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쐐기 ( 7 )
륜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분기 결산을 보고하는 비서처럼 건조한 어조였다. 지금부터 아이 일행은 장례탑으로 떠날 것이며, 그 곳에서 금우궁과 성녀의 혼을 되찾아올 것이고, 성공할 경우 구원군의 지휘권과 왕위를 받는다. 그러나 실패할 경우, 죽는다. 그리고 실패할 확률은 매우 높을 것이다. 여기서 우선 륜의 말은 끝났다. 죽는다. 그 말을 들은 다나의 흰 어깨가 다시 한 번 부르르 떨렸다.
"갑자기 저울에 꽤나 큰 물건들이 올라갔지만, 저기 저 음침한 아저씨를 제외하면 반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군."
륜은 펜으로 레고르를 가리키며 말했다. 레고르의 한쪽 눈썹이 들썩거렸다. 홱 고개를 돌려 레고르의 시선을 피하고, 륜은 뚱뚱한 율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반들거리는 이마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자네는 이 제안에 반대하나?"
"아, 아니오. 사태의 위급함과 또 통령의 고귀함을 믿기 때문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글쎄, 정말로 믿었다면 고이 간직하던 비자금을 풀어 호위와 마차편을 구하지 않았겠지."
"그..그 무슨."
그 율사의 이마에서 땀이 더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륜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최후의 반격을 준비하기 위한 이 회의에, 이런 자들이 어떤 꿍꿍이를 품고 앉았는지.
"솔직히 말해볼까. 당신은, 그리고 당신과 같은 사람들은 별로 반대할 의사가 없어. 왜냐면, 어차피 이런 개인의 객기에 의존하는 작전은 실패할 것이고, 개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지. 안 그런가?"
"아닙니다!"
"흠. 그런가."
륜은 잠시 펜 끝을 씹더니, 또박또박 물어보기 시작했다.
"아니라면 다시금 확인받고 싶군. 어떤 방식으로든 금우궁을 탈환한다면, 이 조건을 받아들이는 건가? 기나센의 촌놈을 왕으로 인정할 텐가?"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땀을 흘리며 그 율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륜은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그 표정은, 약혼자를 사지로 보내는 사람의 표정으로 보이지 않았다. 왕위라는 뜻밖의 보상에 집착해서, 아이의 목숨을 앞세워 거듭 다짐을 받으려는 탐욕스러운 표정으로만 보였다. 모두가 희미하게 그 분위기를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 그대는? 왜 아내와 아들, 그리고 여기서 사귄 현지처를 도피시켰는지 묻고 싶은데. 그대는 믿고 있는가?"
륜의 질문은 곧 다른 고관에게 돌아갔다. 비슷한 대화가 반복되었고, 비슷한 다짐이 반복되었다. 이 방 안에 있던 사람들 중, 거의 절반은 이 질문의 칼끝을 피하지 못했다.
침묵으로 가라앉은 방 안에선 계속해서 륜의 목소리만이 크게 울렸다. 죽을 것, 목숨을 걸었다, 실패할 것이다... 다나는 무릎에 주먹을 쥔 채로 그 얘기를 듣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어깨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마침내 륜이 다짐을 끝마쳤을 때, 다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왜 남의 목숨을 자기 물건처럼 말하는 거죠?"
"응?"
뜻밖의 난입에 놀랐는지, 륜은 멍한 표정으로 다나를 바라보았다.
"가주를 하고 싶었던 것도, 통령을 하고 싶었던 것도, 이제 왕이 되고 싶은 것도 전부 당신이면서, 왜 멋대로 남을 끌어들여서 대역으로 삼는 거냐구요! 이 다음엔 뭘 시킬 생각이에요?"
륜의 입에서 펜이 툭 떨어졌다.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뭔가 울분을 토해내듯 외쳐대는 다나의 목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전부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이 억지로 아이 씨를 끌어들이지만 않았어도, 모든 게 훨씬 더 잘 됐을거에요. 죽는 흉내를 내서, 억지로 사람을 인질 잡아서,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잔뜩 시켜서 이뤄낸 결과라는게, 결국 또 이렇게 책임을 떠넘기는 겁니까?"
"나...나는. 그냥."
드문 일이었다. 륜은 명백하게 당황하고 있었다. 다나는 선고를 하듯, 검지로 륜을 가리키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 정말 싫어요. 저도 똑바로 살아온 사람은 아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요. 아이 씨 옆에 당신 대신 내가 쭉 있었다면, 그게 오늘보다는 훨씬 더 나았을 거에요."
"부정하지 않겠네."
의외의 반응에 다나의 손끝이 멈칫했다.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륜은, 쓴웃음을 베어물고 있었다.
"자네 말대로 나는 쓰레기야.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주제에, 강자에게 기생해서 사명을 떠넘겨서 살아왔고, 그런 주제에 이렇게 처참하게 실패해버린 패배자일세."
그 목소리는, 다나가 당황할 정도로 진심으로 들렸다. 비꼬려는 의도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솜 빠진 인형처럼 야윈 뺨으로, 륜은 희미한 조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조소가 틀림없었다. 다나는 천천히 팔을 내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요?"
"있지."
잠시 뜸을 들이고, 륜은 말했다.
"그래서, 이 죄를 목숨으로나마 갚을 방법을 찾아냈어."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륜은 가슴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소니아 아바키렌의 자료를 토대로 길 아잘록에 대해서 조사를 거듭해왔다네. 그 여자는 누구보다도 길 아잘록을 두려워하고 있어서, 그녀가 아니면 구하지 못할 방대한 자료를 구해뒀더군. 해석하기 이전의 상태로."
갑자기 나온 소니아의 이름에 몇몇 사람들은 웅성거렸지만, 정보망이 있던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다.
"카나기의 전 학장은 그 자를 읽어내는 데 실패했지. 그 이유는, 길 아잘록, 그 자가 이뤄낸 성과와 지위로부터 그 자를 해석하려고 했기 때문일세. 그런 접근법으론 엉뚱한 것을 읽어낼 수밖에 없었겠지.
그 자는 범재 이하일세. 둔재야. 그가 이룬 성과에는 그 자신이 전혀 묻어있지 않아. 그가 이뤄낸 모든 성과는 베낀 것, 남이 포기한 연구를 빌려 부단한 노력으로 마무리지은 것일 뿐이니 말일세."
아이는 눈썹을 떨었다. 륜의 방에 벽지처럼 가득 깔려 있던 종이들이 떠올랐다. 그 문서들은, 소니아가 몰락하고 나서 얻어온 자료였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거꾸로 접근했어야 해."
"거꾸로라면?"
"그 자신이 흥미를 가지고 몰두했음에도, 결코 이뤄내지 못한 것. 부단히 노력했으나 실패한 것. 그것을 토대로 접근했어야 한다는 말일세."
성공한 것은 모두 훔친 것. 그 자신의 빈약한 재능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고로 실패한 연구에만 길 아잘록의 본질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런 논리였다.
"그런 게 있다고?"
"길 아잘록이 버리고 간 연구실에, 무질서하게 폐기된 잡동사니 사이에, 남은 자료가 있었다네. 그건 영혼에 관한 연구였지.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발표되지 못한 것들이었어. 길 아잘록에게 그 자신만의 것이라는 게 있다면, 그 서류뭉치 몇 묶음 뿐일걸세."
그 자신의 것이라고 한다면, 그 이상할 정도로 텅 빈 내면밖에 없다. 륜은 덧붙였다.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그 시도는 결국 실패였지만, 그 연구 과정에서 길 아잘록은 괴이쩍은 마술을 개발하게 되었다네. 자신의 망가진 세계로 상대를 초대해서, 영혼을 망가뜨리고 괴물로 바꾸어 사역하는 마술일세."
영혼을 망가뜨린다. 레고르가 근처에 있기 때문일까, 아이의 머릿속에서 불현듯 먼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적, 교회에서의 기억이었다.
그 때 아지프의 마술사는, 갑자기 몸을 비틀면서 괴물로 변이했었다. 그때는 아지프의 마술사들이면 으레 그런 마술을 쓸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잘록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비슷한 마술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럼 설마 그 때부터인가. 그리고 단테도, 지금 그 마술에 당해 있는 것인가. 아이의 표정은 점점 더 진지해졌다.
"소니아는 아잘록의 특기를 알고 있었어. 그리고 자신이 그 꼴이 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지. 그래서 그녀는 아지프의 마탑을 일부 매수해서, 연구하고 있었다네. 그 타락한 상태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어느새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은 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두 손을 포개고 얘기를 듣던 아우렐리우스가 반문했다.
"그래서, 찾아냈는가?"
"찾아냈지."
"그런 방법이 존재한다고?"
아우렐리우스는 의혹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설마. 망가진 영혼을 부활시키는 건, 망가진 육체를 부활시키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어려운 일일세. 차라리 새 영혼을 창조하는 게 더 쉬울 테야. 내 상식에 비추어 볼 때 그건 불가능하다네. 아니, 인간의 상식에 비추어도 불가능해."
"인간의 상식으로는 안 되겠지. 하지만 신의 상식으로는 가능해."
"신?"
아우렐리우스는 불쾌하다는 듯, 또는 당혹스럽다는 듯 말했다. 영혼, 그리고 신과 같은 추상적인 일은 아탕칼리의 영역이었다. 그 정점에 오른 자신도 모르는 일을, 고작해야 서른도 안 먹었을 여자가 논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륜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신이 소멸하며 생기는 막대한 신기, 그걸 온전히 쏟아붓는다면, 아무리 망가진 영혼이라도 말끔하게 복원시킬 수 있다네."
"쏟아붓는다니, 어떻게?"
"검. 검을 이용하면 가능해. 검은 신기를 발하는 가장 좋은 매개체일세. 신이 검에 찔려 죽으면서, 그 검을 타고 영혼이 망가진 자의 체내에 파고들어가면 가능하지."
아우렐리우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론상 불가능하게 들리지는 않네만, 사실상 불가능한 것과 다름없지 않나."
"가능해. 왜냐면, 내가 아나테마이기 때문일세."
륜은 대수롭지 않은 것을 말하듯 툭 던졌다. 말해도 괜찮은 건가? 아이는 당황해서 사방을 돌아보았다. 방 안은 경악과 얼떨떨함으로 가득했다. 절반은 륜의 선언에 놀라 몸을 일으켰고, 절반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아우렐리우스는, 진지하고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장례탑으로 향해서, 금우궁의 칼에 찔려 죽으면, 그리고 그 검을 타고 들어가 혼을 보듬는다면, 금우궁의 타락을 씻어낼 수 있어. 몇 번이나 계산해보았다네. 틀림없이 가능해."
"당신, 설마."
말을 꺼낸 것은, 방금 전까지 맹렬하게 륜을 비난하던 다나였다. 륜은 고개를 돌려 그런 다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분노로 달아올랐던 그 뺨은, 지금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까 이 방의 모두에게 확인받았지. 금우궁을 회수하고, 성녀의 혼을 되찾는다면, 군말없이 구원군을 위해 봉사하겠노라고. 하지만 그 회수의 방법이, 굳이 싸워서 빼앗는 것이어야 할 이유는 없겠지. 내가 찔려 죽어서, 금우궁이 제정신을 되찾기만 해도 해결되는 문제 아닌가."
방 안에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이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일부러 왕위에 집착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며 다짐을 받던 것은, 이 때를 대비한 설계였던 듯 했다. 륜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펑퍼짐한 소매 밖으로 삐져나온 얇은 손가락은, 녹아내린 촛대처럼 야위어 있었다. 그 손을 가슴에 얹고, 륜은 말을 계속했다.
"아까 말했다시피, 나는 아나테마일세. 이 세상을 위기로부터 구하라는 사명을 받고 태어난 아나테마야. 하지만 이미 이 세상을 위협하는 적들은, 운명에서 벗어난 자들... 나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을 넘었더군. 즉, 이 목숨은 이제 쓸모 없다는 말일세."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어조였다.
"그럼 최소한 마지막 숨을 이 세상을 위해 바치는 게, 위선자로 전락하지 않을 유일한 방법 아니겠나."
부디 데려가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륜은 눈을 감았다. 할 말은 다 했다는 듯한 태도였다. 처분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망설임 없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 그것은 다나가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어쩐지 화가 났다. 자신은 마지막까지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서야 흉내를 낼 수 있었던 것을, 이렇게 혼자 해 버리는 모습이.
"필요 없어요."
"응?"
"꼭 저나 아이 씨가 죽으러 가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그런 조력 따위 필요 없다는 겁니다. 두고 봐요. 그런 것 없이도 당당하게 살아서, 스승님의 유지를 계승해서 돌아올 거니까. 굳이 당신까지 올 필요는 없어요."
"하, 하지만. 당신은 나를 싫어하는 게."
"싫어하니까 하는 말이에요. 그렇게 자살 비스무리한 짓이나 궁리할 시간이 있다면, 다른 할 일이 없나 찾아보세요."
다나는 말을 마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설마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륜은 어쩔줄 모르고 사방을 돌아보고 있었다. 정처 없이 헤매던 시선이 갈 곳을 찾았다. 아이였다. 빤히 들여다보면서, 륜은 천천히 대답을 요구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제 나는, 정말로 아무런 쓸모도 없는데."
옆에서 지켜보았던 아이는 알고 있었다. 전쟁이 틀어지기 시작한 이후, 륜은 계속 저런 식이었다. 자존감이 바닥을 기는 주제에 아직도 책임감은 커다랗기만 해서, 저런 방식을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기쁘게 받아줄 거라고 여기는 듯했다. 안쓰러웠다. 아이는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했다.
언젠가 단테와 함께 죽음에 대해서 나누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무인의 죽음은 애도의 대상이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눈이 녹듯이, 꽃이 지듯이, 그렇게 남기는 것 없이 깔끔하게 소멸하는 것으로 완성되고 싶다고, 그는 또 말했었다. 그건 체념이라도, 분명히 강인한 체념이었다. 륜이 지금 보여주는 체념과는 달랐다. 저런 죽음은, 바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거절합니다."
"그렇지만, 하지만."
"이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약속했어요. 서로의 검은 서로가 이어받기로. 제가 그 약속을 지키러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아."
륜은 고개를 숙였다. 몇 개월간 연구한 끝에 쥐어짜낸 제안을 거절당해 낙담한 것 같기도 했고, 어딘가 감동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이 선언을 마지막으로 회의는 끝이 나는 분위기였다. 누군가가 끝을 선언하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일어나 회의장을 벗어났다. 그들 모두가 나갈 때까지도, 아이는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이길 수 있을까요?"
륜은 툭 물었다. 회의장을 벗어나던 사람들 중 몇이 발을 멈춰서고 뒤를 돌아보았다. 성좌들의 경지는, 그 영역 밖에 있는 자들이 추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저 전과를 바탕으로 가늠할 수 있을 따름이었고, 이 자리에 있던 많은 이들이 단테의 승리를 은연중에 점치고 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정말로 승산이 있어서 나서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만용인가. 대답해줄 수 있는 건 아이밖에 없었다.
커다란 의자에 앉은 륜은 인형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간 아이는, 다듬지 않은 탓에 길게 자라난 앞머리를 쓸어올려 눈을 마주하고, 들려주었다.
"예. 분명히."
*
밤. 맑게 개어서, 유난히 정취 있는 밤이었다.
집에 돌아온 아이는 밤이 깊기를 기다려 뒤뜰로 나왔다. 깨끗한 달빛이 잎새에 부딪혀 희게 부서지고, 멀리서 불어온 바람이 호젓한 빈 가지를 흔들어댔다. 그 한쪽 구석에선, 보리수가 여인의 머리채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레고르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곳이었다. 아이는 천천히 그 아래에 걸어가 앉았다.
웃옷을 벗고, 이 자리에서 나누었던 말을 떠올렸다.
"쐐기를 뽑아라."
선주는 딱 잘라 말했다. 아이는 침묵했다. 나사렘에서, 선주의 힘을 빌려 외신을 잡았을 때를 떠올렸다. 레바테인은 그 때 선주에게 침식당해 지금과 같은, 생물의 내장 같은 형태로 변하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 때처럼, 잠시 몸을 장악한다는 소리인가요?"
"그 때야 상대가 버러지였으니 그 정도로 충분했지. 그때 나는 잠시 내 경험과 기술을 빌려주었을 뿐, 검을 휘두른 것은 너였다. 이번엔 그런 얕은 수로는 안 돼."
"그럼?"
"완전히 내 힘을 끌어내야 한다. 그러려면,"
선주는 잠시 뜸을 들이고 말했다.
"네놈의 혼의 일부를 잘라내서, 내게 영원히 넘겨야 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선주의 태도로, 큰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만이 느껴졌을 뿐이었다. 아이는 계속해서 되물었다.
"그 말뜻은..."
"영원히 네 혼 일부를 내가 가져간다는 말이다. 길 아잘록, 그 놈이 혼 일부를 잃었다가 절름발이가 된 걸 보았겠지. 그렇듯이, 혼을 넘겨주면, 네 신체 일부의 통제권을 내가 가져간다. 그 만큼에 해당하는 기억도, 네 삶의 증거도, 내가 받아간다."
"아."
"많이 바칠수록, 끌어낼 수 있는 힘도 늘어난다. 단테라고 했던가, 그 애송이를 잡기 위해서라면, 1년 정도 분량의 영혼만 넘기면 충분하겠지."
아이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선주는 이런 말을 하면서도, 별로 내켜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럼, 당신에게 영혼을 넘겨 주면, 기억이 사라진다는 건가요? 어떤 기억이?"
"몰라. 무작위야."
"만약 계속 힘을 넘겨서, 혼 전체를 넘기게 된다면... 어떻게 되나요?"
"종국에는 네 껍질을 뒤집어쓰고, 내가 부활하게 되겠지. 대신 네 영혼은 녹아내려서, 찌꺼기만 남은 채 영영 소멸해버리고 말 거다."
"아..."
아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나사렘의 새벽을 상기했다. 빛 하나 들이치지 않던 심해, 그 무저갱 같은 어둠으로 천천히 가라앉던 기억이 떠올랐다. 혼을 계속 넘겨주면, 그렇게 가라앉아서 사라지게 되는 건가...
"혹시라도 같잖은 오해를 할까봐 말한다만, 삿된 의도는 없다. 네놈의 몸뚱이를 가지고 싶어서 구슬리는 거라던가, 협잡을 하는 거라던가. 그런 건 전혀 아니야."
"왜요? 제 몸이 어때서요."
"너무 계집애처럼 생겨서. 얼굴이 전혀 내 취향이 아니거든."
선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딴 몸뚱이에서 살아가는 건 이 쪽에서 사절이다."
처음에는 그저 괴물처럼 보였던 선주였지만, 꽤 오래 함께 지내면서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선주의 표정은 진심처럼 보였다. 아이는 무릎을 더 깊게 끌어안고 물었다.
"그럼 도와주려는 이유는 뭔가요."
"글쎄. 바둑 상대가 없어지면 심심하니까."
그 말을 마치고, 선주는 천갈궁 안으로 들어갔다. 쐐기를 뽑아라, 단테가 남긴 봉인을 풀어라. 그 말로부터 시작된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길 수 있다고, 약속했으니까.'
회상을 마친 아이는, 허벅지의 검집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보리수는 길게 흔들리며, 아이의 얼굴 위에 그림자와 달빛을 뒤섞어 뿌려댔다. 단검의 검면에는 아이의 희미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대로, 아이는 천천히 단검을 어깨로, 쐐기가 박힌 곳으로 가져갔다. 그 때였다.
'정말 하려는 거냐.'
림이었다. 아이의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는 웬만하면 만류하고 싶다. 다른 방법이 있을 게야.'
"림..."
'그 녀석도 네게 경고하지 않았나. 절대로 쐐기를 뽑지 말라고, 나는 아지프보다도 선주가 무섭다고 말이다.'
"그랬나, 그랬었지."
'그것을 뽑고 나면, 네가 지금처럼 살아갈 수 없을까 두렵다. 그렇게 네가 힘든 길만을 골라갈 이유는 없단다, 어린 순례자야.'
아이는 희미하게 웃었다. 마술사를 죽이는 것보다 스스로를 더 생각하라는 조언을 하는 마술사 살해의 신이라니, 굉장히 우스웠다. 동시에, 고마웠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약속했어."
'어린 순례자야...'
"해야만 하는 일이야."
푹!
단검은 어깨의 살을 째고 깊이 쳐박혔다.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와서, 나무에 매달려 있던 풀벌레 몇이 깜짝 놀라 날아올랐다. 신음 끝에, 아이는 어깨에서 무언가를 뽑아 내던졌다. 진한 적갈색의 피가 풀잎에 후두둑 흩뿌려졌다.
"후우욱...후욱."
뽑혀나온 쐐기는 괴이쩍은 모습이었다. 아이의 피를 먹고 나무처럼 뿌리를 뻗어 골수 깊이까지 쳐박혀 있었다. 어깨가 끊어질 듯 아팠다. 그 뻥 뚫린 구멍에선, 시꺼멓게 죽은 피가 어깨선을 따라 느릿하게 흘러내렸다.
'결국 뽑았군.'
환청일까, 아니면 몸 속 깊은 곳에서 선주가 말을 걸어온 것일까. 누군가가 그렇게 말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무에 뺨을 기댔다. 옆머리가 흘러내려서, 뺨을 이불처럼 덮었다.
"잘 부탁해요. 이 목숨이 끝날 때까지."
달빛은 그 위에 흐붓하게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