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28화 (228/279)

40. 쐐기 ( 2 )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격앙된 목소리로 아이는 외쳤다. 모처럼 오랜만에 좋은 소식을 들고 왔는데, 레고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서 카나기가 구원군에서 빠진다는 말은, 곧 구원군의 와해를 뜻했기 때문이었다. 레고르는 길게 자란 옆머리를 쓸어올리며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 해골 무리들이 황궁을 장악하고 벌써 한 달 가까이가 흘렀다. 그리고 저 놈들은 황궁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지. 그럼 구태여 이 쪽에서 건드릴 이유는 없지 않나."

"좀 더 명확히 말해보세요."

"이미 입은 손실이 너무 커. 용 스무 마리가 죽었어. 컨쿼러는 부서졌다. 성기사단 셋은 궤멸당했고, 인마궁도 한 번 죽을 뻔하지 않았나. 전력의 차이는 명확하다. 그런데 저 쪽이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면, 구태여 이 쪽에서 섣불리 싸움을 걸 이유가 없지."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 당신은,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지 않습니까!"

길 아잘록의 목적은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군대와도 달랐다. 그가 바라는 것은 이 시대의 끝이었다. 아이의 눈 앞에 어떤 환상이 어른거렸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 저 거대하게 솟아난 알집에서 헤카톤 케이레스가 깨어나고, 전 세계의 인류를 재로 흩어버린 후 빨아들이는 환상이었다. 이 사실은 이미 예전에 이 자리의 모든 사람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던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다면, 전쟁을 멈춘다는 말은 결코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다.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말이다."

"예?"

레고르는 다시금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말했다. 짙은 연기가 얼굴을 가리며 천장을 향해 피어올랐다.

"전쟁에서 패배하면 인류가 멸망한다. 그런 말을, 일개 필부들이 진심으로 믿고 위기감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 무슨...?"

"인류의 존속, 세계의 안위, 모두 십자군 때 숱하게 써먹었던 표어다. 그리고 그 표어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진실인 적이 없었지. 고작해야 이해관계로 얼룩진 예방전쟁 따위에 인류라는 거창한 말을 주워섬겨왔을 뿐이다. 그럼, 필부와 민중들에게, 또다시 들려온 인류라는 말은 얼마나 가볍게 들리겠나."

"그 말은 설마, 믿지 않는다는 겁니까?"

"그래. 믿지 않는단다, 사제야. 이미 민심과 사기는 바닥났다."

레고르는 그 말을 끝내고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 껐다. 장내에는 침묵만이 가득 찼다. 누군가가 뿌려둔 라벤더향 방향제 사이로, 담배의 독한 연기가 흘러들어와 코를 간질였다. 침묵하던 아이는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럼, 잘 설득하면, 잘 알려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연설로? 눈물로? 아무리 호소해도 말이지, 민중에겐 민중의 문법이 있다. 지도부와 권력자가 무슨 말을 하건 그들은 믿지 않아."

"그런..."

"후드를 뒤집어쓰고 거리를 돌아다녀보거라. 제도가 폐허가 되었다는 것, 황제가 죽었다는 것, 그 말을 걱정하는 척 하는 사람들의 말 뒤에서 어떤 희열이 스물거리며 솟아나고 있는지 느껴보란 말이다. 그들에게 닥친 사실은, 저대로 제도에 아지프가 틀어박혀 앉아 있으면,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 뿐이다."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런 아잘록의 음성이 뇌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는 하얗게 안색을 질린 채로 고개를 떨구었다. 치익,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레고르는 말을 이어갔다.

"이미 민중들의 의지는 꺾인 거야. 그 협곡에서 아지프를 막아내지 못한 데서, 이미 우리는 졌다고 은연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거다. 여기서 인류 같은 거대담론을 외치며 전쟁을 계속하려고 했다간, 구원군은 더 처참하게 부서지고 말 거다. 그리고 간신히 움켜쥔 내 권력도 개박살나고 말겠지. 안 그래도 기반이 처참하니 말이다. 그러니 휴식이다."

"휴식이라니요?"

"민심을 회복하고 정치적으로 내부를 정돈할 때까지 진군을 멈춘다는 말이다. 사실 말이지, 모두 똑같은 생각이다."

레고르는 그렇게 말하며 라이터로 사방을 가리켰다. 아이는 절박한 표정으로 그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우렐리우스도, 라달라리아의 대표 자격으로 나온 율사도 어색한 듯 고개를 외면했다. 아무래도 정치 감각이 밝은 사람들은, 그 민심의 흐름을,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안위에 다가온 위협을 모두 느끼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언제 저 외법이 끝날지 모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알이 깨지면서 괴물이 몸을 일으킬지 모른단 말입니다. 당장이라도 진군을 시작해야...!"

"오, 그럼 네가 가서 설득해보거라. 인류가 위험하고 가만히 있어봤자 어차피 개죽음이니 네 목숨을 바쳐달라고 말이다, 사제야."

레고르는 비웃으며 빈정거렸다. 아이는 반사적으로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지만, 이내 힘없이 손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이 년 전의 아이였다면, 어쩌면, 앞뒤없이 검을 뽑아들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수많은 죽음을 건너온 지금,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레고르의 논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도저히 칼을 뽑아 단칼에 베어넘길 자신이 없었다.

"그럼 내가 가마."

칼을 뽑아든 것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을 돌아보았다.

"내가 설득해보지."

늠름한 옆얼굴, 금을 녹여 바른 듯 연한 금빛으로 반짝이는 긴 장발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성좌의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해 있던 아셀라이였다. 그녀는 나비검을 높이 쳐들더니, 회의장에 새겨진 자신의 명패를 반으로 쪼개버렸다. 떠나겠다는 의사의 표현이었다.

"휴식? 말로는 휴식이겠지. 하지만 사실 그 말뜻은 해산이나 다름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다시 구원군을 더 큰 규모로 모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인마궁, 잠시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는 게 어떻겠나. 중앙의 판단을 존중해 주게."

"당신에게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렐리우스가 그런 아셀라이를 말리려고 하자, 아셀라이는 나비검을 집어넣으며 차갑게 말했다.

"어차피 늘 같은 것이지요. 십자군과 마찬가지로,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 인류를 수호한다는 목적으로 나서면서 실제론 자신의 이익을 언제나 치열하게 계산하고 있었다는 것, 알고 있었습니다. 기대도 하지 않았죠. 만약 민중들이 인류라는 말을 가볍게 여긴다면, 그건 민중의 문제도 나약함의 문제도 아니고, 여기 모인 사람들의 문제일 겁니다."

"자네! 종단의 이름 아래 명하겠네, 자리에 앉게!"

"라디오소는... 중앙의 판단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셀라이는 뚜벅뚜벅 회장을 걸어나갔다. 아우렐리우스의 노한 음성도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문고리를 붙잡고,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나는 지금부터 제도로 향하겠다."

"가서 뭘 어쩔 거요."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

"개죽음을 당하겠다고?"

"민중과 말로 소통할 수 없다면, 이 목숨으로 하면 그만이다. 그럼 누군가는 깨달아주겠지. 정말로 이 싸움이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그 말을 남기고, 아셀라이는 문을 박차고 나섰다. 아이는 황급히 그 뒤를 뒤따랐다. 그 외에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날의 회의는 그것으로 흐지부지되었다.

*

은빛 장식용 갑옷들이 줄지어 늘어선 복도를, 아셀라이는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이 길로 곧바로 제도를 향해 떠날 생각이었다. 적정은 이미 어느정도 공유해 들은 터였다. 제도에 도착한 죽음의 군대는, 생겨나기 시작한 알집을 둥글게 둘러치고 죽은 듯 정지해 있다고 했다. 그 안에서 태어날 것을 지키려는 움직임이었다. 죽는 날까지 그걸 들이받으면, 한 조각 길이라도 뚫을 수 있겠지. 아셀라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셀라이!"

우뚝, 멈추어섰다. 뒤돌아보니 황망한 얼굴로 달려오는 옛 제자가 보였다. 어느새 자신보다도 한 뼘은 더 크게 자라 있었다.

"정말로 혼자 갈 건가요? 이젠 죽을 자리를 찾아다니지는 않겠다고, 그랬었잖아요."

막 다시 만났을 때에는, 그래서일까,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감정을 숨기는 법을 배운 듯 과묵해졌고 동요를 잘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저 얼굴은 영락없이 그 때의 소년이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아이의 얼굴을 붙들고 이마를 맞댔다. 심홍색의 눈동자가 시야 가득 들어왔다. 떠나기 전, 이 눈동자의 빛깔을 똑똑히 새겨두고 떠나고 싶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러 가는 거다. 나는 홀몸이라서 움직일 수 있지만, 너나 다른 사람들은 책임져야 할 것이 있으니 움직이지 못하겠지."

"혼자, 가봤자, 패배할 텐데...'

"하지만 패배할 싸움이라도 가야 해."

아셀라이는 천천히 이마에서 손을 떼고, 휙 뒤돌아섰다. 아이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금빛 십자가가 새겨진 진홍색 망토는 언제나처럼 우아하게 나부끼고 있었다.

"누군가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아직 싸우고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하지 않겠나."

아. 아이는 깨달았다. 아셀라이는 무턱대고 그들을 비난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여기서 구원군을 유지하기 위해선, 정치적인 내부 단속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녀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 단속이 끝날 때까지 구원군이 와해되지 않길 바래서, 희생하려는 것 뿐이었다. 이런 것이 어른인가. 아이가 푹 고개를 숙일 때였다. 아치형의 창문 너머로, 저녁을 알리는 종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그럼 작별이구나."

그 종소리를 끝으로 아셀라이는 떠나갔다.

*

회의가 끝난 뒤, 아이는 비척이며 숙소로 돌아갔다.

아담한 2층집이었다. 살레니움에 거주하는 동안 잠시 머무를 집으로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빌린 것이었다.

문간에 장미 울타리를 두른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아이는, 그 문간에 오늘도 꽃과 선물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살레니움의 시민들이 보내온 것일 터였다. 거절해도 거절해도 사람들은 계속 이런 것을 보내왔다. 흰 꽃다발을 집어들고, 아이는 그 향기를 들이마셨다.

어쩐지 애처롭게 느껴졌다. 지금 아이의 심정이 피폐하기 때문일까, 이 선물들은 격려를 북돋는 감사의 표시라기보다는, 설마 이렇게까지 호의를 표시하는데도 우리를 버릴 건가요, 그런 심정을 담은 것처럼 보였다.

"내가, 싫어하는 사고방식인데."

아이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문을 열어젖혔다. 한편으로는 전쟁의 영웅들을 숭배하면서, 한 편으로는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는 민심을 아이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집 안에 들어서기 전, 문득 고개를 쳐들어 2층을 보았다. 늦은 밤인데도, 어김없이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오늘도 안 자고 있었군요."

방문을 열어젖히면서 아이는 가볍게 꾸짖듯이 말했다. 방 안은 어지러웠다. 아이는 읽을 수도 없는 온갖 언어와 문자로 기록된 책들, 문서들, 논문 따위들이 어지럽게 흩어져서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난장판의 한 가운데에는 긴 검은 머리를 산발한 여자가 자그맣게 앉아 있었다. 륜이었다. 아이가 들어온 걸 깨닫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 쪽을 쳐다보았다. 수척하게 야윈 그녀의 눈에는 기미가 짙게 끼어 있었다.

"안 그래도 약한데, 몸이라도 챙겨야죠. 혹시 아프기라도 하면 단장님을 뵐 낯이 없어요."

그 날 이후, 륜은 이렇게 틀어박혀서 계속 어떤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길 아잘록의 모든 것에 대한 연구였다.

하루도 쉬지 않고, 그 좋아하던 낮잠도 게으름도 전혀 피우지 않은 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헤카톤 케이레스에 대해서, 그리고 길 아잘록의 마술에 대해서 이해하고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성과는 없었다. 그저 찢겨나간 파지만 쌓일 뿐이었다.

"아니, 하지만, 조금만 더 하면, 뭔가 될 것 같기도..."

"급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그건 내일 하도록 하죠."

아이는 억지로 랜턴의 불을 끄고, 륜을 안아서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새삼 놀랐다. 원래도 가벼웠던 륜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더욱 야위었는지, 정말로 두 손에선 무게가 거의 느껴지질 않았다.

"급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건 말이죠."

아이는 오늘 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구원군이 위기를 맞았다는 것, 그리고 아셀라이가 떠났다는 것을. 놀랍도록 담담한 목소리였다. 감정적인 반응은 오히려 륜에게서 나왔다.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듯 부르르 몸을 떨던 그녀가, 아이에게 안긴 채로 목을 더욱 꽉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어미에게 매달리는 아기새 같은 몸짓이었다.

"그런... 그런... 그럼, 저 때문에, 인마궁도 죽게 되었다는 말인가요."

"당신 탓이 아니에요."

"제 탓이에요."

얼굴을 보이지 않도록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륜은 자그맣게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억지로 륜을 침대로 데려가려던 아이는 우뚝 멈추어 선 채, 그 등을 토닥였다.

"저,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버틸 수가 없어요. 힘에 취해서, 세상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허세나 부리고, 게으르고, 그러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어요. 제가, 제가, 좀 더 잘 했더라면..."

길 아잘록의 광기를 예측하지 못한 것. 읽어내지 못한 것. 그것이 그녀에겐 죽도록 죄스러운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아이는 그 등을 계속 두드려주며 자그맣게 말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우린 아직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해낼 거에요."

그 말을 들은 륜은 더욱 거세게 아이의 목을 부여잡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울음이 가라앉은 것은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지친 듯 축 늘어진 륜을 품에 안은 채로, 아이는 잠자리에 들어섰다. 이부자리에는 푸른 밤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 위에 륜을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뒤돌아서서 나서려고 할 때였다.

"저기, 잠깐만요."

옷자락을 자그마한 손이 꽉 붙잡았다. 아이는 우뚝 멈춰섰다. 륜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듯했다.

"계획이, 하나 떠올랐는데 말일세. 꼭 따라주지 않겠나."

"뭔가요?"

륜이 계획을 입에 담은 것은, 그 날 이후로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이는 옅은 기대를 품으며 뒤돌아섰다. 륜은 애써 만든 것 같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 나와 파혼을 하고 새롭게 약혼을 하는 건 어떻겠나."

"예?"

"어차피 이제 내 쓸모는 다했다네. 우리의 약혼이 갖는 의미래봐야, 기나센의 장악과 나에 대한 자네의 신뢰 정도밖에 없었지. 이제 나 없어도 자네는 기나센의 영웅이며, 세계의 영웅일세. 그러니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이런 군식구를 달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겠나."

"많이 지쳤군요."

"아니, 헛소리가 아니야. 깊이 생각해서 내린 결론일세. 나와 파혼하고, 그 다나라는 여자와 새롭게 결혼을 하는 게 어떻겠나."

그렇게 말하는 륜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아이는 천천히 륜에게 다가갔다. 얼굴에 눈을 맞추었다. 그 눈에는 아직도 덜 마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라달라리아도 이탈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지. 하지만 그 여자와 자네가 결혼하면, 라달라리아가 구원군에서 이탈하는 것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네. 자네와 결합하는 건 그 정도의 가치가 있으니 말일세. 그러니..."

"약속했잖아요. 함께 이 세상을 구하기로."

최소한의 희생으로, 이 세상을 멸망에서 구해낸다. 언젠가 관에 함께 새겨넣었던 소원이었다. 아이는 말 없이 손등으로 그 눈물을 닦고, 가볍게 입을 맞추어 입을 막았다. 읍, 읍, 숨소리를 내며 저항하던 륜은 축 늘어졌다. 륜에게서 이런 약한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시금 흐트러진 이불을 덮어주고, 아이는 이번에야말로 방문을 나섰다.

1층의 거실에 들어선 아이는, 오늘 받은 선물들을 펼쳐놓고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이의 마지막 일과였다.

자신에게 향한 시민들의 마음을 하나라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어떤 소녀는 직접 뜨개질을 해서 작은 손장갑을 보냈다. 이건 내 손에 전혀 안 맞겠는데.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는 다음 선물에 손을 가져갔다. 선물이라고 하기엔 조금 특이한 물건이었다. 그건 담배였다.

"응?"

담배갑을 집어든 아이는 무게가 가볍다는 것을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안이 텅 비어있는 것 같았다. 누가 장난을 친 건가. 담배갑을 열어서 툭툭 털었다. 그러자 무언가가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건?"

그건 쪽지였다. 정성스레 접은 쪽지. 의심스러운 눈치로 쪽지를 확인한 아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나갔다. 촛불도 끄지 않은 채였다. 텅 빈채 밀랍만이 녹아가는 방에는 펼쳐져서 내버려진 쪽지 하나만 남았다.

그 쪽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 뒤뜰에서 기다리겠다, 사제야. ]

레고르가, 은밀하게 접선을 시도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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