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예고되지 않은 것 ( 4 )
깊은 밤.
안개와 앙상한 가시나무 숲으로 몇 겹이나 숨겨진 길을 따라서, 단테와 블뢰유는 커다란 탑 앞에 도착했다. 레이첼을 심문해 알아낸 장소, 남부 마탑의 주인인 아지프의 학장이 숨어 있을 탑이었다. 작은 검을 휘둘러 얽힌 가지와 넝쿨을 찢으며 길을 뚫던 단테는 곧 무언가에 검날을 부딪히고 얼굴을 굳혔다. 결계였다.
"잠시 물러서 계시길."
블뢰유를 뒤로 물린 단테는 금우궁을 뽑아들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 달빛마저 흐리게 야윈 가운데서도 금우궁은 시리게 빛났다.
검날 가득 푸른 빛을 밀어넣은 단테는 눈 앞에 나타난 검은 빛의 결계막에 크게 휘둘렀다. 파직, 귀를 따갑게 만드는 긴 파열음과 함께 사람만한 크기의 구멍이 뚫렸다. 단테는 얼른 블뢰유의 손을 붙잡고, 그 공간을 넘어 결계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두 사람이 지나자마자 결계는 소용돌이치며 다시 복구되었다.
"보통 엄중하게 경계되는 게 아니군요. 이 정도라면, 정말로 학장이 직접 주도한 결계처럼 보여요."
블뢰유는 그 검은 반사면에 흐리게 비치는 자신의 표정을 보며 질린다는 듯 말했다. 이 결계를 이루는 마술은 굉장히 정밀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테와 블뢰유의 방문이 헛걸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아지프의 학장은 길 아잘록이 했던 모든 연구에 접촉할 수 있는 권한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길 아잘록이 7위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게되자마자 누구보다 먼저 그의 뒤를 쫓기 위한 연구에 돌입했고, 전쟁의 개막 직전에 저 탑에 숨어들어갔다.
신병을 구속하고 있던 마리아 칼벨레인 외의 어떤 사람도 안에 들이지 않았다. 고로, 레이첼을 비롯한 학장의 심복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7위계에 오르는 것이 머지 않았음을.
"결과적으로 카나기 학장의 판단이 옳았군요. 더 방치했었다면, 7위계 두 명을 상대해야 했을 지도 모르겠어요."
블뢰유는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이 탑은 아지프가 군으로 보호하고 있는 남부 마탑에서도 한참 뒤편에 숨겨져 있어서, 군을 끌고 침투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단테와 블뢰유만 은밀히 탑에 접근한 것이었다.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다. 불안에 떠는 블뢰유의 손을 잡아끌고, 단테는 장례탑 앞에 도착했다.
"열겠습니다."
산양의 두개골이 크게 새겨진 청동 문이었다. 단테가 문고리를 잡고 열어젖히자, 삭은 재와 먼지가 불길한 끼이익 소리와 함께 흘러나왔다. 콜록거리며 한 발자국 안으로 들어선 블뢰유는 탑 안의 광경을 보고 입을 가렸다.
"이건 대체?"
이 탑은 원래 실험에 쓴 사람들을 소각하는 장례탑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벽면 전체가 관으로 뒤덮여 있었다.
관을 덧대어 건물을 지어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흉하게 입을 쩍 벌린 관마다, 기괴하게 말라붙은 유해가 어설프게 담겨 있었고 삭은 재가 수북했다.
끔찍한 광경도 이 정도 규모로 저지르면 오히려 장엄해지는 것인가, 단테는 눈썹을 떨며 재가 수북히 쌓인 바닥을 가로질러 중앙에 도착했다. 어서 이 탑의 끝에 올라서, 학장을 죽이고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시체나 실험체를 운구하기 위한 것인지, 중앙에는 커다란 엘리베이터가 놓여 있었다. 아지프에서 표준으로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중앙에 놓인 레버를 당겨서 엘리베이터를 작동시키려 할 때였다.
"ㅡㅡㅡㅡㅡㅡㅡ!!!"
레버에 손을 대는 순간, 무방비해 보이는 단테의 등을 노리고 천장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단도를 든 난쟁이 곱추 형상의 괴물이었다. 그러나 단테는 예상했다는 듯 그 괴물의 손목을 붙잡고, 그대로 비틀어 단도를 괴물의 목에 찔러넣었다. 괴물은 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학장이 사역하는 괴물이군요. 이 승강기를 지키는 역할이었던 것 같아요."
"아마 층마다 이런 게 있을 겁니다. 수문장 역할이겠죠. 시간끌기 역할밖에는 못할 것 같지만."
은거하기 위한 마탑을 만들 때, 마술사들이 사용하는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탑을 여러 층으로 나누어 층마다 사역하는 괴물을 풀어놓는 것. 승강기의 구조로 보건대, 아마도 이 탑은 4층까지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았다. 단테는 축 늘어진 괴물의 사체를 승강기 저편으로 차서 떨어뜨렸다. 바닥에 부딪혀 쿵 소리가 울릴 즈음, 승강기는 덜거덕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여기도 있군."
2층에 올라서자마자, 뒤돌아 앉은 채 뼈를 으적으적 씹어먹는 흰 괴물의 등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마술로 거대하게 키운 샴발라 같았다.
침입자를 알아채자마자, 그 샴발라는 바닥에 놓인 거대한 바위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 커다란 덩치에 걸맞지 않는 재빠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단테는 넝쿨을 찢기 위해 가슴에 꽂아넣은 정글도를 빼내 가볍게 쳐냈다. 그러자 거대한 샴발라는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놓치지 않고, 뛰어들어 정글도로 심장을 십자 모양으로 찢어발겼다. 2층의 수문장이었을 샴발라가 절명하는 데는 수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실망이군.
정글도를 크게 휘두르자, 검면에 묻은 피가 바닥에 오묘한 그림을 그렸다. 3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엘리베이터는 쓰러진 샴발라 뒤편에 있었다. 잠금이 걸려 있었는데, 샴발라의 목에 걸려 있던 열쇠 꾸러미를 한참 뒤진 후에야 그 열쇠를 찾을 수 있었다. 자수정으로 장식된 은제 열쇠였다. 단테가 별 생각없이 열쇠를 꽂아넣으려고 할 때, 블뢰유가 그 손을 붙잡았다.
"잠깐. 이상해요."
"어떤 점이 말입니까?"
"굳이 촉매가 되는 자수정과 열쇠가 체결되어 있는 게 의심스럽군요."
본 업무는 율사지만, 어쨌든 블뢰유도 마술사였다. 블뢰유는 금색 법문으로 정신에 방벽을 만든 후 열쇠를 꽂아넣었다. 다음 순간, 자수정이 생물처럼 진동하며 검은 안개를 뿜어냈다.
"무슨!"
"괜찮아요."
단테가 깜짝 놀라 검에 손을 가져다대자, 블뢰유가 손을 저어 만류했다. 검은 안개는 블뢰유가 만들어낸 방벽을 뚫지 못하고, 마구 난동을 부리다가 서서히 옅어져갔다.
"함정이군요. 이 열쇠를 꽂아넣으면, 이 탑 안에 있는 사람들의 기억 중 가장 끔찍한 기억을 보여줘서 정신을 공격하는 마술이에요."
그래서 굳이 열쇠를 샴발라의 목에 걸어두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선제적으로 그것을 눈치챈 블뢰유 덕분에 함정은 수포로 돌아갔다.
"큰일 날 뻔 했군요. 경솔해서 죄송했습니다."
마술에 대한 저항력이 옅은 단테가 열쇠에 손을 댔다면, 꽤 오래 무력화되었을지도 모르는 함정이었다. 안도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단테에게 블뢰유는 놀리듯 말했다.
"좀 후회되는걸요. 당신한테도 견디기 힘든 기억이라는 게 있었으려나? 어떤 건지 보고 싶었는데."
"저도 사람입니다."
"저를 두고 야만인의 땅으로 좌천당할 뻔할 때의 기억이려나? 그 때 몰래 찾아온 당신 표정, 참 대단했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농담을."
단테는 일축하고 레버의 손잡이를 당겼다. 쿠르릉, 큰 소리와 함께 승강기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후로는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3층의 수문장도, 4층의 수문장도 단테에겐 통하지 않았다. 아지프 학장의 특기는 악몽을 다루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3층과 4층에도 비슷하게 최악의 기억을 강제로 회상시켜 정신을 공격하는 마술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블뢰유는 눈치채고 전부 차단했다. 학장을 지키기 위한 장례탑은 두 사람의 솜씨 앞에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이걸로 끝인가."
날개와 다리가 부서진 용의 시체로 만든 뼈 사역마, 기어다니는 용골귀를 처치한 단테는 안공에 깊게 쳐박힌 금우궁을 뽑아들었다.
탑 안을 기어다니며 냉기, 그리고 자수정 열쇠에 걸려 있던 것과 같은 마술을 뿜어댄 이 용골귀는 4층을 지키는 마지막 수문장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았던 적들 중 가장 강적이긴 했다. 단테가 처음으로 금우궁을 뽑아들고 갑주를 두르게 만들 정도로 강적이었다.
마술적 대처가 미숙한 단테 혼자였다면, 아마 꽤나 고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블뢰유의 가호를 받고 싸우는 단테에게는 그저 덩치 큰 뼈괴물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생각보다도 손쉽게 용골귀를 무찌른 단테는 검을 뽑아내며 어떤 확신을 느꼈다. 블뢰유와 함께하느 자신이라면, 어떤 적이라도 싸워 이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그럼 이 문 너머에 학장이 있다는 소리로군요."
이제 학장을 지키기 위해 남은 것이라곤, 이 굳게 닫힌 철문 한 장 밖에 없었다. 블뢰유는 먼저 걸어나가 오른쪽 문고리를 붙잡았다.
용골귀의 난동 때문에 살짝 무너진 탑의 구멍으로, 찬 밤바람이 흘러들었다. 장례탑을 가득 메운 관들은 덜걱거리며 재를 쏟아냈다.
잿바람 속에서 긴 머리를 휘날리면서, 블뢰유는 결연한 표정으로 단테를 바라보았다. 이 문을 열면, 아마도 이 전쟁의 운명을 판가름할 최후의 결전이 시작될 것이었다.
블뢰유라고 하더라도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테는 빛바랜 붉은 카펫을 밟고 블뢰유에게 다가갔다. 오른편의 문고리를 붙잡고, 블뢰유의 눈동자에 자신의 눈동자를 맞추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있으니까."
자그마한 불안을 읽어낸 것일까, 단테는 힘 있는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블뢰유는 생긋 웃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함께 문을 열어젖혔다. 문이 열리는 끼이익 소리가 전에 없이 크게 울렸다. 온통 잿빛과 검은 빛, 그리고 어둠 뿐이었던 장례탑에 들어선 이후로, 처음으로 이질적인 풍경이 눈 앞 가득 들어왔다.
"오... 오오..."
그건 연구실이었다. 한 발자국 발을 내딛은 블뢰유는, 바닥을 메울 듯 가득 흩어진 논문을 밟고 아연했다. 빼곡하게 글자가 새겨진 자료와 논문이 쓰레기처럼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학장의 방, 이 연구실의 끝자락에는, 책상에 엎어진 채 머리를 마구 쥐어뜯는 남성이 앉아 있었다. 회색 로브를 입었고 신음을 흘려댔다.
아마도 저 자가 아지프의 학장이 틀림없었다. 그 옆에 다소 생경하게 놓인 침대에는, 한 여자가 죽은 듯 고요하게 누워 있었다. 아마도 저 여자가 마리아 칼벨레인인 듯싶었다.
"용서... 용서해 주게. 잘못했어. 내 오판일세. 나는 이걸, 감당할 수 없어, 그대도 감당할 수 없을 텐데, 어째서..."
학장은 미친 사람처럼 읊조리고 있었다. 여전히 뒤돌아선 채였다. 그리고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도 모를 말을 꺼냈다. 아잘록인가? 아마도 그는 지금 자신의 장례탑에 침입한 자가 길 아잘록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용서해 주게. 용서를... 그리고 그대도 용서를 빌게. 여신께, 성자에게, 이건 감당할 수 없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죄란 말일세... 그런데 어째서."
"알고는 있군요?"
블뢰유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선고의 마술을 준비한 뒤였다. 이어 학장이 반응할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외쳤다.
"그대에게 선고한다! 그대는 살인의 죄를, 무엇보다 존엄한 인간의 생명을 스스로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해치는 죄를 저질렀으니, 이는 영혼이 산산조각나는 것으로 벌받음이 합당할진저!"
블뢰유의 흰 손을 둘러치듯 맺혀 있던 금색의 문자가, 방사형으로 퍼져나가며 학장을 휘감았다. 여기서부터 마술전이 벌어질 거야. 블뢰유는 이를 악물고 손끝을 따라 휘도는 마력에 감각을 집중했다. 그러나 학장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또, 허망했다.
"뭐야, 그대들은 뭔가."
뒤돌아선 채로, 학장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떤 당혹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음색이었다. 마치 정말로 무관계하고 하찮은 것을 마주한 듯한 목소리였다.
"아... 인간의 생명, 존엄? 그렇지, 그런가? 아아..."
그리고 학장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천장에 매달린 촛대에서 초가 일렁거리며 그림자를 사방에 흩뿌렸다. 뒤돌아선 학장의 얼굴을 본 순간, 블뢰유는 숨을 들이켰다.
"당신, 무슨!"
학장의 얼굴은 끔찍하게 변형되어 있었다. 마치 산양을 연상시키는 괴이쩍은 두상에, 피부는 거무죽죽하게 변해서 뼈의 윤곽이 보일 정도로 말라붙은 상태였다. 뾰족하게 솟은 갈비뼈가 그대로 보일 정도였다. 경악 속에서도 블뢰유는 자신이 이것을, 이것과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중얼거렸다.
"헤카톤 케이레스?"
학장의 몸은, 그 산양 괴물과 비슷한 형태로 변형되어 있었다. 7위계에 오르기 위해 아잘록의 연구를 훔치던 과정에서 벌어진 참사인 듯했다.
퀭한 눈동자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학장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짓으로 블뢰유가 건 속박을 끊어버렸다.
성녀가 신경써서 기소한 것인데도, 정말로 사소한 일처럼 끊어버린 것이었다. 블뢰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다음 순간, 학장은 시꺼멓게 말라붙은 목울대로 소름끼치는 비명을 내질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 비명에 화답하듯, 장례탑의 벽면을 이루던 관들이 덜컹거리며 시체의 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재들은 마치 부름을 받은 듯 날아들어, 앙상하게 마른 학장의 몸에 달라붙어선 살을 이루기 시작했다.
만약 단테나 블뢰유가 아라딘폴 공성전에 있었다면, 그때 헤카톤 케이레스의 탄생을 보았다면, 똑 닮아 있었다고 놀라워헀을 것이다. 재가 날아들며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연구실에 걸린 표어가 펄럭거렸다. 삶을 희생의 예술로 여기는 자, 우리의 등뼈를 이루는 뼈마디가 되기를.
"괴물..."
블뢰유가 신음하며 뒤로 물러설 때, 단테가 그녀를 받아주었다. 장레탑의 재를 모두 빨아들인 학장은 어느새 높은 궁륭의 천장에 닿을 정도로 거대한 괴물이 되어 있었다. 헤카톤 케이레스를 꼭 닮은, 재투성이의 괴물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단테는 한 발 앞으로 나서서 블뢰유를 엄호하듯 가리며, 금우궁을 뽑아들었다. 그 끝에서부터 촤르륵 푸른 갑옷이 솟아오르며, 늠름한 단테의 등을 단단하게 메꿔갔다. 등을 보인 채로, 괴물을 마주하고, 단테는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블뢰유는 얼른 가호를 걸었다.
"당신은 제가 지켜낼 테니까."
괴물, 학장이었던 괴물이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든 것은 그와 동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