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32화 (232/279)

40. 쐐기 ( 6 )

아치형의 창문으로 쏟아진 햇살이 붉은 법의를 비추었다.

방 안, 모든 사람들의 이목은 아우렐리우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고요했다. 햇살 속을 떠다니는 티끌들이 똑똑히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아셀라이 경이 그렇게 떠난 이후, 우리는 우리대로, 그녀가 벌어준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분주히 대안을 찾고 있었소."

아우렐리우스는 차근차근히 말을 시작했다.

"우리는 구원군이 흔들리는 이유를 좀 다르게 생각했소. 군심이 흔들리기 시작한 정확한 시점을 생각해보시오. 금우궁과 성녀가 사라진 직후도 아니고, 회전에서 실패한 직후도 아니오. 수도가 함락되고 어가가 무너진 후부터요."

"그 말뜻은...?"

"왕이 없기 때문에, 체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오."

가능한 지적이었다. 예민한 사람들은 이미 희미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나, 이 문제가 굉장히 복잡한 일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기에 꺼렸던 주제였다. 아우렐리우스는 쉴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진정으로 다시 구원군을 일으키려면, 나는 왕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소. 그래서 방법을 찾고 있었소만, 내키지 않는 방법들 뿐이더군."

갑작스럽게 던져진 무거운 주제 때문에 웅성였던 장내는 그 말에 다시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그 고요는 단숨에 깨졌다.

"그런데 오늘, 이다지도 아름다운 방법으로, 우리가 왕을 되찾게 될 줄은 몰랐소. 이 또한 주의 뜻이겠지."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미숙하여 이해가 어렵습니다."

"어려울 것이 뭐 있겠소. 만약 설표공이 저 과업을 이루고 돌아온다면, 그래서 금우궁을 계승하고 끊어진 성녀의 유대를 되살린다면, 그 위업을 기려 설표공을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얘기요."

"예?"

"설표공이 왕의 이름을 받아 구원군을 이끌어준다면, 무너졌던 체계는 다시 반석처럼 바로 설 것이오."

장례탑에서 일을 끝마치고 돌아온다면, 텅 비어버린 왕위를 아이에게 넘겨주겠다는 뜻이었다. 사전에 어느 정도 얘기가 되어 있었는지, 아탕칼리 쪽 인원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낯빛에는 한가득 당혹스러움이 떠올라 있었다. 심지어, 아이도 그랬다. 어떤 상의도 없었다. 아이조차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주 재미있는 소리군."

아탕칼리는 명백히, 위기를 틈타 왕의 옹립이라는 중대사를 날치기로 처리하려 하고 있었다. 반발이 없는 쪽이 이상했다.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레고르였다. 긴 흑발이 흘러내려 책상에 닿도록, 건방지게 목을 꺾은 레고르는 담배를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황제니 왕이니, 그게 당신이 그렇게 음식 주문하듯 턱 주문하면 생기는 건가? 그 권위는 누가 부여하나? 당신이 하나?"

"민중이. 그리고 전통과 시국이 부여해 줄 걸세."

"전통? 자치령의 수렁을 굴러다니던 고아 출신을 왕으로 삼는 게, 대체 무슨 전통에 부합한단 말인지?"

"그런 아이조차 가장 존엄한 자리에 올라설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혈통보다 위대한 전통일세."

"말장난에 능하시군."

"수사학이라고 하는 편이 보다 점잖은 대화가 될 것 같군. 그래, 굳이 수사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설표공은 이런 시국에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네. 공작위를 받았고, 또 부마로 삼아주겠다는 언약 또한 받지 않았나. 설표공은 분명히 어가의 일원이야. 황제가 참변을 당했을 때, 어가의 일원이 왕으로 일어서는 것이 대체 무슨 문제가 있곘나."

"하, 이뤄지려면 저승에 가야 할 언약 따위로 그게 인정이 되나? 누가 그렇게 해석하나?"

"우리가. 그 해석을 내릴 권한을 가진 건, 우리 아탕칼리일세."

이런 모호한 것에 대한 논쟁은 아탕칼리의 특기였다. 그리고 그 결론을 내릴 권한 또한 그들에게 있었다. 이미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논쟁을 준비해온 듯싶었다. 레고르는 더 이상의 논쟁이 쓸모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해석할 권한을 쥔 자들에게 해석을 두고 말싸움을 거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도 드물 것이었다.

"됐어. 겉치레는 집어치우고 이제부터 솔직하게 얘기하자구. 당신, 대체 무슨 속셈인가."

"속셈이라니. 그저 세계의 안녕과 구원군의 결속을 위해서,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은 마음 뿐일세."

"아직 그 빌어먹을 세계의 안녕은 까마득하고, 위기는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벌써부터 위기 이후의 제국을 어떻게 해먹을까, 그 궁리부터 하고 있는 건가? 이런 얼간이를 꼭두각시 삼아 무대에 세워서 뭘 어떻게 할 생각이야?"

"말 조심하십시오!"

그 말에, 아이의 호위 격으로 서 있던 몇 명의 용병이 분개해 칼을 뽑아들었다. 레고르의 말은 명백히 아우렐리우스를 도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발에 걸려든 것은 그 외의 사람들 뿐, 아우렐리우스는 여전히 평온한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무대에 올린 건 자네 아닌가?"

"뭐?"

"그렇다면, 극이 어떻게 흘러가든, 일개 관중이 불평할 권리는 없겠지."

침묵이 찾아왔다. 레고르는 입을 다물고, 담배를 입에서 꺼내 손가락으로 비벼 껐다. 그리고 아우렐리우스를 노려볼 뿐, 아무런 말이 었었다.

몇 사람 외에는 아우렐리우스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는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눈치채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이가 이 제안을 하도록 사주한 것이 레고르라는 사실을,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밀약을.

연극이라는 말은 다른 방식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했다. 레고르는 거부할 수 없는 대본을 준비해서 아이에게 던져주었다. 아우렐리우스는 붓을 들어서, 레고르가 준비한 대본을 크게 고쳐 썼다. 그리고 그 연극이 시작된 이상, 레고르는 더 이상 연극의 진행에 개입할 권리가 없었다. 어떤 쪽을 고르는가, 그것은 오로지 무대에 선 사람, 아이의 몫이었다...

"그래서 설표공,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묻고 싶소. 우리가 그대를 왕으로 추대한다면, 그걸 받아들이겠소?"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베어문 채로 성인은 물었다. 이목이 아이에게 집중되었다. 아이는 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뒤섞인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같은 장소에 서 있건만, 사람들은 다른 세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뒤에 시립해 선 용병들에게선 역사의 한 장면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쁨이, 그리고 기나센의 용병이 제국의 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순진한 감격 따위가 느껴졌다.

그들은 아이가 이 제안을 거절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했다. 반면 반대편에 선 카나기의 문반들에게선, 전쟁의 성과를 그대로 넘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분노, 불의의 습격을 당한 듯한 어수선함이 느껴졌다.

"대답을 부탁하오."

그리고 자신을 응시하는 아우렐리우스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입은 웃는 흉내를 내고 있지만, 주름에 덮인 눈을 응시하고 깨달았다. 이 자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 눈동자 너머로 비치는 내면은 공허하기만 했다.

"저는..."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우물거렸다. 이런 눈을 본 적이 있었다. 통령, 기나센의 전 통령의 눈이 저랬다. 무언가의 수장으로 늙은 자는 저렇게 텅 비어버리게 되는 것인가. 그렇게 닮아가는 것인가.

"저는..."

왕관. 그건 아마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 중 최고의 보상일 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을 터였다.

하지만 아이는 그것이 전혀 매혹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두려웠다. 매미의 허물처럼, 얇고 텅 비었던 통령의 시체가 생각났다.

고작 두 번의 임기였다. 두 번의 임기를 버티지 못하고, 통령은 세상에 일렁거리는 무언가에, 그토록 철저히 소모당했고 또 버려졌다. 한 영웅이 그토록 몰락하기까지 걸린 세월, 고작 10년이었다. 그걸 평생, 죽을 때까지...

그 때였다. 식은땀으로 흥건한 손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다나였다. 슬며시 손을 내뻗어서, 그녀는 손바닥에 무언가 글자를 적고 있었다.

'하기 싫은 거죠?'

아니, 해야만 해요. 그런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거의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손에 강한 힘이 느껴졌다. 다나는 있는 힘껏 아이의 손을 붙잡고, 아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거절해요.'

그런 자리를 견디기에 당신은 너무 상냥하다고 다나는 적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서 울려퍼지는 목소리가 있었다.

ㅡ받아들이게.

홱, 고개를 돌려 륜을 쳐다보았다. 그 목소리는 륜의 것이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블로어를 통해 들려준 것이었다.

ㅡ아우렐리우스의 말이 옳아. 구원군을 위해서 왕은 존재해야 해. 거기에 그가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그의 우려를 읽을 수 있었다네. 텅 빈 왕좌는 어떤 폭군보다도 무서운 폭군일세. 왕좌가 계속 비어 있다면, 누군가 권력욕에 잡아먹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를 일으킬 수도 있는 일이야.

다른 누구에게 맡길 수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 맡아주는 것이 좋겠지. 내가 볼 때, 아이 씨, 당신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륜은 아우렐리우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하고 있었다. 세계를 위해서, 구원군을 위해서. 잠시 눈을 감았다.

"저는..."

오른손에선 다나의 온기가 느껴졌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손에 느껴지는 온기는 더욱 더 세졌다. 시간은 흘렀다. 아우렐리우스에게 햇살을 쏟아내던 태양은, 옆으로 길게 기울어 이제 아이를 비추었다. 햇살은 눈을 감은 아이의 얼굴 위에서 새하얗게 부서졌다. 빛 속에서, 길게 늘어진 아이의 눈꺼풀은 희미하게 떨고 있었다.

"그 제안을..."

레고르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그의 사제를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을 함께하면서,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조차도, 아이가 이 제안을 거부할지 받아들일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저 그 입에서 흘러나올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머뭇거리던 아이는, 결심한 듯 눈을 뜨고, 조용히 말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말에, 여러 사람들의 반응이 엇갈렸다. 환호성도 있었고 탄식도 있었다. 가장 큰 탄식은 곁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다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이는 눈을 똑바로 뜨고, 아우렐리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늙은이의 억지를 받아줘서 고맙네. 인마궁은 참 훌륭한 제자를 뒀어."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이니까요."

"부디 살아돌아오게."

그렇게 두 사람의 덕담이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륜이었다. 얼굴을 푹 숙인 채 앉아 있던 다나는, 천천히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럼 계획은 정해진 것 같군. 괜찮다면, 내게 계획을 정리할 기회를 주지 않겠나."

의혹에 섞인 시선이 륜에게 모였다. 누구인데 갑자기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끼어드느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륜이 통령의 참모이자 약혼자라는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몇 달이나 연구로 밤을 지샌 탓에 륜의 뺨은 수척하게 말라 있었다. 그 얼굴로 희미하게 웃고, 륜은 말을 시작했다.

"기회를 주어 고맙군. 그럼, 내용을 정리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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