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메이지 슬레이어-236화 (236/279)

41. 계승 ( 3 )

젊은 시절 선주의 모습은 말 그대로 짐승 같았다.

검은 머리카락은 빗자루처럼 푸석푸석해서 허리께까지 흘러내렸고, 입고 있는 옷은 시체에서 벗겨낸 수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낡아빠졌으며, 신발조차 없는 맨발이었다. 더럽지 않은 게 있다면 등에 맨 검뿐이었다. 털썩 주저앉은 선주는 나무통을 뒤져 주먹밥을 꺼내더니, 그 큰 손으로 집어서 으적으적 씹어먹었다. 먹는 모습도 인간이라기보단 들개 같았다.

"저,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늑대에게 물려와서 먹잇감이 될 날을 기다리던 블뢰유는, 이 뜻밖의 구원에 당황해 쭈뼛거리며 말을 걸었다.

척 보아도 호노레 블뢰유의 선조구나, 그게 느껴질 정도로 닮은 모습이었다. 다른 점이라곤 서글서글한 눈매와 왼 눈 아래에 아름답게 자리한 눈물점, 둘 뿐이었다.

머리에 단 흰 꽃에선 싱그러운 향기가 났다. 저 또래 남자라면 돌아볼 법 한 모양새인데도, 선주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주먹밥을 우걱우걱 씹고 있었다. 무안해질 정도였다.

"어쩌다 이런 곳까지 오시게 된 거에요?"

블뢰유는 고르고 골라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무심했다.

"글쎄. 길을 잃어서."

"길? 길을 잃었다구요?"

"그래."

더 말할 생각이 없는 듯, 선주는 딱 잘라 말하고 또 다른 주먹밥을 꺼냈다. 안에 산초와 버섯 양념이 들어가 있는 주먹밥이었는데, 블뢰유가 꽤나 공들여 만든 것이었다. 조금 다른 반응일까 기대했지만 선주는 그것도 으적으적 씹어먹을 뿐이었다. 어쩐지 심통이 난 블뢰유는 통 뚜껑을 닫고 말했다.

"대답 안 해주면 더 못먹게 할 거에요."

"엉? 이봐, 이건 네 목숨 값인데?"

구해준 값이라는 것인지, 협박인지, 중의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블뢰유는 나무통을 꼭 끌어안고, 어떻게든 끊길 것만 같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길을 잃었다고 했죠? 얼마나요? 원래는 어딜 갈 생각이었나요?"

"하나씩 물어봐. 한 달. 어딘지는 네가 알 필요 없고."

"한 달? 한 달이나 헤맸다고요? 어마어마한 길치네요."

가볍게 도발하자 선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분위기를 읽은 블뢰유는 나무통을 내려놓고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이 일대의 지리가 기록되어 있는 지도였다.

"특별히 이거 보여드릴게요. 여기서 어디에 가고 싶으셨던 거에요?"

블뢰유는 지도를 펼쳐서 선주에게 쥐어주었다. 선주는 엉겁결에 지도를 받아들더니 뚫어져라 도면을 쳐다보았다. 몇 분이나 그랬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다소곳이 앉아 기다리던 블뢰유는, 설마 싶어서 물어보았다.

"혹시 글을 못 읽는 건가요?"

"시끄러."

그 말을 하자마자 선주는 거칠게 지도를 내던졌다. 정곡을 찔린 듯했다. 블뢰유는 자신도 모르게 쿡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웃기는. 너도 음식이나 팔면서 돌아다니는 주제에, 뭐 얼마나 배웠다고."

단단히 삐진 듯, 선주는 넓은 소매에 팔을 집어넣고 팔짱을 끼며 말했다. 블뢰유는 그제서야 이 사람이 자신이 율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시대에서도, 가난한 율사는 흔한 것이 아니었다. 어쩐지 숨기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블뢰유는 웃으면서 둘러댔다.

"요리책 읽을 만큼은 배웠죠. 언젠가 이런 노점 말고, 번듯한 가게를 꾸리는 게 꿈이라서."

"거 참, 시시하군."

선주는 뚜껑을 열고, 또 다른 주먹밥을 꺼내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그딴 게 꿈인가? 진로 계획을 바꾸는게 좋을 것 같군. 주먹밥도 이렇게 더럽게 못 만들면서 무슨 가게."

"그렇게 손바닥에 묻은 밥풀까지 먹으면서 그런 말 하기에요?"

이 대화로 블뢰유는 확신했다. 이 사람은 대화하는 방식이 거칠 뿐이지 무해하다, 그런 확신이었다. 덧붙여 이런 생각도 했다. 이 들짐승 같은 사람이, 굉장히 재미있다는 생각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블뢰유는 꽃받침처럼 양 손으로 턱을 괴고 말했다.

"그럼 말이죠, 제안이 있는데요."

"거절한다. 꺼져."

"얘기는 좀 들어봐요!"

블뢰유는 또 뚜껑을 덮고 말했다. 선주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자신의 몰골을 보고도 이렇게 겁없이 나서는 건 블뢰유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오래 길을 헤맸다면, 제가 길잡이를 해 드리는 건 어떨까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당신은 저를 지켜주고, 저는 길을 찾아주고. 서로에게 이득 되는 일이잖아요."

"그게 다냐?"

"거기에, 음. 밥도 잘 챙겨줄게요. 당신이 방금 먹은 건 전부 팔고 남은 거라구요? 재료만 있으면 더 좋은 걸 준비해줄 수 있어요."

선주는 하찮다는 듯 블뢰유를 노려보았다. 고작 먹을 것 따위에 내가 넘어갈 사람으로 보이나, 그런 의지를 담은 표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블뢰유는 턱을 괸 채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거칠게 또 다른 주먹밥을 집어든 선주는 짧게 대답했다.

"뭐, 덕분에 오랜만에 끼니를 제대로 때웠으니까 답해주지."

"그럼..."

"꺼져."

블뢰유는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주는 거칠게 말했다.

"충고다. 꺼지는 게 좋을거야."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내 주변에 있으면 전부 불행해져."

사춘기 소년같은 말이었다. 블뢰유는 잠시 이것이 매우 우회적으로 말한 협박이 아닐까 고민했다. 아닐 것 같았다. 블뢰유가 쉽게 물러서지 않자, 선주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면서 한쪽 소매를 빼고 옷을 반쯤 벗기 시작했다. 쇄골과 다부진 근육이 드러나자, 블뢰유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뭐, 뭐 하는..."

그리고 입을 쩍 벌렸다. 그 가슴의 한 가운데, 심장 근처에 있는 흉터 떄문이었다. 당장 치료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걱정이 들 정도로 끔찍한 흉터가 검붉은 화상자국과 어우러져 불길한 형태로 빛나고 있었다.

"이건..."

초승달 모양의 깊숙한 상처가 화상자국과 어우러져, 마치 귀신의 얼굴 같은 형상을 자아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뭇잎이 흔들리면서, 그림자가 선주의 얼굴 그리고 가슴팍에서 어른거렸다.

"증거다. 빌어먹을 운명의 증거."

"빌어먹을, 운명이요?"

"재수없게도 말야, 수천 년에 한 번 빛나는 불길한 별 아래서 태어났다던데. 그러면 어떤 저주가 심장 언저리에 깃들어 들러붙어서, 닿는 주변 사람 모두를 파멸로 인도한다고 하더군."

"그런... 미신 같은 게..."

"꽤나 유명한 미신이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산파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탯줄을 끊은 가위로 내 심장을 찔렀다. 그리고 칼을 맞아서 쓰러져 죽었지."

블뢰유는 말문이 막혔다. 선주는 피식 웃으며, 옛적에 아문 상처를 어루만졌다.

"그게 첫 희생자였다. 무색하게도 난 살아남아버렸지. 이 상처는 그 때 생긴 거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상처였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벌어져서 이런 모양새가 되어버렸지."

그렇게 말하는 선주의 음색은 담담했다. 블뢰유는 침을 삼키고 물었다.

"그럼, 화상은..."

"틀린 얘기는 아니었어. 다 죽었다."

또 바람이 불어 숲의 나뭇잎을 세차게 쓸었다. 강한 바람이었다. 꽃으로 고정한 블뢰유의 머리도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풀어져서, 바람결에 크게 휘날렸다. 선주는 주먹밥을 베어물며 대수롭지 않은 것을 말하듯이 말했다.

"나 때문에 부모님이 죽었고, 날 받아준 마을도 불타서 서까래 하나 안 남았다. 스승도 죽었고, 아주머니도 죽었고, 다 죽었다. 난리통에 어떻게 스승이 기르던 개 하나는 구해왔는데, 그 놈조차 얼마 못가서 죽어버리던데."

선주는 단언하듯 말을 마무리지었다.

"내 주변에서 얼쩡거리던 놈들은, 다 그렇게 꼴사납게 죽었다."

갑자기 흘러나온 무거운 과거에, 블뢰유는 고개를 숙이고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행색으로 봐서 꽤나 특이한 과거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선주는 넋두리를 하듯 말을 계속했다. 가슴을 작게 두드리면서.

"잡아먹힌 거지, 여기 들러붙은 뭔가한테."

"그, 미신을 믿는 건가요? 미신은 얼간이들이나 믿는 건데."

"이십 년 동안 수십 명이 죽는 걸 보고도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쪽이 얼간이 아닐까."

"그럼 그것 때문에, 평생 아무랑도 가까이 안 할 생각이에요?"

블뢰유가 당돌하게 물어보자, 말문이 막힌 듯 눈을 껌뻑이던 선주는 다시금 가슴의 흉터를 매만지며 말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느껴진다. 이 몸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렁이는 게. 날 비웃으면서 즐거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배고파하는 것 같기도 해. 내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얼간이를 잡아먹는 건, 놈에게 최고의 놀거리겠지. 둘 다 만족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그러니까 말이야."

선주는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 처음으로,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함부로 내 옆에서 얼쩡거리다간, 너도 잡아먹힐걸."

숨기지 못한 염려, 또는 불안 같은 것이 그 말꼬리엔 묻어 있었다. 블뢰유는 빙그레 웃으며 선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곤, 선주가 쥐고 있던 주먹밥을 크게 베어물었다.

"그래요? 이렇게요?"

"너..."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느낌이 들어 얼굴을 찌푸렸던 선주는, 지척까지 다가온 블뢰유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화를 냈다간 더 바보가 될 것 같은, 환한 웃음을 베어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살을 찌푸린 선주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놀리지 마라."

다시 옷을 걸쳐 입고 일어서서, 선주는 끈을 조이며 말했다. 어딘가 질린 듯한 목소리였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블뢰유를 떼어낼 수 없을 거라는 걸 직감한 듯했다.

"뭐, 멋대로 따라오던지. 내가 그것까지 막을 권리는 없겠지."

"정말요?"

"그렇지만 하나는 경고해두지."

기다란 대태도를 어깨에 걸쳐메고, 성큼성큼 걸어나가면서, 선주는 말했다.

"끝이 좋지 못할 거야."

바람에 풀숲이 쓸리는 소리가 그 쓸쓸하도록 넓은 등을 감싸주었다. 선주는 그렇게 말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솔길을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점이 되어 작아지는 선주와, 황급히 수레를 챙겨 뒤따르는 블뢰유의 모습이 보였다. 기억은 여기에서 끝났다.

"아."

덜컹, 기억이 끝난 것과 바닥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동시였다. 아이는 황급히 움직여서, 현기증을 느끼는 듯 이마에 손을 대고 휘청이는 다나를 어깨로 받아주었다.

어느새 환상은 말끔하게 걷혀 있었고, 지겹도록 보았던 아지프식 승강기와 벽이 사방을 메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다음 층으로 향하는 승강기에 올라탄 상태였다.

아무래도, 성녀의 혼은 다음 층으로 향하는 승강기에 겹쳐서 자리한 모양이었다. 원래 괴로운 기억을 재생하는 마술은 승강기에 함정으로 걸려 있던 것이므로, 있을 법한 일이었다.

"괜찮아요? 몸에 이상은 없나요?"

"예, 예에... 좀 피곤할 뿐이에요."

이마를 매만지던 다나는, 힘없이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 다행이다,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아이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회백색의 사슬이 뱀처럼 꿈틀대며 쉼없이 승강기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장례탑은 꽤나 높아서, 다음 층으로 가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듯했다. 그럼 그 사이에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아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당신인가요?"

선주에게 한 말이었다. 방금 보았던 기억에서, 그 짐승 같았던 남자가 선주냐고 묻는 말이었다. 대답은 금세 돌아왔다.

'알면서 뭘 물어보나.'

이어, 선주는 툭 던지듯 말했다.

'이게 최악의 기억이었나. 그럴 법도 해.'

"그래서 당신은, 저 마술사와 함께 다녔던 거군요."

'그래, 마술사가 아닌 줄 알았다. 감쪽같이 속았지.'

"그럼..."

'더 묻지 마라. 싸움에나 집중해.'

선주의 기척은 그와 동시에 잦아들었다. 다나의 어깨를 감싸고, 아이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은 하늘에 뚫린 무저갱처럼 어둡고 아득해보이기만 했다.

림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선주는 마술사를 연인으로 삼았었고, 결국 후회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마술사는 성녀 호노레 블뢰유의 선조인 파계 율사, 이 제국의 설계자였다고도 했었다. 도대체 어떤 접점이 있어서 둘이 만나게 되었나 했더니, 그 시작은 저런 우연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아."

다시금 말을 걸려던 아이는, 그 뒤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고 멈칫했다. 그 블뢰유의 후손인 호노레 블뢰유를 만났을 때, 선주는 그렇게 말했다.

블뢰유의 후손이지만 내 후손은 아니라고. 이 제국을 세우기 위해서, 권력자의 협력을 얻기 위해서, 블뢰유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아이는 그 때 처음으로 이 사람도 인간이었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괴로운 기억을 들추고 싶지 않았다. 아이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 침묵을 깨고 불쑥 말을 걸어온 것은, 선주가 먼저였다.

'아무래도 층마다 이런 환상이 준비되어 있나본데. 환상 속의 적과 싸우고, 네 첩이 기억을 계승하면 다음 층으로 올라가게 되는 구조인 듯 싶군.'

"첩 아니거든요."

'어찌됐든 잘 해보자구. 뭐, 네놈도 나랑 엮였으니 끝이 좋기는 글러먹었지만 말이다.'

아이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승강기는 어느새, 두 번째 층으로 향하는 문 앞에 도착해 멈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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