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29화 (229/279)

40. 쐐기 ( 3 )

뒤뜰에 늘어진 보리수 위로 달빛이 부서졌다.

관리되지 않아 소복히 쌓인 낙엽은 발자국마다 사브작 소리를 냈다. 아이는 딱딱히 표정을 굳히고, 보리수 아래에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레고르였다. 그 어깨에는 에단이 아기처럼 매달려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다가, 접근을 알아채자마자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레고르가 눈을 뜬 건 그와 동시였다.

"왔군."

"정확히 말하면 당신이 찾아온 것 아닌가요."

"당신이라니 참 섭섭하구나. 사제야."

레고르가 어깨를 으쓱할 때, 밤바람이 불어 보리수를 쓸고 지나갔다. 사락대는 소리와 함께 달빛이 어지럽게 부서져 레고르의 얼굴 위에서 춤췄다. 말투와 다르게 그가 전혀 웃고 있지 않다는 걸 그제서야 눈치챘다. 아이는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레고르에게 걸어갔다.

"이 쪽에서 물어보죠. 왜 그런 쪽지를 보낸 겁니까?"

"조금 더 진지한 제안을 하기 위해서."

"진지한 제안이라면?"

"구원군을 유지하기 위한 제안 말이다."

아이의 속눈썹이 자그맣게 떨렸다. 분명히 낮에, 레고르는 구원군은 이제 끝이라고 말했다. 정말로 진심인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지금 이 말을 꺼내는 레고르 역시 그때 못지 않게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낮의 회합에는 많은 돼지들이 섞여 있었지. 전쟁을 그만두고 싶었던 건 민중뿐만이 아니다. 거기 앉아 있던 돼지들 중 절반은, 차마 자기 입으로 말하지 못했을 뿐, 은근히 누군가 전쟁을 끝내자고 말해주길 바라고 있었단다, 사제야."

"그런..."

"그래서 우선 반대파의 이름을 선점한 것 뿐이다. 내가 맡기 딱 적절한 배역이었으니까."

레고르의 목소리에는 낯익은 감정이 섞여 있었다. 냉소였다. 머리터럭처럼 길게 늘어져 펄럭이는 보리수 가지를 잡아 매만지며, 레고르는 말을 이어갔다.

"예상대로 그 돼지들은 기뻐하며 내게 구원군 반대파의 수좌 자리를 넘겨줬지. 까딱해서 일이 잘못되었다간 세계의 공적으로 몰릴 궂은 일을 대신 처리해주다니 천운이다, 칼잡이답게 멍청하군, 조용히 닥치고 있길 잘했다. 그게 그 놈들의 생각이었겠지."

"그런... 하지만, 민중 때문이라고."

"명심해라. 누군가가 민중을 입에 담을 때는, 면피하기 쉬운 변명거리로 삼을 때 뿐이다."

뚝, 잎새를 꺾어 바람에 흘려보내며 레고르는 말했다.

"그러니 결국 나는 책임과 함께 반대파의 결정권을 전부 양도받은 셈이지. 그러니 말이다, 만약 내가 굴복당해 구원군이 진공해야 한다고 결정한다면, 더 이상 반발할 수 있는 놈은 없는 셈이다. 그러니 결론은 그거다."

그리고 레고르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아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나를 굴복시켜라."

"그게 여기 찾아온 이유인가요?"

레고르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아이는 팔짱을 끼고 천천히 레고르의 말을 곱씹고, 물었다.

"그럼 아마 그 굴복시키기 위한 방법도 준비해왔겠죠. 사형은 쓰잘데기없을 정도로 준비하는 게 많은 사람이니까요."

"잘 알고 있구나."

"그게 뭡니까? 그 방법이라는게?"

레고르는 피식 웃으며 주섬주섬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어둠 속에서 담뱃불은 빨갛게 타올랐다. 그 끝을 우물거리면서, 레고르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근본적으로는, 오늘 멋대로 뛰쳐나가버린 그 여자와 같은 방법이야."

오늘, 홀로 전장으로 떠난 아셀라이를 두고 하는 말인 듯싶었다. 레고르는 연기를 뿜어냈다.

"순조롭던 전세가 뒤집힌 기점이 뭐였다고 생각하나."

물어보았지만,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레고르는 혼자 빠르게 말했다.

"남부군의 패배였지. 남부군이 무너지면서, 모든 것이 예상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민심의 이반은 크게 보면 그 때부터 시작된 거야. 금우궁은 명실상부한 최강자였고, 블뢰유는 가장 유명한 성녀였다. 그녀만이 펼칠 수 있던, 마술사를 구속하는 마술은 제국의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마술이었다. 그때의 패배로 제국은 두 사람을 동시에 잃었다."

아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두 사람의 죽음은 아이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엉망진창으로 쌓인 낙엽과 이름모를 버섯 무리가 꽃핀 바닥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만약 둘을 되찾아올 수 있다면, 사기를 다시 크게 북돋을 수 있지 않겠나."

"예?"

"방법을 찾았다."

아이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혹시 두 사람을 되살릴 방법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런 희망적인 기대가 치솟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레고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다운 말이었다.

"두 사람을 대체할 방법을 찾았다."

"대체...요?"

"그래. 네가 대체해라."

레고르는 손가락으로 아이를 가리켰다. 그리고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기 시작했다. 정밀하게 그린 그림이 첨부된 지도였다. 낯익은 모양새였다. 그건, 단테가 죽은 장레탑의 구조도였다.

"에단과 내 정보망을 풀어서, 아직 이 탑에 단테가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입수했다. 금우궁을 쥔 채 무언가를 지키고 있더군. 더 자세히 알아본 결과, 그 지키고 있던 게 토막난 성녀의 혼... 고대로부터 이어진 어떤 마술사의 혼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

그건 아마도, 제국을 열어젖힌 파계 율사의 혼일 터였다. 라달라리아의 성녀란, 그 혼을 대대로 계승하여 젊은 나이에 6위계에 오른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혼은 아직 사그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뚜렷하게 물질화된 채로 불타오르고 있단 말이지. 그러니 네가 가서 계승시켜라."

레고르는 조금 더 분명히 요구사항을 말했다.

"너는 단테를 무찌르고 금우궁을 물려받고, 성녀의 제자를 데려가서 그 혼을 계승시켜라. 잃어버렸던 영웅과 성녀가 돌아왔노라고 세상에 알려라. 그럼 나는 추하게 발버둥치다 굴복하겠다. 그 정도의 성과가 있으면 민심을 되찾는 것도, 명분을 찾는 것도 가능할 거다."

즉, 그런 말이었다. 아이와 다나가 단테와 블뢰유의 자리를 물려받아 달라는 것. 그것을 영웅적으로 포장하고 퍼뜨려서, 한 번 꺾인 민심과 군심을 모두 되살리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가능한 말처럼 들렸다. 연이은 절망적인 상황으로 언제나 어두워져 있던 아이의 눈망울에 한 조각 빛이 돌아왔다. 노력해서, 승리해서, 무언가 해낼 수 있다면, 아이는 얼마든지 몸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어때, 해볼 생각이 있나?"

"예... 아니, 잠시만요."

그러나 그 눈동자는 레고르의 비릿한 미소를 보자 다시 의혹으로 물들었다. 그가 아는 사형은, 레고르 보르지아라는 사람은, 이렇게 순수한 제안을 해오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손바닥을 쳐내고 아이는 나름 사납게 물었다.

"그럼 왜 당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남부로 가지 않고, 그런 배역을 저한테 넘기는 겁니까?"

"음."

레고르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 입에선 어느새 미소가 싹 사라져 있었다. 제법이군, 그런 말을 중얼거린 레고르는 말했다.

"두 가지 문제 때문이다. 첫째. 난 소재가 못 된다."

"소재?"

"정확히 말하면, 너를 제외한 어떤 사람도 소재가 못 된다. 꺾인 의지를 되살리는 것, 그건 단순히 전과를 올려서 될 일이 아니다. 우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건 네가 아니면 못할 일이야."

"왜, 왜..."

"왜냐면 멍청하니까. 멍청이들은 머저리에게 감동받고 바보를 좋아하기 마련이라서, 문자 그대로, 우상이 될 자는 너처럼 멍청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사제야."

먼 옛날처럼, 레고르는 아이의 이마를 검지로 툭 툭 찍으며 말했다. 일부러 반발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의도대로 따라주기 싫어서, 아이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레고르를 노려보았다.

"이 구원군의 수뇌부에서 너 혼자만이, 숱하게 멍청한 짓을 하면서 구해도 별 의미도 없을 목숨들을 구해왔지 않나. 어제도 그랬지. 어떤 보답도 없는데 혼자서 목숨을 던져 용골을 구해서 돌아왔지."

"칭찬하는 겁니까, 욕하는 겁니까?"

"맘대로 받아들이거라. 아무튼, 우상이라는 건 멍청이들에게 필요한 것이니 멍청이밖에 될 수 없는 모양이야. 그러니 너밖에 적임이 없다."

아이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레고르에게 무언가를 인정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고르의 이어지는 말에 그 표정은 급속도로 딱딱해졌다.

"둘째로는, 성녀의 혼 때문이다. 에단에게 들었다. 그 혼은 고대에 위업을 이루었던 7위계의 마술사가, 자신의 혼을 물질화해서 대대로 물려주는 것이라고. 라달라리아의 성녀들은 자신의 제자에게 그 혼을 대대로 물려주며 혼을 계승해왔다고 말이다."

"예... 알고 있었어요."

다행히도 호노레 블뢰유는 제자를 남기고 죽었다. 다나였다. 블뢰유의 죽음 이후로, 다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전장의 맨 앞에서 싸워왔다. 이번에도 자신이 부탁한다면, 함께 장례탑으로 떠나는 걸 거절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아직 그 아가씨는 율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걸로 아는데. 네 첩이니 알고 있지 않나?"

"첩 같은 말로 부르지 마시죠."

아이는 잠시 레고르를 노려보았지만, 코웃음칠 뿐이었다.

"그래서 조금 문제가 생겼단 말이지. 세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마술사, 7위계의 혼을 이어받는 일이다. 몸에 부담이 가지 않을 리가 없어. 하물며 율사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풋내기가 대상이어서야 그 부담은 더더욱 커지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성녀의 혼을 억지로 계승시켜서 네 첩을 성녀로 만들면, 그 여자는 죽을지도 모른다."

레고르는 무언가를 선고하듯 싸늘하게 말했다. 잠시 후, 그 입에서 담배가 툭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아이가 멱살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아이의 붉은 눈을 바라보며, 레고르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야겠군. 8할은 죽는다.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앉은뱅이가 되거나... 귀머거리가 되거나. 아무튼 멀쩡하진 못하겠지."

"알면서도 그런 걸 떠맡기려는 겁니까!"

"너는 지금, 수만의 민중들에게 죽더라도 성전에 참여하라고 독전하고 있지 않나? 네 주변인에게는 그걸 못 하겠다는 거냐?"

"닥쳐요!"

아이는 격하게 레고르의 멱살을 흔들었다. 그러나 레고르는 턱 손을 쥐어 아이의 팔을 붙잡고,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문제는 그거지. 뒷조사를 해봤다. 네 첩이라고 하니 좀 멍청하고 순진한 여자일 줄 알았는데, 그 여자는 전혀 멍청해보이지 않더란 말이지. 나나 다른 위정자가 대의를 말하며 떠밀어도, 순순히 목숨을 건 도박을 하러 가주지는 않을 요물처럼 보였다. 그 여자를 설득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딱 한 명밖에 없어 보이더군."

너 말이다.

레고르는 그렇게 말하고 손을 놓았다. 그리고 더없이 유쾌해져서,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멱살을 죽일 것처럼 세게 붙들고 있는 아이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기 떄문이었다.

레고르의 말에 격노하면서도, 더 나은 해답을 찾지 못해서, 분해서 흘리는 눈물이 틀림없었다. 저 눈물이 뜻하는 것을 레고르는 읽을 수 있었다. 자신의 제안을 수락한다는 뜻이었다.

"변한 게 없군. 어른인 척 흉내는 엄청나게 내더니 말이야."

풍파를 겪으면서 달라진 척을 했지만, 이 흰 머리의 청년은 역시 그의 사제였다. 그 날부터,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레고르는 자신의 목을 조여오는 팔 힘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고, 사납게 팔을 뿌리쳤다.

"아직 말은 다 안 끝났다. 만약 너와 네 첩이, 아잘록의 마술로 타락해버린 단테에게 죽어 버린다면, 그래서 실패한다면... 그것도 괜찮다. 네가, 정확히 말하면 네게 붙어있는 그 기분나쁜 붉은 귀신이 죽으면 에단이 힘을 되찾는다고 하더군. 그 힘이 있으면 전세를 뒤바꿀 수 있노라고 에단은 말했다."

거꾸로 아이의 멱살을 붙잡고, 레고르는 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샘처럼 새어나오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그 눈물에 어렴풋이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영락없는 괴물이었다.

"윽, 으으윽..."

"그러면 내가 책임지고 끝내주마, 사제야. 아잘록이건, 아지프건. 알겠나?"

그리고 레고르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텅, 레고르는 축 늘어진 아이를 보리수 그늘에 내던졌다. 보리수가 흔들리며 그림자와 달빛이 뒤섞여 아이의 얼굴 위에서 부서졌다. 앞머리가 축 늘어져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흘깃 노려보고, 레고르는 뒤돌아섰다.

그 흔들리는 등이 완전히 시야 너머로 소멸할 때까지, 아이는 죽은 듯 가라앉은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림이 길게 이어지던 침묵을 깼다.

'괜찮으냐, 어린 순례자야. 밤이슬이 찬데, 이런 데서 자서는 몸에 좋지 않은 법이다.'

이제는 제법 그럴듯한 말을 꺼낼 수 있게 된 림이었다. 아이는 멍하니 림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 뺨을 어루만졌다. 기묘한 촉감이 손끝에 전해졌다. 새벽을 지새우면서, 아이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당신에게는 우상의 재능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재능...'

맨 처음에, 도박장에서 만났을 때, 드미트리가 했던 말이었다. 우상, 우상, 그 두 단어가 머리를 후벼파는 것처럼 아프게 느껴졌다.

그렇게 말하던 드미트리는 결국 죽었다.

그녀가 죽으며 남긴 말은 지워낼 수 없는 흉터처럼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참회하면서, 만족스럽게 떠난 것처럼 보였다.

혹시, 어쩌면 그게 아닌 건 아니었을까. 어쩌면 첫 날부터, 그녀는 나라는 우상에 홀려 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과 함께 흉터가 진하게 시려왔다. 그 환상통은 어떤 검상보다도 아프게 가슴을 찔러왔다. 만약, 다나도 이런 흉터가 된다면, 이렇게 시려온다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아무리 다쳐도, 전부 나으니까. 나 혼자 아픈 편이 나은데."

멍하니 중얼거리며 슥, 아이는 손톱으로 손등을 길게 긁어냈다. 가느다란 혈선이 생기고 핏방울이 맺혔다. 그러나 그 혈선은 곧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아물었다.

"혼자..."

'괜찮으냐? 너는 가끔 너무 많은 것을 고민하는구나, 어린 순례자야.'

아이는 앉은 채로 림의 뺨을 아기처럼 계속 문질렀다. 어린아이의 손장난 같은 무의미한 동작이었다. 림은 잠자코 그 손장난을 받아주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아이는 유의미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일어나 있습니까?"

천갈궁을 뽑아서 선주를 불러낸 것이다. 검은 그림자가 일렁거리며 검 끝에서 새어나와서, 곧 선주의 모습을 갖추었다. 일 년여간 힘든 전쟁을 겪어오면서, 아이는 조언과 수련이 필요할 때마다 선주를 불러 도움을 청하곤 했다. 지금도 그 연장선이었다. 아이는 천천히 선주에게, 레고르와 나눈 대화를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그 블뢰유와 붙어먹던 재수없는 놈을 잡아 죽이러 가야겠다?"

선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툭 말했다. 그 말투가 왠지 안심이 되서, 아이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예."

"네가?"

"예. 할 수 있을까요."

"흐음..."

턱을 매만지던 선주는,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그 녀석은 이 검의 전 주인, 귀르겐이라고 했던가, 그 녀석이 그랬던 것처럼, 길 아잘록의 마술로 변이해 있을 거란 말이지? 반쯤 외신과 같은 형상으로 말이다."

"예.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게 그의 특기니까요."

선주는 또 턱을 매만졌다. 그 입에서 결론이 나온 것은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어느새 저 멀리선 동이 터오고 있었다.

"결론을 내려주지. 전장을 거쳐오면서, 너는 꽤 성장했다. 만약 변이되기 전의 단테라면 네가 7할 정도 확률로 이길 거다."

"아."

잠시 밝은 표정을 지었던 아이는, 선주의 말의 의미를 곱씹고 어두워졌다.

"그럼, 변이한 후는?"

"못 이긴다. 한 5푼? 그 정도 확률로는 맞찔러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아니, 정정하지. 맞찔러 죽을 수조차 없을 거다."

"그런... 그럼, 방법이 없다는 건가요."

아이의 절망 섞인 말에도 선주는 즉답해주지 않았다. 말갛게 동터오는 햇살과 뒤섞여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주를 이루는 천갈궁의 검은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그 표정은 무표정한듯 보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선주와 어울려온 아이는 그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망설이지 말고, 방법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선주는 잠시 눈꼬리를 세워 이 쪽을 노려보더니,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래,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알려주세요. 부디."

선주는 영 마뜩찮은 표정으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쐐기를 뽑아라."

"예?"

"내가 네 몸을 잠식하지 못하도록, 그 놈이 박아놓은 쐐기. 그걸 뽑아라."

그것이 선주가 내놓은 해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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