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25화 (225/279)

39. 예고되지 않은 것 ( 10 )

단테는 그 뒷모습을 노려보다 한 마디를 흘렸다.

"이 꼬라지가?"

말을 시켜서 주의를 끌 생각이었다. 그렇게 말하며 단테는 나선형의 계단을 밟아나갔다. 그 끝에 아잘록은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먼지에 덮인 계단은 많고도 많아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이 꼬라지를 보면 너도 알고 있는 걸텐데. 이게 네 망상이 실현된 후의 미래다. 이런 폐허나 다름없는 세상을 넌 원하는 건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종아리 끝이 아려왔다. 천천히 발을 끌면서, 단테는 아잘록의 수기를 떠올렸다. 대답은 저 위에서부터 쏟아지듯이 들려왔다.

"자네는 무언가를 이해한 것처럼 말하는군."

단테는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잘록의 말은 이어졌다.

"돌려 말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래, 자네가 말하는 그 망상이라는 게 뭔가?"

"네가 쓴 수기를 봤다."

단테는 딱 잘라 말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어 뱉으면서, 계단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확실히 말해두지. 네놈은 미쳤다. 넌 가족을 기만이라고 생각한다고 적었지. 그럼 이 세상에 기만 아닌 게 무엇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흐음. 그런가."

"이 제국을 의미없는 연구를 위한 나라로 만들고, 인간의 모든 것을, 가족을, 삶을 해체하는 게 네가 하려는 일 아닌가. 그걸 발판으로 삼아 8위계에 도달하는게 네 목표겠지. 도달할 수도 없겠지만, 이토록 황폐한 세계에서 혼자 8위계에 올라봐야 또 무슨 의미겠나. 결국 넌 후회할 거다. 이렇게 텅 빈 세상에서, 저 끔찍한 네놈의 피조물이나 지켜보면서 말이야."

단테는 이런 말로 끝맺었다.

"그러니 그 전에, 이 자리에서 네 목숨을 끊어 주겠다."

반응은 의외였다.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아잘록이 너털웃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그는 웃으며 중얼거렸다.

"나라? 8위계?"

단테는 기묘한 느낌이 들어 발을 멈추었다. 한참 웃던 아잘록은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누구에게서 전해들은 말일지는 명확하군. 아마 카나기의 학장이 한 말이겠지."

"뭐?"

"삶의 관성을 멈추지 못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 큰 권력을 뒤쫓는 것. 위계를 진전시키려 애쓰는 것. 모두 그가 품은 불안이고 그가 품은 야망일세. 목적 잃은 국가의 미친 지배자라, 그건 아마도 그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스스로의 말로일 게야. 그 불안에 너무나 깊게 사로잡힌 바람에, 나를 볼 때도 억지로 그걸 투영해 예단한 모양이군."

이런 식의 대답이 돌아올 줄 몰랐던 단테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한 마디 해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인간은 가장 치열하게 타인을 이해하려고 할 때... 결국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어 있기 때문일세. 인간이란 족속은, 나라면 어떻게 할까, 나라면 무엇을 바랬을까. 무의식적으로 그 질문을 거듭해야만 비로소 결론에 도달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야."

먼 옛날, 헛소리를 주절대던 아지프의 마술사에게 아잘록이 들려주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 끝에 어떤 결론이 추가되어 있었다.

"모든 인간에게 타인이란 그렇기에 변형된 자아에 불과하다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것은 그 의지 자체가 아니라 언어일 뿐, 추상일 뿐. 소통은 불가능해."

아잘록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니 아마 이 세상에는 없겠지. 나를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오답이라는 거냐?"

"오답일세. 완전히 오답이야."

먼 바람이 불어 아잘록의 뒷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눈빛은 깊었다. 마주 바라본 단테가 움찔할 정도로, 읽을 수 없이 깊었다. 그는 나지막히 말했다.

"나는 그저 인류의 진보를 바랄 뿐일세."

단테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질렀다.

"이 꼬라지가 대체 무슨 진보란 말인가. 너와 네 족속들이 일으킨 전쟁과 혼란 때문에, 얼마만큼의 피가 이 세계에 흐르고 있는지는 알고 하는 소리냐!"

"그럼 거꾸로 물어볼까. 인류의 진보된 형태는 뭔가?"

아잘록은 흥미롭다는 듯 물어보았다.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였다. 단테는 빠르게 쏘아붙였다.

"적어도 네가 수장으로 있는 나라의 인류는 아니겠지."

나라, 그 말이 아잘록을 자극한 것인가. 아잘록은 열에 들뜬 것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럼 무엇인가? 더 도덕적인 국민인가? 더 법을 잘 준수하는 국민인가? 더 부유한 국민인가? 더 신실한 국민인가?"

그는 손을 들어, 무너진 성터의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자세히 돌아보니, 무너진 황궁에는 여러 학파의 상징물과 깃발이 널브러져 있었다. 차례대로 부서진 라달라리아의 신상을, 망가진 사소필렌의 헌금통을, 뼈를 드러내고 죽은 용의 시체를 가리키며 아잘록은 말을 이어갔다.

"더 고기를 많이 먹고 더 번식을 많이 하며 더 오래 사는 국민인가? 아니면, 더 진보한 나라의 국민인가? 더 멋진 개집에 사는 개는 진보한 것인가?"

"쓰잘데기없는 궤변은 집어치워라."

"왜 사람들은 이상과 국가를 결부시키는 건지 모르겠군. 왜 서로 종속되고 지배받으며 노예로 살기를 스스로 원하는가? 왕조차 가장 자유로운 노예에 불과할 텐데."

길 아잘록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등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서, 그가 말할 때마다 자그맣게 떨렸다. 마치 그림자가 말을 꺼내는 듯한 모양새였다.

"내 젊은 시절의 수기를 보았다고 했지. 가족... 가족은 기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물론 맞는 말일세. 하지만 말이야. 나는 그것보다도 훨씬 거대한 기만을 발견했다네."

아잘록은 잠시 뜸을 들이고 선언하듯 말했다.

"그것의 이름은 국가일세."

"뭐?"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멀리서 헤카톤 케이레스가 울부짖은 것은 그와 동시였다. 괴성에 뒤따른 바람에 재와 먼지가 흩날려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고막의 먹먹함이 가라앉을 때쯤, 아잘록은 다시 말했다.

"그 가엾은 카나기의 학장도, 그 대척점에 있을 법한 인간인 자네도, 무의식적으로 세계를 국가와 동치하지 않았나. 그것이면 충분한 증명이 되었겠지. 인간은 국가를 희구하는 동물일세. 그것이야말로, 모든 비극을 잉태시키는 기만이지."

"그런..."

"인간이 국가를 희구하는 이유는 불완전하기 때문이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아잘록은 딱 잘라 말했다.

"스스로의 운명조차 감당할 수 없는 실패작이라서, 위대한 무언가를 찾아 헤매도록 운명지어져 있단 말일세."

그는 천천히 팔을 들어 재와 먼지에 뒤덮인 깃발을 가리켰다.

"자네에겐 들려오지 않는가? 이 사토에 묻힌 아우성이."

그는 연설자처럼, 주먹을 꽉 쥐며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냈다. 단테는 그 광기에 압도되어, 발걸음을 움직이는것도 멈추고 아잘록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저 거짓이라도, 기만이라도, 무언가는 내 삶보다 위대해야 해. 무언가는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어야 해. 이렇게 아우성치며 이 세상의 언덕과 들판을 헤맨 끝에, 국가라는 기만자의 품에서 무가치한 죽음을 맞고 또 맞아왔단 말일세."

또 다시 헤카톤 케이레스는 길게 울부짖었다. 아잘록은 그 울부짖음의 메아리가 가라앉기도 전에, 다시 말을 꺼냈다.

"나는 그 극복할 수 없는 나약함을 밑바닥 그 아래의 심연에서부터 평생토록 들여다보았다. 나는... 인류의 진보를 위해 이 미력한 생을 바치겠노라고, 형의 시체 앞에 서원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다시 단테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무엇을 해야만 했겠나?"

대답해줄 수 없었다. 아마도 이 세상의 누구도, 그 질문에 대답을 줄 수는 없을 터였다. 단테의 침묵을 마주한 아잘록은 빙긋이 웃더니 말했다.

"나 같은, 결함투성이 인간이, 이 사토 아래 가라앉은 이들에게 약속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었겠나?"

"그게, 뭐냐."

"그렇다면 그 소원, 내가 대행해주겠다."

그 말과 동시에, 아잘록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동터오는 먼 여명의 햇살이 진한 역광을 뿌렸다. 일어선 그는 무언가를 받쳐들고 있는 듯 보였다.

"내가 완전성을 선물하겠다."

단테는 이 회화의 흐름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는 건 길 아잘록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매우 무가치하게 여긴다는 것, 그렇기에 이런 폐허를 만들어놓고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단테는 거세게 계단을 밟으며 아잘록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해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군. 네가 미쳤다는 것 하나뿐. 인간의 삶은 고통스럽더라도 의미없지 않다. 네가 그 고통에 갈음할 기쁨을 느껴본 적이 없고, 또 느끼지 못하도록 태어났을 뿐. 네 광기를 세계에 강요하지 마라."

말을 마칠 때쯤, 이미 아잘록은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눈 바로 앞에 들어왔다. 단테는 금우궁의 손잡이에 칼을 가져가며, 계단의 마지막 섬돌을 밟았다. 아잘록의 웃음이 터진 것은 그와 동시였다.

"멋진 말이군. 그래, 그럼 자네는 스스로를 불안하고 허무하게 느끼지 않는단 말인가."

"당연하다. 내겐 해야 할 일이 있고 짊어져온 업이 있다. 그런 걸 느낄 틈은 없어."

"그런가? 영웅이라고 불리는 자네는, 그처럼 무결한가? 완전한가?"

아잘록은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뒤돌아섰다. 이 환영의 세계에 발을 딛은 이후로, 그가 앞모습을 보인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단테는 얼어붙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이 여자를 죽여야만 했나."

"뭐?"

아잘록이 품에 안고 있던 것 때문이었다. 그건 시체였다. 핏기가 빠져 새하얗게 변한 마리아의 시체. 아까부터 주욱, 아잘록은 이 시체를 자신의 품에 안은 채로 단테와 대화를 나누었던 모양이었다. 단테의 동요를 읽은 것인지, 아잘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가득 메웠다. 침묵을 깬 것은 단테의 변명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여자 역시, 네 곁에서 수많은 생명을 소모해왔을 테다. 그 순간 이미 그녀에게 원망할 권리는 없어졌을 테다. 나 자신도, 죽는 날 원망하지 않고 기쁘게 죽는 것으로 그 업을 함께하겠다. 그것이면 충분한 것 아닌가!"

"그게 자네가 몸을 숨긴 기만인가?"

이번에는 아잘록이 계단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품에는 여전히 마리아의 시체를 안은 채였다. 검을 뽑자. 베어버리자. 금우궁의 손잡이를 쥔 채로 단테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것이 사람이 사람을 죽여도 될 이유라고 생각하나. 실제론 자네조차 죄됨과 불안에 떨고 있지 않나."

"닥쳐!"

"그게 인간이 품은 극복할 수 없는 부조리일세. 자네는 틀림없는 영웅이겠지. 하지만 영웅조차도 그 부조리에서 벗어날 수 없단 말일세. 그 형언할 수 없는 죄됨을 달래기 위해서 자네는 무엇을 해왔나. 제국이라는 국가의 품에서 훈장과 찬사를 긁어모아 양심을 마비시키고, 여자와 몸을 섞고 번식을 꾀하고 서로 상처를 핥아대지 않았나. 그래서 그 불안함이 달래지던가? 그 웃기지도 않는 싸구려 연극들이, 자네가 말하는 삶의 기쁨인가?"

"한 번만 더 그녀를 모욕하면, 바로 베어버리겠다!"

"나는 그저, 그런 불안으로부터... 값싼 기만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고 싶을 뿐이야."

아잘록은 그렇게 말하곤, 마리아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태양을 등진 그의 얼굴에 깊은 음영이 어렸다.

"내가 창조하고자 하는 것은 국가 따위가 아닐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