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27화 (227/279)

40. 쐐기 ( 1 )

계절은 흘러갔다. 틱, 불꽃은 옅은 기름내를 풍기고 일어날 듯 일렁거리다 잦아들었다.

단테와 블뢰유의 죽음으로, 남부군은 패배했다.

학장의 자리를 인계받은 아잘록은 그대로 아지프의 지휘권을 장악했고, 군세를 몰아쳐 라달라리아의 진영을 습격했다. 주축을 잃은 라달라리아는 그 습격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절벽에서 내던진 도자기처럼 수백 조각으로 갈라져서, 사방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구심점을 잃은 율사들은 그렇게 남부 곳곳의 오지에 흩어졌고, 고립되었다.

그들을 구출해야만 했다. 륜은 그 율사들의 위치를 읽어냈고, 다나와 아이를 비롯한 구출대가 편성되었다. 그러나 구출대는 쉽사리 출발하지 못했다. 구원군의 주력을 방어해줄 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레고르가 그것을 도와주었다.

남부군의 전멸은 마침내 카나기의 원로들에게, 지금이 대단한 비상상황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줄 배경을 제공한 모양이었다. 레고르는 가장 충실한 협력자가 되어, 구출대가 남부로 출발하고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을 벌어주었다. 아이가 도착했을 때, 남부는 이미 죽음의 땅이 되어 있었다.

무너진 저수지에서 율사 하나를 구해냈다.

눈 먼 집행관이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공포와 광기 속에서도 자신의 사명을 잃지 않은 그는, 아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덮쳐왔다. 목을 깊게 찔러 안식을 주었다. 죽어가면서, 그는 작은 부탁을 남기고 떠났다. 숨소리에 묻혀 어떤 내용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아이는 많은 율사들을 구해냈다.

남부로 향했던 라달라리아의 군세 중 7할은 구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죽어 흩어진 사람 또한 모래알처럼 많았다. 희생은 불가피했다. 막을 수 없었고 예방할 수 없었으며 애도할 시간조차 없었다.

아지프의 군세가 지나간 땅은 잿빛으로 초토화되었다.

그 단테의 환상에서 보았던 것처럼, 성터는 무너져 풀 한포기 자라지 못했고, 인간의 살점이었던 잿가루가 온 사방을 덮어 사막으로 만들었다.

무너진 항구에선 물고기가 떼로 죽어 흰 배를 동동 드러낸 채 썩어갔고, 새들조차 손대지 않았다. 곳곳에선 환골탑이 솟아올라 하늘에 인간을 공양했다.

모든 인간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생존자도 남지 않았다. 탑이 가라앉은 자리에선 흰 해골 병사가 몸을 일으켜서 아지프의 군세에 합류했다. 세계는 그렇게 반쯤은 화장터를 닮은, 반쯤은 징병소를 닮은 곳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 잿빛 사막에 앉아서, 아이는 한 움큼의 모래를 집어들었다.

어린 시절에 꾸었던 꿈을 생각했다. 모래가 되어 세계에 흩뿌려지는 꿈이었다. 손에 쥔 인간의 재는 빠르게 손틈 사이로 새어나갔다. 완전히 새어나가기 전 그 어두운 악취를 깊이 들이켰다. 그 집행관처럼, 이 재들 또한 어떤 부탁을 하는 것처럼 들렸다.

또 계절이 바뀌었다. 틱, 푸르스름한 겉불꽃은 아지랭이처럼 옅게 끓어올랐고, 이내 꺼져버렸다.

아지프의 군세는 여전히 제도로 진군하고 있었다.

죽음으로 죽음을 막는 듯한 싸움이 이어졌다. 길 아잘록은 아지프의 남은 세력을 전부 규합하여, 역사상 없었던 규모의 불사자의 군대를 꾸렸다.

그가 품은 목적이 지배가 아니라, 광기였기에 가능한 규모의 군대였다. 이 군세가 지나가는 곳에는 단 하나의 생존자도 남지 않았고, 모두 재와 뼈가 되어 아잘록을 위해 복무했다. 뼈의 행렬은 광야를 가득 메우고도 끝이 나질 않았다.

이들과의 전면전은 불가능했다.

구원군은 이들의 진로에 놓인 몇 군데의 거점을 지켜냈다. 유서 깊은 도시, 나름의 자구책을 갖춘 도시들은 구원군이 합류하자 자신의 고향을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그 외의 모든 세계는 지켜내지 못했다. 수많은 산과 들, 마을과 촌락이 재와 먼지로 변했다.

피난민의 행렬은 울음과 비명을 꼬리처럼 길게 남기며 사방으로 퍼져갔다. 제도는 어느새 코앞이었다. 더 이상 몇몇 고을 위주의 방위전 따위를 전개할 순 없었다.

한 번의 싸움에 전력을 걸었다.

놈들의 후미를 잘라서 세력을 줄이고 고립시킨 뒤, 지금까지 지켜낸 여러 도시와 합공하여 아지프의 군세를 포위하고 섬멸한다는 계획이었다.

카나기의 모든 용군단이 이것을 위해 집결했다. 아지프의 군세가 길따란 계곡에 접어들었을 때, 용들은 난동을 부리고 불을 내뿜어 계곡을 무너뜨렸고 분지로 만들었다.

후미에는 살아남아 아잘록을 뒤따르는 아지프의 마술사들이 가득했다. 아이는 교룡 타스하에 레고르와 함께 올라탔고, 선봉에 서서 놈들을 도륙했다. 컨쿼러가 그 뒤를 뒤따르며 눈을 푸르게 빛냈다.

작전은 절반의 성공이었고, 절반의 실패였다.

후미의 마술사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지만, 이 쪽의 타격 또한 컸다. 사흘 밤낮으로 사방을 뒤덮은 불꽃과 혈사포 때문에 울창했던 산은 완전히 무너져 평지가 되었다. 스무 마리의 용이 죽었고, 구원군의 2할이 죽었으며, 1할은 회복하지 못할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그 모든 피해는 이 피해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었다.

컨쿼러가 부서졌다.

더 이상 제도로 진군하는 아지프의 군세를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무정하게도, 계절은 흘러갔다. 틱, 드디어 희미한 불꽃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후우."

아이는 드디어 불붙은 라이터를 한참 전부터 입에 물고 있던 담배의 끝에 가져갔다. 아이는 지금 그 전투의 결과로 생긴 황폐한 언덕 위에 앉아 있었다.

곳곳에 시체와, 재를 흩날리는 백골과, 쥐떼와, 부러진 군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흘러내리는 석양빛은 잔인하도록 새빨간 빛으로 그것들을 비추었다.

그 풍경을 맨 정신으로 망막에 새기는 것은 괴로웠다. 담배 끝에 불을 붙이려 라이터를 틱틱거리며 애쓰던 아이는, 또 불이 꺼져버렸음을 깨닫고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틱, 다시 한 번 텅 빈 언덕에 라이터를 튕기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제도로의 진군을 막지 못했다.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한 듯, 천 년간 번영했던 제도는 하루아침에 몰락했다. 세상 전체를 면으로 덮어버리듯 진군하는 죽음의 군대, 그것을 도저히 막을 도리가 없었다.

아지프의 군세는 피난할 길조차 전부 먹어치우며 걸어왔다. 피난민들은 칼을 맞고 죽었고, 불을 맞고 죽었으며, 혈사포를 맞고 죽었고, 자기들끼리 밟혀서 죽었다.

어떤 마술의 작용이었을까, 그렇게 아지프에게 죽은 모든 인간들은 화장이라도 한 것처럼 잿가루로 흩어졌다. 잿가루 속에서는 흰 백골이 몸을 일으켰고, 그 백골은 피난민과 제도의 시민들을 죽였다.

황제는 텅 빈 황궁에 꿋꿋이, 홀로 남아 칼을 받았다.

륜이 보여주었으므로, 그 죽음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아이만은 알고 있었다.

황제는 늙었고, 관절염에 시달리고 있었다. 시녀의 도움 없인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무릎으로 기었다.

무너진 무릎으로 차가운 융단 위를 기어서,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잘록 앞에 나아갔다. 왕관을 벗고 웅크린 황제는 정말로, 한 움큼이었다.

그 주름진 이마를 바닥에 비비듯 박으면서, 황제는 선양의 의사를 밝혔다. 자신이 목숨을 바칠 테고, 자신의 핏줄들도 모두 목숨을 바칠 터이며, 황위를 선양할 테니 제발 죽음을 멈추어 달라는 것. 그것이 그의 유언이었다.

황제는 으깨져서 죽었다.

미안하군,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었다. 그 늙은 주름살 역시 불타자 별반 다를 것 없는 재가 되었다. 유골 역시 특별할 것이 없었다. 유난히 관절이 엉성한 인골귀가 있다면, 그것으로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를 따름이었다.

세상에 흘러내린 용암처럼, 일직선으로 닿는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며 진군하던 군세는, 그제서야 멈추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유를 이해할 수 없는 돌연한 정지였다.

그리고 그 이후 제도에는 거대한 결계와 커다란 구조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치, 새의 알처럼 생긴 커다란 무언가였다. 저것의 정체 역시 아이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도.

저 안에선, 헤카톤 케이레스가, 태어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터였다.

아라딘폴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빨아들여서, 초인의 외신으로 탄생하기 위한 알.

드디어 더 이상 물러설 수는 없는 최종장이었다.

틱, 틱, 아이는 먼 지평 너머를 바라보며 손장난처럼 라이터를 매만졌다. 연료가 떨어진 것인지 라이터는 쉽사리 불붙지 않았다.

노을이 완전히 저물 즈음에서야 드디어 커다란 불이 피어올랐다. 아이는 담배 끝에 그 어렵사리 피어난 불꽃을 가져다대고, 깊이 숨을 빨아들였다. 잿빛의 연기가 폐를 그슬리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해가 완전히 지평 너머로 사라졌을 때,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얼마 전의 싸움으로 부서진 컨쿼러, 그것을 수리하기 위해서는, 용의 척추뼈가 필요했다.

이 싸움터에선 그때 죽은 카나기의 용 한 마리가 전쟁터의 원령을 빨아먹고 괴물로 되살아나서, 밤마다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지금 아이는 그 녀석을 쳐죽이고 뼈를 얻기 위해,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몰래 빠져나와 여기서 그 용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열 마리의 용, 그 뼈를 모두 합쳐 태어난 거대한 용이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는 뼈마디 사이사이마다 구슬처럼 정제된 원령이 희뿌옇게 빛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용의 눈구멍에도, 눈 대신 커다란 원령 두개가 구슬처럼 박혀 있었다. 아이는 입에 담배를 문 채로, 마주 몸을 일으키고,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싸움이 시작된 것은 그와 동시였다.

*

황도 인근의 마지막 대도시이자, 사소필렌의 도시, 살레니움.

그 곳은 지금 구원군의 거점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사소필렌의 연금술사들은 구원군에 물자를 아낌없이 제공해주었다.

철없는 새내기 용병조차도 마술을 두른 장검으로 무장하고 상처를 재생시켜주는 40루덴짜리 회복약을 두어 개 두르고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만약 이들의 협조가 없었더라면, 이전의 회전에서 사망자는 결코 2할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는 지금 그들의 가장 큰 공방에 들어서는 중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후끈한 열기가 온몸을 덮쳐왔다. 내부는 공기마저 달아오른 듯 주황빛이었다. 사방에선 가마솥과 용광로가 부글부글 들끓고, 장인들은 열심히 여러 도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도구들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저것이었다.

아이는 고개를 들어, 공방을 가득 메울 듯 위압감을 드러내는 컨쿼러의 동체를 바라보았다. 회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부서진 컨쿼러는, 척추를 길게 늘어뜨린 채 상체만 남아서 천장에 묶여 있었다.

두터운 구릿빛의 쇠사슬이 동체를 떨어지지 않게 붙들고 있었고, 컨쿼러가 흠집난 곳마다 세네 명의 사소필렌 마술사들이 매달려서 수선을 하는 중이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더없이 분주했다. 그래서, 아이가 다가온 것을 꽤나 늦게 알아챌 정도였다.

"어쩐 일로 이런 곳까지 오셨습니까!"

설계도를 손에 쥔 채 무언가를 열심히 지시하던 마술사가, 아이의 접근을 눈치채자 반갑게 달려들었다. 얼굴에는 인상 좋아 보이는 황금 가면을 뒤집어쓴 채였다. 그 가면은 그가 이 대공방의 책임자라는 뜻이었다.

"구해주신 용골 덕분에 늦지 않게 수복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니, 원래 용골보다 더 좋은 물건을 구해주셔서, 완성된 놈은 단순히 수복을 넘어서 더 강화된 놈이 나올 것 같습니다. 모두 설표공 덕분입니다."

"그런가요, 다행이군요."

아이는 자신의 손을 붙잡아오는 마술사에게 엷은 미소를 흘렸다. 연이은 싸움에서, 아이는 언제나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고 언제나 최고의 무훈을 세웠다.

설표공, 그 호칭은 그 대가로 얻어낸 것이었다. 살레니움을 지켜냈을 때, 아직 살아있던 황제는 급히 전령을 보내 아이 우르드에게 공작령과 공작위를 내린다는 교지를 내렸다.

이름뿐인 작위였지만 사람들은 뛸듯이 기뻐했다. 먼 옛날, 기나센의 하얀 표범이라는 별명을 되새겨서, 설표공이라는 이름으로 붙여주었다. 그것이 황제가 내린 마지막 교지였다.

"저는... 이 공방에서 태어나서, 평생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고, 연구하고 싶은 것을 연구하는 재미에만 빠져서 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주제넘게 이런 자리까지 올라오게 되었고, 이것이야말로 마술사의 본분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위기가 닥치고 난 후에야 알았습니다. 그 모두가 설표공 같은 이들이 우리의 안위를 목숨 바쳐 지켜주었기 때문에 이뤄질 수 있었다는 걸 말입니다."

우러르는 듯한 눈빛으로, 마술사는 아이의 손을 붙잡고 그런 말을 꺼내왔다. 그는 주섬주섬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설표공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희망입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빌면서, 그런 마음을 담아 준비한 물건입니다. 받아 주시지요."

"이건...?"

"담배입니다. 살레니움의 특산품이지요. 설표공이 외모와는 다르게 애연가라고 들어서 준비해봤습니다."

그런 소문까지 퍼졌나. 아이는 피식 웃으면서 감사를 표했다. 마술사가 쥐어준 것은 금박으로 겉을 감싼 담배였다. 먼 옛날, 레고르가 특별 주문을 넣어 이걸 주문했던 기억이 났다. 선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공방의 하인들, 제자들이, 쭈뼛거리며 다가와 무언가를 하나씩 건네주었다.

그래서 공방을 나설 때, 아이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선물을 끌어안은 채 뒤뚱거리며 나가야 했다. 그 모든 선물을 건네줄 때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마지막 희망이 구원군이고, 아이라는 말을 건네주었다. 그래서일까, 선물보다 더 무거운 책임과 부담감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그 말대로였다.

목적조차 알 수 없는 광인의 군대가 날뛰는 이 세상에서, 그것에 대적할 수 있는 것은 구원군 뿐이었다.

선물을 방에 풀어놓은 아이는, 곧 정복을 차려입고 높다란 시계탑으로 향했다. 그 시계탑의 꼭대기에서, 구원군의 수뇌부가 모여 전략회의를 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발걸음은 오랜만에 가벼웠다. 계속해서 어두운 소식만을 들었던 구원군에게, 오랜만에 컨쿼러의 복구라는 낭보를 들려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카나기는 이제 빠지겠다."

수척한 레고르는, 아이가 받은 것과 똑같은 금박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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