만 이신은 빠르게 알아들었다.
"조건을 걸겠다는 거냐?"
"어려운 조건은 아니야."
이신은 잠시 뜸을 들였다. 륜의 희미한 미소를 내려다보던 그는 천천히 자신의 자리에 돌아가, 푹 꺼지듯 앉고선 물었다.
"말해 보게."
"당신이 직접 전투에 참전해주게."
"뭐?"
오늘 회합을 통틀어 처음으로, 이신이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이 등장했다. 륜은 슬쩍 레고르를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이신을 바라보고 또박또박 말했다.
"천교룡 타스하의 주인이 직접 전쟁의 선봉에 서 주었으면 한다는 걸세. 정말로 명예가 목적이라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그야..."
이신은 잠시 생각했다. 무슨 목적으로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인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이신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생각이긴 했다. 학장이 야전 지휘관 역할까지 할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참가한다고 해서 손해볼 것은 없었다. 천교룡 타스하가 자신을 지켜주는 한, 그는 자신의 안위를 지킬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이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원래도 나는 선봉에 설 생각이었다네. 다른 조건은 없나?"
륜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없지. 당신의, 음, 명예를 모욕해서 미안하군. 사과하겠네."
일말의 꺼림칙한 기운을 느끼면서도, 이신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이번에야말로 아무런 반론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며, 이신은 다시 물었다.
"그럼, 반박할 사람은 있나?"
"잠깐."
이신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 말을 꺼낸 것은, 이번에는 아이였다. 아이는 뚫어져라 탁상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말해 보게. 뭔가?"
아이는 또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길 아잘록의 목표가 건국이라는 말이 아이에겐 크게 와닿지 않았다. 빌헬름과, 드미트리와 있었던 일 때문일지도 몰랐다. 드미트리가 빠져 있던, 죽도록 후회했던 그 함정에 길 아잘록도 빠져 있단 말인가.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어떤 이상을 가지는 것과, 그 이상을 내건 국가를 만드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이 자리에는 분명 자신보다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이 가득한데도, 왜 그것을 아무도 말하지 않는지, 아이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제국의 멸망과 세계의 멸망을 동치하는 태도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들은 무의식중에, 국가를 세계와 동치시키는 듯 했다.
"저..."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은, 아이가 말의 형태로 풀어내기엔 지나치게 추상적이었다. 논리라기보다는 직감에 가까운 불안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말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아이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꺼내려 할 때였다.
"아."
이신이 마구 늘어놓은 길 아잘록에 관한 자료 중에는, 헤카톤 케이레스에 관한 것도 있었다. 그 커다란 삽화에 함께 그려져 있는 란페이가 눈에 들어왔다. 십자가에 박힌 것처럼, 란페이는 두 팔을 벌린 채 헤카톤 케이레스의 가슴에 박혀서 눈을 감고 있었다. 으득, 이를 깨물었다. 어쨌든 지금 이신의 제안은, 길 아잘록, 그 자를 죽이기 위한 최적의 전략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토를 달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던 이신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는 세부적인 전략을 토의하기 시작했다. 한참 지나 해가 저물고, 그 회담이 끝날 떄까지도, 아이는 뚫어져라 문서 위에 그려진 란페이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