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계승 ( 1 )
용을 타고 비행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장례탑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최대한 신속하게 일을 처리해야 했으므로, 카나기는 이색적인 이동수단을 빌려주었다.
천교룡, 타스하였다. 지금 다나와 아이는 타스하의 무성하게 자란 갈기를 붙잡고 창공을 가로질러 남부로 향하는 중이었다.
희박한 공기 때문에 폐가 자꾸 조여들었다. 떨어질까 무서운 것인지, 흰 구름을 통과할 때마다 다나는 아이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이따금씩 용의 숨결에서 불똥이 새어나와 두 갈래로 흘러갔다. 아이는 가지처럼 자란 뿔을 붙잡고, 날아가는 내내 지상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휘황하게 빛나는 살레니움의 권역을 지나자 비단처럼 곱게 정돈된 중부 대로가 보였고, 드넓은 곡창지대에서 덜 익은 보리가 물결치는 것이 보였다.
아직 전쟁의 불꽃이 범하지 못한 지역들이었다. 그러나 살레니움에서 멀어질수록, 지면의 색채에서 황금빛과 녹색은 줄어들었고 잿빛과 진흙빛이 늘어갔다.
무수하게 쏟아진 포격 때문에 붉은 흙이 피처럼 드러난 평야가 보였다. 시체와 쓰레기가 흘러들어 하천은 탁해져 있었고, 숲은 앙상하게 메말랐다. 그것들을 넘어서자, 거인이 할퀴기라도 한 것처럼 흉하게 무너진 산맥이 보였다. 얼마전 있었던 회전의 흔적이었다.
"윽."
"아, 혹시 불편한가요?"
신음성을 흘리자, 다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꼭 달라붙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개를 저었다.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회전의 기억 때문이었다.
지금도 아릿한 피냄새가 풍겨나오는 저 산자락 아래에서, 새벽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아이는 근면하게 살육했다.
베고, 찢고, 쳐부수고, 깊이 찔러넣은 칼을 몸뚱이를 걷어차면서 뽑고, 기어서 도망치던 마술사의 목덜미에 칼을 꽂고, 아스라하게 퍼져나가던 후퇴의 호각 소리를 들었다.
석양이 쏘아보낸 마지막 빛이 피웅덩이에 닿아서, 시체를 밟고 선 자신의 얼굴을 비추었다. 너무도 낯설었다. 많이 죽였다. 명분이나 변명으로 덮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죽였다. 되짚어보면, 어렸을 때부터 계속,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죽여왔다. 많이...
'참 여유롭군. 그따위 감상씩이나 즐길 틈도 있고.'
몸 속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주였다. 쐐기를 뽑은 후, 천갈궁이 아니라도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게 된 선주는 이렇게 시도때도 없이 말참견을 걸어오곤 했다.
'말참견? 버르장머리가 없군. 그냥 한심해서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어차피 바뀌지도 않을 거면서 쓰잘데기없는 속앓이는... 집어치우고. 어떻게 칼을 휘두를지, 그거나 한 번 더 생각해라.'
발끈한 듯 화를 내고, 선주의 기척은 사라졌다. 천교룡은 산봉우리에 걸려 있는 구름을 헤치고, 남부로 향하는 마지막 산맥을 넘고 있었다.
그러자 더욱 더 새까맣게 메말라 죽어버린 대지가 드러났다. 남부는 구원군이 패퇴한 곳이었다. 아지프식 징병이 이루어진 그 일대는, 풀 한포기조차 없이 새까맣게 말라죽어 있었다.
아이는 이를 세게 악물었다. 천교룡이 속도를 높인 것은 그와 동시였다. 뇌명 같은 울음을 토하고, 타스하는 몸을 구불대면서 더욱 더 빠르게 하늘길을 활주하기 시작했다. 다나의 분홍빛 머리칼이 길게 휘날렸다.
"저긴가?"
그 죽어가는 들판과 암녹색으로 우거진 수림을 넘자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뚝 솟아 있는 탑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반구형의 장막이, 반투명하게 빛나며 탑을 감싸고 있었던 것이었다. 선주가 몸 속에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결계군. 하긴, 그 건방진 놈이 괜히 용을 빌려준 게 아니었어.'
"예?"
'잠깐 몸 좀 빌려가겠다.'
아이는 그 말대로 선주에게 의식을 넘겨주었다. 몇 번 연습했기 때문에, 쉽게 건네줄 수 있었다. 비행하는 내내, 아이의 허리를 꼭 붙잡고 있던 다나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아이가 벌떡 일어나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 위험하게 왜 움직이는 거에요?"
용의 정수리까지 올라선 선주는, 나무처럼 커다랗게 자란 타스하의 뿔을 두 손 벌려 붙잡았다. 그리고 발을 크게 찧으며 소리쳤다.
"저기 쳐박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뜻밖의 행동에 다나는 안색을 창백해져서 선주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타스하는 괴성을 내지르고 움직이고 있었다.
길다란 몸이 구불거리며 급강하할 태세를 마쳤다. 그대로, 엄청난 속도로, 천교룡은 반투명한 결계를 향해 화살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저 결계를 깨려고 그러는 건가? 그래도 갑자기 이러는 법이. 몇 마디 항의라도 늘어놓을 생각이었지만, 이미 결계는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다나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본능적으로 허리를 꽉 껴안는 것밖엔 없었다.
쾅! 타스하의 머리와 결계가 부딪히자, 결계는 유리처럼 산산조각났다. 두 사람은 그 조각난 구멍 속으로 떨어져내렸다. 다행히도 큰 충격은 없었다. 어째서인지 결계 안쪽에는, 잿더미가 눈처럼 소복하게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쳤어요?
잿더미 속에서 몸을 일으키며 아이는 선주에게 화를 냈다. 이런 짓을 할 거라면 최소한 말은 해줘도 되는 것 아니냐, 그렇게 따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몸을 숨긴 선주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타스하가 몸을 뒤틀며 하늘 저 멀리로 떠나가는 것이 보였다.
"하여간...아!"
다나가 없어진 것을 확인한 아이는 황망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유독 재가 많이 쌓인 곳에 파묻혀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팔을 붙잡고 끌어내자, 재투성이가 된 다나는 켁켁거리며 입 속으로 들어간 재를 털어내려고 애썼다.
"콜록, 콜록. 이런, 이런 일을 할 거라면 먼저 말은 해 줬어야죠!"
"아니, 그게..."
자기가 하려던 원망을 그대로 듣게 된 아이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무서운지, 후들거리는 다나에게 어깨를 기대어 줄 뿐이었다.
"눈에, 눈에 들어가서... 어?"
계속 재를 털어내던 다나가 갑자기 동그랗게 눈을 떴다. 손에 묻은 재가 갑자기 스르르 녹아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몸에 붙어 있던 재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환상이었던 것처럼, 닿은 순서대로 녹아 없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환상이 맞다.'
대답은 몸 속 깊은 곳에서 들려왔다. 선주였다.
'이 재는 장례탑에 있던 게 아니라, 저 꼭대기에서 쏟아져내려오는 것 같군.'
아이는 고개를 들어, 아마도 단테가 있을 탑의 최상층을 바라보았다. 그 말대로였다. 허물어진 탑 끝자락에서 재가 끝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륜과 함께 들여다보았던 기억에서, 황폐해진 세계 전체를 뒤덮고 있던 그 재였다. 손바닥을 펴서 쏟아지는 재를 받아내자, 닿자마자 녹아내렸다.
'이 공간 전체가 마술에 크게 오염되어 있어. 성녀의 혼 때문인지, 아니면 길 아잘록이 남긴 마술 때문인지 모르겠다만, 환영으로 사라져야 할 것들이 형태를 갖추고 이 공간을 좀먹고 있는 모양이군.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오염이 더 심해져서 침범조차 하기 힘들었을 거다.'
아이는 선주에게서 들은 말을 다나에게도 그대로 들려주었다. 다나의 표정에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함께 손을 맞잡고 두 사람은 장례탑의 정문을 찾기 시작했다. 무너진 여신상과 묘비가 어지럽게 뒤섞인 길 앞에 문은 있었다. 둥근 문고리를 붙잡았을 때, 선주가 나지막히 말했다.
'탑 안쪽에선 더 지독한 마술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마라.'
문을 열자,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앞머리가 마구 휘날려서, 눈을 뜨기 힘들 정도였다. 잠시 후, 문이 완전히 열렸을 때, 두 사람은 당황해서 사방을 돌아보았다.
"여긴?"
을씨년스럽게 선 장레탑은 온데간데없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
그야말로 들풀만이 가득한 벌판이었다.
당황한 채로 아이는 사방을 훑어보았다. 무릎까지 자라난 연녹색 풀들이 바람에 몸을 눕히고, 일어서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분명히 탑의 문을 열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공간이 펼쳐졌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것도 환상일까요?"
"아."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땅을 매만지던 다나가 해답을 찾아냈다. 탑 근처에 수북이 쌓여 있던 재처럼, 이 광경 전체가 환상인 모양이었다. 무릎을 짚고 일어서면서 다나는 말했다.
"이게 마술이라면, 아마 마술을 유지하게 해 주는 핵도 있을 거에요. 그걸 찾아서 부숴야, 이 탑의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구조 같은데요. 우선 그걸 찾아보죠."
별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선주도 다나의 의견에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풀숲 사이에 하얗게 난 길을 따라 걸으며, 아이는 선주에게 조용히 물었다.
"왜 말이 없나요?"
'뭔가, 이상해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뭘요?"
'이 장소를.'
길은 숲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웅장한 거목들이 모여 만든 원시림이었다. 나무마다 팔뚝만한 덩굴식물이 매달려 희고 푸른 꽃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다리가 많은 벌레와 빛깔이 화려한 새 따위가 날아올랐다. 다나는 유심히 사방을 훑어보며, 턱을 매만지곤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장소가 환상이라면, 대체 어떤 환상일까요. 언뜻 봐서는 아지프와 연관은 별로 없어 보이는데요."
그 때였다. 그 대답이 다가온 것은.
무성한 덩굴과 녹음에 가려진 깊은 곳에서,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다나의 등을 덮쳐왔다. 어떻게 기척을 죽였을까 궁금할 정도로 거대한 짐승이었다.
쨍! 섬전처럼 날아든 칼날이 송곳니를 후려쳐 막아세웠다. 이빨에 잔금이 가고, 칼날이 얕게 쳐박힐 정도로 위력적인 반격이었다.
다나를 지키듯 등지고 선 아이는, 잠시 천갈궁을 두 손으로 붙잡고 그 커다란 습격자와 힘싸움을 했다. 그건 흰 털의 늑대였다. 흉물스럽게 드러난 잇몸마다 찌꺼기가 누렇게 들러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흡!"
호흡을 가다듬고 크게 쳐냈다. 늑대는 고통스러워하며 목을 들었고, 그걸로 끝이었다. 검날은 예리한 호를 그리며 목줄기를 꿰뚫고 피를 흩뿌렸다. 단숨에 절명한 늑대는 쓰러지며 큰 소리를 냈다. 쿵! 쌓인 나뭇잎과 흙이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괜찮습니까?"
"덕분에요."
스윽, 검집에 검을 밀어넣으며 아이는 다나에게 물었다. 놀랐지만, 다친 곳은 없어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아이는 쓰러진 늑대의 시체를 향해 다가갔다.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빛이 잘 드는 양달로 시체를 끌어내 관찰하던 아이는, 곧 기묘한 것을 발견했다.
"이런 짐승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수 많은 괴물들을 베어왔던 아이였지만, 이렇게 집채만한 늑대를 베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시감이 들었다. 그건 다나도 마찬가지였는지, 희디흰 털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뾰족한 삼각형 모양의 귓속에는 흰 털이 잔뜩 자라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동시에 깨닫고 말했다.
"레오?"
북서 자치령에서, 다나는 개가 끄는 수레를 타고 행상 노릇을 했었다. 그 때 데리고 있던 개, 레오와 이 늑대는 똑 닮아 있었다. 그러고 보면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일대의 개는 사실 원래 천 년 전에는 괴물이었는데, 점점 피가 옅어져서 그럭저럭 개 취급을 할 수 있는 크기가 된 것이라고.
"그럼 설마?"
'낯이 익다 했더니.'
몸 속에서 무언가가 들끓는 기분이 들었다. 선주였다. 선주는 음울한 목소리로, 두 사람의 추정을 확인해주었다.
'이 환상이 보여주는 건 천 년 전의 북서 자치령이다. 이 탑에는, 원래 방어 마술로 가장 괴로운 기억을 보여주는 마술이 걸려 있었다고 했었지. 그게 이 곳에 조각나 흩뿌려진 성녀의 혼... 천 년 전에 살았던 블뢰유의 혼과 뒤섞여서, 이런 걸 만들어낸 모양이다.'
즉, 두 사람이 지금 마주하는 환상은, 제국이 세워지기 전.
천 년 전의 환상이었다.
아이에게서 그 사실을 전해들은 다나는 녹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크게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