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23화 (223/279)

39. 예고되지 않은 것 ( 8 )

마탑을 무너뜨린 뒤, 구원군은 폐허가 된 일대에 머무르며 전후 복구를 시작했다.

징집을 피해 숨어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얼굴을 들이밀었고, 구원군은 그들을 위해 새 집과 헛간을 지어주고 있었다. 싸움을 마치고 며칠 쉬지도 않은 채, 아이는 솔선해서 그들을 도왔다. 지금도 판잣집의 지붕 위에서 열심히 망치질을 하는 중이었다. 입에 못을 여러 개 물고, 나무망치로 솜씨 좋게 지붕을 만들어나갔다.

깡! 큰 소리와 함께 마지막 못질을 마친 아이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잠시 후드를 벗었다. 괜히 소란스럽게 하기 싫어서 뒤집어쓴 후드였다. 올려다본 하늘은 푸르렀다. 그 하늘 끝자락에선, 용 한 마리가 산봉우리를 휘감은 채 몸을 쉬고 있는 것이 어슴푸레 보였다. 카나기의 용이었다.

이신이 죽은 후 카나기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쥐죽은 듯 움츠려 있었다. 저 용의 느긋해보이는 휴식도 그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하지만 아이는 알고 있었다. 아마 그 안에서는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으리라는 것을. 잠시 멍하니 하늘 끝을 쳐다보며 레고르를 떠올리던 아이는, 고개를 털어 잡념을 멀리하고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염려해도 별 수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림, 듣고 있어?"

아이는 림에게 말을 걸었다. 신기한 듯 굴뚝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던 림이 뽁 머리를 뽑고 이 쪽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느냐, 어린 순례자야.'

"사형의 뒤에 붙어 있던 그 여자 말인데, 그 여자에 대해 뭐 할 말 없어?"

림은 곰곰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글쎄,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거라.'

"어떻게 된 거야? 그 녀석은 선주랑 네가 옛날에 죽인 것 아니었어?"

'글쎄, 그랬다고 생각했건만, 어떤 술수를 써서 부활한 모양이구나.'

림은 턱을 쓰다듬었다. 무언가 긴 할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이는 침을 삼키며 림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목을 쳤다고 생각했지만 말이지, 에단의 숨통이 정말로 끊어졌는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럴 만한 상황이 못 되었거든.'

"왜?"

'놈도 선주에게, 그리고 내게 치명상을 입혔기 때문이다. 어떤 수를 쓴 것인지, 절대로 배신만은 하지 않을 것이라 여겨졌던 여자를 꼬드겨 뒤를 쳤다. 그리곤 이 세상을 구성하는 법칙에서 선주의 이름을 빼내어 지워버렸지. 그 과정에서 나도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내 모습이 온전하지 못하게 된 것, 기억이 흐려진 것, 모두 그 때문이다.'

"그렇구나... 아니, 배신하지 않을 여자라면, 설마."

아이는 블뢰유를 보고 절박하게 외치던 선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림은 이빨을 드러내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 성녀의 선조다.'

"그런... 왜 그런 짓을?"

'너무 강한 힘을 가졌기 때문아니었을까. 말했다시피, 선주는 7위계의 마술사 서넛과 동시에 싸워도 지지 않을 수 있는 자였다. 거기에 아나테마였지. 운명을 일그러뜨리고 뒤흔들기에 충분한 힘이었고, 간신히 제국을 건국시킨 그 여자는 그 변수를 남겨두고 싶지 않았을 테다.'

"그래서 에단이랑 손을 잡고 널 잊혀지게 만든 거라고?"

'그렇겠지. 다만, 의문이라면...'

림은 또다시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왜 그냥 죽이지 않고, 에단과 손을 잡아서 세계의 운명에서 제거한다는 복잡한 방법을 썼는가, 그 정도는 의문이군.'

아이는 잠자코 어깨를 매만졌다. 선주 역시 참 기구한 운명을 헤쳐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을 겪고서도, 블뢰유의 후손인 호노레 블뢰유를 마주했을 때, 선주의 모습에서 원망이나 회한은 느껴지지 않았었다.

"사형은 에단과 네가 연결되어 있다고 했었는데. 그건 무슨 소리야?"

'주인의 이름을 지우면 새 이름을 적어넣을 공백이 생기기 마련이지. 아마도 그 놈은, 소멸 직전에 이 세계에서 선주의 이름을 지우면서 생긴 공란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넣은 모양이다. 그 덕분에 소멸하지 않고 살아남았고, 모종의 안배를 통해 육을 얻었겠지. 하지만 내가, 진정한 주인의 존재가 그 가련한 도둑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고 있구나.'

"아..."

'그러니 내가 없어져야 내 운명을 완전히 가로채서 온전히 부활할 수 있다는 뜻이겠지.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 그 말을 들은 아이는 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죽이 벗겨진 얼굴, 처음에는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놀랐던 얼굴,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친숙해보이는 얼굴. 아이는 조용히 물었다.

"그럼,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건, 그 녀석을 죽이면... 네 원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거야?"

'이미 본 적이 있을 텐데.'

"응?"

'에단이 지금 취하고 있는 모습. 그게 내 천 년 전의 겉가죽이란다, 어린 순례자야.'

아이는 레고르의 목에 어린아이처럼 매달려 있던 에단의 모습을 떠올렸다. 긴 흑발을 휘날리는, 어딘가 냉정하고 성숙해보이는 인상의 미녀. 그래, 미녀였다. 아이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그럼 너 여자였어?"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되겠구나. 왜, 놀랐느냐?'

림은 찢어지는 웃음을 흘리며 그렇게 말했다. 아이는 잠시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흉측한 겉모습 때문일까, 아니면 커다란 신장 때문일까. 무의식적으로 당연히 림은 남성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쭉.

"놀라긴, 했는데..."

'이런, 실망이라도 한 것 같구나, 어린 순례자야. 화장실이라도 엿봤을까봐 그러느냐?'

"아니, 그래서는 아니고..."

너를 지금까지 아버지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놀랐어. 이런 말을 하려던 아이는 뒷말을 삼켰다. 낯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이미 굳게 박아넣은 못에 괜시리 망치질을 하면서, 아이는 원래부터 생각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럼 림은 내가 사형이랑 그 에단이라는 놈을 없애주길 원해?"

'응?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야, 네 원래 힘을 찾으려면..."

'흠.'

림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서, 아이가 뚫어놓은 굴뚝 속을 들여다보았다. 목소리는 홈통에 울려서 걸걸하게 퍼져나왔다.

'글쎄. 난 잘 모르겠구나. 네 마음이 바라는 대로 하라는 말 밖엔 해줄 말이 없군.'

"응?"

예상 외의 대답이었다. 아이는 퍼덕이는 뼈날개를 보며 말했다.

"그 에단이라는 녀석은 네 숙적 아니야? 마술사를 죽인다는 업을 쌓으려면, 또 네가 얼굴을 되찾으려면..."

'그보다 네 사명을 우선하거라, 어린 순례자야. 그 사형이라는 자는 네 목적을 위해 필요하지 않느냐.'

그리고 림은 다시 가만히 굴뚝을 들여다보았다. 굴뚝 아래에는 밥을 짓기 위한 자그마한 부엌이 자리해서, 은은한 짚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포근하고 따뜻한 주홍빛의 불이었다. 림은 그 따스함을 응시하는 것이 좋았다. 잠시 입을 열고 닫으며 그 뒷모습을 응시하던 아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사다리도 없이 가볍게 바닥에 뛰어내려 착지하고선, 큰 소리로 림에게 말했다.

"난 다른 곳도 돕고 올 테니까, 해질 때까지 계속 그러고 있어!"

'알겠다. 잘 다녀오거라.'

반어법으로 한 말이었는데, 진심으로 받아들인 듯 림은 날개를 퍼덕이며 대답했다. 어처구니가 없어 픽 웃음을 터뜨린 아이는 다시 후드를 푹 눌러쓰고 발걸음을 옮겼다.

*

아이가 도착한 곳은 막 지어지고 있는 광장이었다.

사거리가 교차되는 지점에 있는 광장, 그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는 목의 줄을 당겨 후드를 더 조이고, 조심스럽게 인파로 들끓는 광장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미 여러 번 얼굴을 들켜 소란스러워진 적이 있기 때문에,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몇 발자국 내딛지도 않아서 괜한 걱정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의 이목은 온통 광장의 중앙에 서 있는 한 사람에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땅에도 라달라리아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거기 다소곳이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는 건 다나였다. 아이와의 연락망 역할을 자처해서 이 곳에 남은 다나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팔을 걷어붙이고 이 곳의 치안을 안정시키는 것을 도왔다. 지금은 그 막바지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사람들의 우러름 섞인 시선을 받으며 다소곳이 엎드린 다나는, 품에서 금빛의 무언가를 꺼냈다. 고위 율사의 문장이었다.

"이제 이걸 이 광장의 정중앙에 파묻으면, 마술사도 율법에 준수하도록 만드는 여신의 가호가 여러분의 땅에도 임할 겁니다. 더 이상 가족이 희생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 말에 박수와 환호가 울려퍼졌다. 저 말이 아지프에게 시달린 이 곳의 사람들에겐 무엇보다도 큰 위로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다나의 환한 미소를 바라보던 아이는 얼떨결에 분위기를 따라 박수를 쳤다. 갈채 속에서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웃는 다나는 정말로 행복해보였다. 멍하니 그 표정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서 장난스런 목소리가 울려왔다.

"눈에서 꿀이라도 떨어질 것 같군?"

"예?"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낯익은 듯 낯선 남자가 보였다. 이마를 훤하게 드러낸 금발의 기사였다. 연한 푸른빛이 감도는 건틀렛으로 건성건성 박수를 치면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보던 아이는, 이내 깨닫고 말했다.

"아셀라이?"

그건 남장을 한 아셀라이였다. 어찌나 감쪽같은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그저 시원스러운 인상의 남자 기사라고만 생각할 것 같았다. 아이의 목소리 때문에 이 쪽에 이목이 살짝 집중되었다. 아셀라이는 팔을 들어 가볍게 아이의 입을 막고, 검지를 세워 자신의 입 근처로 가져갔다. 조용히 얘기하자는 뜻이었다.

"이미 떠난 거 아니었어요? 그런 낯부끄러운...아니, 멋진 편지까지 남겨놓고."

아이가 탑에서의 싸움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이미 아셀라이는 홀연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떠난 자리에는 그녀 특유의 웅장한 필치로 쓴 편지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자신은 저번 세기에 있었던 십자군의 불명예스러운 생존자이며, 그 오욕을 씻기 위해 다시 한 번 인류를 위한 군세가 일어나기를 열렬히 바라고 있었고, 함께할 기회를 주어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그 편지는 지금 이 쪽의 문제는 해결된 것 같으니, 빨리 다른 전장에 합류하기 위해 떠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작별인사조차 제대로 못 했기 때문에 아이는 내심 섭섭했지만, 그녀다운 이별이라고 납득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런 자리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니 반가운 동시에 당황스러웠다.

"물론 그럴 생각이었지. 저 아가씨를 발견하기 전까진."

"예?"

아셀라이는 손을 들어 다나를 가리켰다. 그리곤 진지하게 말했다.

"네 덕분에, 내가 라디오소의 재건을 떠맡게 된 건 알고 있겠지? 그리고 본디 라디오소는 조금,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집단이다. 그렇지?"

"예에..."

특별하다는 건 흡혈귀를 뜻하는 것이었다. 아셀라이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저 아가씨도 꽤나 특별한 운명을 가지고 있더군. 그래서, 동료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예?"

"왜, 걱정되나? 내가 혹시 빼앗아가기라도 할까봐?"

"아뇨, 그렇다기보단."

다나와 성기사단이라는 것이 굉장히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색을 읽었는지, 아셀라이는 다시금 다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라디오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힘이나 싸움 실력 따위가 아니야. 그건 내 밑에서 견디기만 하면 얼마든지 길러줄 수 있지. 중요한 건 의지력이다. 절대로 자의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절실한 목표, 그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강인한 의지력이야말로 가장 필요한 것이지."

"의지력... 말인가요."

"그래. 백 년이고 이백 년이고, 이를 악물고 이 세상을 견뎌낼 수 있는 의지력이 엿보인다. 어쩌면 나보다도 강할지도 몰라. 그러니 꼭 부탁하고 싶군."

아셀라이의 말은 진심처럼 들렸다. 아셀라이가 정말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다나에게 접근한다면, 자신이 개입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아이는 잠자코 의식을 끝마치고 있는 다나를 바라보았다. 다나가 문장을 파묻은 곳 위에, 희게 빛나는 새 여신상이 놓이고, 여신상의 내부는 문장의 빛이 비쳐 은은한 금빛을 띄었다. 이제 이 곳은 공식적으로 라달라리아의 수호를 받게 된 것이었다. 기쁜 표정으로 일을 끝마친, 이 마을의 촌장쯤 되어보이는 사람이 크게 소리질렀다.

"자! 이제 여신의 축복을 기리며 여기 모인 모든 분께 음식을 나누어드리겠소! 아내와 딸이 밤을 새서 준비한 고기 파이요!"

그 말에 작은 환성이 일었다. 저 멀리서 두 사람의 여인이 커다란 트레이를 돌돌돌 밀고 오기 시작했다. 그 얼굴에는 쑥스러움과 기쁨이 묻어 있었다. 대조적으로, 누군가의 얼굴은 당황한 듯 새파래졌다. 다나였다. 그녀는 자그맣게 촌장의 어깨를 건드리더니, 이렇게 물었다. 청력이 좋은 아이와 아셀라이 정도나 들을 수 있을 만큼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저... 죄송하지만, 저 파이들은 저를 위해 준비했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아아, 그랬지! 모두 들으시오! 이 음식은 이 보잘것없는 마을을 위해 기꺼이 성문장을 내려주신 다나 아니스 율사님을 기리기 위해 준비한 것이오! 모두 마음에 새기도록 하시오!"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다 먹..."

거기까지 말하던 다나는, 갑자기 현기증이라도 난 듯이 휘청였다. 주변 사람들이 크게 놀란 것은 당연지사였다.

"왜, 왜 그러십니까? 몸이 많이 안 좋습니까?"

"예에, 햇볕을 너무 많이 받았더니, 현기증이..."

"그럼 어서 돌아가서 편히 쉬어주십시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나는 어디가 아팠다는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빠르게 광장에서 멀어져갔다. 잠시 후 트레이의 은뚜껑이 열리고, 텅 빈 접시 때문에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당황해서 한참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은 어떤 고약한 놈들이 음식을 훔쳐먹었노라고 결론을 내리고 분개했다.

"의지력이 대단하다구요?"

아이는 피식 헛웃음을 지으며 아셀라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재미있는 것을 봤다는 듯, 배를 붙잡고 웃고 있었다.

*

먼 산이 보랏빛으로 젖어드는 저녁.

"그런가, 그런 일들이 있었군."

아이는 오늘 있었던 일과,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륜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가끔 고개를 끄덕이거나 추임새를 취하는 것 말고는 조용히 이야기를 경청하고만 있던 륜은, 담배 연기를 깊게 뱉어내며 말했다. 잿빛 숨결에 호롱불은 어지럽게 흔들려서 천막 벽에 그림자를 뿌렸다.

"컨쿼러를 얻어온 후부터, 정확히 말하면 소니아가 죽은 이후부터, 예지의 힘을 훔쳐 쓸 수 없어서 많은 부분을 추측에 의존했는데 말이야.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다행이군."

"그 말뜻은?"

"레고르 보르지아. 그 자가 이렇게 행동할 것이라는 예측은, 아나테마의 힘을 빌린게 아니라 제 스스로 예측했다는 뜻이에요."

륜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것이 굉장히 뿌듯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다시 곰방대를 입에 물고 지도를 펼쳐들었다.

"구원군을 일으키기 전, 가장 염려했던 난적은 카나기였어요. 원래 이 명분도 군세도 카나기가 미리 안배해 둔 것이니만큼, 분명히 구원군을 깨부수고 그 자리를 탈취하려 수작을 부릴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예상보다도 훨씬 싱겁게 통제 하에 들어왔어요. 모두 당신 덕분이에요."

"정말로 믿어도 괜찮을까요?"

레고르가 정말로 구원군에 순순히 따라주겠느냐는 걱정이었다. 일단 레고르를 믿고 보내긴 했지만, 아직 한 가닥의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륜은 생긋 웃으며 그것을 해소해주었다.

"괜찮을 거에요. 레고르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구원군에서의 업적과 구원군이라는 비상상황이 반드시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륜은 왜 레고르에 대한 경계를 일단 덜어도 되는지에 대해서 길게 설명해주었다.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정치에 대해서 어느정도 눈이 트인 아이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긴 말을 마친 륜은, 목이 마른 듯 물을 꿀꺽꿀꺽 마시고 아저씨같은 소리를 토해냈다. 물 한방울이 목을 타고 흘러 쇄골까지 흘러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러니 카나기의 협조도 얻을 수 있다면, 이제 남은 위험 요소는 거의 없을 것 같군요. 우선 이 곳은 진압되었고, 단테와 블뢰유가 간 남쪽도 안심해도 되겠죠. 그럼 걱정해야 할 건, 아셀라이라는 전력을 끌어다 쓰는 바람에 전력에 구멍이 났을 아탕칼리 쪽인데..."

그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강렬한 금색 빛이 저 먼산을 물들이듯이 터져나왔다. 눈이 부셔서 잠시 얼굴을 찡그려야 할 정도로 강한 금빛이었다. 번개라도 친 건가? 아이는 깜짝 놀라서 의자를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뭐지?"

륜도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의 옷소매를 잡았다. 이건 륜에게도 예상 외의 사태인 듯했다. 그 정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머리를 산발로 풀어헤친 다나가 이 천막에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아이 씨!"

한참을 숨도 쉬지 못하고 달려온 듯, 그 말을 외친 다나는 기둥을 붙잡고 헥헥대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서 다나를 받아주었다. 다나의 안색은 악몽이라도 꾼 듯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낮의 광장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스승님이... 스승님의."

"차분히. 차분히 말해봐요. 무슨 일인가요?"

목이 멘 듯 더듬거리던 다나는, 곧 이런 말을 넋나간 듯 토해냈다.

"스승님의, 심장 문자가, 방금 저에게 날아왔어요."

율사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심장에 특수한 문자를 새기고 다녔다. 심장이 멈추면, 퍼져나가 죽음의 상황을 전하는 문자였다.

아이가 부패한 율사를 처리할 때 직접 보았기에 알고 있었다. 방금 저 금빛은 블뢰유의 심장 문자가 다나에게 날아오면서 뿜은 빛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급변하는 사태에 놀라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던 륜은 툭 중얼거렸다. 그 말뜻은,

"단테와 블뢰유가 패배했다?"

너무나 명확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