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예고되지 않은 것 ( 7 )
한편, 아이와 레고르는 천교룡 타스하와 격렬하게 싸우는 중이었다.
긴 싸움의 결과로 타스하의 몸뚱이 곳곳에는 불자국과 검상이 길게 남아 있었다. 용의 피는 뜨거웠다. 마탑 바닥 곳곳에 흩뿌려진 피는 공기를 만나자 맹렬히 타올라서, 붉은 피안개를 뿌리며 용암처럼 들끓었다. 아이는 그런 타스하의 목덜미에 레바테인을 깊게 꽂아넣은 채, 온 힘을 다해 두꺼운 비늘을 갈라내고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타스하는 괴성을 내지르며 온 몸을 뒤틀었다. 교목처럼 두껍고 단단한 뿔에 부딪혀서, 마탑이 어지럽게 부서지고 굉음이 울려퍼졌다.
타스하의 몸이 천장에 쳐박혔고, 후두둑 돌가루가 떨어지며 연노랑빛 배가 드러났다. 쇳덩이보다도 단단한 타스하의 몸에서 유일하게 드러난 약점이었다.
타스하가 내뿜은 불길에 한쪽 팔이 새까맣게 그을린 레고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백양궁을 깊이 찔러넣고, 잉어처럼 뛰쳐올라 뱃가죽에 길따란 혈선을 남겼다.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핏줄기가 레고르를 뒤따라 분수처럼 터져나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타스하는 사방을 마구 들이받더니, 뚫린 구멍으로 머리를 빼고 용틀임을 했다. 검처럼 길게 늘어진 뿔이 사과껍질을 도려내듯 탑의 외벽을 깎아대며 벽돌과 먼지를 흩날렸다.
아이는 그 목덜미에 레바테인을 꽂아넣은 채로 대롱대롱 매달렸다. 바람이 미친듯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흘깃 쳐다본 지면은 아득하도록 멀었다.
혹여나 떨어지지 않도록 비늘의 틈새에 발을 깊게 박아넣고, 아이는 레바테인을 옆으로 그었다. 무쇠 덩어리에 검을 박아넣고 억지로 잡아당기는 듯, 격렬한 저항감이 손바닥 가득 밀려왔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츠츠츠, 천갈궁을 꺼내 휘두르자 그림자가 뭉게뭉게 새어나와 레바테인을 맞잡았다. 함께 손을 포개어 손잡이를 꽉 붙잡고, 아이는 온 힘을 다해 타스하의 몸을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찌지직, 괴성이 터지고, 솥뚜껑만한 비늘이 떨어져나가며 기화된 피안개가 시야를 매캐하게 메웠다. 타스하는 더 격렬하게 몸을 비틀어 아이를 떨쳐내려 애썼다. 입에서는 폭포처럼 농밀한 불꽃을 쏟아댔다. 마탑의 외벽을 새까맣게 그슬리며 흘러내린 불꽃은 주홍빛으로 넘실대며 바닥을 초토화시켰다.
"하아아압!"
긴 상흔을 남기며 달려나간 아이는 어느새 타스하의 정수리께에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무성한 나무처럼 가지쳐 자라난 뿔이 눈 앞에 들어왔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뿔은 무언가를 지키려는 듯 일정한 규칙성을 띄고 있었다. 그 대상은 정수리에 돋은 빨간 비늘이었다.
휘청, 요동치는 타스하에게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뿔을 억세게 붙잡았다. 푹, 손가락으로 검날을 길게 훑었다.
산이라도 집어삼킬듯 커다란 신기가 레바테인 위를 붉게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아이는 뿔을 붙잡고 등반이라도 하듯 저 높이 걸어올라갔다. 그 끝에서, 타스하의 뿔을 박차고 뛰어올라서, 빨간 비늘을 향해 레바테인을 크게 휘둘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낙하의 충격력까지 담은 일격은, 깔끔하게 비늘을 꿰뚫었다. 뱀처럼 탑을 껴안은 채 난동을 부리던 타스하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정신을 잃고 추락했다. 쾅! 두꺼운 머리가 탑의 상층을 전부 쳐부수며 커다란 흙먼지를 일으켰다. 돌조각과 가구, 마탑에 즐비했던 고문도구와 실험도구 따위가 전부 박살나 가루로 흩날렸다. 타스하의 추락은 중층에 다다라서야 멈추었다.
"후욱, 후우욱..."
그때까지도 빨간 비늘에 레바테인을 깊숙이 꽂아넣고 버티던 아이는, 힘이 빠져 타스하의 머리 위에 엉덩이를 찧었다. 힘든 싸움이었다. 그리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진동을 느끼고 벌떡 일어섰다. 이렇게 되고도 타스하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숨을 크게 헐떡이느라 머리가 흔들렸던 것이다.
"정말 내구도가 말이 안 되는 수준인데."
아이는 질린 듯 중얼거렸다. 레고르가 에단을 이용해 모종의 술수를 썼기 때문에, 타스하는 이신의 죽음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 해묵은 용은 그래서 자신의 주인을 구하기 위해 탑에 붙어 있어야만 했고, 날아서 도망가지 못했다. 만약 이 용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불을 쏟아대기만 반복했더라면 이렇게 이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아이는 땀에 흠뻑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레바테인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목숨을 끊어 주기 위해서였다. 그 때, 천장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훌륭하게 역할을 다해 줬구나, 사제야."
마탑 상층에 남아 있던 레고르가 아래를 들여다보며 한 말이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레고르는 풀쩍 뛰어내렸다. 레고르의 긴 검은 머리는 비단처럼 펄럭였다.
"이 녀석의 처리는 내게 맡겨다오."
그리고 레고르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저벅저벅 걸어와선 타스하의 주둥이를 붙잡았다. 흰자위를 허옇게 드러내고 쓰러져 있던 타스하는, 레고르의 손짓에 반응하듯 눈을 떴다.
그 커다란 눈동자에 적의가 깃들었다. 침을 흘리며 이빨을 드러내려는 타스하의 주둥이를, 레고르는 힘으로 깔아뭉개 바닥에 쳐박았다.
쿵! 옷이 타는 바람에 똑똑히 드러난 레고르의 팔근육에 힘줄이 팽팽하게 솟아올랐다. 레고르는 타스하와 눈싸움을 하듯 눈을 맞대며,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주인에게 대들지 마라. 나를 섬겨라."
'호오.'
뼈날개를 펄럭이며, 림은 그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았다. 울상을 지으며 상처입은 레고르의 팔에 매달려 화상을 매만지던 에단이, 그 말과 동시에 타스하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타스하는 괴성을 내지르며 주둥이를 벌리려 애썼다. 입안 가득 불덩이가 일렁거리는 것이 이 바깥에서도 보였다. 하지만 레고르는 다시 한 번 주둥이를 바닥에 쳐박고, 크게 소리지를 뿐이었다. 한 치도 지고 싶지 않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누가 네 주인이냐!"
기싸움은 계속되었다. 타스하의 머리에서 내려와서, 아이는 둘의 싸움을 지긋이 지켜보았다. 결국 싸움은, 레고르의 승리로 끝났다.
어느 순간 타스하가 유순하게 머리를 숙이고 손길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제압된 것을 확인한 아이는 붉은 비늘에서 레바테인을 뽑아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스하의 상처는 천천히 아물기 시작했고, 빨려들어갔던 에단은 숨결과 함께 다시 빠져나와 레고르의 목덜미에 휘감겼다. 기운이 빠진 듯, 레고르는 무너진 돌계단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설명해주시죠. 뭘 한 겁니까?"
"저 녀석은 대대로 카나기의 학장을 섬겨온 용이란다, 사제야. 나의, 그리고 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나는 카나기의 수장이 되어야만 해. 그러니 이렇게 도움이 될 놈을 그냥 죽게 놔둘 순 없었다."
"그래서 저 용은 어떻게 된 거죠?"
"이 망령은, 세상을 구성하는 법칙에 슬쩍 한 두가지 덧칠을 할 수 있다고 하더군. 계약자의 이름 몇 자를 다른 글자로 갈아끼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아."
레고르를 아나테마로 만든 것, 그것이 에단이라는 사실은 첫 만남 이후 림에게서 들었다. 그리고 에단은 선주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린 신이기도 했다.
역사도 그렇게 고쳐쓰는 게 가능했던 에단의 힘이라면, 타스하의 계약자를 이신에서 레고르로 바꾸는 것 정도는 쉬운 일에 속할지도 몰랐다. 경계와 놀람이 뒤섞인 표정을 짓는 아이를 보며, 레고르는 피식 웃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줄까."
그리고, 레고르는 자신의 목에 붙어 있는 에단의 뒷목을 붙잡아 들어올리곤 말했다.
"오늘 있었던 일은 이 망령이 처음 제안한 거다. 그리고 그 첫 제안에서, 이 망령은 널 속이고 꼬드겨서 목을 칠 것을 요구했다. 학장 대신."
그 말이 끝나자마자, 림은 험악한 얼굴로 에단을 바라보았다. 에단은 깜짝 놀란 듯 사방을 훑어보다 레고르의 등 뒤로 숨었다. 레고르는 림의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마주보면서, 똑똑히 말했다.
"이유는 네 뒤에 있는 저 시뻘건 흉물 때문이라던데."
"더 자세하게 말해주시죠."
"이 망령의 목을 친 게 저 흉물이라더군. 저 흉물을 저 꼴로 만든 것도 이 녀석이고 말이야. 그래서 존재가 이리저리 뒤얽힌 바람에, 저 흉물은 반드시 소멸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저 흉물이 소멸해야만 힘을 빨아들여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그래야 비로소 완전해져서 나를 돌봐줄 수 있다고 하던데."
아이는 림의 신전에 남아 있던 목 없는 동상을, 그리고 에단의 동상을 떠올렸다. 선주와 림이 나누던 대화도 떠올렸다. 선주는 지나가는 말로, 림의 현 모습이 고아함을 잃어버렸노라고, 안타깝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참 운명이라는 게, 더럽게 얽혀 있군요."
하필 레고르가 에단의 아나테마로 나타난 것이, 정말로 얄궂게 느껴졌다. 엄지로 가드를 밀어 검을 살짝 발도하고, 아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꾸로 림이 완전해지기 위해선 당신이 죽어야 한다는 소리겠군요.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싸우자는 겁니까?"
'어린 순례자야...'
언제든 발도할 수 있도록 채비를 갖춘 채, 아이는 레고르를 노려보았다. 림은 자신을 위해 일어선 아이를 오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레고르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대응하려는 듯 백양궁을 잠깐 집어든 레고르는, 칼집을 끌러 저 멀리 내던지곤 손을 들었다.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믿음을 얻고 싶은 거다."
"믿음?"
"네 옆에는 괴상한 참모가 붙어 있는 모양이니 말이다. 혹여 다른 경로로 이 정보를 들었다간, 나를 의심하고 불신하게 되겠지. 그래선 안되지 않나. 눈 앞에 다가온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서로의 협조가 필수불가결한데 말이야."
"그 말뜻은..."
"나는 이 길로 돌아가서, 머리를 잃고 헤매는 카나기의 전권을 확보하겠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이 구원군에 협력할 것을 맹세하마."
"사형...아니, 당신, 진심으로."
아이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망설였다. 예전부터, 아주 예전부터 느꼈다. 레고르 보르지아, 이 자는 결코 좋아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자신을 닮은, 이해할 수 없고 좋아할 수 없는 어떤 자신만의 원칙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고, 어쩐 이유에서인지 그것은 철저하게 지켰다.
굳이 무력하던 시절의 아이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도, 그래놓고선 공성전의 마지막에 죽이려 들었던 것도 그 원칙에 따른 것일 터였다.
그리고 아마도, 그 원칙에 따르면 여기서 아이를 배신하고 힘을 독점하는 건 할 수 없는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아이는 눈을 지긋이 감고 생각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아이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저는 사형이 싫습니다."
"안타까운 일이구나, 사제야."
"하지만 구원군을 이끄는 성좌의 입장에서, 또 기나센의 통령된 입장에서, 당신이 카나기를 우리를 위해 통제해 주겠다고 약속한다면 말입니다.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섰다. 금실로 장식된 붉은 어깨망토가 곳곳이 찢어진 채 펄럭거렸다.
"그러니 여기선 사형의 말을 믿겠습니다. 하지만, 이 위기가 끝나면..."
"뒤는 내가 말해도 되겠나?"
"해보시죠."
"그때 맺지 못한 결착을 맺도록 하죠. 이건가?"
레고르는 아이의 목소리를 우스꽝스럽게 흉내내며 답했다. 그대로였다. 농락당한 기분이 든 아이가 입술을 세게 짓씹으며 이익 소리를 내자, 레고르는 배를 붙잡고 웃어젖히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말 더럽게 꼬여 있군, 운명이란 게."
어느새 타스하의 상처는 거의 아물어 있었다. 가장 해묵은 용에 걸맞은 경이로운 재생력이었다. 훌쩍 그 머리에 올라탄 레고르는 이 말을 남기고 저 멀리로 사라져갔다. 반쯤 무너진 마탑에 올라선 채로, 아이는 멍하니 타스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뜻밖의 장소에서 시작된 레고르와의 재회는 우선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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