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쐐기 ( 4 )
연금술사들의 도시, 살레니움.
제국 뿐만 아니라 온 센디엘을 통틀어 가장 번화한 도시가 바로 이 곳이었다. 화폭에 그린 것처럼 반짝이는 이 도시의 곳곳에서는, 풍요와 부유함이 흘러넘쳤다.
인적조차 드문 빈 공원과 버려진 교회도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마탑들이 하늘을 찌를 듯 웅장하게 솟아서 끝없이 늘어졌다. 이따금씩, 거대한 인조 골렘들과 비행선이 그 마탑 사이를 미끄러지듯 누비곤 했다. 새털구름은 연보랏빛 하늘 저 끝까지 퍼져 있었다.
그런 살레니움의 초저녁이었다. 대학생들과 연구자들이 모여 사는 구석진 거리를, 두 사람의 남녀가 걷고 있었다. 품에는 갈색 봉투를 한 아름 끌어안은 채였다. 그 두 사람은 다나와 아이였다.
"예쁜 곳에 데려다 주겠다더니, 결국 헤매다가 해가 저물어 버렸네요?"
다나는 갈색 봉투로 입을 가리면서 웃었다. 곁을 따라 걷는 아이의 옆얼굴에는 미안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오늘 다나에게 어울려 달라고 권유한 건 아이였다. 살레니움의 꽃을 보러 가자는 게 그 권유의 내용이었다. 이맘때면 살레니움에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꽃이 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대충 둘러댄 얘기였다.
하지만 결국 그 살레니움의 꽃은 찾지 못했다. 두 사람은 아침부터 하루 종일 살레니움의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엉뚱한 곳을 헤맸을 뿐 꽃 비슷한 것조차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한적한 둔영이나 눈 덮인 산골에서만 살아왔던 아이에게 거미줄처럼 얽힌 살레니움의 번화가는 너무 감당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미안해요. 헛걸음을 하게 해서..."
"아뇨. 방향성이 이상해졌지만, 헛걸음은 아니었어요. 재미있었거든요."
다나는 갈색 봉투에서 수상한 물건을 꺼냈다. 어린애들 장난감처럼 보이는, 손에 끼는 호랑이 인형이었다. 그걸 오른손에 끼고 아이의 얼굴 앞에서 흔들어보이자, 갑자기 천둥 같은 굉음이 터져나왔다.
바람이 일어나 아이의 앞머리를 살짝 들어올릴 정도였다. 어흥, 다나는 장난스럽게 호랑이 흉내를 내며 외쳤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아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거꾸로 위로를 받는 모양새였다.
오늘 오전, 한참이나 길을 헤매고 또 헤맨 결과, 두 사람은 마탑의 학생들과 불법 연구자들이 머무는 숨겨진 거리에 도착하고 말았다.
그곳에서는 수상쩍은 사람들이 좌판을 펼쳐놓고 온갖 괴이쩍은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연금술사의 도시, 살레니움 다운 암시장이었다.
해가 저물 때까지, 아이와 다나는 그 곳을 헤매며 이것저것 물건을 구경하고 돌아다녔다. 저 쓸데없이 고품질인 호랑이 인형도 그 때 구매한 것이었다.
이상한 물건들은 그 외에도 많았다. 경보용이라는 고무공이 멋대로 터지는 바람에 사람들에게 쫓기기도 했고, 상품으로 진열되어 있던 황금 개구리가 다나의 앞섶에 뛰어드는 바람에 한바탕 소란이 일기도 했다.
원래 권유받은 내용에서 한참 동떨어진 하루였지만, 그래도 다나는 만족하는 듯 했다. 연신 이런 저런 물건을 뒤적이던 다나는, 곧 금빛으로 반짝이는 분수대를 발견하고 아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기서 좀 쉬다 가요."
두 사람은 분수대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날씨는 조금 쌀쌀했다. 어디선가 불어온 찬바람에 다나는 어깨를 붙잡고 부르르 떨었다.
맨 어깨가 드러난 탓에 살짝 소름이 올라와 있었다. 다음 순간, 다나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무심한 듯한 손짓으로, 아이가 어깨망토를 둘러주었기 때문이었다. 체격 차이 때문에 상반신이 푹 파묻히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다나는 쑥스러운 듯, 말없이 옷에 얼굴을 파묻었다. 망토에는 아직 온기가 진하게 묻어 있었다. 힐끔 표정을 살피며 어물거리던 다나는, 일부러 요란을 떨며 봉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기름을 잔뜩 머금은 듯, 윤기가 흐르는 황금색 떡이었다. 아까 살레니움을 헤매면서 샀던 물건이었다. 그 떡을 크게 한 입 베어물고, 다나는 남은 떡을 아이에게 건넸다.
"자요. 감사 표시에요."
아이는 머뭇거리며 다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입술에 기름이 묻어 유난히 번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망설이며 살짝 손을 들어올렸을 때, 다나가 팔을 내뻗었다.
"읍."
떡을 억지로 아이의 입에 쑤셔넣었던 것이다. 아이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은 채로, 우물우물 씹어서 삼켰다. 고구마같은, 부드러운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번졌다. 꿀꺽 삼키고, 아이는 다나를 내려다보았다. 다나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배시시 웃고 있었다.
그 때, 강한 바람이 불어 두 사람을 휩쓸었다. 분수의 물줄기가 휩쓸려 물방울을 튕길 정도로 강한 바람이었다. 좋은 기회야. 다나는 망토가 날아가지 않도록 꼭 붙잡고, 은근슬쩍 아이에게 몸을 기댔다. 가슴은 작은 북처럼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다나는 켁켁대며 떨어지고 말았다. 길게 늘어진 아이의 머리채가 다나의 얼굴을 찰싹 후려쳤던 것이다.
"악! 분위기 좋았는데!"
코를 움켜쥐고 다나는 소리쳤다. 아이는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그 날, 머리를 잘라버린 이후로 꽤 시간이 지났다. 너무 바쁘게 지내온 탓에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덧 머리카락이 다시 이렇게 길게 자라버린 모양이었다. 아이는 다나와 좀 거리를 벌리고, 천갈궁을 스릉 뽑아들었다. 다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응? 뭐 하려는 거에요?"
"너무 길어서요. 불편하니까, 잘라야죠."
머리채를 동그랗게 움켜쥔 채, 목이 희게 드러날 정도로 들어올리고 아이는 말했다.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이대로 검날로 쳐내서 머리를 자를 생각이었다. 신기를 끌어올려 검날에 두른 아이는, 그러나 어떤 것을 보고 멈추었다. 놀라울 정도로 사색이 된 다나의 표정이었다.
"정말로요? 그렇게 대충 잘라버릴 생각이에요?"
"어, 예... 남자가 머리 길면 이상하니까."
"안 이상하거든요!"
박력에 놀라서 검을 다시 집어넣을 정도였다. 어린아이가 독버섯을 주워먹는 걸 말리는 듯한 기세였다. 그렇게 실랑이한 끝에, 결국 다나가 머리를 손봐주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바닥에 앉은 아이를 끌어안듯 앉아서, 다나는 눈처럼 새하얀 아이의 은발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저번에 머리가 짧아졌을 때도, 혹시 전쟁터에서 날려먹었나, 하고 속상했는데. 속상했던 거 피해보상해주세요. 그 여자는 옆에서 이런거 하나 안 말리고 뭘 한 건지... 정말."
"그러면 안 되나요."
"당연하죠!"
다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이의 머리를 아프도록 세게 묶었다.
"하여간, 아무렇게나 해도 예쁘니까 그렇게 무신경한 거에요. 앞으로는 꼭, 시종이나 시녀한테 관리해달라고 하세요."
"그렇군요."
"더 확실하게 대답!"
"예."
아이가 조금 크게 대답하자, 다나는 뭐가 웃긴지 배시시 웃었다. 아이는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다나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손이 참 따뜻하구나, 아이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어제 밤잠을 설친 탓에, 조그맣게 졸음이 몰려왔다. 그리운 기분이었다. 먼 옛날에도, 아이와 다나가 아니라 막 빠져나온 실험체일 때에도, 누나에게 이렇게 머리를 맡긴 적이 있었다. 그 때 생각이 자꾸 났다...
"옛날 기억나요?"
"예?"
아이는 화들짝 놀라서 눈을 떴다. 한껏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다나가 꺼낸 과거는, 그 어렸을 때의 이야기가 아니라 좀 더 최근이었다.
"북서 자치령에서 이렇게 둘이 같이 다녔을 때요. 그때도 이렇게 하루종일 둘이서 있었잖아요."
"아."
길어봐야 몇 년 전 일인데, 어째서인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먼 과거처럼 느껴졌다.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더 억세게 자라난 푸른 들판과, 그 들판 위에서 살랑거리던 봄바람이 눈앞에 선했다. 이마에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다나가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사실 그 때, 마지막에 헤어질 때, 그렇게 그냥 보내주고 싶지 않았어요.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제도로 데려가고 싶었어요."
다나의 손은 죽 흘러내려서, 아이의 가슴께를 더듬었다. 말없이 그 손을 잡아주었다. 아이의 손이 너무 따뜻했던 탓일까, 그 흰 손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그랬으면,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요. 지금이랑."
다나가 몸 전체를 기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토하는 작은 숨결이 귓불을 간지럽혔다. 불안한 듯 떠는 차가운 손을, 더욱 강하게 쥐어잡았다.
자줏빛으로 저물어가는 지평 위로, 별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고 있었다. 저녁빛에 먹혀들어가는 희미한 산그림자 위로, 기나센의 눈 덮인 산맥이 어른거렸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그렇게 손을 맞잡은 채로, 말없이 저물어가는 세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당신이 저랑 함께 제도로 갔더라면, 음, 스승님도 만났을 테고, 금우궁도 더 일찍 만났겠죠. 잘 해주셨을 거에요. 아무런 배경이 없던 저한테도 언니나 오빠처럼 스스럼없었던 분들이니까. 그랬으면, 그랬으면..."
아이를 품에 안은 채로, 떠나간 사람들의 이름을 허망하게 더듬던 다나의 손이 멈추었다. 강하게 가슴팍을 끌어안은, 얇은 팔뚝이,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낯익은 떨림이었다. 얼마 전, 심하게 자책하던 륜을 안아올렸을 때, 맞닿은 가슴에서 전해졌던 떨림과 그 떨림은 많이 닮아 있었다. 맞잡은 손으로 온기가 흘러들어갔기 때문인지, 어느새 다나의 손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혹시, 조용한 곳에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조용한 곳이요?"
"오늘 꼭, 해야만 하는 말이 있어서."
다나는 잠시 당황한 듯 표정을 흐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저녁의 어둠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녹색 눈동자는 분명히,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플 정도로 세게 맞잡은 손을 당겨서 다나를 일으켜주고, 두 사람은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낮에 봐 두었던 곳이 있었다.
살레니움의 명물로 유명한, 황금 코끼리가 운반하는 가마였다. 부유한 관광객들이 살레니움을 유람할 때 으레 타는 물건이었다. 윤기가 흐르는 코에 루덴 금화를 쥐어주자, 코끼리는 무릎을 꿇고 가마로 올라가는 계단을 내려주었다.
"자, 조심히."
굽 높은 신발을 신은 다나는, 계단을 오를 때 위태로워 보였다. 얼른 허리에 손을 내뻗어 받쳐 주고, 두 사람은 가마 안에 함께 들어섰다.
내부는 화려했다. 붉은 색과 금색의 융단이 깔린 바닥 위로, 잠을 자도 무리없을 것 같은 널찍한 가죽 의자가 놓여 있었다.
방향제를 걸어놓았는지, 안에선 희미한 꽃향기가 났다. 문을 닫자 외부의 소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고요함 속에서 코끼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먼저 앉은 다나는, 두 손을 가슴께에 올려놓은 채 긴장한 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투명한 유리창에 그녀의 긴장된 얼굴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천천히 그 곁에 다가갔다. 유리창 너머로,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도시의 야경이 보였다. 황금으로 가득한 연금술사의 도시는, 밤에도 완전히 꺼지지 않고 명멸했다.
그 빛들은 물에 젖어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도시를 스쳐 지나서 어두운 공원으로 들어섰을 때, 다시금 유리창에 두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
다나는 유리창에 손을 대고, 멍하니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함께 비치는 아이의 얼굴은, 초조한 듯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아이의 머릿속에선, 저번에 들었던 그 음성이 음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녀의 혼을 억지로 계승시켜서 네 첩을 성녀로 만들면, 그 여자는 죽을지도 모른다.'
내일, 또 한번의 회의를 앞두고 다나를 불렀던 이유.
권하기 위해서였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야겠군. 8할은 죽는다.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앉은뱅이가 되거나... 귀머거리가 되거나. 아무튼 멀쩡하진 못하겠지.'
레고르가 한 제안을, 그대로.
다시 한 번 입술을 세게 짓씹고, 아이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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