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24화 (224/279)

39. 예고되지 않은 것 ( 9 )

충격은 컸지만 대응은 빨랐다.

블뢰유가 목숨을 잃은 것이 사실이라면, 우선 그 경위를 알아내야만 했다. 놀라 찾아온 사람들을 물리고 접근하지 못하도록 단속을 철저히 한 륜과 아이는, 블뢰유에게서 날아온 심장 문자를 해독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지금 아이가 나르고 있는 흰 그릇은 그 작업에 필요한 것이었다. 그릇 가득 담긴 물은 찰랑대며 아이의 굳은 얼굴을 어지럽게 비추었다.

"여기에 자네의 피를 촉매로 한 방울 흘려넣으면, 자네의, 스승의... 죽음의 경위를 알 수 있을 걸세."

다나는 등을 드러낸 채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제국이 설립될 때부터 성녀의 힘은 세습되어 왔고, 다나 역시 성녀의 제자로서 그 힘을 받아내기 위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 하얀 등에 법문처럼 빼곡하게 새겨진 글자와 문양들이 그 증거였다.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그것은, 블뢰유의 문자가 날아와 새겨진 이후로 어둡고 불길한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제가 할까요?"

담배를 자르기 위한 작은 손칼을 손에 들고, 륜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다나는 그 손을 바라보더니, 말없이 손칼을 가져가서 목 옆을 살짝 긁었다.

작은 혈선을 따라 새빨간 피가 방울져 떨어졌다. 륜은 얼른 그 피를 받아내어 물그릇에 흘려넣었다. 물그릇을 흔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자 핏방울은 물과 뒤섞여 어지러운 곡선을 그려냈다.

세 사람은 그 주위에 둘러앉았다. 물 위에 뜬 핏방울은 길게 늘어져 문자를 이루고, 물그릇의 가장자리를 따라 둥글게 퍼지더니, 눈부신 금빛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환한 금빛이 세 사람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세 사람은 환영 속에 있었다.

단테와 블뢰유가 학장을 죽인 뒤, 아잘록과 싸우는 모습을 그린 환영이었다.

*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잘록이 부리는 진짜 헤카톤 케이레스는 학장과는 달리 괴이한 쌍검을 들고 있었다. 야만인의 땅을 헤매며 빼앗은 검, 갈라아이의 쌍검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었다. 그 거대한 육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재빠른 속도로 검을 몰아쳐왔다. 단테는 그저 검격을 튕겨내고,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큭!"

건틀렛과 검을 교차해서 단테는 내려찍기를 간신히 받아냈다. 충격은 컸다. 뒷발이 돌바닥을 뚫고 쳐박혀 뒤로 밀려날 정도였다.

잠시 숨을 돌릴 틈도 없었다. 헤카톤 케이레스는 쌍검을 역수로 붙잡고 크게 횡베기를 날려왔다. 다리와 목이 동시에 토막나도 이상하지 않을 일격이었다.

하나라면 모를까 두 검을 동시에 받아치는 건 무리다. 판단이 선 단테는 뒤로 몸을 굴려 간신히 검격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저 유골의 공격은 그것마저 예상했다는 듯 궤도를 바꾸어 덮쳐왔다. 왼손의 검을 뻗어 찌르기를 날려온 것이었다.

끼기긱! 큰 소리와 함께, 단테의 엄십갑 일부가 우그러졌다. 조금만 더 옆이었다면, 아니면 그 갑옷이 금우궁의 갑옷이 아니라 일반적인 갑옷이었다면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격이었다.

"이런, 좀 상했군."

단테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헤카톤 케이레스를 올려다보았다. 반면, 그 어깨에 뿌리박듯 서 있는 아잘록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몇 번의 검격을 거치면서 헤카톤 케이레스도 상처 없이 성하진 않았다. 관절 몇 군데에 움푹 구멍이 뚫렸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금이 가서 뼛조각이 흩날리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아잘록의 손짓 한 번에 복구되었다. 아잘록이 주문을 외면서 손을 흔들자, 장례탑에 가득했던 재가 날아들어선 상처를 수복한 것이다. 잠시 후 헤카톤 케이레스는 싸움이 없었던 것처럼 말끔한 모습으로 변했다. 아잘록은 단테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더 이상의 싸움은 무용할 것 같은데. 그냥 여기서 스스로 손발의 힘줄을 끊는 게 어떻겠나. 그럼 저 여자는 그냥 돌려보내겠네."

"뭐?"

"자네는 내 실험을 위해서 필요한 존재인데 말이야, 저 여자는 아니라서. 쓸데 없는 희생은 피하는 쪽이 좋지 않겠나."

단테는 까드득 이를 갈았다. 아잘록의 어깨에선 귀조들의 왕, 세네터가 깃을 고르고 있었다. 저 녀석과 계약한 이상 아잘록은 거짓을 말하지 못했다. 고로 저 말은 그의 진심이었다. 대답은 블뢰유 쪽에서 나왔다. 금빛의 사슬이 벼락처럼 떨어져선 길 아잘록을 옭아맸다. 기회를 엿보던 블뢰유가 율법을 이용해 아잘록을 포박하려 시도한 것이었다.

"그런 자비 따위 필요 없습니다!"

"흠, 안타깝군."

사지를 사슬에 묶인 채로도 아잘록은 평온했다. 단테는 블뢰유가 벌어다 준 그 시간을 헛되게 쓰지 않았다.

그는 헤카톤 케이레스와 나눈 검격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 검격에서는 인간의 손길이 느껴졌다. 명백하게, 헤카톤 케이레스는 숙련된 인간의 검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 검술의 검로는 분명히 낯익은 데가 있었다. 무엇이었지, 대체 무엇을 구사하고 있나. 검에 일생을 바쳐왔던 단테의 머리는 터질 듯 회전하며 그 정체를 읽어내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그 해답은, 살짝 고개를 쳐들었을 때 비로소 통찰해낼 수 있었다.

"기나센...!"

단테의 눈에 들어온 것은, 헤카톤 케이레스의 가슴팍에 두 팔을 벌린 채 매달려 있는 어떤 여성이었다. 그 정체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이 우르드가 소속된 용병단의 전 단장, 란페이 우르드.

"그런가, 저게 저 몸을 움직이는 건가?"

저 실전적인 검술은 어떻게 보아도 기나센의 검술이었다. 그리고 저 헤카톤 케이레스는 학장과 다르게 너무도 섬세한 움직임을 유려하게 펼쳐내고 있었다. 둘의 차이는 가슴에 박혀 있는 저 여자뿐이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저 여인이 헤카톤 케이레스를 사실상 조종하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핵이라는 것.

막막하던 차에 드디어 붙잡은 실마리였다. 단테는 금우궁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가락으로 검신을 훑었다.

두꺼운 건틀릿 너머로도 검날의 서늘함이 전해졌다. 손가락을 따라서, 검 위에선 푸른 빛이 태풍처럼 원을 그리며 몰아쳤다.

양손을 어깨 위로 올리고, 오른발을 뒤로 물리고, 단테는 곧 튕겨나가려는 화살처럼 날카로운 자세를 취했다. 충격에서 벗어난 헤카톤 케이레스 역시 몸을 곧추세우고 포효를 내지르고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쌍검이 다시금 커다란 호를 그리며 덮쳐왔다. 하지만, 이번엔 그 검로를 읽을 수 있었다. 단테는 쏜살같이 튀어나가며, 검과 검 사이의 실낱같은 틈을 뚫고 헤카톤 케이레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검날에 스친 투구가 잘려나가며 단테의 절박한 맨얼굴이 드러났다. 단테가 노리는 것은 하나였다. 저 가슴에 매달린 여자를 박살내는 것. 란페이의 얼굴은 바로 지척이었다. 단테는 온 힘을 다해 그 얼굴에 금우궁을 꽂아넣었다.

퍼서석! 과일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금우궁은 란페이의 얼굴을 꿰뚫었다. 그와 동시에 헤카톤 케이레스의 괴성이 아스라이 귓전에 들려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하지만 이상했다. 사람을 꿰뚫은 감촉 대신, 안개를 후려친 것 같은 흐리멍덩한 기분만이 끈적하게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금우궁이 꿰뚫은 자리는 찢겨진 그림처럼 흉한 구멍이 검게 뻥 뚫렸을 뿐, 피도 뼛조각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단테는 박아넣은 검을 뽑았다. 그러자 피 대신 재가 구멍으로부터 흩뿌려졌다.

"뭐지?"

얼굴에 뚫린 괴이쩍은 구멍으로부터, 회색의 재는 끝도 없이 쏟아져내렸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재를 휘감아 잿바람을 일으켰다. 잠시 후 잿바람이 걷혔을 때, 단테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꺠달았다. 이 곳에 들린 것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환술이군. 실패했나."

학장이 변이한 가짜 헤카톤 케이레스와 싸웠을 때 마주했던 세계. 온 세상을 불에 태워 화장해버린 것처럼, 잿빛의 사막에 파먹힌, 멸망한 세계의 풍경이 눈 앞을 메우고 있었다.

그때 보았던 그대로의 풍경이었다. 저물어버린 보랏빛 밤하늘 아래로 길게 늘어진 지평에는 눈 기댈 곳 하나 없고, 그저 수북이 쌓인 재만이 바람을 따라 이런저런 무늬를 그리며 놀고 있었다.

단테는 얼굴을 굳히고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단테 앞에 봉긋하게 쌓여 있던 사구를 걷어냈다. 바람을 피하려 질끈 눈을 감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사구 속에 파묻혀 있던 새하얀 백골이 황폐하게 단테를 맞이했다.

"이번에도 성녀님의 조력을 기대할 수밖에 없겠군."

결론을 내린 단테는 다시금 한 발을 내딛었다. 블뢰유의 말이 떠올랐다. 학장은 아잘록의 마술을 흉내내고 있었으며, 자신이 보았던 세계는 어쩌면 아잘록이 바라는 세계일지도 모르겠다는 말. 아마도 지금 자신은 같은 환술에 당해 여기에 붙들려 있는 것일 터였다. 그렇다면, 진짜가 품은 세계는 가짜와 얼마나 다를 것인가. 눈을 부릅뜨고 그 차이점을 찾기 위해 사방을 훑으며, 단테는 잿빛 사막을 횡단하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헤매었던 세계였기 때문에, 단테는 금세 행보를 정할 수 있었다. 그 무너지고 빛바랜 제국의 성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빛으로 지평의 끝자락이 희미하게 밝아올 때, 단테는 저 멀리서 어슴푸레 빛나는 성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잘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헤카톤 케이레스의 괴성이, 동터오는 여명보다도 강하게 단테를 후려쳤다. 단테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비명이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워낙 거대하기 때문일까, 여기서도 똑똑히 보였다. 가슴을 두드리며 세상을 걸어다니는 헤카톤 케이레스가.

이게 차이점인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 혀를 물어 피를 내고, 단테는 모래 언덕을 타고 올라갔다. 성에서라면, 저 헤카톤 케이레스가 더 똑똑히 보일 것 같았다.

으스러지도록 검을 세게 쥐고, 드디어 성터 앞에 도착했다. 어느새 완연한 여명이었다. 피처럼 붉은 태양빛이 허물어진 성터와 낡은 깃발을 적시며 사선으로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단테가 마침내 그 성곽에 도착했을 때, 또 한 번 괴성이 터졌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왜인지 단테는 이번엔 그 괴성이 조금 처연하다고 느꼈다. 헤카톤 케이레스라는 이름의 뜻을 전해들었던 기억이 났다.

유모 잃은 유골이라고 했었지. 그 이름 때문일까, 저 비명은 어버이를 잃은, 또는 어버이로부터 부정당한, 낙태당하는 무언가가 내지르는, 그런 고독을 품은 것처럼 들렸다. 이것도 어쩌면 환술의 일종일지도 모르겠군. 잠시 그 떨림에 압도되어 발걸음을 멈췄던 단테는 고개를 저어 부정하고, 성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 이제야 왔군."

그리고, 또 하나. 뜻밖의 음성이 단테를 반겼다. 예상하지 못한 선객이었다. 그는 수업에 늦은 학생을 꾸중하기라도 하는 듯, 가벼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 길 아잘록이었다. 성벽의 가장 높은 망루, 반쯤 무너진 망루에 그는 등을 보이며 걸터앉아 있었다. 여명의 빛 때문에 그 등을 따라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반대편에서, 그가 무엇을 정신없이 보고 있는 것인지는 뻔했다. 마치 예술품이라도 감상하는 것처럼, 길 아잘록은 저 텅 빈 재의 사막을 헤매는 헤카톤 케이레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름답지 않나?"

미쳤군.

단테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길 아잘록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검을 으스러지도록 세게 쥐어잡은 채였다. 장검의 감촉이 손바닥 가득 아프게 전해져왔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